하비는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눈을 떴다. 옆의 베드테이블에 놓인 소설에는 책갈피가 꽂혀 있었으나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늘어진 카세트 테이프처럼 밤을 늘이고 싶다는 기분. 미적지근한 시간을 미적지근한 기분으로 보낸 흔적이었다. 하비도 이런 날에는 이불 속에 파묻힌 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이 작은 마을에 의사라고는 자신 뿐이니 애써 침대 밖으로 몸을 떠밀었다. 반쯤 먹다 남긴 샌드위치를 전자레인지에 던져넣고, 1초마다 하나씩 느리게 내려가는 숫자를 바라본다. 제자리에서 도는 샌드위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비는, 조리 완료음이 채 울리기 전에 전자렌지를 열었다. 계기판은 돌아가지 않은 4초를 비추고 있었다.


시골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가장 성가신 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옆동네 환자들을 왕진해야 할 정도로 적은 수입?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들어먹질 않는 알콜중독자들? 아니다. 병원 카운터에 앉아 지나보내야 하는 시간이다. 무언가 일을 하며 보내는 시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음편히 쓸 수 있는 시간도 아닌. 일과 휴식의 경계에서, 미묘한 긴장 위에서 지나보내야 하는 시간이다. 평소와 같이 초록색의 재킷을 걸쳐입고는 평소처럼 자리에 앉았다. 흘끗 바라본 시계는 벌써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으나 한 시간의 부재에도 병원의 하루는 아무렇지 않게 시작되었다.


습관적으로 열어 본 메일함에는 새로운 의료기기를 홍보하는 따위의 뉴스레터 뿐이다. 대충 제목만 건너뛰며 달칵대다 '모두 읽음'을 눌러 알림을 지운다. 남은 알콜솜이며 자양강장제의 재고를 확인해 본다. 유통기한이 지난 진통제를 몇 통 폐기한다. 조만간 약제사에게 조지의 혈압약을 새로 주문해야 하는데 카탈로그 작성이 귀찮아서 미뤄두고 있다. 가습기 돌아가는 소리만 조용히 적막을 채우는 병원 로비의 풍경은 계절이 지나가도 변하질 않는다.


정기 검진이 잡혀 있던 조디가 급한 일이 생겨 취소하게 된다며 미안하다는 전화를 주었다. 오후 네시가 되기만을 기다리던 하비는 결국 15분정도 일찍 일어났다. 오늘은 모든 게 미묘하게 어긋나는 날이다. 병원 문을 잠그고 짧은 산책을 나섰다. 하비는 분수대를 들여다보는 걸 좋아했다. 분수대 맨 위에 동전을 던져넣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는 누가 처음 시작한 걸까? 파랗게 녹이 슨 동전들의 가치는 1골드짜리 동전부터 50골드 기념주화까지 다양했다만, 동전을 던진 이들의 마음은 그에 비례하지 않았으리라. 쌓은 동전들을 차근차근 세다 보면 누군가의 잊어버린 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의사란 녹슬어버린 꿈을 보는 직업이다. 사람들은 생명을 살리는 직업이라며 칭찬하고, 분명 보람이 없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낫기 위해 아프지는 않는다. '낫는다'는 것은 '아프다'가 전제되어야 하는 사건이며 아프다는 것은 기능의 중단, 쓸 수 없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 누구도 나아가는 것을 멈추고 싶지 않아한다. 그것이 병과 같은 타의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꺼운 안경이 콧날을 짓눌렀고, 유리알에 시야의 가장자리가 휘었다. 이미 녹에 덮여버린 꿈, 하비는 가끔 자신의 시간이 어딜 향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비의 시간은 마치 전자레인지의 4초처럼, 근무시간의 마지막 15분처럼, 의미없이 흘려보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비씨?"


얼마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을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하비는 고개를 돌렸다. 돌계단을 오르고 있는 것은 흰 머리칼을 높게 틀어 올린 이방인, 앙증맞게 달린 붉은 리본은 세월의 잔흔이 박힌 청회색 눈동자와 상반된 이미지를 더했다. 그녀는 하비가 군의관으로 일할 때 자주 보았던 눈동자를 가졌다, 제대로 상처가 붙기도 전에 다시 전장에 나서던 군인들. 그들은 낫지 않는 자들이었다. 멈추기를 부러지기보다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하비가 '무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녀가 낫지 않는 사람일까봐.


"아, 이디스씨. 여기서 뵙네요."


물론 그런 걱정은 머지않아 녹았다. 인사를 건네자 해사하게 웃는 볼에는 예쁜 보조개가 나타난다. 그러고 보니 하루 종일 처음 마주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하비는 그것이 이디스여서 왜인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어느새 불기 시작한 바람이 하비의 짧은 곱슬머리를 헤집고 지나갔다.


"잠시 같이 있겠어요?"





대화는 늘 그렇듯 소소했다. 


이디스는 쾌활한 사람이라기엔 말투며 몸짓에 규칙과 절제가 스며 있어서, 처음엔 나이를 가늠하기 곤란한 면이 있었다. 과거의 인생을 증명하는 습관들은 퍽 건조했기에 그녀 스스로 쌓아올렸다기보다는 학습된 것에 가까웠다. 지나치지도 무성의하지도 않은 그 손길로부터 하비는 종종 커피를 건네받았다. 씁쓸한 싸구려 커피의 맛이지만 온도는 언제나 따스했다. 그렇게 겨우 두 계절이 지났을 뿐인데, 어느새 하비는 커피의 따스함이 이디스에게서 온 것이라 느끼기 시작했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면 하비는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섣부른 판단과 감정은 늘 일을 그르치기에, 언제나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신중함은 의사 나름의 습관이 되었다.


"...하비씨, 마음에 걸리는 일 있어요?"


하비는 여름 작물은 무엇을 심었는지. 여름엔 독감이 돌지 않아 좋다던지 따위의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다. 몇 마디를 주고받았을까, 돌연 이디스가 물었다. 일순이지만 그녀가 뜸을 들인 것을 눈치챘다. 분명 그녀로서도 조심스레 물은 것이겠지. 괜한 참견은 아닌지, 그럼에도 기어이 묻고 마는 것은 자신을 그만큼 신경쓰고 있다는 뜻일까? 고요한 이디스의 눈은 푸른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하비는 그 안개의 깊이에 한층 조여든 마음으로, 분수대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오전부터 성가시던 잡념이 목에 가래처럼 끓어서 헛기침을 해 본다.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까, 어디까지 대답하는 게 좋을까.


“이디스씨. 저는…”


툭. 콧잔등에 돌연 떨어진 차가운 물방울의 감각에 하비의 말이 끊겼다. 이디스도 비슷하게 눈치챘는지 두 사람은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에 시커먼 적란운이 드리우고 있었다. 이크, 비가 오려나 봐요. 저한테 우산이… 이디스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접이식 우산을 꺼냈다. 우산을 꺼내고 펴는 사이에도 빗줄기는 빠르게 거세졌다. 분수대의 수면이 동당동당 물결치기 시작했다. 하비씨 이쪽으로! 자신은 코트라도 벗어야 하나 고민하던 하비는 이디스가 기울여준 우산 아래로 쭈뼛 머리를 밀어넣었다. 자 이제 빨리 실내로 이동하는 게 좋겠어요. 두 사람이 겨우 머리만을 가리는 작은 우산 아래 고개를 맞붙이고 병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 순간이었다. 


휘잉!


소나기가 끌고 온 돌개바람에 낡은 우산의 뼈대가 뚝 하고 부러졌다. 미처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연처럼 날아가는 우산. 높이높이 잘만 날아가는 우산을 두 쌍의 눈이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아… 조만간 새 우산을 사야겠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이디스가 말을 마치기 무섭도록 빗방울은 금세 소나기가 되어 쏟아졌다. 


하비는 저도 모르게 이디스의 손목을 붙잡고 마을회관으로 뛰었다. 가장 가까운 건물이라서였던 것 같다. 하비의 가죽 구두가 질은 땅을 박찼다. 정말 오랜만에 '뛰어'본 하비였으나 그런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저 비에서 피할 곳을 찾아야 했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음에도 낡은 마을회관 처마 아래로 들어갈 때 쯔음엔 이미 두 사람 다 쫄딱 젖은 채였다. 멈춰서고 나자 코끝에 걸친 안경알에는 가쁜 입김과 빗물이 맺혀 시야가 어수선했다, 닦으려고 꺼낸 옷깃이며 손수건을 꺼내 봤지만 전부 젖어서 별 소용이 없었다. 안경을 닦으려 애쓰는 하비를 바라보던 이디스가 웃었다. 하비는 거의 장님이어서 그녀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웃음소리는 절대 비웃음이 섞이지 않았다. 


"하비씨 방금 엄청 다급했어요. 알아요?"

"이디스씨의 우산은 엄청 낡았던걸요, 이미 살이 부러져 있던데."


말하고 나니 괜히 머쓱해져 젖은 콧수염을 문질렀다. 흠뻑 젖은 머리와 셔츠, 바짝 세우던 경계마저도 상황에 흠뻑 젖어버린 걸까. 체면이나 조심성이 흐물흐물 녹아버린 채 순간 하비도 이디스도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은 비가 잔디를 때리는 소리에 섞여 풍경의 일부로 녹아들어갔다. 아아, 많이도 오네요. 감기 걸리면 어쩌죠? 아침에 작물에 물 괜히 줬네. 아까보다 한층 부드러워진 대화, 가벼워진 목소리톤, 농담섞인 화법. 


"저기 봐요, 쌍무지개에요."


소나기는 찾아왔을 때만큼이나 급작스럽게 지나갔다. 이디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적란운 뒤로 다시 고개를 드러낸 여름 태양이 하늘에 선명한 두 줄의 산란광을 드리우고 있었다. 안경을 대충 닦아내고 바라본 하늘의 색은, 무지개의 안쪽이 바깥쪽보다 살짝 밝았다. 하늘을 그렇게 동경하고 또 오래 바라봐 온 하비였는데, 왜 무지개에는 이제껏 관심이 없었을까? 고개를 갸웃대던 하비는 그제야 하루 종일 가시지 않던 찝찝함이 홀가분해졌음을 깨달았다.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 의미 있는 시간과는 무지개 안의 하늘과 밖의 하늘색 정도의 차이가 있을까. 정확한 답은 낼 수 없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모를 것이며, 하비는 내일도 전자레인지를 끝까지 돌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렴풋이... 의미가 희미한 시간들마저 넓은 창공의 일부, 그러한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들이 모여 그리는 한 폭의 하늘이라는 생각이 그 순간 들었다. 


“이디스씨, 다음에 정기검진 받으러 와요.”


실내에 머물렀다면 보지 못했을 하늘. 미묘한 어긋남, 물길이 조금만 틀어져도 흐르지 못한 채 고일까 걱정하는 마음은 폭우 속에 씻겨 내려갔다. 잃어버린 시간은 찾아내는 시간으로, 아팠던 시간은 나을 시간으로 품을 수 있다고. 의미 없음의 의미 또한 찾을 수 있다고.


그렇게 '지나쳤으면 그만이었을 시간'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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