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를 즐기는 이라면 으레 타인에게서 자신과의 공통점을 찾고, 그 공통점을 기점으로 모이길 좋아한다. 그 기점이라는 게 종족이어도 예외는 아니다. 도혁 역시 열성 알파 모임 ‘라쿤즈’의 회원이다.

 

한때 그 회원들끼리 침 흘리며 떠들곤 했던, 환상의 존재 ‘S급 오메가’가 지금 도혁의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상대로 호감을 보이며 작업까지 걸고 있다. 딱히 이렇다 할 계기도 없는데.

 

“그런데 부군께서 작고하신 지가…….”

“얼마 안 됐지. 뉴스에도 나왔는데. 잠깐, 표정이 왜 그래? 내가 하는 짓이 너무 아닌 것 같나? 남편 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나 집에 들여서 꼬드기고 있고.”

 

솔직히 도혁은 신재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본심을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니 아닙니다, 하곤 접시에 남은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토스트를 으적으적 먹는 도혁의 얼굴에는 혐오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고, 신재는 그걸 보고 속으로 웃으며 두 개째의 토스트를 칼로 썰었다.

 

‘꽤 도덕군자 같은데. 재미있네. 살다 보니 이렇게 조신한 알파도 다 만나고.’

‘남편이랑 사이가 안 좋았나? 아무튼 찝찝하네. 태어나서 이런 오메가는 처음 본다. 만사에 거리낌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해야 하나.’

 

각자의 생각에 빠진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은 응접실에선, 신재가 토스트를 자르거나 도혁이 커피 컵 내려놓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렸다.

 

신재의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온 도혁은 나란히 이마를 맞대고 잠든 수찬과 은규 커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은규가 유부남인 수찬을 만난다는 사실을, 도혁이 안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수찬의 존재를 안 이후, 도혁은 전과 같은 마음으로 은규를 바라보거나 대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생활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전부 그가 알아서 할 일이니.

 

유부남과 만나는 친구. 배우자와 사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도 태연자약하게 저를 꼬드기던 쿨러-사이클 이사 김신재. 그토록 사랑했음에도 하루아침에 친구 씨를 배고 나타난 연인. 아버지의 정부로 그의 본처와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모친.

 

아무래도 ‘정상’에 대한 도혁의 기준이 너무 높은 걸까? 아니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걸까? 두통을 느끼기 시작한 도혁은 수찬과 은규가 잠든 곳 앞에 주저앉아 한숨을 쉬었다. 간밤에 너무 마신 탓인지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계속 이러고 있다가도, 도혁은 다시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학교에 갈 것이다. 항상 그랬듯이.

 

 

 

*

 

오후에 수업을 마친 도혁은 학과 동기와 과실에 남아 지도 교수에게 선보일 연기를 짰다. 그러던 중 핸드폰 벨이 울렸고, 도혁은 화면에 뜬 ‘임찬홍’이란 이름을 보고 거리낌 없이 수신 거부 버튼을 눌렀다.

 

“한창 바쁜데 연락을 하고 그러냐.”

 

동기의 시선을 의식한 도혁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친구야? 그냥 받아. 급한 용무면 어쩌려고?”

“아니야, 무슨 말 할지 빤해. 괜찮아. 하던 거나 마저 하자.”

 

도혁은 고개를 저은 뒤 회의를 계속했다. 와중에도 찬홍의 이름이 계속해서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시대라는 건 변하기 마련이다. 알파니 오메가니 하는 종족 분류가 촌스러운 것이 되어가는 현재, 굳건했던 계급 시대는 종말의 그림자 아래 있다. 하지만 영원히 변치 않는 시대도 있다. 황금만능이라는 시대 감성은 사유재산 개념이 탄생하고부터 지금껏 굳건히 이어져 왔다. 돈으로는 뭐든 할 수 있다. 무슨 일이든 용서가 되고 또 덮을 수 있다. 황금은 시대에 등장한 이후부터 영원한 주역이었다.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도혁에게는 5년을 만난 연인이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빈천했지만 솔직했고, 무엇보다 성실했다. 적어도 도혁은 그렇다고 믿었다. 어느 시점까지는.

 

알파가 관계 도중 오메가의 몸에 잇자국을 내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행위. 그것이 각인이다. 도혁의 짝, 현은 그 각인이 무섭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도혁의 10년 지기 친구 찬홍의 잇자국을 목에 낸 채 나타났다.

 

현은 도혁을 사랑했지만, 그의 빈천함과 불투명한 미래는 사랑할 수 없다고 했다. 인간 이도혁, 그의 빈천함과 불투명한 미래. 그것들을 분리해서 볼 수 있을까? 그 모든 게 하나로 응축된 존재가 도혁이다. 그러니 현은 도혁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

 

빌어먹을 발정기 때문에 현과 사고를 냈다는 찬홍은, 도혁에게 사과하는 뜻으로 현금 천만 원을 계좌로 입금해 주었다. 당시 무일푼이었던 도혁은 돈을 받고 찬홍을 용서했다. 그리고 찬홍의 돈을 귀두구 적출에 사용했다.

 

수술을 마친 도혁이 퇴원하던 날, 찬홍은 밥을 사 주러 왔고 도혁은 고맙다고 했다. 도혁은 자존심이 없는 인간이다. 자존심 같은 건 돈이 되지 않고, 가장 중요한 건 언제까지나 돈이기 때문이다.

 

회의를 마친 도혁은 재차 걸려온 찬홍의 전화를 결국 받았다. 그리고 신가좌동 주택가의 고깃집에서 그와의 만남을 가졌다.

 

“수술 잘됐대? 병원, 저번에 마지막으로 갔었다며.”

“덕분에.”

 

타의로 진행된 일이었지만, 도혁은 현과 헤어지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현은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고, 마찬가지로 쓰레기 같은 찬홍이 수거해 갔다. 정말 잘되었다. 둘이 결혼한다면 그만큼 어울리는 한 쌍이 없을 것이다. 정상이 아닌, 혹 정상이길 포기한 현에게 정상인, 적어도 정상이기 위해 노력하는 자신은 과분하다. 도혁은 그리 여기며 찬홍이 따라준 소주를 마셨다.

 

“너한테 이런 말 하는 게 면목 없지만, 곧 결혼할 것 같다. 내달 말에.”

 

찬홍은 오랜 망설임 끝에 결혼 소식을 전했다. 도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대가 변하잖아. 아무렇지도 않아. 너희 일,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철판에서 익다 못해 타는 고기를 마냥 보던 도혁이 중얼거리자, 찬홍은 그의 손을 답삭 붙잡곤 결혼식에 꼭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때 도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발신인은 신재였다.

 

“그러니까 나도 변해야 돼. 시대가 변하니까.”

 

도혁은 전화를 받는 대신 신재의 이름이 뜬 화면만 물끄러미 보며 읊조렸다. 그러더니 찬홍에게 식장에 친구 한 사람과 같이 가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럼. 와서 한 끼 먹고 가. 라쿤즈 애들 다 올 거야. 오랜만에 만나서 얘기도 하고, 응?”

“그래, 그래야지.”

 

도혁이 웃으며 말했다. 찬홍은 클럽 ‘라쿤즈’의 우두머리다. 이 모임은 도혁과 찬홍이 중학생이던 시절 만들어졌는데, 당시 이들이 다니던 학교는 재학생 대부분이 우성 알파인 명문 사립 학교였다. 당시 학교 최고의 명물이었던 건 이사장이 애완동물로 기르는 신미국 너구리, 즉 라쿤이었다. 이사장은 매일같이 그 너구리를 끌고 학교 이곳저곳을 활보하고 다녔다.

 

하루는 이사장과 너구리의 모습을 본 도혁이, 목줄을 차고 이사장이 원하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너구리 처지가 제 처지와 닮았다며 한탄했다. 그러자 찬홍을 비롯한 열성 알파 친구들이 자신의 처지 역시 다르지 않다며 동조했다. 그들 모두 우성 알파 학우들 등쌀에 시달리느라 하루하루 고역을 치르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도혁의 한탄에 영감을 받은 찬홍은 자리에 있던 친구들과 모임을 결성했다. 그렇게 약체 클럽 라쿤즈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 클럽의 대왕 너구리는, 식자재 납품업체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은수저 찬홍이다.

 

“근데 무슨 친구?”

“최근에 친해진 사람인데, 되게 잘나가.”

“그래?”

 

심기가 불편해진 찬홍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그는 바깥에서는 진탕 구르고 깨질지 몰라도 라쿤의 무리 안에서는 최고로 잘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대가 정말 변했어. 그런 사람이 나한테도 친구하자 하고. 그 사람이 그거거든, 우리 천둥벌거숭이 시절에 떠들던 거 있잖아. S급 오메가. 그런데 나한테 좀 관심 있는 것 같더라? 난 별로 생각 없는데.”

“아……. 그러냐? 네가 외모는 원래 되잖아. 독특하고.”

 

찬홍의 눈에 무일푼인 도혁에게서 볼 만 한 건 외모 하나였다. 그 번드르르한 겉모습으로 부유한 오메가를 잘도 꾀어냈다고, 찬홍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런가? 하긴, 내가 웬만한 우성보다 낫지. 걔들은 천편일률적으로 눈동자든 터럭이든 새까맣잖아. 난 한풀 꺾인 회색이니까 다가가기도 부담 없고. 솔직히 더 트렌디한 외모 아니냐?”

“그래. 뭐, 네가 걔들보다 사이즈가 작아 흠이지만.”

 

찬홍이 빈 술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열성 중에서도 최하위에 가까운 도혁은 알파치고는 체격이 왜소하고, 심지어 같은 열성들보다도 작다.

 

“얼굴이 되는데 키가 대수야? 그래도 내가 그 사람보다는 커.”

 

도혁은 거뭇한 고기 몇 점을 상추 한 장에 가득 올리더니, 이내 쌈을 싸 와구와구 먹었다. 그리고 찬홍의 결혼식에 꼭 그 대단한 친구와 함께 가겠다고 했다. 찬홍은 오늘 처음으로 도혁과 먹은 술값을 계산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신재 덕에 이번 달 약값이 굳어, 도혁이 대신 값을 지불하면 되니까.

 

그나저나 언제 신재의 전화번호가 핸드폰에 저장된 것일까? 찬홍이 떠난 고깃집 앞에서 도혁은 기억을 되짚어가며 전화를 걸었다. 재빨리 전화를 받은 신재는 도혁에게 앞서 건 전화를 왜 받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도혁은 친구와 있느라 핸드폰을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고 둘러댔다.

 

“그런데 무슨 용무로 전화하셨습니까?”

-다른 건 아니고, 접때 집에 잘 들어갔냐고.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김신재 씨 차, 운전하신 기사님께도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세요.”

-……이도혁 씨는 무슨, 착한 아이야?

 

네. 도혁이 조금 취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신재의 웃음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그런데 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내달 말에 친구가 결혼하는데…… 같이 가 주십쇼.”

-거기 가면, 난 뭐가 좋지?

“제가, 그, 친구한테 객기 부리느라 김신재 씨 모시고 오겠다고 말뚝을…… 박았지 뭡니까? 솔직히 김신재 씨가 거기 가시면 뭐가 좋은지 모르겠는데, 안 오시면 제가 곤란해진다는 말씀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구르며, 도혁은 전화기에 대고 최대한 불쌍한 목소리를 냈다.

 

-아니……. 대체 뭘 믿고 이렇게 건방을 자꾸 떠는지 모르겠네.

“아무것도 안 믿습니다. 믿으면 큰일 나.”

 

세상에 믿을 건 없다. 죄 이상한 사람들뿐이다. 아닌 것 같은 사람도 언젠가는 새카만 속내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도혁은 전화기 속 신재에게 그런 말들을 두서없이 주절거렸다.

 

-너 취했니?

“아마도…… 요?”

 

진작 취하고도 남았지만, 도혁은 자신이 취한 줄 모르고 있다. 보통 취한 사람들이 그렇듯.

 

-재미는 있다. 그래, 심심한데 잘됐네. 그냥 너 하고 싶은 말 아무거나 다 해봐.

“자기가 안 센데 센 척하는 거, 되게 꼴값 떠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오늘 되게 꼴값 많이 떤 것 같아요.”

-왜 그랬는데?

 

신재의 물음에 도혁은 말하던 걸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머리가 핑핑 도는 와중에도 대답할 말만큼은 확실했다.

 

“나쁜 새끼 앞에서 체면 세우느라…….”

-자존심 싸움인가? 그거 하다 나랑 결혼식 가겠다고 한 거야?

“바로 그겁니다. 감이 무척 좋으시네요.”

-……그 말, 들으니까 기분 되게 안 좋네?

 

결국 도혁은 친구 결혼식 날 순수하게 신재와 함께이고 싶은 게 아니라, 자존심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값비싼 보석처럼 신재를 착용하고 싶은 거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신재는 이가 갈렸다.

 

-내가 무슨 네 액세서리도 아니고…….

“제가 너무 경우 없었죠? 죄송합니다. 부디 못 들으신 걸로 해주십쇼. 아니, 두고두고 노여워하셔도 괜찮습니다. 이상한 말 꺼낸 대가는 받아야죠. 저는…… 아무튼 믿는 구석이 없습니다. 아무…… 아무것도 없어요. 쥐뿔.”

 

취한 도혁이 전화에 대고 옹알옹알 떠들자, 신재는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픽 치고는 술은 얼마나 마셨는지 물었다.

 

“많이 안 마셨습니다. 소주 댓 병? 어, 많은가? 모르겠네…….”

-요즘 젊은 알파들은 다 이도혁 씨처럼 말해?

“어……. 모르겠습니다. 알아올까요?”

-좀 귀엽네.

“원래 귀엽다는 말 자주 듣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오메가들보다 알파들이 저를 더 좋아해요……. 알파섹슈얼도 아닌데, 새끼들이 말을 해도 자꾸 들이대…….”

 

아무튼 결혼식 건은 내달 말까지 생각해뒀다 답해주겠다고, 신재는 모호하게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신재와의 통화를 마치고 지하철에서 내릴 때, 도혁은 어쩐지 위로를 받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재에게 문자를 보내려는데,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감사하ㅂ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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