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합작 [유아교육과 녤윙] 백업입니다.





안녕하세요. 단훈 어린이집 교사 박지훈입니다. 3년차구요. 올해는 단훈 어린이집의 최고 형님들이 모인 7세 강아지반을 맡게 됐습니다. 실습 때부터 유아를 주로 맡아와서 별로 부담은 없어요. 형님반을 맡으면 졸업식이 말도 못하게 슬퍼서 그게 많이 힘들긴 한데... 그만큼 좋은 추억이 많아 그런 거라구 생각하면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년 최선을 다해서 즐겁게! 열심히! 보내야겠다 다짐하게 돼요.


저는 어린이집에서 흔치 않은 남자 교사입니다. 대학 다니면서 군대까지 다녀오느라 나이에 비해 경력은 적은 편이에요. 스물 아홉에 삼년차. 그래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적응이 되니 흔히들 말하는 짬이라고 하죠? 그게 막 채워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지더라구요. 원장님은 가끔 융통성이 없긴 하셔도 나쁜 분은 아니시고 -모든 직장의 최고 권위자가 그렇듯 아주 좋은 분이라고는 차마... 못하겠네요- 동료 선생님들도 다 좋은 분이십니다.


덕분에 직업만족도는 높은 편입니다. 신입 땐 내가 이 일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만 가면 십 년도 거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들었어요. 들었었어요. 오늘 아침까지는요.


새학기 시작을 앞두고 선생님들끼리 간단한 오티가 진행됐어요. 더불어 새로 오시는 선생님도 처음 뵙는 자리였죠. 작년까지 고양이반(6세)을 맡아주셨던 선생님이 출산휴가를 내시면서 공석이 생겼거든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원장님이 그렇게 맘에 들어하셨다고 해요. 저 면접 볼 때는 손유희 해봐라 모의수업 해봐라 악기 연주 해봐라 등등 오만 거 다 시키시더니. 이번에 뽑힌 선생님과는 도란도란 이야기나 나누셨다고 하더라구요. 원장님 스스로도 신입 쌤 자랑을 입이 닳도록 하시는 걸 보면 거짓은 아닌 모양입니다. 이럴 때 신입을 아니꼬와하면 꼰대지요? 저는 그런 걸 무지하게 싫어하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했어요. 어차피 한 직장에서 일할 거 잘 지내면 좋으니까요.


오티 날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서 자리에 앉았어요. 안타깝게도 원장님이 일등으로 와계시는 바람에 아들내미 자랑을 다이렉트로 들어야 했어요. 하도 웃느라 입가에 경련이 날 것 같았지만 힘냈습니다. 그렇게 한 십오분 지났을까요? 문이 열렸고요. 신입 교사가 들어오네요.


안녕하세요 원장님.


그 신입 교사 얼굴, 키, 몸매, 목소리. 하다못해 은은하게 풍기는 향수 냄새까지... 많이 익숙하더군요.


어머 선생님 왔어요? 일찍 오셨네!
차가 많이 안 막히더라구요.
이리 와서 앉아요. 여기는 일곱 살 강아지반 선생님. 둘이 오늘 처음 보지?
네, 안녕하...
......
...아, 안녕... 안녕하...안녕...
......


저는 할 말을 잃었고 그쪽은 버퍼링이라도 걸린 듯 안녕, 안녕하, 안녕을 반복했습니다. 원장님이 왜들 그러냐 하셨을 때야 서로 끈질기게 쳐다보던 시선이 거둬졌어요.


아니 내 살다살다... 인생이란 게 원래 이런 겁니까?


지훈 선생님도 인사드려. 고양이반 맡아주실 강다니엘 선생님이에요. 이름도 엘레강스하지? 호호.


그 엘레강스한 이름 저도 너무 잘 아는데요...


하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네. 처음 뵙네요.


어린이집에 새로 들어온 교사가, 당장 오늘부터 얼굴 마주하며 함께 일해야 할 신입 교사가, 바로 제 대학시절 구남친이라고 하네요.


네... 충격실화입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고

W. 스킨




나보다 세 살 위였다. 내가 파릇파릇한 스무살로 대학에 입학했을 때 강다니엘은 이미 군대까지 다녀온 복학생 선배. 정말 한참이나 커 보였다. 당시 22살이던 학회장 선배가 강다니엘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걸 보고서 좀 놀랐다. 학생회 임원끼리 과잠을 맞춰입고 있는 모습은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에겐 왠지 모를 위압감을 주곤 했는데, 그 중 대빵이라 칭하는 학회장보다 더 위인 사람이 나타나서일까. 강다니엘은 학생회도 아니었다. 학생회 선배들이 하도 도와달라고 부탁해서 온 거라고 했다. 학생회도 아닌데... 어쩐지 그들보다 더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좀 있으면 십 년이 다 되어가는 그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오티 날 강다니엘은 까만 볼캡을 쓰고 롱패딩을 입고 있었다. 덩치가 너무 커서 놀랐다. 패딩 때문인가 싶었는데 잠시 뒤 후드티만 입은 걸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저 사람 유교과 맞나. 유교과 아니고 유도과 아냐? 그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는 의문은 혼자 품었다.


유아교육과의 특성 상 어딜 보나 여자였다. 설마 남자 신입생이 나 혼자는 아니겠지.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말.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작년까진 그래두 두 명은 됐는데 올해는 너 한 명이래. 이름이 뭐랬지, 지훈이? 지훈아 우리가 잘 챙겨 줄 테니까 전과하거나 편입하거나 그럼 안 된다... 혼자 멀뚱히 서 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부학회장 선배가 친히 다가와 말해줬다. 낯가림이 있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네에, 대답했다. 전과 안 되고 편입 안 되면 자퇴를 고려해봐야겠다.


나름 개강 전에 친구 만들어보겠다고 꾸역꾸역 참가한 오티인데, 친구는커녕 동물원 원숭이가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자인 친구가 익숙지 않았기에 -남고 출신이다- 이곳에선 친구를 사귈 수 없을 거라 판단했다. 지금이라도 집에 가야겠다. 생각하면서 소심한 두 다리는 버스 탑승 중. 토낄 궁리를 하며 밍기적거린 탓에 거의 마지막에 탔다. 척 보기에도 자리가 다 채워진 것 같아 대충 가까이 보이는 곳에 앉았다. 창가 자리에 먼저 와있던 여자애는 나를 신경도 안 쓰고 잘 준비나 했다. 나도 말 많은 타입이 아니라 편하긴 한데... 나 그럼 이러고 몇 시간 달린 뒤에도 친구 없는 거잖아. 존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자퇴하려면 뭐부터 해야 하지.


"술은 같이 마셨는데 왜 나만 늦잠이냐."
"그거야 니는 소주를 병째 마셨으니까 그렇지."
"네가 실연의 아픔을 알아? 아냐고..."
"몰라. 안 차여봐서."
"개새끼야."


아하하 미안. 근데 진짠데. 학회장 선배가 인원수를 세는 사이 강다니엘과 남자 선배 한 명이 들어왔다. 일단 남자라는 성별만으로도 반가웠다. 물론 티는 못 냈다. 강다니엘과 같이 들어온 재환 선배는 첫인상과 현인상이 놀랍도록 일치했다. 되게 까불거리고 밝고 구김살없어 보인다, 는 게 첫인상. 그리고 딱 그런 사람이었다. 맨 앞은 학생회 자리라고 해서 두 번째 줄에 앉았던 나는 괜히 딴청을 피웠다. 둘은 비어있는 내 옆자리, 그러니까 복도를 사이에 둔 옆자리에 앉았다. 속쓰려 죽겠다며 끙끙 앓는 재환 선배를 창가에 몰아넣고 강다니엘이 복도쪽에 앉았다. 이상하게 되게 불편했다. 옆자리 애한테 자리 좀 바꿔달라 부탁하려 해도 얘는 이미 후드집업 뒤집어쓰고 잠에 빠졌다. 보아하니 이쪽도 어제 달리고 온 듯했다. 포기하고 핸드폰을 꺼냈다. 게임 로딩창을 띄워두고 가방을 뒤적이고 있을 때.


"어 그거 나도 하는데."


그때 강다니엘이 말을 걸었다. 처음엔 바보 같이 두리번거렸다. 나한테 하는 말 아닌 줄 알고. 저요? 되묻기까지 했다. 너 말고 게임. 강다니엘이 심플하게 대답했다. 게임 말한 건 알지 나도... 내가 그걸 물어봤겠냐고.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는 나와 달리 강다니엘은 흔들림 한번 없이 내 눈을 쳐다봤다.


"닉 뭐야? 같이 하자."
"네?"
"나 진짜 이때까지 져본 적 없어."
"예?"
"닉 뭐야."


분주하게 핸드폰을 만지더니 다시 내 눈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뚱시뚱시요.' '뭐? 뚜쒸뚜쒸?' '아뇨 뚱,시요. 그거 두 번.' '그게 뭐야.' 그러더니 아까 재환 선배 놀릴 때처럼 소리 내서 웃었다. 살짝 허스키한 웃음소리였다. 뚱시뚱시 내 어릴 적 별명인데 왜 웃지.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가만 있었다. 강다니엘은 아니 귀여워서, 라며 눈을 한껏 접었다. 위아래로 도톰하게 접힌 눈을 보니 마카롱이 떠올랐다.


웃는 게 참... 여기까지 생각하고 핸드폰을 들었다.


"너 이름은 뭐야?"


이번엔 내 눈이 아닌 자기 핸드폰을 보면서 물었다. 그날따라 데이터가 느려서 게임이 바로 실행되지 않았다. 괜히 로딩 중인 화면을 톡톡 건드리면서, 박지훈이요. 작게 대답했다. 힐끔 훔쳐본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자퇴나 편입이나 뭐 그런 거 하지 마."
"......"
"나랑 놀자."


짧게 웃는 목소리와 장난스럽던 그 얼굴이, 내가 몇 년 간 남자 동기 하나 없는 유아교육과에 끈질기게 붙어 있을 정도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곤... 양심상 절대 못하겠다. 내가 먼저 강다니엘 좋아했던 거 맞는 것 같다. 그때가 그와 나의 첫만남.




-1일차


자고로 어린이집의 오티는 앞으로 일 년 간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매우 중요하고 엄숙한 자리이다. 강다니엘과는 조금 전 '처음 뵙겠습니다',' 네 처음 뵙네요' 이후 한마디도 섞지 않았다. 뒤이어 속속 도착한 선생님들은 쌔끈빠끈한 신입 선생님을 보고 아니 이게 뭐야 이게 무슨 횡재야 하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고 그 결과 오티 시작 한시간째 강다니엘 큐앤에이가 진행 중이다. 이게 말이 되냐고. 원장님이 제일 신난 거 뭔데 진짜.


"다니엘 선생님은 형제관계가?"
"외동입니다."
"아이구 사랑 많이 받고 자라셨겠네. 걱정 마요. 선생님들 다 좋은 분이셔서 잘 챙겨 주실 거야."


물어오니 답하는 게 당연하고 심지어 신입으로서 선배들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는 게 당연하다는 거 잘 안다만. 왜 이렇게 속이 불편한가 모르겠다. 꼬박꼬박 대답해주는 거 꼴보기 싫어. 저 사람 좋게 웃는 얼굴도 꼴보기 싫어. ...여전히 잘생겨서 더 꼴보기 싫다. 나이 먹더니 더 잘생겨진 것 같아서. 강다니엘한테 자격지심 같은 건 없다. 강다니엘 잘난 것만큼이나 나 잘난 것도 잘 안다. 누군가한테 자격지심 느낄 만큼 자존감이 낮지 않다는 거다. 근데 왜 짜증나지. 아 진짜 짜증나네...


"애들이 선생님 너무 힘들게 하는 거 아닌가 몰라. 막 몸으로 놀아달라구 하면 적당히 거절하세요 응?"
"네, 알겠습니다.”


미경 쌤의 손이 아까부터 강다니엘 어깨 근처에 올라가있다. 계속 닿아있진 않고 살짝씩, 말할 때마다 은근히 터치하는 정도. 내 짜증의 원인을 찾았다.


오티라 그런지 단정하게 흰 와이셔츠와 슬랙스를 입고 왔다. 자켓을 벗자마자 드러나던 끝없는 어깨와 두툼한 가슴팍에 솔직히 좀... 그래 진짜 조금 심장 떨린 건 사실. 관심없는 척 앞에 놓은 노트만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인간의 눈은 신비하고도 대단해서 시선을 깔아도 강다니엘이 어렴풋이 보였다. 내 눈에도 쩌는데 다른 쌤들 눈엔 더 쩔겠지.


...구남친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이나 하고 앉았다.


“그러고보니까 지훈 선생님도 동경대학교 나오지 않았나? 그럼 다니엘 선생님이랑 알지 않어?”


방심하다 질문이 훅 들어왔다. 안경 너머 번뜩이는 원장님의 눈빛에 당황해버렸다. 별거 아닌 질문에 머뭇거리면 더 이상해질 걸 알면서도 곧바로 받아치지 못했다. 분위기가 딱 의아해지려던 그 시점. 겨우 대답을 했다. 나 말고 강다니엘이.


“별로 마주칠 일이 없어서 잘 몰랐나 봐요.”


아주 간결하고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원장을 비롯한 선생님들은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새로운 질문을 이어나갔다. 여기서 벙찌는 건 나 혼자다. 아니 내 질문에 왜 지가 대답... 그리고, 뭐? 별로 마주칠 일이 없어? 마주칠 일 없으면 굳이굳이 만들어서라도 만났던 주제에. 물론 나도 같이 그랬으니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한때 그랬던 CC사이에.


왠지 모르게 속이 답답해진다. 이 답답함은 오티가 끝날 때까지 계속 됐다. 집 가서 씻고 자고 싶다. 이 와중에 원장은 오티 기념 회식을 하자며 주임 선생님과 고깃집 컨택 중이었다. 아니야 나는 집에 갈 거야. 재빠르게 짐을 챙기고 원장님께 양해를 구하려는데 셔츠가 팽팽해질 정도로 넓은 등짝이 선생님들에게 둘러싸여 나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아마 필참이겠지. 우리나란 신입이 회식 빠지는 것만큼 큰 죄가 없으니까. 원장이 가까이 다가온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냐고 물었다. 아 원장님 저는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아무래도...


“...어디 고깃집으로 가면 되나요?”



-



그닥 눈치보는 성격은 아닌데 결국엔 회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말을 못 한 건지 안 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패스.


강다니엘은 차를 가져왔다. 난 원래 출근할 때 버스를 더 애용한다. 원장님, 강다니엘. 고깃집까지 이동하는 수단에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후보 1은 볼 것도 없이 제꼈다. 나만 그런 거 아니고 모두가 그랬다. 당연하지. 누가 사석에서 대빵 상사랑 붙어 있으려고 해 일초라도 더 떨어져 있으려 하지. 원래 내 생각 니 생각이랬다. 내가 생각하는 건 남들도 똑같이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엔 백퍼센트의 적중률을 자랑한다. 강다니엘은 모든 선생님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얼씨구 미경 선생님은 벌써 조수석에 타 있다.


선택지가 두 개 있다고는 했으나 정작 나에겐 선택권이 없다. 눈물을 머금고 원장님 차로 향했다. 이미 안전벨트까지 착실히 맨 미경 쌤이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곤 쌤 이따 봐요오 콧소리를 냈다. 얄미워 죽겠는 거 정상이지? 도합 아홉 명의 선생님들은 두 개의 차로 찢어졌다. 원한다면 뻔뻔하게 고집을 부려서라도 강다니엘의 삐까뻔쩍한 차에 탈 수 있었겠지만... 그냥 말았다. 얘는 내가 원장님 차에 타든 콜택을 잡아 타든 신경도 안 쓰는 것 같길래. 나만 이러지 나만. 짜증나서 뒤도 안 보고 원장님 차에 탔다. 쟈스민 방향제 냄새 가득하고 좋네. 어 좋다 진짜.


"다니엘 쌤 고기 좋아하지? 이리 와서 앉아요."


회식 때마다 원장님 맞은편은 무조건 나였다. 이것도 이제 옛날 얘기다. 강다니엘이 오니 나는 찬밥 신세가 됐다. 새로운 것에 환장하는 21세기 인간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묵묵히 끝자리에 앉으려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원장이 나를 불렀다. 자기 옆자리에 앉으란다. 거기 앉기엔 강다니엘이랑 너무 가까운데. 좀 망설였다.


"나는 소고기가 그렇게 좋더라. 다니엘 쌤은 무슨 고기 제일 좋아해요?"
"어... 저는 그냥 고기면 다 좋아해요."
"어머 배우신 분."


미경 쌤은 강다니엘한테 본드라도 붙여놓은 모양이다. 또 옆자리. 그걸 보곤 군말 없이 원장 옆에 가 앉았다. 셔츠 소매를 걷어올리던 강다니엘이 힐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뭘 봐. 보지도 않고 속으로만 공격했다.


강다니엘은 차가 있어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원샷 때리던 원장이 그게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이럴 때 부르라고 있는 게 대린데?" 그랬다. 마찬가지로 차를 가져온 원장이 그렇게 나오니 거절하기 난감했을 거다. 강다니엘은 잔을 받아 마셨다. 나는 원래 술을 즐기지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 오늘 같은 날 마셨다간 적당한 때 브레이크 걸 자신이 없어서 입에도 안 댔다. 원래 같으면 나에게 술을 권했을 선생님들은 죄다 강다니엘만 보고 있다. 어쩜 술도 그리 잘 마시냐고. 맞아 강다니엘 술 잘 마시지. 사귈 때 쟤 취한 모습 보고 싶어서 나 한 잔 마실 때 두 잔 먹이고 막 그랬는데. 근데 내 얼굴이 먼저 빨개지고 내가 먼저 취했던 걸로 기억한다.


"지훈 쌤은 오늘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어디 안 좋아?"
"아 아뇨. 새벽에 배탈이 좀 났어가지고..."


거짓말이다. 간만에 온 관심이 반가워 아무말이나 씨부렸다. 또 한 잔을 넘기고 있던 강다니엘이 눈만 내리깔아 나를 봤다. 아주 잠깐 마주친 눈은 내가 먼저 피했다. 술도 못 마시면서 강다니엘과의 술자리는 좋아했던 이유. 술 넘길 때 저러고 쳐다보는 표정이 좋아서. 술도 안 마셨는데 자꾸 추억팔이나 하게 된다. 환장하는 소고기에도 딱히 손이 안 갔다. 나 진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배탈이라도 났었나. 기분이 좋지 않으니 몸상태까지 좋지 않게 느껴진다. 내가 여기 있어서 뭐하냐. 주섬주섬 일어날 채비를 했다. 왜 그러냐는 물음에 집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아쉬운 소리를 내지만 전부 강다니엘 가는 거 아니니 됐어 싶은 거 다 안다. 재수없는 강다니엘. 푹 쉬라며 토닥여주는 선생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강다니엘한테도 고개를 까딱 숙이긴 했는데 보긴 했나 모르겠다.


"...근데 여기가 어디야."


길치인 나는 초행길에 무지하게 약하다. 오는 길에 지하철역을 본 것 같긴 한데... 어디로 왔더라.


"배 많이 아파요?"


핸드폰을 꺼내기 무섭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화들짝 경기를 일으켰다. 뭘 그리 급하게 나왔는지 자켓에 팔을 넣는 중인 강다니엘. 말 거는 걸로 보아 나를 따라 나온 것 같았다. ...왜? 아니 그것보다, 저 존댓말은 뭐야.


"잘 때 이불 좀 잘 덮고 자요. 그러니까 배탈이 나지."
"......"


자켓을 마저 입은 강다니엘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난 아까 돌아본 상태 그대로 멈춰 있다. 누가 얼음이라도 한 것처럼. 말은 모르는 사이인 척 존댓말 쓰면서 내용이 그따위면 어떡하라는 거야.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건 색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는 동안 강다니엘은 평온함을 유지했다. 언제나 여유 넘치던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 아니, 하... 무슨 말을 하려다가 한숨이 튀어나왔다. 강다니엘이 말하라는 듯 눈썹을 까딱인다.


"...뭐야? 요?"
"뭐가요."
"왜 우리 어린이집... 아니 솔직히 나 있는 거 알고 왔지. 요."
"뭔 소리래. 나 당황하는 거 못 봤어요? 너, 아니 쌤보다 내가 더 놀란 것 같은데."
"뭐래요. 내가 더 놀랐구만."


처음 본 순간부터 했어야 할 말을 꾹꾹 누르고 누르다 하려니 주둥이가 막 터졌다. 누군가 나올 것을 염려해 강다니엘을 끌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담배 피우기 딱 좋은 장소. 강다니엘 대학교 땐 흡연자였는데 지금은 끊었나? 또 옛날 생각.


"졸업하고 쭉 아버지 일 배우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난 애기들이 좋아서. 지금 진짜 신입이에요. 이번이 처음."
"안 궁금해. 요."
"직장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
"나도 마찬가지야. 요."
"배는 얼마나 아픈데요."
"하나도 안 아프니까 신경 쓰지 마."
"......"
"...세요."


아주 생초면부터 말까던 사람이 이런 데서 다시 만나니 존댓말 되게 잘한다. 나는 불편해 죽겠는데. 입이 절로 불퉁하게 나왔다. 예전부터 내 표정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강다니엘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문득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지 싶은 생각이 든다. 빨리 가서 씻고 잘 거야. 미련없이 등을 돌리려는데 또 말을 걸었다. 아니 말을 건다기보단 약간 혼잣말에 더 가까운 어조로.


"왜 삐진 것 같지?"
"뭐라고요?"
"삐졌어요?"
"내가요? 아뇨, 제가 왜요? 나 진짜 어이가 없네."


내가 왜 삐져 뭘 삐져. 내가 왜 대체 뭐 때문에 삐지는데. 나 진짜 안 삐졌는데 삐졌냐고 물어보니까 입이 더 튀어나왔다. 애초에 장난 걸려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분노하며 씩씩거리는 나를 보곤 슬쩍 웃었다. 술은 강다니엘이 마셨는데 애꿎은 내 목덜미가 벌게졌다. 분해서 그렇다. 여전히 내 머리 꼭대기에서 띵가띵가 놀고 있는 것 같은 게 분해서. 진짜 갈 생각으로 등을 돌렸다. 강다니엘이 느긋한 걸음으로 옆에 따라붙는다.


"먼저 처음 뵙겠습니다 한 건 선생님이에요."
"......"
"그 말 아니었으면 난 아는 척했을 것 같애."
"...거기서 아는 척해서 뭐해요."
"우리 계속 처음 만난 사이해요 그럼?"


대답까지 약간 머뭇거렸다. 이런저런 많은 이유를 떠올려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정답은 하나다.


"네."


일부러 목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그랬더니 강다니엘도 알았다 그러고. 왜 따라오나 싶으면서도 내 마음속엔 은근히 얘가 나를 역까지 데려다 줄 거란 믿음이 있었나 보다. 강다니엘은 내 어깨를 살며시 잡아 방향을 틀어주며 이쪽 아니고 저쪽으로 쭉 가면 지하철역 나와요. 조심히 가요. 라고 했다. 방향만 잡아주고 그대로 고깃집에 들어갔다는 거다. 좀 당황했다. 하긴 아무리 직장동료라 해도 초면에 누가 역까지 데려다 줘. 심지어 난 술도 안 마셨는데. 습관이 무섭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그래도 몇 년 전 길들여진 습관까지 나오게 될 줄은 몰랐다. 따로 가야 할 일이 생기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데려다 주던 강다니엘. 그땐 그게 좀 부담스럽기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나는 게 웃기다. 아무래도 술 마실 걸 그랬나 봐. 작은 후회는 덤으로.




**





고백은 내가 먼저 했다. 오티 가서 술 처먹고 뽀뽀하고 개강 후 고작 3일 동안 썸 비스무리하게 타다가, 그냥 내가 질러버렸다. 강다니엘은 은근 순정파인지 이렇게 빨리...? 라는 표정을 지었었다. 그렇게 치면 오티 때 뽀뽀도 하면 안 됐지. 그날 우리 초면이었는데. 근데 이것도 할 말 없다. 내가 먼저 했거든. 물론 술에 만땅 절어 니 입술인지 내 입술인지 구분도 못하긴 했지만 암튼 죄는 죄니까 반성한다.


헤어지자고도 내가 먼저 했다. 그래도 나름 예쁘게 잘 사귀었던 것 같은데 우리. 2년을 만났다. 1학년만 채우고 내가 입대를 해서 뒤에 일년은 장거리 커플이었다. 강다니엘은 학교 다니며 과제하랴 실습 준비하랴 공부하랴 바쁘고 나도 내 나름 나라 지키느라 바빴다. 그러다보니 이젠 연락을 해도 할 말이 점점 줄어드는 거다. 매일을 붙어있어도 처음처럼 설레고 재밌던 게 갑자기 아득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서서히 식어가는 마음을 스스로 느낄 때, 그때 좀 멍했던 것 같다. 너무 좋아해서 어쩌지 싶던 것도 이렇게 사그라들 수 있구나. 권태기라고 봐야 할까. 그렇겠지?


가끔 sns를 구경하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강다니엘 사진을 볼 때가 있었다. 강다니엘은 우리 과 말고도 아는 사람이 많았고 그만큼 약속도 많았다. 매일 저녁 통화하며 지훈아 보고싶다 라고 해도 다음날 낮이 되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예쁘게 웃고 있는 강다니엘. 군대가 힘들긴 힘들었던 모양이다. 죄없는 강다니엘이 미워질 것 같았다. 그러고 싶진 않아서 이별 통보를 했다. 질러놓고 후회 안 했다면 솔직히 거짓말이다.


몇 번이고 며칠이고 잡는 강다니엘을 싹 다 내쳤다. 사귈 때도 '훈아 너 가끔 보면 엄청 냉정할 때 있는 거 알아?' 소리를 종종 들었었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거? 딱 싫다. 그래서 여지를 안 줬다. 헤어지는 것까진 참았어야 했나 하고 후회했는데... 다시 만났다가 되려 더 큰 후회를 얻게 될까 봐 참았다. 그리고 끝. 내가 전역했을 때 강다니엘은 졸업생이었고 그 뒤로 과 행사 때 얼굴 한번 본 게 다다. 안 보고 산 지 한 6년 됐나? 이렇게 보니까 많이 오래됐네. 아무리 생각해도 놀랍다. 헤어진 지는 그보다 더 오래된 마당에 직장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그 옛날 기억이 뭐라고 고작 한 번의 만남에 이렇게 흔들리게 될 줄도 몰랐다.




-2일차


어린이집 앞에서 딱 마주쳤다. 본능적으로 굳어버릴 뻔하다가 강다니엘 옆에 다른 선생님도 계시기에 나름 표정관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강다니엘이 나에게 먼저 인사했다. 인사말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디 하나 어색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허나 그렇게 느낀 건 나뿐인지 강다니엘과 쌤은 하하호호 웃으며 어린이집으로 들어갔다. 앞으로도 쭉 처음 보는 사이하자고 한 건 나다. 나를 이렇게 사무적으로 대하는 게 당연하다. 제발 박지훈. 이상한 데서 속 좁아지지 말자.




-7일차


키 크고 덩치도 있어서 아이들이 무서워할 줄 알았다. 엄청난 오산이었다. 생각해보니 강다니엘은 학교 다닐 때도 교수님들께 평이 좋았다. 모의수업도 능숙하게 잘하고 현장실습을 나가도 칭찬만 수두룩하게 듣고 오는 타입. 강다니엘과 아이들이 붙어 있는 모습은 의외로 아주 잘 어울린다.


“다니 선샌님!”


고양이반 아이들은 강다니엘을 다니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때마다 강다니엘은 좋아 죽겠음을 숨기지 못하고 마카롱을 구웠다. 아이들 좋아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그때보다 더해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7세 강아지반, 강다니엘은 6세 고양이반. 교실이 바로 옆인데다 화장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연결돼 있어 틈만 나면 마주쳤다. 바깥놀이 후 손 씻기 지도를 하다 보면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기 중인 강다니엘이 보였고 아이들 틈에 섞여 함께 양치하고 있으면 식사지도 중인 강다니엘이 보였다. 근무할 땐 아무래도 편한 옷을 주로 입었는데 강다니엘은 맨투맨을 입고도, 그냥 티 하나를 입고도 태가 났다. 자꾸 눈길이 가는 건 내가 몸빠여서 그래. 강다니엘이 아닌 다른 남자 선생님이었어도 그랬을 거다. 그럼.


지훈 선생님 원장님이 잠깐 내려오시래요.
지훈 선생님 오늘 미세먼지 나쁨이라 바깥놀이 못 나가요.
지훈 선생님 일지 다 쓰시면 저 주세요. 이따 내려갈 때 같이 제출할게요.


나에게 지훈 선생님, 지훈 선생님 부르는 건 아직 적응이 덜 됐다. 어린이집 내에서 마주치는 것만 해도 혼자 고장나기 바쁜데 강다니엘이 나를 저렇게 부를 때면... 대충 네네 대답만 하고 도망치듯 멀어졌다. 난 아직 선생님 앞에 강다니엘의 이름을 붙여 불러본 적이 없다. 해야 할 말이 있으면 선생님이라고만 불렀고 그마저도 내키지 않는 날엔 말없이 다가가 용건부터 이야기했다. 강다니엘은 아무 반응도 없었고, 애초에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11일차


“지훈 쌤. 선생님은 왜 제 이름 안 불러줘요.”
“예?”


아니었다. 그래도 아아아주 신경 끄고 있고 뭐 그 정도까진 아닌 모양이다.


“아니 미경 쌤이나 다른 쌤들한텐 잘만 하던데. 나한테만 맨날 이름 안 붙여주잖아요.”
“...그게 중요해요?”
“너무요.”
“...알았어요. 강다니엘 선생님.”
“바빠 죽겠는데 일곱 글자 언제 다 말할래요. 녤 쌔앰, 해봐요.”


무시하고 화장실이나 갔다.
......좀 귀엽긴 했다.




-15일차


오며가며 마주칠 떄마다 강다니엘이 은근히 스킨십을 하기 시작했다. 강다니엘 스킨십 많은 거야 스무살 오티 때부터 느끼긴 했으나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겪는 건 느낌이 또 달랐다.


한창 사귀던 때야 슬쩍슬쩍 하는 스킨십조차 강도가 셌다만 그건 연애 중일 때 얘기고. 지금은 고작 머리 만지기, 어깨 주물거리기, 팔뚝 주물거리기, 허리에 손 올리기, 허리 감싸기-어떤 날은 뒤에서 안 듯이 두 팔로-가 전부였다.


쓰고 보니 고작이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원래 이런 인간이니 뭐라 하기도 애매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곳에 성인 남자는 나 하나라 그 스킨십을 내가 모조리 감당 중이라는 것이다. 아 일주일에 두 번씩 체육 선생님이 오시긴 한다. 체육 쌤과는 언제 또 그렇게 친해졌는지 어제는 어깨에 손 올리면서 웃더라. 교실 창문 닦다가 다 봤다. 체육 쌤이 여자친구가 있으셔서 다행이다.


뭐가. 질투 아님.




-17일차


뭔 놈의 적응이 이리도 빠르냐. 강다니엘은 벌써 만렙 선생님이 됐다. 안 그래도 원장님 예쁨 받는 판국에 일까지 잘하니 아주 그냥 어린이집의 보물이 되셨다고. 내가 저 정도 경력이었을 땐 어땠더라.


생각을 말자. 집 가는 길마다 훌쩍거렸던 기억밖에 없다.




-25일 차


학부모의 연령대는 다양하다. 늦둥이 낳은 어머니부터 일찍 낳은 어머니까지. 공통점은 모두 강다니엘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물론 선생님으로서 좋아하는 거지만... 자타공인 어머니들의 귀염둥이였던 내 자리가 위험해졌다.


"다니엘 선생님 이거 드세요. 피곤하실 텐데."
"아 감사합니다 어머님. 아영이 요즘 낮잠도 잘 자고 너무 예뻐요."
"그런가요?"


법이 법인지라 큰 선물은 못 해도 작은 간식거리는 꾸준히 들어왔다. 늘 학부모님 인기투표 일등을 꿰차던 내 자리가 위험해진 거야 아무렴 상관없다. 그런 거 다 제외하고, 내가 싫은 건 바로 이런 거다.


"지훈 쌤 비타오백 좋아하죠. 이거 먹어요."


자기가 받은 걸 나에게 주려고 할 때 말이다. 오늘은 비타오백 한 병을 짤랑거리며 들고와 나에게 내밀었다. 방금 어머니한테 받은 거 다 봤는데 가시자마자 이러기 있냐구. 묵묵히 아이들 수첩이나 정리했다. 눈 앞으로 불쑥 병이 내밀어진다. 먹어요. 피곤해 보이는데.


"방금 아영이 어머니한테 받으셨잖아요."
"네."
"네가 아니고요... 선생님 생각해서 주셨는데 그걸 왜 저한테 주시냐구요."
"아... 좀 그런가."


좀이 아니고 많이요 많이. 강다니엘은 진지한 얼굴로 잠시 생각에 빠졌다. 양말 이거 누구 거예요. 바깥놀이 나갈 때 양말 벗은 사람? 우뚝 선 덩치를 애써 무시했다. 강다니엘은 무표정하다가도 아이들이 나오면 금세 웃는 얼굴로 머리를 만져줬다. 양말을 찾으러 나왔던 아이들이 강다니엘을 보곤 신나서 말을 걸었다. 강제로 강다니엘의 사색 타임도 종료된다.


"강아지반 이제 들어가세요."
"지훈 쌤."
"이름표 안 붙이고 놀이하는 친구 누굴까?"
"그럼 제가 사온 건 먹어요?"
"네?"
"알았어요. 어 고양이반, 선생님이 나오라고 안 했는데."


나의 네? 는 되묻는 의미의 네였지 긍정의 네가 아니었는데. 강다니엘은 지 좋을 대로 받아들이곤 쿨하게 반에 들어갔다. 뭐냐.




-26일 차


"자. 먹어요 이거."
"...저 혼자요?"
"네."


다음날 갔더니 강다니엘이 비타오백 두 박스를 사들고 왔다. 멀리서 보고 오늘 무슨 손님맞이라도 있나 했다. 근데 그게 다 내 거라니. 얼떨결에 받았다. 당황스러움에 입만 뻐끔거리자 강다니엘이 사전에 내 거절의사를 차단해버린다.


"내 돈 주고 내가 사온 거 내가 지훈 쌤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깐요. 거절 안 돼요."
"...저를 왜 주시는데요."
"그냥. 선생님 피곤해 보여서."


요즘 잠도 잘 못 자고 피곤한 게 사실이긴 하다만... 혼자 비타오백 두 박스 비워야 할 만큼은 아닌데. 아무튼 주는 거니 감사하게 받았다. 솔직히 좀 설렜다. 집 가자마자 뜯지도 않고 냉장고에 고이 넣어뒀다. 진짜 피곤해서 죽을 것 같을 때 한 모금씩 마시려고. 하하.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다.




-32일 차


한달이 넘어서야 번호 교환을 했다. 핸드폰 바꾸는 김에 번호도 같이 바꿔서 쌤들한테 알려드리다가, 그러다보니 강다니엘도 자기 핸드폰을 내밀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번호 찍어주던 나는 그 핸드폰까지 받아들었다. 그게 강다니엘 거였다는 건 돌려주면서 알았다.


이미 찍어준 마당에 다시 무르기도 뭐해서 그냥 뒀다. 강다니엘은 방글방글 웃으며 곧장 통화버튼을 눌렀다. 액정에 낯선 11자리가 떴다. 눈에 익지 않은 걸 보니 확실히 사귈 때 그 번호는 아닌 듯하다. 하긴 그때가 몇 년 전인데. 잠깐 고민하다가 ‘다니엘 선생님’ 으로 저장했다. 아직 제대로 불러본 적은 없지만 눈에라도 익으라고.


“프사 잘 나왔네요.”


이미 저장을 마친 강다니엘이 내 카톡 프사를 보고 말했다. 주말에 찍은 사진이다. 검은색 반팔티를 입고 브이하고 있는 그냥저냥 평범한 사진.


“혼자 찍은 거예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누가 찍어준 거?”


...뭐야 저 신경 쓰인다는 듯한 은근한 물음은. 김칫국일지 몰라도 내 주둥이는 일단 움직였다. 찍어준 거요. 잘 나왔죠. 강다니엘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한참 내 사진을 쳐다보다가 한다는 말이.


“...애인?”


나참...


“내일 미경 선생님이 당직이신가?”


지금도 충분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을 조금 뒤로 미루는 것. 우리 엄마가 말한 매력어필 방법 중 하나이고 나는 그걸 충실히 이행 중이다. 강다니엘 저 강아지 같은 인간 내 대답 기다리는 것 좀 봐. 귀엽다 어떡하지. 이거 박우진이 찍어준 건데. 친구도 너무 친구인 박우진. 괜히 바쁜 척 교사실을 나갔다. 덩그러니 남은 강아지 강씨가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그대로 자리를 떴다. 아마 매력어필 제대로 한 것 같다.




-43일 차


[다니엘 선생님: 아침 먹었어요?]


번호 교환 이후 자꾸만 연락이 오는데요, 어떡하죠. 답장은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었다. 웃긴 건 내가 답장하면 그쪽에서 다시 안 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근데 또 안 하면 어린이집에서 나한테 똑같이 질문한다. 선생님들 다 계신데 굳이 나한테만 와서 “쌤 아침 먹었어요?” 하고. 선생님들은 남자 쌤끼리 친해지는 과정이 보기 좋은 눈치였지만 괜히 찔리는 난 적당히 거리를 뒀다. 아무도 의심 안 할 우리 둘의 과거가 들킬까 봐서. 그때부턴 내가 씹히는 한이 있어도 꼬박꼬박 답을 했다. 여전히 지가 먼저 보내놓고 내가 답 보내면 씹는다.


조금 지나자 이젠 심화된 질문을 던졌다. 예를 들어 밥 먹었냐는 카톡에 먹었다는 답을 보내면 묵묵부답이다가, 나중에 굳이 내 옆에 와선


“뭐랑 먹었어요.”


하고 묻는 거다. 이럴 거면 계속 카톡을 하든가. 내가 씹든 안 씹든 와서 말 걸 거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친해져보려는 노력인가. 듣자하니 미경 쌤의 사적인 연락엔 지나치게 사무적으로 대응해 선생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나에게 이런 노력을 해주는 것에 감사합니다 절이라도 해야 할까. 근데 미경 쌤은 강다니엘이 진짜 맘에 드시는 모양이다. 강다니엘... 잘하고 있어.




-59일 차


주말 쉬고 왔더니 몸이 안 좋았다. 분기별로 꼭 한 번은 겪고 지나가는 몸살인 것 같았다. 양털 후드집업에 얼굴을 파묻고 출근했다. 부드럽게 들어오던 검정색 차가 내 옆에서 멈춰섰다. 창문이 내려가고 보이는 건 강다니엘 얼굴. 오늘도 강아지 같다.


“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잠깐만, 같이 들어가요.”


바로 코앞이 어린이집인데 같이 들어갈 거리나 되나 싶었지만... 핸들 돌리는 손길이 무지하게 다급해 보여서 가만히 기다렸다. 완벽하게 주차를 마친 강다니엘이 차에서 내렸다. 오늘은 회색 옷이다. 역시나 잘 어울린다.


“날씨 많이 따뜻해지지 않았어요?”
“네, 그러네요.”
“양털 입었길래. 안 덥나 해서.”
“저는 원래 뜨뜻한 거 좋아해가지구 괜찮아요.”
“음? 더운 거 싫어하잖아요.”


할 말 없음. 사귈 때도 내가 더위를 너무 많이 타서 강다니엘이 늘 손부채질도 해주고 그늘 찾아서 앉혀주고 그랬었다. 옛날 생각은 늘 위험하다. 웃기지도 않은데 뻘쭘하게 웃는 걸로 대화를 차단했다. 내가 어린이집 문을 여는 동안 강다니엘은 옆에 얌전히 서서 기다렸다. 그러고보니까 이 쌤은 왜 일찍 왔대?


“근데 오늘 오전 당직 전데?”
“알아요.”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알면서 묻는 거예요 진짜 몰라서 묻는 거예요?”
“......”


나 때문에 일찍 왔다는 저 뉘앙스. 나만 느끼는 거 아니지. 부쩍 거침없어진 강다니엘이 무섭다. 진짜 공포, 이런 거 말고. 옛날에도 적극적인 강다니엘한테 많이 끌렸었으니까. 존나... 안 돼 박지훈. 장난치지 말라는 의미로 강다니엘의 가슴팍을 톡 때렸다. 당황스럽게도 강다니엘 눈이 땡그래진다. 놀란 눈으로 자기 가슴팍에 손 올리는 강다니엘. 그리고 그거 보고 더 당황하는 박지훈...


“...뭐, 왜요. 아파요? 엄청 살살 쳤는데.”
“아니... 쌤이 나 만져 주는 거 엄청 오랜만이라서요.”
“뭐요? 아니, 그게 뭔...”


누가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이다. 따지고보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내 맘과 달리 목덜미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나를 따라 들어오는 강다니엘은 자꾸 오랜만 어쩌구하며 중얼중얼. 왜 저래 사람 민망하게... 손끝에 닿았던 강다니엘 가슴팍은 그때보다 더 탄탄해진 것 같아서, 그래서 또 좀 설렜다. 나도 강다니엘한테 뭐라할 자격 없는 거 안다.


근데 지훈 쌤. 뒤에서 강다니엘이 불렀다. 안 돌아보고 네, 대답하며 신발을 갈아신었다. 숙이고 있던 내 얼굴 옆으로 강다니엘이 쑥 들어왔다. 악 깜짝아. 놀라서 몇 걸음 물러났다. 내 고개를 따라 움직이는 그의 눈엔 장난기가 없었다. 얼굴이 빨개졌다느니 토마토라느니 장난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어디 아프죠.”
“어... 아니요?”
“뭘 아니야. 약은 먹었어요? 알약 싫다고 또 안 먹었겠지.”


이렇게 나오면 내가 무슨 반응을 해야 하지. 내 침묵에 강다니엘도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둘뿐인 어린이집에 숨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눈치보다가 내가 먼저 들어갔다. 뒤에 묵묵히 따라붙는 게 느껴진다. 이번엔 귀까지 열이 올랐다.


그날 퇴근시간. 내 사물함에 놓여 있는 마시는 감기약과 비타민, 내가 좋아하는 뽀로로 캔디. 약국에서 애기들한테만 주는 거. 메세지 하나 없어도 물품이 지문 수준이다. 아 이 형 왜 이러냐 진짜...


[약 고마워]
[요.]


처음으로 내가 먼저 카톡했다.




-62일 차


가만 보면 바깥놀이 시간에 아이들보다 강다니엘이 더 신나 있는 것 같다. 원래도 활동적인 편이긴 했지만 세상 그렇게 즐거워 보일 수가 없다. 굳이 뛰어다니지 않아도 충분히 피곤할 텐데. 하여튼 체력 하나는 타고난 사람이다.


“다니 선샌님! 야옹이 왔어요 야옹이!”
“어디에 왔어요!”


바깥놀이를 하다 보면 종종 이렇게 강다니엘의 생일날이 오기도 한다. 바로 길고양이가 등장하는 날. 아이들과 모래성을 쌓던 강다니엘이 번쩍 튀어올랐다. 그 큰 덩치 구겨가며 조심히 다가가보지만 우다다 달려가버린 아이들 덕에 고양이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강다니엘의 설레 죽던 얼굴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진다. 순간 너무 강아지 같아서 놀랐다. 애옹이도 얘 강아진 줄 알고 도망간 거 아니야? 하하하.


“아이 가뿟네...”


얼마나 아쉬우면 다 고친 사투리까지. 머릿속에 '귀엽다'는 단어가 둥실 떠오르는 건 나만 그런 게 아닐거라 믿는다.




-66일 차


강다니엘이 약 챙겨준 그날, 고맙다는 나의 선톡을 시작으로 일주일째 연락이 이어지고 있다. 난 정말 안 그러려고 했다. 정말 노력했는데 강다니엘이 워낙 연락 이어가기를 잘한다. 아무리 단답에 읽씹에 느려터진 극강의 답장텀 등등 별의별 방법을 다 써도 소용없었다. 핑계로 들릴진 몰라도 그래서 그렇다. 딱히 강다니엘이랑 카톡하는 게 재밌어서는 아니다.


[다니엘 선생님: 사진]


오후 당직인 강다니엘을 두고 먼저 퇴근 중이었다. 방금 전까지 비지니스의 끝을 달리는 얼굴로 꾸벅 인사하고 헤어진 강다니엘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아니 이 사람이 이건 또 언제 찍었어. 오늘 낮잠시간에 화장실 청소하던 내 뒷모습 사진이었다. 엉덩이 한짝이 거의 뭐 코끼리보다 크게 나왔다. 짜증나는데 그것보다 웃긴 게 더 커서 나도 모르게 ㅋㅋ을 남발했다. 강다니엘도 같이 막 웃는다. 


                                       [ㅋㅋㅋㅋㅋㅋ아니]
                                       [허락없이 왜 찍어요]
                                       [남의 사진을ㅡㅡ]


[다니엘 선생님: 그렇게 말하면]
[다니엘 선생님: 나 서운해요]


설사 애인 사이라 해도 남인 것이 맞거늘. 실상은 아무렇지 않을 걸 알면서도 서운하니 어쩌니 저런 풀죽은 소리를 하면 난 또 그거에 마음이 쓰였다. 내가 바보인 거 안다. 유독 강다니엘한테 약한 것도 안다. 안다고 뭐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까지 아주 자알 안다. 시간이 갈수록 강다니엘한테 휘둘리는 느낌이 드는데... 그게 딱히 싫지 않다는 게 문제.




-74일 차


고양이반 제헌: 그른데 다니 선샌님은 왜 맨날 강아지반 선샌님만 봐요?
고양이반 민주: 바찌훙 선생님이 다니 선샌님 쳐다보고 가써요.
강아지반 태운: 다니 선생님이 선생님 토끼 같대요. '태운아 너희 반 선생님 아기토끼 같구 너무 귀엽지이' 이랬는뎅.


맹세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는데 강다니엘이랑 사귀는 거 아니고 아무 사이 아니고 썸도 아니...고? 정말 뭐 아무것도 아닌데. 일단 조심은 해야겠다.




-82일 차


눈 뜨면 잘 잤냐 오늘 날씨는 어떻다더라 연락하고 어린이집에서 만나면 서로 고개 꾸벅 숙이면서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각자 일 열심히 하다가 마주치면 가끔 머리 만져주고 너무 다정해서 명치 간지러워지는 눈빛으로 슬쩍 웃어도주고 다른 쌤들 앞에선 여전히 동료교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퇴근할 땐 둘 중 하나가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인사하고 나가자마자 ‘퇴근하면 전화해요’ 카톡 남겨놓고 가끔 저녁 같이 먹고 시간 내서 영화도 보고 집 앞까지 데려다 준 적 꽤 있고 나란히 서서 걸을 때 손이 자꾸 닿고 무엇보다 이제 눈만 봐도 토할 것처럼 떨려서 미쳐버리겠는데, 이거 썸인가?




-96일 차


공들인 어린이집 행사 하나가 끝났다. 고생했다는 의미로 간만에 회식을 했다. 강다니엘 처음 오던 날 술에 입도 안 댔던 나는 정말이지 미친놈처럼 달렸다. 어디서 나온 패기인지 모르겠다. 와 진짜 너무 취했다.


"지훈 쌤! 지훈 쌤? 눈 좀 떠봐요. 아유 근데 지훈 쌤은 취해도 볼이 발그레한 게 귀엽네."
"원장님 제가 지훈 선생님 데려다 드릴게요."
"다니엘 쌤이? 집 어딘지 알아요?"
"저번에 얘기해보니까 저랑 가까이 사시더라구요. 너무 늦어서 저희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장육부와 뇌가 죄다 울렁거리는 가운데 원장과 강다니엘의 대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뭐라는진 모르겠고 토할 것 같아서 입을 앙 다물었다. 누군가 나를 잡고 일으킨다. 안 돼요 싫어요. 착실하게 거절하는데 익숙한 강다니엘 목소리가 나에게 일어날 수 있겠냐 물었다. 뭐 이리 가까운지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수준이었다. 이 와중에 목소리가 환장하게 좋아서 소름이 다 돋았다. 얌전히 강다니엘이 이끄는 대로 힘을 풀고 몸을 맡겼다. 내 딴엔 강다니엘을 배려하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얘는 그게 더 힘들었는지 살짝 주춤했다. 나 살 안 쪘는데... 갑자기 짜증이 확 올라서 고개를 치켜올렸다. 겨우 회식장소 밖으로 나를 끌어낸 강다니엘이 고개를 틀어 나를 봤다.


"왜. 뭘 봐요."
"...나 살 안 쪘어."
"누가 뭐래요?"
"아니라구 나 살 안 쪘다구. 근데, 고기는 좋아하지 내가 또..."


강다니엘은 횡설수설 웅얼거리는 나를 단단히 붙들어주면서 웃었다. 진짜 웃겨서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이런 말 내 입으로 하긴 좀 그렇지만 귀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취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뭐 쨌든 이런 느낌은 언제 받아도 좋으니까 그냥 냅두련다. 강다니엘이 나를 더 끌어당겼다. 졸림 플러스 취기에 다 풀린 눈으로 강다니엘을 올려다봤다. 같이 마주 봐 주는가 싶더니 금세 눈을 피해버린다. 한마디할까 말까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로 고민하는 동안 속전속결로 택시까지 잡아버린 강다니엘이 나부터 야무지게 쑤셔넣었다. 그러면서 부르는 주소가 우리 집이라 심기불편.


"아니요. 아뇨 기사님. 죄송해요. 거기 말구요, 그... 형 어디 살지. 형 네가 주소 말씀드려 언능."
"형...?”
"얼른 말씀드리라구."
"지훈이 니, 아니 지훈 쌤 지금 나보고 형이라 한 거예요?"
"아 지훈 쌤은 뭔 놈의 지훈 쌤이야... 여기 어린이집 아니잖아요. 지훈아, 해."
"와......"
"기사님 다니엘 집이 어디냐면요... 빨리 주소 말씀드려어."


그게 택시 안에서의 내 마지막 기억이다. 곧바로 헤드뱅잉을 시작하며 잠들어버린 내 머리통은 강다니엘의 단단한 가슴팍에 안착했다. 내가 잠든 동안에도 쉬지 않고 내 머리카락을 살살 만져준 강다니엘 덕에 꿀잠잤다. 기분 좋은 꿈까지 꾼 것 같다.


그러다 정신 차려보니 장소는 처음 와보는 강다니엘의 집. 사귈 때나 니 집 내 집 없이 드나들었지 헤어진 후로는 처음이다. 깔끔한 소파에 거의 눕듯이 기대 앉아 강다니엘 움직이는 것만 빤히 쳐다봤다. 뭔가 안절부절못하고 굉장히 부산스러웠는데, 귀가 왜 저렇게 빨개.


"...지훈 선생님."
"아이 참. 여기 어린이집 아니라니깐요."
"...지훈아."
"......"
"지훈아 하라면서. 왜 대답 안 해줘."
"아니... 개떨리잖아."
"개떨리잖아가 뭐예요 선생님이.”


저렇게 눈썹 내리면서 웃는 얼굴 너무 좋다. 당사자 의도는 어떨지 몰라도 뭔가 예쁨 받는 느낌이라. 택시에서 진탕 자고 일어났더니 술이 깨는 건지 반대로 더 오르는 건지 구분이 어려웠다. 앞에 서 있는 강다니엘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웃던 얼굴에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져간다. 그러다가 또 눈을 피하길래... 내가 먼저 손을 뻗었다.


"...야, 지훈, 지훈아! 니 어딜,"
"이리 와봐 형."
"아니 잠깐만..."
"뭘 잠깐만이야. 손 치우세요."


나는 앉아 있고 강다니엘은 그 앞에 서 있는 상태. 내 시야 정면엔 그의 길쭉한 다리가, 정확히 말해 사타구니가 위치해 있다. 그럼 내가 손을 어디로 뻗었겠어. 뜬금없이 머리통에 뻗었겠어? 강다니엘이 심히 당황하며 내 손을 잡았다. 간만에 닿아보는 손이 예전처럼 크고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치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 목표는 다른 곳에 있다. 엉거주춤 엉덩이를 뒤로 뺀 강다니엘을 끌어당겼다. 어흑. 열오른 내 손이 그곳에 정확히 닿자 강다니엘이 우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혔다. 아 표정 좀 봐. 귀여운데 섹시해... 이제 알겠다. 술은 깨지 않고 더 오르는 중이었다. 박력있게 강다니엘의 팔을 잡아당겨 소파 위로 앉혔다. 그리고 나는 재빠르게 강다니엘 허벅지 위에 안착. 도망 갈 구석 미리 차단하는 거다.


"아... 왜 그래 지훈아."


그러면서 손은 자연스레 내 허리 위로. 봐봐 습관 무섭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졸린 눈을 깜빡이며 헤헤 웃었다. 울상으로 나를 바라보던 강다니엘의 얼굴이 더 울상이 된다. 뭐라고 작게 중얼거리는데 대충 자기한테 왜 그러냐는 것 같았다. 귀여워서 그런다 하면 뭐라하겠지? 강다니엘은 자기 귀엽단 말 안 좋아하니까. 대답 대신 강다니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킁킁. 냄새 너무 좋아.


“냄새 좋다.”
"지훈 쌤..."
"응."
"이래도 괜찮겠어요?"
"응."
"그냥 대답하지 말고. 진지하게 묻는 거예요."
"나는 안 진지해 보여서 그래?"


목덜미에서 코를 떼고 눈을 바라봤다. 강아지 눈매와 입꼬리가 함께 달싹거린다.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냥 막아버렸다. 사나이 박지훈. 구남친 입 막으려고 손 대신 입술 사용.


밀어낼 거란 예상과 달리 강다니엘은 더 적극적으로 응했다. 뽀뽀까지만 생각했지 키스는 아직 계획에 없었는데? 얼씨구 이젠 자기가 내 입술을, 혀를 잡아먹고 막... 발끝에서부터 열이 올라 정수리에 연기가 뿜어져나올 것 같을 때쯤 강다니엘이 나를 소파에 눕혔다. 숨소리가 거칠어져 있다. 함께 가빠진 내가 다리를 비비적거리자 가차없이 내 두 다리를 벌려냈다. 어딘지 모를 곳이 찌릿거렸다. 정신은 점점 몽롱해지고, 덩달아 우리 둘 눈도 몽롱해지고... 모르겠다. 술은 깨는 것 같은데 대신 다른 게 오르는 느낌이다. 그래도 오늘 많이 마시긴 했으니까... 취한 척 조금만 더 매달리고 싶다. 내 골반을 만지작거리는 강다니엘 목에 팔을 둘렀다.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결국엔 웃고 마는 입꼬리가 너무 좋아서 그대로 다리까지 허리에 감아버렸다. 일단 눈 감자. 나도 이제 모르겠다.




-97일차


잤다. 구남친이랑.


온갖 잡다한 생각 다 떠나서 너무 좋았던 것밖에 기억 안 난다. 그래서 할 말이 없다. 신기하게도 둘이 동시에 눈을 떴다. 둘 다 비몽사몽인 와중에 눈 마주치고선 서로 놀라 소리도 못 지르고 굳었다.


"...자, 잘 잤어요?"


그냥 가만히 있을 것을 내가 먼저 안부나 물었다. 강다니엘은 멋쩍은 얼굴로 네... 대답했다. 분명 새벽까지 흐아앙다니엘하아지훈아 하고 숨소리 가득한 반말이나 나눴던 것 같은데 자고 일어나니 또 내외가 시작됐다. 멍한 정신이 돌아오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당연히 부끄러움이다. 강다니엘도 비슷한 모양인지 덮은 이불을 좀 더 끌어올렸다. 이불 아래 삐죽 튀어나온 발가락이 귀여웠다. 어제 앞뒤 안 가리고 허리 흔들어가며 미친 듯이 쑤셔박던 그 분 어디 가셨지.


"...우리 근데 존댓말... 해야 하나?"


강다니엘이 물었다. 곰곰이 생각했다. 이러다 만약에, 마안약에 또 섹스하는 날이 오면? 다시 존댓말하다가 잘 때만 또 말 까고 다음날되면 다시 존댓말하고 내외하고 그럴 건가? 상상해보니 정말 별로다. 어린이집에서만 그렇게 할까요? 그랬더니 강다니엘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한 이불 속 홀딱 벗고 있을 우리 둘의 몸을 생각하니 불이라도 붙인 듯 얼굴이 화르륵 뜨거워졌다. 이런 건 귀신 같이 잘 캐치하는 강다니엘이 좀전까지 긴장해 굳어 있던 얼굴에 슬며시 웃음을 띄웠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은근하게 웃으면서...


“아 부끄럽다... 진짜 오랜만이다 지훈아. 그치.”
“...응.”
"내일 일요일인데 또 자고 갈래?"
"......"
"자고 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99일 차


주말을 강다니엘 집에서 홀랑 보냈다. 옛날 생각 무지하게 많이 났다. 출근도 같이 하자며 끌어안는 강다니엘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나는 새벽 일찍 나와 집부터 들렀다.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준비하는 내내 강다니엘이 보낸 카톡으로 핸드폰이 시끄러웠다. 내용 확인도 안 했는데 웃음부터 나왔다. 아 큰일이다 이거.


출근했더니 강다니엘이 먼저 와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입 꾹꾹이를 하며 웃음 참으려고 애쓴다. 쌤들 앞에서 나름 숨겨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으나 아주 실패다. 차라리 대놓고 웃는 편이 낫겠다.


"아픈 데는 없어요?"


서류 전해 줄 게 있어 잠깐 고양이반에 갔더니 작게 물어오며 은근히 허리를 터치했다. 이 선생님이 씨씨티비 찍히면 어쩌려고. 아이들이 보지 못하게 눈으로 욕하며 서류를 건네는데 손에 뭔가 거슬리는 게 보인다. 반짝이고 작은 거. 상징과도 같은 것. 뭐야. 뭐예요 이거.


"잠깐만. 설마 커플링...?"
"네. 쌤 가자마자 찾아서 꼈어요. 엄청 오랜만이죠."


아니 저 유물보다 더한 커플링을... 강다니엘의 어여쁜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 순간 열이 확 받았던 나는 그 반지가 묘하게 눈에 익어 설마했고, 설마는 역시 사람을 잡는다. 우리 사귀던 시절 급하게 맞췄던 커플링이다. 사귄 지 이백일인가 삼백일에 내가 선물했던 걸로 기억한다. 난 저거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데. 이때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게 놀랍고 저렇게 순수한 얼굴로 좋아하는 게 놀랍다. 정말 강다니엘스럽다.


"저기 근데요 선생님..."
"네, 지훈 쌤."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요?”


진짜 작게 말할 거니까 한 번에 들으세요.
네.
그... 우리... 그, 사귀는...건가요?
...그거 질문이에요?


정색도 저런 개정색이 없다. 쫄아서 아니 그게 아니고, 하며 곧바로 변명을 시도했다. 나도 안다. 한 번 잠만 자고 -한 번이 아니었지만- 끝낼 사람 아니고 그럴 사이도 아니라는 거. 근데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 그렇다. 이틀을 붙어 있으면서 우리 다시 만나자, 뭐 이런 얘긴 하나도 없었잖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우선 여긴 일터다. 고양이반 아이들이 다가와 선샌님 여기 왜 왔어요? 묻기 시작했다. 반 이름은 고양이인데 선생님이 대형 강아지라 그런가 순한 꼬마 강아지 같은 아이들.


"다니엘 선생님한테 드릴 거 있어서 왔어요 헤헤. 쌤 이따 끝나고 얘기해요."
"퇴근 같이 해요."


말하면서 강다니엘은 아이들 몰래 내 엉덩이를 한 번 주물거렸다. 학교에서도 슥 지나치며 여기저기 터치하던 실력 안 죽었다. 식겁하고 냅다 튀었다. 주말 동안 뺀질나게 들었던 강다니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주변에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커플들을 보며 종종 강다니엘을 떠올려왔다. 그래도 난 한번 끝나면 거기서 완전히 멈추는 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다시 연락을 해본다거나 강다니엘이 한 연락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헤어지면 그땐 처음보다 더 슬플 것 같았다. 음, 그랬지. 그랬는데, 아니 이걸 다시 바꿔 생각해보면... 다시 안 헤어지면 되잖아? 지금 내 정신상태가 아주 이성적이진 못하다는 거 나도 잘 안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뇌를 꺼내서 보여주고 싶다. 온갖 부정적인 생각 다 물리치고 하트 가득한 예쁜 미래만 그려진다면,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나는 강다니엘이 좋은 게 분명하다.


생각은 이쯤에서 멈추기로 한다. 밤새 강다니엘, 아니 다니엘에게 만져진 몸이 여즉 뜨겁다. 


"바찌훈 선생님 얼굴이 빨가세요.”
"지민이가 의산데 선생님 치료해준대요!"


그래 고마워 얘들아. 이거 다 옆 반 선생님 때문이야... 그 선생님이 나를 좋아하고, 나도 그 선생님을 엄청 좋아하는 것 같아. 방금 얼굴 보고 왔는데도 막 또 보고 싶어. 아 또 뭐 핑계 댈 거 없나. 이따 아이들 하원하면 교사실에서 좀 보자고 해야겠다. 사내연애 나이스.





영광스럽게도 녤윙 전공합작으로 참여했던 글입니다!
합작은 처음이라 걱정도 됐는데 다행히 나름 술술...재밌게 썼던 것 같아요 히히 읽는 여러분도 재밌으셨으면 좋겠어요

항상 감사합니다 녤윙개짱

녤윙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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