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시리즈의 제목은 <소설창작론>이다.

꽤나 거창한 제목이지만, 사실 이 시리즈가 소설 창작의 절대적인 방법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 창작에 관한 필자의 이론과 이에 대한 고찰을 다루고자 한다.

물론 <소설창작론>의 포스트가 본고를 봐주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보장한다.

으레 '소설 잘 쓰는 법'이라고 검색해서는 나오지 않을,

독특하고, 전문적이면서도, 소설의 본질을 꿰뚫는 정보를 담을 것이다.


본 시리즈는 웹소설을 주제로 다룬다.

다만 정보의 질과 양에 있어서 '웹소설'이라는 이름만큼 쉬운 내용을 다루는 일은 크게 없겠다.

웹소설이라 함은 소설사적으로도, 인문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해당 포스트는 서론을 담당한다.

<소설창작론> 시리즈에 연재할 포스트들의 내용을 요약하고, 그 필요성을 피력할 용도다.

잦은 수정이 불가피하리라고 생각한다.


도덕감정론

본 시리즈에서 처음 다루게 될 주제는 '애덤 스미스'의 명저 <도덕감정론>에 기반한다.

그의 또 다른 저서 <국부론>은 성서 이래 가장 위대란 책이라고 익히 들어 유명할 것이다. <국부론>이 이기적인 인간에 대한 시장의 원리를 설명한다면, <도덕감정론>은 이기적인 인간이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원리를 설명했다. 애덤 스미스가 평생을 걸쳐 수정해왔고, 애덤 스미스의 '인간'을 전제하기에 그만큼 의미가 깊은 책이다.

이 책을 통해 필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바는 '동류의식', 즉 '동감'이 소설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다.

따라서 주제는 '공감'이 되겠다.

이제 의문을 가지는 이들이 몇 명 나타나리라고 생각한다.

"이 고전이 어느 방면에서, 어떤 원리로 소설을 쓰는 데에 도움이 되는가?"

대답은 간단할 것이다.

소설은 작가나 독자나,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이미 인지하고 있듯이 '허구'다. 이런 '시뮬라크르적 속성'(현실의 모방물)은 소설이 그것으로 하여금 가장 현실적인 것을 지향하게 한다.

그래야만 독자가 소설 속 세계에 몰입할 수 있고,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리얼리스트들 뿐만이 아니다. 모든 소설에 적용되는 절대 불변의 법칙이다.

이렇듯 소설이 진짜 같은 가짜를 쓰는 것이라, 소설의 기법은 보통 '자연스러운 전개', '사실적인 문체'로 발전해왔다.

필자가 <도덕감정론>을 인용해 다루고자 하는 것은 '독자가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하는 방법'(몰입하게 하는 방법)이다. 아마 이 방법은 상술한 것처럼 기술적인 방법은 아니다. 다만 '텍스트'로 독자의 심리를 자극하는 심리학적인 방법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소설가가 인문학을 비롯한 철학, 심리학, 사학 등을 배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을 다루는 학문은, 인물을 다루는 소설과 궤를 같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 공장제 소설의 등장과 '몰입'의 변화(<도덕감정론> 시리즈의 필요성)

산업혁명은 생산능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지만, 제품의 디테일 자체는 다품종 소량 생산 시대가 오기 전까지 전근대에 멈춰있었다. 서양 디자인의 역사에서 아르누보나 우키요에 자포니즘의 영향이 좋은 예시다.

이런 배경에서 각기 제품의 성능보다는 정신적 경험이나 체험, 그러니까 추가적인 효용을 중시하는 사회로 이행하게 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정보혁명에 따른 마케팅 혁명이 있다. 보드리야르가 비판했던 것처럼 현대 사회는 심각할 정도로 제품 자체보다 제품의 브랜드나 광고모델에 에토스(설득력)를 느낀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자.

현재 대중소설 시장을 지배하는 웹소설이라는 것은 소설의 산업혁명이다.

정보혁명에 따라 소설은 통신매체로 창작되고 소비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소설의 상업성은 계승했지만 각기 소설의 가치는 떨어지고 말았다. 상술한 산업혁명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 독자의 변화

웹소설에는 '한 페이지의 무게감이 없다'.

이는 중의적 의미인데,

책을 고르고, 책을 짚고, 책장을 넘기는 사소한 작업들이 더 사소해지면서 소설을 읽는 심적 부담이 줄었다는 의미가 있고, 도서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책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졌다는 의미가 있다.

> 작가의 변화

통신 매체로 소설을 창작하고 유통하면서 작가의 부담이 확연히 줄었다.

더이상 왕의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출판사를 찾지 않아도, 자본이 전혀 없어도 쉽게 소설을 유통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러면서 수많은 소설이 쉽게 창작되었고, 소설 시장은 포화상태에 들었다.

요컨대, 이러한 변화들이 소설의 가치를 낮추었다는 것이다.(희소성이 떨어짐)

이제 독자들은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쉽게 버리고 다른 소설을 읽으러 떠나게 되었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감정의 체험이다. 이는 상고시대부터 변하지 않은 소설의 진리다.

이러한 목적성이 웹소설 시장과 결합하면서 소설은 키워드 + 4드론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 후회, 집착, 피폐, 회귀, 빙의, 환생 등으로 독자가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키워드를 제시하고,

- 높은 수준의 가독성으로 더욱 빠르게 소설에 몰입할 수 있는 내러티브와 당위성을 부여한 것이다.

문제는 후자의 경우에 모순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몰입은 독자가 소설의 허구를 어느정도 진실로 느낄 때 가능한 것인데, 몰입을 만드려면 그만큼 불필요한 서술이나 묘사가 늘어난다. 반드시 서사를 진행하는 데 필요한 내용만 적여야 한다는 가독성의 법칙이 부정되는 것이다.

결국 이에 대해서는 '적절하게'로 넘어가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소설이 '키워드'에서 드러나는 소설의 신박함(흥미나 재미)을 중시한다.


필자는 맹목적으로, 소설에 독특함을 부여하려다가 실패한 작품을 수없이 봐왔다.

<베놈>은 그 소재로 개성을 얻었지만, 개연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영화라는 대작업에 들어가면서 몰입이라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잊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최근 방영되었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은 '회귀'라는 소재로 재미를 만들었지만 마지막 화의 전개로 혹평을 들었다. 마지막화는 시청자의 몰입을 깨부수었는데, '사실은 꿈이었다'라는 전개였다. 여기서 우리는 <구운몽>과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필자가 <도덕감정론> 시리즈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몰입의 법칙이다.

왜 후회, 집착, 피폐, 회귀, 빙의, 환생이 성행하는가?

독자의 몰입이 깨지는 경우에는 무엇이 원인인가?

순식간에 몰입하게 하는 방법은, 가독성이 중시되지만서도 묘사를 길게 쓰는 방법은 없을까?

본 시리즈가 이에 대한 대답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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