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편에는 주의 키워드에 해당하는 장면들이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下 편에 키워드에 해당하는 내용들이 반드시 나오게 됩니다.


※전체 내용 주의: 반복되는 살해, 죽음, 자살, 고어(정말로), 그로테스크, 종교적 소재를 흥미 본위로 이용함

위에 써진 주의 키워드로 이미 충분히 경고해 드렸습니다. 키워드 내에서 한껏 나올 수 있는 불쾌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습니다. 읽기 전에 반드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작성자는 종교에 대한 유감이 전혀 없으며 작중 언급되는 모든 지명, 상황, 현상, 기타 등등의 키워드는 현실의 것과 단 하나의 관련도 없으며 관련이 있다면 우연입니다.






유중혁은 눈을 떴다.

자신의 마지막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뭐, 무너지는 건축물 잔해에 깔려서 뼈가 부러졌거나, 누군가가 휘두르는 칼에 맞아서 생을 마감했겠지. 어쩌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기보단 이미 가지고 있는 죽음의 예시가 너무 많아서 다 엇비슷하게 느껴지는 걸수도 있겠다. 천 번이 넘은 후부터 죽음의 숫자를 세는 건 포기했다. 천 번 정도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죽음의 레파토리도 뻔해진다는 것을 유중혁은 겪어 알았다. 겪어 온 죽음이 다채로우면 다채로울수록, 추가되는 새 죽음의 색채는 더욱 흐려져갔다.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분야에 익숙해지고 무뎌지고 있었다.

잠시 앉아 몇 번 눈을 깜박이자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몸이 수복되는 것을 느끼며 유중혁은 익숙한 광경을 돌아보았다. 천장까지 닿는 원목 책장들과 빼곡이 차 있는 두꺼운 검은 책들. 낡을 대로 낡아서 밟으면 삐걱 소리를 낼 것 같은 마룻바닥. 그리고 어디선가 들리는 책장 넘기는 소리.

의심할 여지 없이 신전이었다.



성 상 파 괴 운 동



죽음에 대해선 진작 익숙해졌다지만 유중혁은 도무지 신전에는 익숙해지질 않았다. 별로 그렇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인가, 매번 죽을 때마다 오는 곳인데도 그랬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으면서도 신이란 것에 투항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천성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진즉에 탓할 대상을 찾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진지하게 입교를 고민했으리라.

그러나 유중혁은 신전에 큰 감흥이 없었다. 거대한 책장에 압도되기보단 그냥, 신전이구나. 그 정도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약간 불쾌한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들어서서 연신 경탄을 내뱉을 만한 풍경인데도 유중혁에게는 그 모든 것이 장엄하기보단 생경했다. 책장을 가득 채운 경전들을 보면, 대체 뭐 그리 할 말이 많길래 저렇게 길고 긴 경전이 필요한지 의아할 뿐이었다. 어디선가 사제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들어도 마음이 평안해진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 것들이 가져다주는 감각을 굳이 얘기하자면 한밤중에 원인 모르게 깨어나 시계 초침소리를 들을 때의 묘한 불안함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유중혁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따라 몇 번 모퉁이를 돌았다. 산처럼 쌓인 책의 미로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이 방법뿐이었다. 아주 작은, 종이가 허공을 젖히며 일어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며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다 보면 신전의 중앙을 찾을 수 있다.

거기에 사제가 있었다.

항상 햇빛을 보지 못하고 실내에 있어서인지 허여멀건한 피부가 도드라진다. 피륙을 여러 폭으로 이어 만든, 제 몸보다 훨씬 큰 천을 둘둘 두르고 앉아 있는 게 때론 우스꽝스러워보일 수 있겠다. 그러나 유중혁은 늘 거기서 어딘지 모를 서늘함을 느꼈다. 천 덩어리에 파묻힌 채 깡마르고 하얀 사지만 뻗어나온 것이 책장을 넘기는 모습은 독특한 취향의 미술가가 일부러 틀리게 빚은 정물 같았다. 사제는 체구가 크지 않았지만 가끔 유중혁은 그가 자신이 퇴치했던 괴물들과 비슷한 결이 있다고 생각했다. 무례한 생각인 걸 알기에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상대가 무례를 끼치지 말아야 하는 동등한 사람으로서 느껴져서 그런 건 아니고, 그 말에 어떻게 반응할지 짐작가지 않아서이다.

유중혁은 사제를 바라보았다. 사제는 이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사제는 항상 유중혁이 그에게 도달할 때마다 경전을 덮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의 대부분이 천으로 덮여 있어 이목구비조차 희미한 고저로만 구분하는데도, 유중혁을 응시하는 시선은 또렷이 느껴졌다. 분명 모퉁이를 돌기 전까지만 해도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유중혁은 발소리를 최대한 죽였는데도. 아마 아무도 없는 신전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인기척에 예민한가 싶었다. 경전에 매우 집중하는 것 같으면서도 항상 유중혁과 마주할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가끔 안쓰럽기도 했다. 유중혁이 보기에도 신전의 사제란 사람에 목마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사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또 왔네.

불투명한 막을 한 꺼풀 뒤집어쓰고 전달되는 목소리였지만, 또렷이 들렸다.

출구를 열어라.

좀 쉬고 가지 그래.

유중혁이 죽음을 천 번 넘게 겪었으니, 사제도 유중혁의 부활을 천 번 넘게 보았다. 가끔 그는 이렇게 쉬어가길 권유했다. 가끔은 달갑기도 하고 어떤 땐 성가시기도 한 요청이다. 이번의 유중혁은 딱히 내키진 않았지만,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사제였고 그의 허락에 따라 나갈 수 있으니 별 도리가 없었다. 유중혁이 거부한다고 해서 사제가 불쾌해하는 건 아니다.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유중혁에게 해를 입힐 것 같지도 않았다. 해를 입힐 능력도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저렇게 쉬었다 가라고 할 때는 입구를 잘 열어주지도 않았으니 말을 듣는 게 편했다.

유중혁은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낡은 나무 바닥이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신전의 중앙, 사제가 앉아있는 의자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위치이다. 이제는 유중혁이 하도 자주 앉아서 그 자리의 색도 변한 느낌이었다. 사제는 일어나서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서 차를 타 온다. 그가 주는 차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달라고 해도 안 줄 때도 있고 원치 않았는데 억지로 권하는 경우도 있어서 곤혹스럽다. 다행히 이번에는 유중혁도 약간 갈증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유중혁은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셨고 사제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용케도 저 커다란 천이, 흘러내리지 않았다. 품이 넉넉한 천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사제의 겨드랑이나 쇄골 같은 것을 훔쳐보면서 유중혁은 생각했다. 말랐다. 이 안에서 뭘 먹고 사는지도 잘 모르겠다. 옷조차 구하지 못하는 건지 일부러 구하지 않는 건지조차 구분되지 않는다. 유중혁이 신경쓸 바는 아니지만, 천 번을 같은 자세로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다보면 궁금하기 마련이었다. 문득 유중혁은 사제도 자신에 대해 그런 의문을 가질지 궁금해졌다.

사제가 유중혁을 바라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속을 읽히는 기분이라 유중혁은 조금 불편해졌다. 아마 이 신전이 천 번의 대면에도 익숙해지지 않은 점은 사제의 저런 면모 탓도 있을 것이다. 신앙심이 깊어 능력이 좋은 것인지 사제는 유중혁의 의중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고 항상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행동했다. 가령, 불쾌해진 유중혁이 잡념을 떨치기 위해 칼이라도 닦으려고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는 이 때에, 기다렸다는 듯 검을 닦을 천을 던져주는 것도 그랬다.

......

새 거야.

유중혁은 응수하지 않았다. 천을 잡아채자마자 느껴지는 감촉이 시사하는 바가 컸다. 적당히 기름이 먹여진 좋은 천이었다. 이런 걸 준비할 여유가 있으면 본인 옷도 좀 사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도 참았다. 신전과 사제는 항상 그래왔듯이 하는 일이다. 유중혁은, 그가 아닌 다른 회귀자가 오더라도 비슷하게 사소한 도움을 주지 않을까 어렴풋이 짐작만 한다. 그럴 것이다. 그게 가능성이 높은 추측이라서 믿는 건 아니고 그런 논리가 유중혁의 속을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그게 사제들의 일일 테니까. 유중혁은 그것으로 생각을 멈추고 그냥 묵묵히 검을 닦기 시작했다.

천이 검을 닦으며 지나갈 때마다 검이 조금씩 반짝반짝해졌다. 유중혁은 검을 닦는 것에 집중하다가 저도 모르게 검을 살짝 기울였다. 잘 닦인 반질반질한 금속 면 위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는 사제의 얼굴이 살짝 기울어지게 비쳤다. 아니나다를까, 여전히 유중혁을 바라보고 있다. 꼭 이런 식이다. 유중혁이 쉬고 있는 동안 사제는 경전을 다시 펼치지도 않고, 손에 책을 쥔 채로 앉아 유중혁에게만 집중한다. 지금껏 유중혁에게 치대는 이가 많았지만 이런 식으로 관심을 보이는 건 오로지 이 사제뿐이라 조금 부담스러웠다. 유중혁은 계속 검을 닦으며 시선을 검에서 돌려 내려놓은 찻잔을 바라보았다. 찻물 위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해쓱한 얼굴의 남자가 비쳤다. 백 번 양보해 말해도 유중혁의 몸은 도저히 야위거나 병들어 보인다 칭할 바가 아니었지만, 부활 직후엔 얼굴에 피로가 드러나긴 했다. 스스로의 꼴을 보니 쉬었다 가야 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죽기 직전을 생각해 보면 부활한 게 기적이었다. 신전에 돌아오면 거짓말같이 몸은 돌아와 있다. 유중혁이 죽으면서 팔다리가 뜯겨도, 눈알이 파내져도, 장기가 없어져도 얼마든지 원래대로의 몸이 돌아온다. 자잘한 손발톱 같은 건 당연지사요 심지어 머리채를 잡히고 머릿가죽이 벗겨졌어도 머리털 하나 상한 곳 없이 모질까지 원래대로 돌아온 걸 확인할 수 있다. 아직 채 회복되지 않은 부분이 있어도, 신전에 가만 앉아 있으면 차오른다. 물론 그동안 사제의 끈덕진 시선을 감내해야 하지만 목숨값 사지값치곤 꽤 싼 대가다. 유중혁은 잠시 손발가락에 힘을 주어 움직여 보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도 반복해 본다. 확실히 매분 매초의 상태가 다르다. 아까는 전신에 조금 뻐근한 느낌이 있었는데 그것도 어느새인가 사라져 있다. 신전과 사제는 명색을 다하는 셈이다. 결국 몸이 다 회복되면 다시 신전 밖으로 나가서, 무언가에 도전하고, 무언가를 해결하고, 또 그러다가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생각하면 축복인지 저주인지 애매하지만. 그런 점 때문에 고맙지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세상에 댓가 없는 선물은 없다. 유중혁이 겪었던 득 중에 여지껏 댓가를 요구하지 않은 건 확실히 사제뿐이었다. 차를 마시며 쉬었다 가라는 요구가 전부라면 확실히 목숨값치곤 싸다. 유중혁은 다 닦은 검을 다시 집어넣고 붉은빛이 도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목 너머로 후끈하고 알싸한 기운이 넘어갔다. 다시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사제는 유중혁이 출구를 향해 나가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붙잡지도 않고 말을 걸지도 않았다. 출입문이 열려 있는 걸 보면 이미 그가 유중혁이 나갈 거라는 걸 알고 열어준 게 뻔했다. 유중혁은 천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사제의 표정을 상상하며 걸음을 옮겼다.

가겠다.

바라보지 않고 중얼거리듯 말했지만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그 많은 만남에도 불구하고 유중혁은 단 한 번도 그와 제대로 통성명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유중혁은 그를 사제라고 부르는 것 외엔 뭐라고 칭해야 할지 몰랐다. 사제는 어쩐지 말해주지 않아도 유중혁의 이름을 알 것 같았지만, 마찬가지로 이름을 입에 올리진 않았다. 다음 번에 오게 되면ㅡ또 죽고 싶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결국 올테니ㅡ이름이라도 물어볼까. 그렇게 생각하던 유중혁은,

문득, 기억해냈다. 경전에 파묻혀 끝없이 긴 책을 읽는 사제는, 그 행동으로 인해 종종 독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번 생에 유중혁이 싸워야 할 마왕은, 지진이었다.

골치아프기도 하지. 유중혁은 몇 번째인가 태풍을 일으킬 날갯짓의 나비를 찾아 꽃밭을 헤치며 개고생을 했던 회차를 떠올렸다. 차라리 드물게 나타나는 형태가 있는 자들이 훨씬 나았다. 연쇄살인마라든가, 흑마술사 같은 것들은 죽이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새 마왕으로 자연재해의 때가 오면 유중혁은 반쯤 포기하고 싶어졌다. 대부분의 마왕이 형태를 가지지 않는 재난에 가까웠으니 유중혁은 대부분의 때에 포기하고 싶었다는 소리다. 바꿔 말하자면, 유중혁은 마음은 그랬더라도 한 번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태풍, 홍수, 지진, 사람들의 악의나 살심, 그것들이 빚어낸 온갖 기현상에 시달리면서도 유중혁은 포기하진 않았다. 그래서 항상 좀 벅찼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도무지 방법이 짐작조차 안 가는 것들을 막기 위해 아등바등했다. 그래도 이번엔 나았다. 유중혁은 이미 어떻게 지진을 없애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포세이돈을 죽이는 것은 이걸로 스물 여섯 번째가 될 것이다.

포세이돈을 찾아 심해의 궁전으로 내려가면서도 유중혁은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이미 아는 길이라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없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도 없었다. 수문장들을 도륙하면서도 말 한 마디 던지지 않았다. 회귀는 낯선 길을 이미 아는 길로 만들어준다. 회귀는 제가 가야 할 길의 비효율을 없애버린다. 유중혁은 더는 그들이 궁금하지 않았고 더는 할 일 외의 시도하지 않았다. 당연히, 포세이돈의 수급을 목에 드는 그 순간까지도 오랜만이라든지 이번이 스물 일곱 번째라느니 하는 말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무너지는 궁전에서 물의 범람에 휩쓸려 익사하던 바로 그 순간에 또다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회차가 완성되었다. 말하자면,

왔네?

딱히 오고 싶지 않았다.

이 사제와 주고받는 말만이 그의 삶에서 유일한 대화였다.

유중혁은 눈썹을 한데 모았다. 사제의 목소리는 당연히 돌아올 사람이 왔다는 듯 태연했다. 심지어 이번엔 이미 따라진 차가 자리 앞에 놓여져 있었다. 이제 마치 무슨 집사람이라도 되는 듯 받아주는군... 유중혁은 잠시 허튼 생각을 하다가 머리를 휘휘 저었다. 신전이 집처럼 느껴지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죽음으로서 가는 곳을 너무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감히 귀살의 패왕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뭔가를 내어줄 인간이 이 사제 말고 있을 리도 없었다. 유중혁은 붉은 빛의 차로 목을 축이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는 죽어 신전에 들어와서 사제와 실없는 몇 마디를 나누고 다시 채비하고 나가는 것도 하나의 루틴처럼 느껴졌다. 유중혁은 이번엔 오랜 시간을 투자하기로 아예 작정을 하고 한쪽 다리를 편다. 좀체로 볼 수 없던 편한 자세가 신기했는지 사제가 몸을 돌려 노골적으로 유중혁 쪽을 향했다. 뭔가 말하려 했는지 입이 우물거리다가 닫힌다. 얼굴을 감싸는 천의 주름이 미세하게 달라지다가 다시 다무는 입술처럼 고정되는 걸, 유중혁은 눈에 새겼다.

천 몇 번 째더라, 여기 온 것이? 유중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이름이 뭐지.

왜 물어볼 마음이 생겼어?

물어보지 않을 이유는?

보통은... 독자라고 부르지.

알고는 있었다. 항상 책을 읽고 있는 사제이기에 독자라고 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호칭이나 이명으로 삼기엔 퍽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건 이름은 아니군.

성씨라도 붙여 줘?

세간에 김씨가 많던가...사제가 작게 중얼거렸다. 별로 재미있는 농담은 아니었다. 김독자라니. 세 글자 이름의 양식은 갖췄건만 그냥 독자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더욱 괴상했다. 유중혁이 얼굴을 찌푸리자 사제가 유중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이름은?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비틀며 허, 웃어 버렸다. 어쩐지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이미 알고 있는 걸 묻는 것 같았다. 아니, 정말로 몰랐나.

대부분은 패왕이라고 부르지.

하지만 그건 이름이 아니잖아.

김독자가 유중혁이 했던 말을 똑같이 되돌려 주었다. 유중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제 이름 석자를 입에 올렸다.

...유중혁이다.

그래, 유중혁.

이미 알고 있던,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온 환상 속의 친구를 부르듯 사제가 유중혁의 이름을 되뇌었다.

통성명을 했다고 하여 그 날 그 둘이 많은 말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중혁은 오며가며 신전에 들를 때마다 독자에게 한 마디를 건넬 여유가 생겼다. 왔네, 라는 삭막한 두 글자가 왔네, 유중혁, 하는 다섯 글자로 늘어난 것은 퍽 느낌이 달랐다. 그 인사를 들을 때마다, 유중혁은 정말로 돌아가야 할 곳에 돌아간 것 같은 안정감을 느꼈다. 부정하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유중혁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혼잡한 세상에서, 매번 주어지는 재앙마다 각기 다른 곳으로 가면서  헤매는 동안, 유중혁이 들르는 장소 중 유일하게 변함이 없는 장소는 신전뿐이었다.

단 하나의 세이브 포인트, 그 안에서 유중혁을 반기는 단 한 명.

유중혁은 수없이 많은 죽음을 반복하면서 다른 이들을 잘 사귀지 않았다. 뼈와 살갗이 으깨진 덩어리에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걸 본 사람들이 질겁을 하기도 하고, 그 단계를 잘 넘어간 지인이더라도 결국 유중혁이 죽음을 반복하는 것 자체에서 오는 정신적 충격을 견디지 못했다. 정작 회귀를 반복하는 유중혁 본인은 아무 생각이 없는데 주변에서 더 난리였다. 차라리 유중혁이 회귀할 때마다 그들이 유중혁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편했다. 그렇게 원했고,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그 소망을 비껴간 것은 아니나다를까 사제였다.

독자는 유중혁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의 반복되는 죽음과 부활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마치 유중혁이 마땅한 외출이라도 나갔다 온 것처럼, 유중혁이 죽어 돌아올 때마다 독자는 평화롭게 인사를 건네고 차를 따랐다. 그것이 오히려 유중혁을 안심하게 만들었다. 유중혁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괴이하고 상식 밖의 일일 때, 그것을 상식인 듯이 대해주는 그 태도가 유중혁을 진정케 했다.


유중혁이 일이 막히기 시작할 때마다 사제에게 조언을 구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천 이백 번짼가, 유중혁은 지진으로 인해 무너진 건물에 깔려 처참한 몰골로 돌아왔다. 슬금슬금 모여든 살점이 다시 뼈에 붙어 근섬유에 붙잡혀 검은 사내의 형상으로 일어서는 걸 바라보며 사제는 경전을 닫았다. 잠시 후 얼굴까지 제대로 수복된 유중혁이 침음성을 내뱉었다. 분명히 포세이돈을 잡았다. 그러나 대지진은 일어났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점점 더 잦아졌다. 유중혁이 기존에 아는 방식대로 마왕을 상대해도 마왕의 강림은 멈추지 않았다. 지진, 태풍, 해일, 연쇄살인, 이공간 통로, 장자들의 죽음, 메뚜기 떼, 피로 물든 강, 흉년, 대규모의 전염병이 연달아 내려왔다. 공략해야 할 구조가 송두리째 바뀌었다. 분명히, 포세이돈을 죽였는데.

...죽였는데.

포세이돈 '만', 죽였잖아.

유중혁이 분에 못 이겨 중얼거리자마자 사제의 맹랑한 목소리가 그 위로 겹쳤다. 유중혁이 사제를 바라보았다. 순간 사제의 목소리가 뚝 끊기고, 천이 끌리면서 사제의 몸뚱어리가 자세를 바꾸었다. 얼굴 부분을 가린 천의 아래쪽이 도톰하게 모여 짓눌렸다. 입술 모양이었다. 말실수였는지 입을 다물었다. 유중혁은 본능적으로 사제가 알고 있는 게 많다는 걸 느꼈다ㅡ예전부터 늘 그랬지만.

그럼?

......

포세이돈 외에, 누구를 더 죽였어야 하지?

유중혁은 성큼성큼 사제가 앉아있는 의자를 향해 걸어갔다. 피할 수도 있었을텐데, 사제는 의자에서 내려오지도 않고 앉은 자세 그대로 있었다. 유중혁이 의자 양쪽 팔걸이를 잡고 상체를 숙여 코앞에서 사제의 얼굴을 내려다볼 때까지 그랬다. 보통의 인간들은 유중혁이 이렇게 나오면 무서워한다. 하지만 천이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여전히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사제가 유중혁을 올려다보느라 고개를 쳐들었다. 팽팽히 잡아당겨진 얼굴 부분의 천을 통해 오뚝한 코가 드러나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천 하나가 전부였으나, 그 천 때문인지 유중혁은 사제의 숨소리 하나조차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천 너머의 존재가 살아있는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유중혁은 천을 벗기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한 번 더 나직이 물었다.

포세이돈을 죽이는 것으로 부족한가?

포세이돈은 지진이 아니니까.

무의미한 대답을 한 후 잠시 침묵하던 사제는 조금 고민하는 듯 하다 말을 이었다.

...포세이돈은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 개연성을 가진 설화지. 네가 그것을 죽이면 지진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고. 네가 확실히 지진의 개연성을 끊었지만, 만약 다른 것들이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 개연성을 가졌다면 마왕은 그것들을 통해서도 강림할 수 있어.

천 밑으로 비죽이 나온 사제의 하얀 손가락들이 검은 경전의 표지를 문질렀다. 드드득, 미세하게 손톱 끝에서 경전의 가죽 표지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라.

모 설화에서는, 땅 속의 거대한 메기가 요동을 칠 때마다 지진이 일어난다고 해. 만약 그 메기까지 죽였다면 지진이라는 마왕이 강림할 가능성은 더 줄어들지. 그것 역시 하나의 개연성이니까.

다른 개연성을 가진 것들도 있나?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 개연성을 가진 것들은 많아.

번거롭군.

당연하지. 너는 실체가 있거나 없는 '현상'과 싸우는 게 아니야. 

유중혁의 손이 천에 감싸져 있는 사제의 얼굴을 잡았다. 얼굴을 쓸곤 턱에서 목까지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목 부분에서 멈춘 손은 조금만 힘을 주면 금방 독자의 멱살을 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유중혁이 그러든말든, 천 위쪽이라 느끼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무시하고 있는 건지, 사제는 아랑곳않고 떠들었다.

네가 싸우는 건 현상을 일으키는 개연성들 그 자체야. 그 개연성을 죽이면 마왕이 강림할 수 없어지니까, 확률을 낮추는 싸움이지.

추상적이군.

관련된 개연성을 없애서 마왕이 실재하게 될 확률만 낮추면 돼. 원래 모든 건 실재하지 않아. 개념과 생각이 모여 실존하게 되니까. 비슷한 말 못 들어 봤어?

관심 없다.

개연성을 부여하는 순간부터 실재하게 되는 거야. 마왕도 그렇고 신도 그렇지.

사제의 말은 신을 모시는 사람치곤 꽤 불손하게 들렸다.

사제가 그런 말 해도 되나?

이 논리 안에서 나는 적극적으로 신에게 개연성을 부여하고 있으니까.

상하관계가 뒤바뀐 듯한 발언에 유중혁은 의심하듯 사제의 눈(이 있을 듯한 위치의 천 부분)을 째려보았다. 유중혁이 신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제 역할에 충실하지 않은 채 말만 휘황한 성직자란 언제든 의심스럽기 마련이었다.

네가 사냥하는 포세이돈이 지진이라는 마왕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것과 같아. 결과를 만들기 위해선 개연성을 넣을 수많은 재료가 필요하고, 가끔 인간은 원인과 결과를 헷갈려 해. 반대로 지진이 빙의하는 형상이, 지진의 화신체가 포세이돈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인간들은 잘 안 하는 생각이지만.

잊었나 본데, 나는 인간이다.

물론 너도 포함해서.

네 말은 마치 너는 인간이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자기가 속한 집단을 완전히 타인처럼 말하는 버릇은 쉽게 생기지 않는다. 유중혁은 독자의 인간론이나 신론에 대해 불쾌감을 가질 만큼 관념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별개로 독자의 태도는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그 걸림이 부정적인지 긍정적인지 판가름하기 이전에 유중혁은 그가 한 말들이 '쓸모가 있다'고 판단했다. 어쨌든 장황한 논리를 제하고 본다면 독자의 말은 분명한 정보들을 전달하고 있었다.

지진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것들은 뭐가 있지?

...맨입으로?

천 밑으로 얄미운 입술이 벌레가 움직이듯 슬금슬금댔다. 유중혁은 짜증이 나서 콱, 천째로 그 밑에 있는 사제의 입술까지 손가락으로 쥐어당겼고 처음으로 사제가 인간같은 소리를 냈다. 아, 아야야, 야, 잠깐만. 유중혁은 그간의 불쾌감을 풀기 위해 몇 초를 더 유지했고 잠시 후에야 사제는 천 위로 제 입술을 손으로 문질렀다.

너무하네.

보상이 필요하면 하겠다. 하지만...

그 뒤의 말은 잇지 않아도 서로가 알 수 있었다. 유중혁은 도대체 신전에만 박혀 있는 이, 인간인지도 모를 사제에게 어떤 보상을 줄 수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유중혁이 잘 할 수 있는 일은 죽이거나 부수거나 파괴하는 것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선물해주거나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은 유중혁의 분야에 없었다. 독자도 그것을 알고는 있었는지, 잠시간의 휴지 후에 대답했다.

우선 네가 궁금해하는 것부터 알려줄게.

보상은?

이미 주고 있어, 넌.

그 말 역시 어딘가에 유중혁이 내막을 알 수 없는 일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유중혁은 더 캐묻지 않았다. 당장 받아야 할 정보가 급했다.





사제가 준 정보는 확실히 유용했다. 유중혁은 각 마왕의 강림을 막기 위해 하는 일의 가짓수를 늘렸고 그 과정에서 사제의 이야기를 많이 써먹었다. 대개 들어맞았다. 유중혁은 전보다 복잡해진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하면서 점차 독자가 했던 말이 무엇인지 깨닫고 있었다. 연쇄살인의 재현을 막으려면 미리 원한 관계를 가진 이들의 마음을 풀어주면 된다. 무기의 보급률을 줄이고 이슥한 골목을 없앤다. 화산의 폭발을 막으려면 밑에 얽매여 있는 불의 정령들을 미리 풀어준다. 인간들에게 땅을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 괴이쩍인 현상들을 막는 것치곤 유중혁은 꽤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대처를 하고 있었다. 재앙이 오기 전에 재앙을 표상하는 증거들을 모조리 미리 잡아 없애버린다. 그래서 유중혁은 몇 번이고 담벼락에서 우는 흰 여우의 목을 비틀고, 제물을 바치고, 지하세계에 묶인 장난의 신을 죽이고, 땅 속에서 몸을 비트는 거대한 메기를 작살에 꿰었다. 강림할 마왕이 강력할수록 거기에 개연성을 보탤 만한 존재들이 차고 넘쳤다. 유중혁은 그것들을 차분히 하나하나 박살내가며 마왕의 강림을 막았다. 하나라도 놓치면 마왕은 놓치지 않고 그 상징과 설화들을 통해 개연성을 얻어 내려왔다.

유중혁은 차츰 사제가 말한, '오히려 그 신들이야말로 마왕(현상)의 화신체에 가깝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때로 아주 강력한 마왕은 여러 신에게 동시에 빙의하여 내려왔다. 말인즉슨 모든 설화와 사건에서 동시에 개연성을 얻어 하나로 자신을 충족시켰다. 유중혁은 금방 그 구조를 습득하곤 마왕이 땅에 발을 딛을 받침대 하나하나를 철저히 파괴했다. 덕분에 패왕에게 붙은 귀살의 호칭은 떨어지지 않았다.

유중혁은 정보를 얻는다는 명목으로 점점 더 신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차피 신전에 돌아가게 되는 때는 죽고 난 직후이므로 쉬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유중혁은 사제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으려고 애썼지만, 사제는 매번 답해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지 않을 땐 유중혁은 정보를 포기하는 대신 다른 말들을 던졌다. 사제는 그 말에는 가끔 답해주었다. 그래서 유중혁은 독자가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신전에 머물러 있었고 단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상에 대한 모든 것을 이미 읽어서 아주 잘 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 아냐고 물으니 경전에 모든 것이 이미 쓰여 있다고, 경전을 읽음으로써 세상의 모든 구석구석을 속속들이 볼 수 있다고 했다. 유중혁은 코웃음을 쳤지만 속내는 살짝 복잡해졌다.

유중혁과 사제는 완전히 상황이 달랐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 둘은 결이 같았다. 유중혁은 마왕의 강림을 막기 위해 모든 삶을 세상에 바치고 있었고, 사제는 신을 증거하기 위해 자기 삶을 신전 안에 구겨박고 있었다. 발산과 수렴은 다를 바가 없다. 거울상처럼 좌우가 반대가 되었지만 모양은 똑같은 것이 유중혁의 삶까지 자조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적어도 유중혁은, 세상에 뛰어들어서 무언가를 했다. 사제가 하는 일이라곤 오로지 경전을 읽는 것뿐이었다. 아니면 차를 따르거나, 가끔 유중혁에게 무엇을 주거나.

네가 읽은 것 중 하나라도 직접 눈으로 보거나 만져 본 적은 있나?

읽는 게 곧 경험이야. 오히려 읽은 것이 경험한 것보다 더 진짜일 수도 있지.

한결같이 허울 좋은 소리뿐이다.

아니, 그냥 읽어서 아는 것과 경험해서 아는 건 다르다.

어떻게 확신해?

그렇게 묻더니 문득, 사제는 손톱으로 경전 표면을 미세하게 긁어댔다. 신경질적인 움직임이었다. 책등을 손가락으로 쓸면서 책의 모서리 끝을 만지작거렸다. 새하얀 손가락으로 표지 장도 살짝 집어들었다 놓았다 하는 걸로 봐서 다시 경전을 읽고 싶어 안달이 나는 모양이었다. 지금껏 유중혁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은 단 한 번도 경전을 편 적이 없는 그였다. 그러나 지금은 필사적으로 경전을 열어 읽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유중혁은 사제가 앉은 의자로 다가가 그의 손에 깍지를 껴고 떼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하지?

음......

독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유중혁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다. 유중혁은 놓지 않았다.

지금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을 알 수 없어서.

그 책을 읽으면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을 알 수 있기라도 하나?

비슷해.

말을 하면서도 독자는 계속 손바닥을 뒤로 하여 손을 빼내려고 했고, 유중혁은 재차 붙잡았다. 둘은 마치 손으로 가벼운 실랑이를 하듯 잡아당기고 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역시 힘이나 끈기에서 유중혁이 압도적인 우위였다. 잠시 후 여전히 붙잡힌 채 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포기한 사제가 팔에 힘을 풀었다. 유중혁은 빈정거렸다.

아주 대단한 책이군.

내가 좋아해.

......

유중혁은 독자의 품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그 검은 책은 그대로 있었다. 유중혁은 잠시 책을 노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읽은 것이 경험하는 것보다 더 진짜같다고 했지.

응.

변함없는 대답이었다. 천에 가로막힌 너머의 얼굴에서 들리는 소리는 오기를 북돋았다. 눈썹뼈와 코, 턱끝에 걸린 천이 떨어지는 유려한 곡선이 희미하게나마 독자의 이목구비를 짐작케 했다. 유중혁은 다른 한 손으로 독자의 뒤통수를 휘감아 잡아 당겼다. 약간 성긴 뒤쪽 천의 씨실과 날실 밑으로 동그란 뒤통수가 느껴졌다. 사제의 온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유중혁은 그대로 천에 휩싸인 얼굴 위로 입을 맞췄다. 입가를 감싼 천이 빠르게 젖어들어가며 너머에 있는 입술의 형태가 느껴졌다. 숨이 딸리는지 타액에 젖은 천이 마치 숨을 쉬는 심장의 판막처럼 펄떡였다. 잠시 후, 유중혁이 입을 떼자 천 사이로 살짝 드러난 흰 목덜미가 붉어진 게 보였다.

이쪽이 더 가짜같은가?

유중혁이 웃으며 날카롭게 되물었다. 사제는 잠시 숨을 몰아쉬다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

그것은 인내심 강한 용사의 이성이 끊어지게 만들었다. 유중혁은 이를 아드득 갈곤, 중얼거렸다.

그럼 한 번 더 해.


그리고 신전이 다시 침묵에 잠겼다.




中 또는 下편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어디에 한눈을 팔아도 글쓰기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문의는 side_n_table@naver.com

밋뜨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