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곡 - https://youtu.be/CGvIzFRcRMA 





노란빛 햇살이 창문을 두드리는,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오후였다. 사진관을 지나치는 행인들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역시나 사진을 찍으러 올 손님은 없었다. 눈길 한 번도 없이 제 갈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매정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 멀리 아무도 앉지 않은 의자를 바라보고만 있는 카메라 앞에 섰다. 투명해야 했던 렌즈에는 뽀얀 먼지만이 가득했다. 작은 한숨과 함께 대충 겉옷으로 먼지를 닦아내었다. 그때 였다. 작은 종이 유리문과 부딪혀 청아한 소리와 함께 남빛의 정장을 쫙 빼입은 노 신사분이 들어오셨다. 나는 렌즈 닦는 것을 멈추고 신사분을 맞이했다. 






"좋은 오후입니다, 신사분"






나의 가벼운 인사에 남자는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셨다. 곱게 땋은 감색의 머리카락에는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듯, 입가를 따라 난 주름은 청년과도 같이 밝게 빛나는 금빛의 눈과 큰 대조를 주었다. 건사진 남자의 외형과는 반대로, 그의 눈 한쪽은 화상을 입은 듯한 그을린 상처가 나 있었다. 남자는 팔 한쪽의 걸어둔 코트를 구석진 곳에 있는 옷걸이게 걸으셨다. 나는 다급하게 남자의 코트를 받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나의 호의에 남자는 점잖은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나는 조심스럽게 남자의 코트를 옷걸이에 걸었다. 






"사진을 한 장 찍을까 하는데…."






남자는 텅 비어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남자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디에 쓰시려고요?"




남자는 카메라 앞에 앉았다. 남자는 아까와 같은 인자한 미소를 띈 채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그저…. 사진 하나 남겨둘까 해서요" 




기억을 위해서 남기는 사진이라, 


드문 경우였다. 특히나 이렇게 실력 없는 사진사와 사진사만큼 볼품없는 사진관에서 추억을 남기다니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뿌연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았다. 어쩌거나 누군가에 소중한 기억을 남겨준다는 것은 귀중한 일이었다. 나는 책상에서 고운 수건을 꺼내 렌즈를 조심스럽게 닦았다.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남자는 개의치 말고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남자와 나의 사이에는 조용한 정적이 가득했다. 그런 정적을 깬 건 남자였다. 






"이 사진관을 예전부터 오고 싶었는데, 이제서야 오게 되네요"






"예? 아…."




이런 누추한 사진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 나는 자연스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별 볼일 없는 사진관을 오고 싶으셨다니, 어떤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제 부인이 좋아했습니다." 






"부인분 취향이 독특하시네요."


나의 작은 농담에 남자는 나지막하게 웃음소리를 내보이셨다. 






"맞아요, 저도 이따금 이해가 안될 때도 많답니다."




다시금 투명한 빛을 뽐내는 렌즈를 카메라에 끼워 넣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신호에 카메라 앞에 남자는 긴장한 듯 몸을 뻣뻣하게 세우셨다. 카메라 렌즈로 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숙성한 적포도주와 같이 깊이 있는 색깔을 띤 넥타이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어찌 보면 너무나도 짙은 적색에 이질감을 들게 했지만, 또한 그마저 오묘하게도 조화를 이루었다. 






"넥타이가 참 멋지십니다, 신사분"




남자는 붉은빛의 넥타이를 매만졌다. 매우 소중히 아끼는 물건임을 알려주듯 넥타이를 고쳐매는 남자의 손길이 섬세했다. 






"그렇죠? 제 부인이 골라준 거에요"




부인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지, 남자의 입가엔 미소가 스르륵 번졌다. 오랜 세월을 함께했음에도 애정이 짙은 것은 힘든 일인데, 여간 보통 사랑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시간에 무르익은 남자의 얼굴에 핀 주름처럼 사랑이 그만큼 무르익은 것이겠지, 나는 카메라를 의자 중앙선에 맞추었다. 






"금술이 좋으신가 봅니다, 부인 얘기만 해도 이렇게 싱글벙글하시니"








"하하…. 제가 부인을 많이 사랑해서요."






거짓이 아니라는 듯 남자는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과 같은 얼굴로 수줍게 웃음을 흘렸다. 아직도 저런 얼굴을 지을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와 함께 그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져 왔다. 그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그는 어떤 사랑을 해 왔을까, 무엇이 그를 깊은 사랑에 빠지게 한 것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넌지시 남자에게 물었다. 










"부인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습니까?"




나의 질문에 남자는 잠시 고민을 하는 듯 눈을 감았다. 잠깐의 정적이 공간을 에워쌓다. 나는 괜히 선을 넘어버린 게 아닌지 목울대를 타고 오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남자의 긍정적인 대답이 들려왔고,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특별한 것 없는 오후, 


한 남자의 깊디깊은 사랑 이야기가 이 보잘것없는 사진관을 감쌌다.


















싱그러운 꽃향기가 코끝을 찔러왔다. 


케인은 인상을 구긴 채 빨갛게 물든 동백꽃을 포장하고 있었다. 동백꽃,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며 수줍게 건네주기에는 안성맞춤인 꽃이었다. 동백꽃 색과 비슷한 끈으로 리본을 묶어달라고 쓰여 있는 예약서를 바라보며 케인은 책상 서랍에서 붉은 포장끈을 꺼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손님과 약속한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케인은 급히 잘 모인 꽃 주위를 끝으로 감기 시작했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케인은 동백꽃에 시선을 둔 채 소리로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 세요"








"꽃은 아직인가요?"




낮지만, 곱게 짜인 목소리


단번에 귀를 사로잡는 목소리에 케인은 고개를 들어 손님을 바라보았다. 저기 저 멀리 조그맣게 피어 있는 백합과같이 하얗고 제법 큰 저보다 한 뼘은 더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케인은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눈은 제 손에 들려진 동백꽃보다 더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 속 밤하늘처럼 어두운 동공이 케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기요?"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케인에 남자는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케인을 다시금 불렀다.




"아! 네…. 곧 끝나요!"




케인은 아득해진 정신을 다시 되잡고 포장을 완성하는 데 집중했다. 아니 집중하려고 했다. 저 멀리서 팔짱을 낀 채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남자에 케인의 머릿속이 남자의 피부처럼 새하얗게 변하였다. 긴 끈을 자르는 가위가 손의 진동에 미친 듯이 움직였다. 






"꽃, 이쁘네요."






"아…. 하하! 동백꽃 중에서 가장 이쁜 아이로 골랐어요."






남자는 한껏 올라가 있던 눈꼬리를 늘어뜨린 채 환하게 웃었다. 케인은 또다시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법 아니, 매우 매력적인 사람이다. 케인은 아까부터 이상하게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 조마조마했다. 






"프러포즈 하실 건가 봐요?"




케인은 자꾸만 간질거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킨 채 남자에게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네" 




남자는 기쁜지 수줍게 웃었다. 살짝 붉어진 볼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생각만 해도 저런 표정이 나오다니, 왠지 이 꽃의 주인이 부러워졌다. 






"애인 분도 좋아하실 거예요"




케인은 마지막으로 꽃다발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흐트러진 부분들을 정리했다. 매력적인 사람의 프러포즈를 장식할만한 아름다운 꽃다발이었다. 선명하게 붉게 피어난 동백꽃이 남자와 잘 어울렸다. 케인은 살짝 씁쓸해진 마음을 담은 채 남자에게 꽃다발을 전했다. 짧게나마 스친 손끝에 다시 간질거리는 마음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남자는 저의 눈동자 색과 똑 닮은 동백꽃을 손에 쥔 채 가게 문을 열었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짙은 동백꽃 향기만이 남아있었다. 잠깐의 간질거림이 허망스럽게 그의 흔적은 사라졌다. 케인은 흰 피부의 사내가 서 있었던, 지금은 텅 빈 자리만 바라보았다. 케인은 다시 일상으로 제 집중했다. 평소와 같이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여러 가지 빛깔의 꽃들을 살폈다. 










그렇게 한순간의 얕은 감정으로 끝날 것 같은 인연은 


누구의 장난처럼 머지않은 시간 후에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저기요?"






평소와 다를 것 없던, 퇴근길 


케인은 이어폰 속 잔잔한 발라드 노래를 귀에 담은 채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꽤 늦은 시간인 만큼 거리에는 저와 같이 퇴근하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조용했다. 케인 또한 그들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니 재촉하려고 했다. 저 멀리 불 꺼진 가로등 아래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이기 전까진 말이다. 






케인은 조심스럽게 가로등 아래 기대다시피 누워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조금만 가까이 가자 술 냄새가 케인의 코를 찔렀다. 케인은 인상을 구긴 채 남자의 어깨를 제 손으로 가볍게 쳤다. 남자는 잠깐 몸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푹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한껏 올린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잔머리가 내려와 있었고, 흰 피부에는 술기운에 올라온 홍조로 붉게 물들여져 있었다. 동백꽃과 닮은 붉은 눈을 눈물에 젖어 더욱 짙은 색으로 물들여 있었다. 




그 남자였다.




"손님…?"




케인의 말에 남자는 케인을 알아보는 듯 젖은 눈을 더욱 적셔왔다. 남자의 붉은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남자의 어깨가 작게 떨려왔다. 케인은 다소 당황스러움에 남자의 옆에 있는 제 손을 어찌할지 몰라 했다. 프러포즈를 할 생각에 한껏 들 떠 있고,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던 남자가 이제는 한껏 슬픔에 젖어 누구보다 불행한 남자가 되어있다. 케인은 어색하게 남자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자 남자는 케인의 품에 안겨 어깨에 제 고개를 파묻었다. 갑작스러운 남자의 행동에 케인은 놀랐지만, 곧 귀로 들려오는 남자의 흐늑이는 소리에 케인은 그저 남은 팔로 남자의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남자는 한참이나 케인의 품 안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제 어깨가 축축해졌음이 느껴졌을 때 남자는 케인의 품에서 벗어났다. 얼마나 울었는지 이제 코마저 새빨개졌었다. 그 모습이 조금 웃기게 보여, 케인은 피식 웃었다.






"지금…. 우는 사람 앞에서 웃는 거에요?"




남자는 한껏 잠긴 목소리로 케인을 노려보았다. 퉁퉁 부은 눈으로 저를 매섭게 노려보니, 오히려 귀엽게만 느껴졌다. 케인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은 채, 남자의 눈가를 매만졌다. 






"미안해요, 이제는 괜찮아요?"






따뜻한 케인의 체온에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손길을 받았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였다. 






"술은 왜 이렇게 많이 마신 거에요?"








"슬퍼서요…."




남자는 그제야 제 몸에서 술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았는지 고개를 돌린 채 케인을 제 팔로 밀어냈다. 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퉁퉁 부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남자를 향해 제 손을 뻗었다. 






"가서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을래요? 술 좀 깰 겸" 














남자는 순순히 케인을 따라 편의점에 왔다. 남자는 멍하니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바라보았다. 케인은 그런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오랜 고민을 하는지 미간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고작 아이스크림에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다니, 겉보기와는 다르게 꽤 귀여운 사람이었다. 






"먹고 싶은 거로 골라요"




남자는 나를 쓱 보더니 이내 약간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냉장고 구석에 있는 비싼 브랜드 아이스크림을 손으로 톡톡 가리켰다.   






"그거 먹고 싶어요? 골라요 그럼"






다소 심심한 내 반응에 남자는 재미없다는 입을 삐죽거리며 내가 어릴 적 먹던 초코아이스크림을 집어 들었다. 






"그거 엄청나게 달던데, 괜찮아요?"






"별로 안 달아요"






남자는 나를 지나쳐 계산대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나는 급하게 아무거나 골라 남자를 따라갔다. 남자는 내 손에 쥐어진 아이스크림을 계산대로 올려놓더니 이내 제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었다. 나는 카드를 쥔 남자의 손을 저지했다. 






"제가 살게요"




남자는 나를 힐끗 보더니 이내 기가 찬다는 듯 작게 탄성을 뱉었다. 




"이런 건 형이 사야 하는 거예요"




남자는 다른 손으로 카드를 쥔 손을 잡은 케인의 손을 떼어낸 뒤 직원분께 건네주었다. 케인은 물음표 가득한 얼굴로 진을 바라보았다. 동갑 아니 무리해도 자신과 2살 정도 차이가 나 보이는 사람이 형이라고 하다니 케인은 계산대 위에 놓인 아이스크림을 양손에 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이 차이도 별로 안나면서 뭔 형이에요"




남자는 케인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주며 말했다. 




"뭐래, 너보다 나이 훨씬 많거든요."




남자는 술기운에 한껏 붉어진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제 입에 물었다. 케인 또한 남자를 따라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달달한 맛이 입안을 감쌌다. 




"몇 살인데요"






"30살이요"




케인은 순간 놀라 손에 들려있던 아이스크림을 바닥으로 떨어뜨릴 뻔했다. 케인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거의…. 삼촌인데요…?"






"삼촌이라니, 형이라고 해줘요."






"이름도 모르면서 뭔 형이에요…."






"난 진이에요, 카다 진"




갑작스러운 남자의 소개에 케인은 그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남자의 등 뒤로 도시를 비추는 여러 가지 빛깔의 조명들이 어우러져 한편의 화폭이 가득 찬 캔버스로 보였다. 남자 아니, 진의 동백꽃과 같이 깊고도, 진한 붉은빛의 눈이 빛과 함께 은은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의 눈물로 살짝 붉어진 눈가와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는 그날에 느꼈던 간질거림이 다시금 올라오게 했다. 케인은 그 짧은 찰나에 심장이 미친 듯이 띄어왔다. 귀에 울리는 듯한 큰 심장박동처럼, 얼굴 또한 달가워졌음을 느꼈다. 분명 술은 마신 건 저 남자인데 내가 뭐에 취한 것 같았다. 






"..괜찮아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케인에 진은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 저…. 저는 케인이에요, 시이다 케인"






"케인…. 시이다 케인…."




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케인의 이름을 제 입에 담았다. 차가운 밤공기가 뜨거워진 케인의 볼을 스쳤다.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그럼"




진은 케인을 바라보며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환하게 웃었다. 원래 이렇게 웃음이 많은 사람인 건지, 아니면 술 때문인지 케인은 미친 듯이 움직이는 제 심장 소리가 들릴까 걱정스러웠다. 






"이제 집 가자, 일어나 형"




케인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은 그런 케인의 말에도 멀뚱멀뚱 케인을 올려다보았다. 






"안 갈 거야?"






"가기 귀찮아…."






"그래도 집은 가야지…. 일어나 어서"




진은 도통 뭔 생각인지 그저 다 먹은 아이스크림 바로 바닥에 낙서하고 있었다. 케인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꽤 늦은 시간이었다. 케인은 진을 일으켜 세웠다. 




"택시 태워줄게, 가자"






"응…."






케인은 진 팔을 제 어깨에 올린 채 택시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작게 흥얼거리는 진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둘은 택시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얼마 안 가 택시가 들어왔고 케인은 진을 뒷좌석에 태웠다.




"형 주소, 주소 말해줘"








" OO구…. OO 아파트.."






"부탁드리겠습니다, 기사님"






"잠만…. 잠만 케인"




케인이 진을 안전하게 택시로 태운 뒤 문을 닫으려고 하는 순간, 진이 케인을 불렀다. 케인을 바라보는 진의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했다. 




"왜?"




진은 제 정장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이내 제 핸드폰을 꺼내 케인에게 내밀었다. 






"너 전화번호 알려줘"






"어? 어…."




어서 알려달라는 듯 말없이 핸드폰만 쭉 내밀고 있는 진에 케인은 얼떨결에 제 전화번호를 키패드로 눌러버리고 말았다. 진은 그런 케인의 행동이 마음에 드는지 싱긋 웃고는 키패드에 눌린 케인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나중에 밥 살께, 고마워 동생" 








진은 술로 인해 한껏 꼬인 발음으로 케인과 다음을 약속했다. 케인은 고개를 끄덕이곤 인사와 함께 정말로 진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 택시가 엔진소리와 함께 떠났을 때도 케인은 멍하니 택시를 바라보았다. 제 몸에서 알싸한 술 냄새와 진의 달달한 체향이 느껴졌다. 차가운 밤공기가 케인의 볼을 스쳤고 그제야 케인은 꽤 늦은 시간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케인은 발걸음을 돌렸다. 진의 노랫소리와 함께 걸었던 택시 정류장을 지나 진과 통성명을 하게 된 상가의 거리들, 그리고 편의점을 지나 진과 만난 골목길 속 등 꺼진 가로등을 지났다. 왠지 모르게 동백꽃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첫날의 떨림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우리의 인연은 깊고도 길게 이어졌다. 




가로등에서 진을 만나고 그다음 날 진에게 연락이 왔고, 같이 저녁 식사를 한 이후로 꾸준한 만남까지 이어졌다. 그저 친한 형 동생에서 어느 순간부터 손끝만 스쳐도 심장이 마구 띄게 되었고, 만나는 날에 거울 앞에 서게 되는 시간이 늘어났고, 서로의 행동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가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래,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케인"






그날은 케인의 집에 진이 놀러 온 날이었다. 


진이 좋아하는 만둣국을 먹고, 진은 소파에 앉은 채 케인은 그런 진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 TV 소리를 배경 삼아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응?"




진은 케인의 길게 자란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이상하게도 진의 차가운 체온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우리 결혼할까?"








하마터면, 소파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케인은 놀란 마음을 부여잡고 벌떡 일어나 진을 바라보았다. 거짓이 아니라는 듯 진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누가 봐도 놀란 얼굴에 누워서 제멋대로 뻗쳐 있는 머리를 한 케인의 모습이 제법 우스꽝스러워 진은 피식 웃었다. 




"장난 아니야, 진짜로"






"아니…. 아니…. 그…. 그게.."




이거 맞는 거야?




케인의 머릿속에는 온갖 물음표가 가득했다. 어릴 적에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보다도 더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하필 이도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라 주니, 케인은 더 고장이 나 버렸다.






"싫어?"






"아…. 아니!! 아니 절대로 아니지 근데…."






"근데?"




아까부터 계속 놀라는 얼굴만 한 채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는 케인에 살짝 마음이 상한 진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케인을 바라보았다. 나름대로 오랜 시간 동안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서 나온 말인데, 이렇게 반응이 애매모호하니, 진의 기분이 상하기엔 충분했다. 




다행히도, 오랜 연애로 이런 진의 마음도 알아차리게 된 케인은 급히 떠나간 정신들을 다시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너무 갑작스럽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건 그렇고…. 내가 나중에 멋지게 하려고 했단 말이야…."








"뭐 남들처럼 프러포즈 받고 결혼해야 하나? 나는 이렇게 단순하게 결혼하는 것도 좋은데"






"그…. 그래도. 난 형에게 멋진 프러포즈 해주고 싶었단 말이야.."




진은 얼빠진 얼굴을 하는 케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동백꽃 향기가 케인의 코끝을 두드렸다. 




"나중에 해주면 되지"




진은 입꼬리를 올린 채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케인도 그런 진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어느 평범한 주말 오후, 두 연인은 미래를 약속하는 입맞춤을 했다. 따뜻한 정오의 햇살이 둘을 비춰주었다. 햇볕만큼이나 따뜻한 서로의 온도가 서로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깊고 진한 사랑이 둘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케인은 붉게 달아오른 진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날의 진의 얼굴과 똑같은 모습에 케인은 괜스레 웃음이 났다.




"뭐야, 왜 웃어"






"그냥…. 처음 형 만났을 때 생각나서"




케인은 조심스럽게 진의 볼을 잡은 채 다시 입을 맞추었다. 진은 자연스레 케인의 목에 제 팔을 둘렀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면서 내 삶이 마법처럼 뒤바뀌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매일 아침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입맞춤을 할 수 있고 하루의 마무리를 그 사람의 품 안에서 할 수 있는 기쁨이 나에게 다가왔었다. 진실한 애정에서 온 기쁨은 케인에게 안정감을 주었고 케인은 그런 안정감 속에서 진과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단조로우면서도, 평온한 하루


케인은 그런 하루를 원하며, 살아왔다. 








케인은 일상을 지키고 싶었다. 






유독 공기가 차가워진 밤이었다. 진의 권유로 둘은 밤 드라이브를 떠나고 있었다. 차 안에는 진의 취향인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들려왔고 케인은 조수석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고 그런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진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드문드문 도로에 세워진 가로등이 진의 얼굴을 비추었다. 케인은 여전히 아름다운 제 배우자를 바라보았다. 진 또한 그런 케인을 바라보았다. 




낭만에 가득 찬 그들 사이로, 


불청객이 나타난 것은 불과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트럭 운전자가 신혼부부가 탄 차로 돌진하고 있었다. 


환한 트럭의 헤드 라이터가 둘의 눈을 덮쳐왔다. 




진은 급하게 핸들을 잡았고 


트럭은 그대로 둘의 낭만을 부서트렸다. 








케인은 일상을 지키고 싶었다. 










교통사고였다.


매일 아침 뉴스에 스치듯 지나갈 것 같은 그런 사고였다. 








"부인께서…. 급하게 핸들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셔서…. 환자분은 폭발로 인한 화상으로…."






지독한 악몽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나를 둘러싼 모든 이야기가 거짓말 같았다. 아니, 거짓이었으면 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온몸에 남아있던 모든 감각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왼쪽 눈에서 올라오는 시큰한 통증만이 나를 채웠다. 






"부인께서는…. 안타깝게도…."




매일 밤 진을 안아 주었던 내 왼팔에는 붕대만이 남아있었다. 






"죄송합니다."




내 사랑,


내 아내,


나의 반려,







진이 보고 싶다.








































사진 속에 진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늘 챙겨입던 흰 셔츠에 단정하게 올린 머리카락, 그리고 동백꽃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




아름다운 진의 앞에서 저의 모습은 그저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분명, 진이 머리카락 풀고 다니지 말라고 했는데


아, 넥타이 매는 법 진에게 제대로 배울걸


구겨진 셔츠 입는 거 진이 진짜 싫어하는데 


화상 흉터 가릴걸, 이거 보면 진이 속상해할 텐데








"케인아…."




초점 없는 눈으로 사진 속 진을 응시하고 있는 케인의 옆으로 그의 친한 형인 제드가 조용히 다가왔다. 케인의 모습은 가히 엉망이었다. 하나뿐인 제 동생의 그런 모습을 말없이 지켜볼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제드는 눈물을 꾹 삼켰다. 그저 고개만 숙인 채 케인의 등을 토닥여 줄 뿐이었다. 








케인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비통에 찬 식장을 벗어났다. 


더욱 쌀쌀해진 밤의 공기가 케인을 반겼다. 






케인은 무기력하게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털썩 앉았다. 


밤바람은 애석하게 계속 불어왔다. 


시간은 어느덧 깊은 밤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리에 사람들을 어제처럼, 오늘처럼 일상을 살아갔다.                                                                  

그날처럼, 시간을 흘러갔고                                                                                                        그날처럼, 도시 속 사람들은 바빴고                                                                                            그날처럼, 밤공기는 차가웠다.             






세상은 무심하게도 흘러가고 있었다.                                                                                          내 세상만이 멈출 뿐이었다.                                                                                                    






한 송이의 소중히 피어온 동백꽃과 같은 내 사랑은                                                                        그 흔한 인사도 없이 시들어지고 말았다. 






그래,

사랑은 비극이었다.
























기나긴 이야기를 끝마친 신사분의 표정은 덤덤하셨다.




나는 그저 멍하니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살아가다 보니."












"어느덧 제 아내와 이별한 지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습니다."


남자는 벽에 걸린 오래된 달력을 바라보았다. 








"이제 저는 머리도 혼자 잘 묶고, 넥타이도 잘 매고, 잘 다려진 셔츠를 입고 다녀요."






"그러나, 이 흉터만큼은…. 도저히 숨겨지지 않네요."




남자는 제 얼굴에 새겨진 흉터 자국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래도, 제 아내 아니, 진에게 잘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사진관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진은 아내에게 보내는 사진…. 이네요"








"그렇죠"




남자는 눈꼬리를 살며시 접으시며 인자하게 웃어 보이셨다.


나 또한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찍겠습니다. 긴장은 다 풀리셨죠?"




나는 깔끔하게 닦여진 카메라 렌즈를 카메라에 다시 끼웠다. 






"카메라 봐주시고요, 찍습니다. 하나, 둘"






남자는 아내와 처음 만난, 

꽃집에서 진을 만난 케인처럼 환하게 웃으셨다. 



처음, 제 사랑을 마주한 

그날의 청년 처럼.






찰칵- 






카메라의 셔터음 소리가 조용한 사진관에 울려 퍼졌다.











우연히 유튜브를 보다가 인상 깊은 한 인터뷰를 보아서 케인진으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소라 선생님의 바람이 분다 라는 노래를 참 좋아하는데 이 노래와 잘 어울리는 글을 쓴 것 같아 기분이 뿌듯합니다! 


항상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인사를 드리며, 감기 조심하세요!

@Jhinsexy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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