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이지







이 이야기는 언제까지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허구적 이야기입니다. 실제 역사적 배경, 언어와 많이 다를 수 있다는 점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항심

1. 늘 지니고 있는 떳떳한 마음

2. 맞서려는 마음


















"으음, 너무 어려워요."


"일본어는 처음 접할 땐 쉬운데 갈수록 어려워져요. 그래도 잘 하고 있어요, 용선 아가씨는."


"그랬으면 좋겠어요."


"푸흐, 잠시 조금 쉴까요?"




별이가 웃자 용선도 따라 웃었다. 약 1달 동안 가르쳐본 용선의 실력은 그리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편했다. 너무 잘 하면 자기들이 정보를 다 얻기도 전에 수업이 종료될 것이었고, 너무 못하면 별이가 답답해할 것이 분명하기에 적당히, 딱 용선 정도가 맞았다.




"음... 배고프지 않나요?"


"배고프세요?"


"조금... 아침을 못 먹었거든요."


"그러면 점심 먹을까요? 저도 마침 배고팠던 참이거든요."




오늘도 점심을 거른 별이는 용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1주일 되니 어느 정도 어색함이 풀린 것 같았다. 용선도 저에게 하던 낯가림을 조금씩 걷어내는 중 같았다. 작은 마찰 없이 순조롭게 진행하니 여간 다행스러운 게 아니었다. 혜진도 조금씩 자리를 잡고 있고 휘인도 주점 일을 무난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별이가 웃으며 앞에 있던 차를 마셨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차 맛이 좋다.


용선이 어린 하녀에게 무어라 일컫자 고개를 끄덕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간단한 식사가 준비되어 용선의 방 앞으로 왔다. 아가씨, 여기서 드실 건가요? 응, 여기서 먹을게. 용선과 별이가 있던 탁자 앞으로 상이 차려졌다.




"가리는 건 없어요?"


"네, 다 잘 먹어요. 그리고 가려도 먹어야죠. 용선 아가씨께서 준비해주신 건데."


"우리 집 사람들이 준비했죠.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어서 먼저 식사하세요."


"별이씨도요."




용선이 먼저 수저를 들었다. 용선의 입장에서도 별이는 좋은 선생이었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고 못한다고 재촉을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저를 배려하며 가르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서 믿고 맡길 수 있었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편안함이었다. 오래 본 사람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인 것 같았다.




"오늘 수업은 어떤 것 같아요? 많이 어려웠어요?"


"아니요. 조금 어렵긴 하지만 괜찮아요."


"어때요? 우리 초반보다는 많이 친해진 것 같지 않아요?"


"음... 네. 그런 것 같아요."


"제가 용선 아가씨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나요?"


"어... 아직은?"


"아쉽네요. 이쯤 되면 우리 친해질 줄 알았는데."


"굳이 친해져야 하나요?"


"말했잖아요. 저는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러 왔다고."


"친해지는 게 마음을 얻는 건 아니잖아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죠. 친해지는 게."




별이가 코를 찡긋 거리며 웃었다. 밥을 다 먹은 뒤 정리를 끝낸 둘은 잠시 소화 좀 식힐 겸 밖으로 나와 산책을 했다. 물론 산책 이어봤자 집 앞마당이지만. 별이는 마당을 걸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화단과 마루가 보였다. 이상하게 팔이 간지러웠다.




"간지러워요?"


"네? 아, 그러게요. 뭐 물렸나 봐요."




별이가 팔을 걷으며 말했다. 긁은 자리엔 희미하게 기다란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흉터네요."


"네. 어릴 때 다친 상처 같아요.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팠겠다..."




용선이 별이의 팔을 보며 말했다.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흉터를 매만졌다. 또다시 익숙한 무언가가 제 가슴속에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어째 상처를 보고 이런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흉터를 매만지던 용선의 시선이 손목에 감겨 있는 천으로 저절로 옮겨졌다. 제 생각엔 아마 처음 만날 때부터 감겨 있었던 것 같았다. 용선이 쳐다보는 걸 느꼈는지 별이가 팔을 거두고 옷을 내렸다.




"손목에 왜 천을 감았어요? 멋?"


"네. 멋으로 감았어요. 어때요, 멋져 보여요?"


"으음..."


"용선 아가씨는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시군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왜 감은 거예요? 진짜 멋으로?"


"멋으로 감은 것도 하지만 음... 비밀. 사실 제 손목에 흉터가 하나 있거든요. 거기까지 말해줄게요."


"별이씨는 비밀이 많네요. 성도 비밀이고 저것도 비밀이고... 언제 말해줄 거예요?"


"말해주면 비밀이 아니게 되잖아요."


"그렇긴 하죠...."


"푸흐, 나중에 용선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면 그때 말해드릴게요. 지금은 안 돼요."




생각보다 유용하게 써먹히는 것 같았다. 마음을 얻는다는 것.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 꽤 힘들다는 건 별이 저 자신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어려운 걸 알고 있기에 말할 수 있었다. 우선 별이는 용선의 마음을 얻는 것보다 의열단을 위해 정보를 모으고 김승우와 카츠마토 토마를 죽이는 게 더 중요했다. 어차피 저 또한 그녀가 김승우의 무남독녀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계속 이 관계를 이어나가도 괜찮겠다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 왜 이렇게 뚫어지게 쳐다봐요?"


"... 네? 아, 아니에요. 이제 그만 산책할까요?"




익숙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는 것, 그게 걸렸다.




"혹시 내일 시간 괜찮아요?"


"어떤 시간이요? 수업 시간 말고?"


"아니요. 수업 시간에 자리 좀 비울 수 있나 해서요."


"자리요? 별이씨 어디 가요?"


"네. 용선 아가씨랑요."


"...? 저는 왜요?"


"내일 한 번 응용해보자고요. 우리 그동안 배운 거."




별이의 말에 용선이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별이가 웃으며 말했다.




"나가요, 우리. 때 마침 내일이 장날이던데요? 맛있는 것도 먹고 오자고요. 외국어는 실전이에요. 이렇게 앉아서 중얼중얼 거리고 있으면 효과도 없고 사용도 못 하잖아요. 그냥 만나서 못하더라도 조금씩 대화 나누다 보면 저절로 귀가 트이고 입이 열려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뭔데요?"


"우리 아버지가 혼자 못 다니게 해서... 반드시 한 명이 같이 갈 것 같아요. 나갈 가능성도 별로 없고요."


"아버지가 용선 아가씨를 매우 아끼시나 보네요."


"으음, 그렇죠."


"기다려봐요. 제가 허락받아올게요."


"네? 우리 아버지한테요?"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들어가 있으실래요? 내일 좋은 소식 가지고 올게요."




고개를 끄덕이자 별이는 용선을 그녀의 방에 데려다준 뒤 승우의 서재로 향했다. 자신감과 깡 이 2개만 있으면 됐다. 계십니까, 호시입니다. 별이가 방문을 열었다.




-




연회장 무대 뒤편, 혜진이 거울을 보며 짙은 화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뒤에 팔짱을 끼고 있던 별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혜진에게 말을 걸었다.





"어때? 할만해?"


"응. 생각보단."


"목 안 아파?"


"내가 거기 있을 때 목청 하나는 우렁찼잖아?"


"크큭, 그렇지. 안혜진 목소리가 최고지."


"휘인이는?"


"항상 이 시간이 주점 일 바쁘잖아."


"언니는 어때?"


"나도 뭐 나쁘지 않아."


“아가씨는 잘 가르침 받는 중?”


“응. 협조 잘하더라.”





열린 공간이어서 그런지 지나친 이야기는 자제했다. 혜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경성에 내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혜진은 어느새 자리를 잡고 꽤나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다. 활동하는 곳도 이제는 좀 고위층 사람들이 찾아올 법한 연회장이니 혜진의 목소리가 그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은 모양인가 보았다.




“저기 있네. 카츠마토 토마.”




조심히 무대 뒤에서 관찰하고 있던 별이는 토마에게 눈길을 멈췄다. 손으로 턱을 괴고 혜진의 노래를 듣고 있는 게 별이의 눈에 보였다. 1달 전, 그때가 생각나서 그런지 상처가 욱신거렸다. 별이는 그 상처가 있는 팔을 다른 손으로 조심스레 쥐었다.




“그냥 카츠마토 유키토 연줄로 올라온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의 반사 신경과 사격실력은 웬만한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용선이 카츠마토 토마와 결혼을 한다는 사실은 별이도 진작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 야심한 밤에 학수와 둘이 긴밀하게 만났는지가 의문이었다.




"언니, 무슨 생각 해?"


"응? 너 언제 끝났어?"


"방금?"


"뭐야, 벌써?"


"벌써라니. 뭔 생각을 하고 있길래 나 끝난 것도 몰라?"




혜진은 일어나라- 하며 별이의 어깨를 툭툭 친 후 화장을 지우기 위해 거울 앞에 섰다. 휘인이한테 물어봐야지, 별이는 고개를 저으며 갈아입는 중인 혜진의 옷가지를 들어 주었다. 모든 일정이 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어느덧 달이 머리 위로 환하게 비쳐 있을 때였다.




"노래 부르는 거 사람들이 뭐라고 안 해?"


"응? 사람들 누구? 휘인이?"


"아니 아니, 관객들."


"아아, 뭐 많이 하지. 삼등 기생 취급하면서 뭐라 뭐라 하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원하는 것도 많고 하라는 것도 많고. 뭐, 괜찮아 나는. 다른 애들이면 모르겠는데 나는 외강 내강이잖아? 별 신경 안 써."


"힘들겠네."


"힘들긴 무슨. 대장 하는 일이 더 힘들지."


"무슨 일 있으면 말해. 바로 달려갈게."


"아이고, 됐네요. 저번처럼 팔에 이상한 거 달고 오지 말고."


"저번에는...! 애휴, 그래. 너도 참 징하게 놀려먹는다."




휘인의 말처럼 혜진은 1달이 돼가도록 별이를 놀렸다. 별이도 처음에는 놀리는 혜진에게 그만하라 했지만 이제는 체념하고 혜진이 뭐라고 하든 말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샜다.





"내일 거기 아가씨랑 좀 나가보려고."


"왜? 굳이 복잡하게?"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더 자세하게 들으려고. 그 아가씨가 다니면 수군수군 댈 거 아니야. 김승우네 집 여식이다 이렇게 시작해서 김승우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많이 얻을 수 있겠지. 본 것과 보지 않은 것의 차이는 크니깐. 생각이 안 나다가 갑자기 그 아가씨를 보고 아, 맞다- 김승우가 어쩌고저쩌고 할 수 있잖아."


"함부로 그걸 허락해줘? 어쩌면 김승우를 노리는 세력들이 또 있을 거야. 김승우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당연히 허락받고 나가지. 내가 미쳤다고 허락을 안 받고 나가? 거사 하기도 전에 목 잘려 나가겠다."


"허락은 또 어떻게 받았네?"


"내 말솜씨로."


"어이구, 대단하십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니 어느덧 주점이 둘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휘인이 음식을 나르면서 손님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휘인도 둘을 봤는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마마무 팬픽러 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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