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때와 같이 오늘도 도서관에 가 책을 읽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복도를 걷고 있는데, 일주일 전 2황자, 드미프리의 피아노 연주를 들었던 방문이 이번에도 열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듣자 하니, 그는 1황비인 어머니의 압박으로 황태자와 원치 않는 권력 싸움을 한 듯했다. 그 싸움의 끝은 그가 스스로 아카데미에 입학함으로써 끝이 났지만, 여전히 2황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의 수도 적지 않다고 한다.


나는 2황자에 대한 정보들을 떠올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저번에 보았던 대로 피아노와, 수많은 악기들이 방 안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피아노 앞에 서서 많은 건반 중 하나를 눌러보았다.


-띵~


관리가 잘 되어 있는지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아 다른 건반들도 눌러보았다.


-띵, 띵, 띵~


"뭐 하십니까?"

"으앗..!"


피아노 건반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하고 있는데, 뒤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꽝!


"헉!"


피아노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고, 나는 급하게 손을 뗐다.


"하하하-''


내게 말을 걸었던 이는 내 모습을 보고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 놀랄 것까지야 있나요."

"아.. 그게..."

"일주일 만에 뵙습니다, 형수님."

"예, 좋은 오후입니다. 황자 전하."

"황자 전하라뇨. 저번에 프리라고 불러주시기로 했잖습니까."

"아..."


그의 말에 왠지 누군가가 겹쳐 보였다.


"예, 프리. 저, 그럼 프리도 저를 하임이라 불러 주세요."

"아, 그럴까요? 그래요, 형수님은 조금 딱딱하죠?"

"예, 뭐..."


정작 나와 혼인한 이는 나를 인정하지 않을 텐데 남에게서 듣는 그 인정의 말이 거북했다.


"그나저나 하임, 피아노를 치고 있던 건가요?"

"아, 네. 그냥 문이 또 열려 있길래 궁금해서요."

"... 저, 그럼 제게 피아노 연주를 배워 보시겠습니까?"

"예?"

"저번부터 피아노 연주에 굉장히 흥미가 있는 듯 보여서요. 뭐, 제가 잘못 본 거라면 별수 없지만요."

"아..."


피아노라...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다. 무언가를 배울 기회가 많지도 않았지만, 그 시간에도 악기라는 것은 내게 너무나도 큰 사치였다. 그래도, 피아노를 치는 프리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나도 그렇게 빛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물론이죠. 저야말로 영광인걸요?"


프리는 내게 시원한 미소를 보이며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자, 그럼 여기 앉아 보세요. 기초부터 알려드릴 테니까요. 참고로 제 수업은 꽤 고되니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도망치실 기회는 지금뿐이에요."

"아뇨, 괜찮습니다. 엄격하게 지도해주세요, 선생님."


즉흥적으로 한 선택이었지만, 후회나 걱정보다는 기대가 되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을 다잡고 프리의 옆자리에 앉았다.


"우선, 기본적인 음계는-"


그의 지도는 생각보다 본격적이었고, 저번에 만났을 때의 가벼운 언행과는 달리 진지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제법 멋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까지. 질문 있나요?"

"아뇨, 없습.. 아, 하나 있는데, 질문해도 괜찮을까요? 수업이랑은 상관 없는 거라서..."

"네, 좋습니다. 뭔가요?"

"음... 저번에 프리는 사랑 때문에 아파하는 게 어리석다고 했죠."

"... 이런,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처음 보는 하임 앞에서 별 얘기를 다 한 것 같군요. 네, 맞아요. 그래서요?"

"그렇다면 혹시, 사랑 때문에 아파하지 않는 방법을, 아시나요...?"

"사랑 때문에 아파하지 않는 방법이라... 간단하죠. 사랑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아니, 그런 방법 말구요. 만약, 이미 사랑에 빠졌다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죠?"

"흐음... 그건 조금 어려운 질문이네요. 이미 사랑에 빠졌다면, 상대방에게 마음을 줘버렸다면, 아파하지 않는 방법은 없겠죠. 그러니 사랑이 어리석은 감정이라는 겁니다. 아파할 게 뻔하면서도 다들 사랑에 빠지니까요. 어리석고, 참으로 잔인하죠. 그래도 최대한 상처 받지 않는 방법은, 진심을 숨기는 겁니다. 사람은 상대방이 완전히 자신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했을 때 가장 잔인해지거든요. 그러니까, 내게 더는 잔인해지지 않도록 최후의 방어선을 세우는 거죠."

"... 진심을, 숨긴다."


나는 프리가 했던 말을 작은 목소리로 따라 했다.


"... 뭐, 아무래도 하임에게는 어렵겠지만요."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설마 몰랐습니까?"

"뭐를요?"

"하임은 참 알기 쉬운 사람입니다.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거든요. 저는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 제가요...?"


감정을 숨기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생각을 알기 쉽다니. 당혹스러웠다.


"저번에 처음 말을 걸었을 때 당황하는 모습도 그렇고, 피아노 연주를 들을 때도 그렇고,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아... 그렇군요."

"음.. 근데 지금은 또 잘 모르겠네요. 어떨 때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기도 해요. 방금 그 질문의 의중도 모르겠고요."

"... 그건 알 필요 없습니다."

"지금도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

"뭐, 됐습니다. 그래도 충고 하나 하자면, 황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감정을 숨기는 연습을 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게, 이곳에서 살아남는 방식이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수업도 끝났으니, 선생님의 연주를 한 번 들려주시겠어요?"

"... 좋죠."


나는 그가 편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 구석에 놓여 있던 간이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자, 시작해도 좋아요."

"풉- 이번에는 완전 알겠네요, 하임의 생각."

"예?"

"기대에 보답할 수 있는 멋진 연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내가 그의 연주를 기대했던가? 그저 말을 돌리기 위한 변명일 뿐이었는데...


그런 생각들은 그의 연주가 시작되자 모두 사라졌다.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연주에 빠져들었다. 부드러운 선율이었다. 언젠가 레일의 성에서 유모가 불러준 자장가와도 비슷한 것 같았다.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는 느낌. 수고했다며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

"... 연주, 끝났는데요."

"아...! 오늘도 정말 좋았습니다. 프리의 연주는 언제나 제게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언제나요? 겨우 두 번밖에 안 들어보고요?"

"아뇨, 세 번입니다. 지난주에 한 번, 오늘 한 번, 그리고, 황제 폐하의 탄신 연회 때 한 번."

"아... 그날이요... 그런데 하임은 그날 연회에 안 나오지 않았나요? 분명 몸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요."

"방에서요. 창문을 열었더니 피아노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참 아름다운 연주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프리가 연주한 게 맞았군요."

"예, 제가 맞긴 합니다만... 어떻게 아셨습니까?"

"음... 감으로요? 말했잖아요. 프리의 연주는 언제나 위로가 된다고. 그때도 엄청 위로가 되었어요. 고마워요."

"... 아닙니다."


아니라고 말하는 그의 입과는 달리, 그의 목뒤는 조금 붉어졌다.





제게는 피아노에 대한 조금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피아노 학원이 다른 재단에 인수되더니, 어느 날 다시 다른 곳에 팔아넘기더군요... 잘 다니던 학원이 사라져버린 황당한 사건이었죠. 아무튼 그래서 지금은 제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이 있던 자리에 한의원이 생겼습니다. 당시에는 학원을 안 다니게 되어서 좋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쉬워요. 조금 더 배웠으면 좋았을 텐데 하구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즐거운 하루 되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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