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선물. 그동안 도와줘서 고마웠어."


가엘은 자신의 눈 앞에 내밀어진 작은 통을 바라보았다. 안 받아? 케이아가 재차 손을 내밀었다. 가엘에겐 그것을 어설프게 받아드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는 듯 했다. 

그가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첫 번째, 그는 케이아로부터 선물을 받을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두 번째, 선물의 외관이 평생 가도 저는 못 받을 종류의 것이라 생각해왔던 것이었다.  

상지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아도 될 만큼 작았고, 겉은 부드러운 벨벳 천으로 덮여있었다. 생긴 것만 봐서는 꼭…… 반지 케이스 같았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길거리에서 청혼하던 연인들이 딱 저런 케이스를 주고받던 적이 있다. 케이아는 무릎을 꿇고 있지도 않았고 케이아와 자신이 연인인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만약 진짜로 청혼받은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지금은 이 자리에 없는 다이루크에게 맞아죽거나 그도 아니면 비슷하게 몸 반쪽이 불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늘 그렇듯 저 혼자서 헛생각의 우물에 빠져버린 가엘을 현실로 되돌려놓은 것은 꾸준히 그를 기다려준 케이아 덕분이었다. 정확히는 케이아 역시 그를 기다려준 것이 아니라 그의 대답을, 혹은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쪽 뿐인 눈 속에서 결코 사납지 않은 독촉의 의견을 읽은 가엘은 떠듬떠듬 대답했다. 


"……나도 고마워?"

"뭐가 고마운데?"


첫 번째 풀이가 시원하게 틀려먹었기에, 두 번째 풀이로 넘어갔다. 가엘은 대답 대신 행동을 택했다=머뭇거리며 양해를 구했다. 


"여기서 열어봐도 되는 거야?"


케이아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가엘은 긴장하며―거의 티도 나지 않았지만―케이스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긴장을 전혀 할 필요가 없었음을 깨달았다. 케이스 안에 담긴 것은 평범한 은제 십자 귀걸이였다.


"……귀걸이 고마워."

"별 말씀을. 성의를 봐서, 잘 끼고 다녀!"


용건은 정말로 그것 뿐이었던 듯, 케이아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마치곤 거리 저편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가엘은 그 어떤 당황보다도 우선적으로 케이아의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아보임에 크게 안심했다. 1년간 칩거하던 케이아를 자극시키지 말아야한다고, 특히 네놈은 조심 또 조심하라고 진에게 귀에 딱지가 얹히도록 잔소리를 들었던 지난날은, 일반인보다 배는 무심한 가엘의 행동거지를 겨우 일반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지대하게 공헌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거리에 혼자 남게된 가엘은, 다시금 새로이 손에 들어온 선물에 덩그러니 집중했다. 이걸 어쩐다.

그가 귀를 뚫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외로 이상한 일 축에 들었다, 적어도 티바트에선 말이다. 대부분의 성인들은 성인식을 치루는 시점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귀를 뚫었고, 아니더라도 귀를 뚫은 자국이 있는게 보통이었다. 가끔씩은 소년소녀들도 이르게 귀를 뚫는 경우가 있었다. 급할 게 무어 있냐는 소리를 자주 듣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여기는 자유의 도시 몬드가 아닌가? 10살 때부터 맥주를 마시는 나라에서 귀를 뚫는 게 별 대수로 취급될 리 없다. 실제로 그가 아는 붉은 머리 수녀는 성인식 전부터 문신이니 담배니 별 일탈은 다 저지르고 다녔었다. 듣기론 아마 스네즈나야도 비슷하다던가. 

딱히 몬드나 스네즈나야만의 풍습은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어느 나라든 귀걸이를 차는 문화는 보편화되어있었다. 그 기원은 수천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리월의 암왕제군이, 옥체의 일부를 직접 뗴어내 가공하여 만든 아름다운 귀걸이 한 쌍을 자신의 반려와 나눠가졌다는 유명한 일화에서부터 말이다. 그때부터 귀걸이 선물 풍습은 보신과 안녕 등을 의미하는 것이 됐고, 연인 간에 귀걸이를 나눠끼는 것은 곧 애정의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 아마 기혼자들의 반지 다음으로 자주 끼는 치장 목적 이외의 치장구일 것이다. 

즉, 가엘이 귀걸이를 선물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티바트의 문화적으로 봤을 때 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기까지는 가엘도 알 수 있었다. 다만 가엘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가엘은 귀를 뚫지 않았고 상대방이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 기회에 귀를 뚫으라는 건가?'


그 역시 작년부로 성인식을 치르긴 했다. 말한대로 이상할 건 없었다. 생각해보면 내심 잘된 일이기까지 했다. 솔직하게 말하는 건 고사하고 이리 돌려서라도 말해주었다면 다행이지.

가엘은 선물받은 귀걸이를 잘 간직하고 있다가, 다음 휴가날이 되자마자 귀를 뚫었고, 그 이후부터 내내 그것만을 차고 다녔다. 








"그래서, 치장에 관심은 좀 생겼어?"

"어……."


부정을 의미하는 '어…….'였다. 케이아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그 뒤로 케이아는 가엘을 만날 때마다 종종 장신구나 치장구를 선물해주었다. 주기는 대략 한 달 정도일까. 처음은 '갈아끼울 귀걸이가 필요하지 않아?'였고, 비슷한 흐름으로 손에 아기자기한 조각들이 쥐어졌다. 가끔은 간단한 반지나 팔찌, 목걸이 등을 선물받을 때도 있었다. 고마웠다고 대놓고 말은 못하고 별별 이유를 대며 둘러대듯 호의를 전하는게 딱 케이아다워,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딱히 이상함을 느끼지는 못헀다. 

그리고 가엘은 그 선물들을 죄다 기사단 정복 밑에 주렁주렁 끼고 다녔다. 

솔직히 말해서, 이상한 물건을 파는 행상인으로 신고당해서 잡혀가도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걸 가엘만 몰랐다. 최근까지는 케이아도 몰랐다. 날마다 바꿔끼고 다니라고 준 피어싱을 죄 새로 뚫어 달고다니는 걸 보았을 때 얼른 눈치채거나 말렸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가엘은, 정말, 절망적일 정도로 센스가 없었다. 

사람의 버릇은 대개 키워준 사람을 따라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바르카 밑에서 길러진 가엘은 반지를 손가락에 제대로 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정도이긴 했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을 보고 견문이나 취향을 넓힐 기회도 없었다. 우선 그가 자유의 국토에서 제일 가는 눈치 부족 인간이라는 것도 문제였고, 얼마 없는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라 해봤자 다이루크 아니면 진이었는데, 둘 다 파티 때가 아니면 화려하게 차려입는 성격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가엘은 대개 기사단 정복 아니면 조촐한 평복을 입고 다녔다. 그는 꼭 성당 고아원에 다니는 사람 같았다. 아이들의 옷을 물려입는 사람처럼 싸고, 저렴하고, 편리함에 집중해 미적 기능이란 1도 없는 옷만 골라입었다는 뜻이다. 그의 평복은 지극히 단정했으며, 가끔은 무난하다 못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럴 때면 그의 화려한 백발은 마치 노인의 다 세어버린 백발처럼 볼품없어졌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꼴보기 싫었다. 

가엘과 사적으로 만나던 근 1년간 케이아는 그것을 절절히 깨달았고, 알고 지낸지 10년이 넘었다는 걸 생각하면 너무 늦은 배려일지도 몰랐지만, 제 나름대로 감사의 표시를 할 겸 가엘에게 꾸밀 계기를 주었다. 

그리고 케이아는 자신의 방식이 틀렸음을 최악의 방식으로 깨달았다. 뭘 해도 바뀌는 건 없었다. 애초에 꾸밀 줄 모르는 사람한테 잘 좀 꾸며보라고 말을 해봤자 통할까? 선물해준 옷들이 죄다 괴상한 조합으로 망쳐져 몬드 성의 주민들 앞에서 공공연히 드러나는 것을 볼 때마다 케이아는 가엘을 떄리고 싶었다. 끔찍했다. 가장 끔찍한 점은 가엘이 저걸 케이아가 선물해준 것이라고 숨기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바르바토스여, 부디 이 불쌍한 영혼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소서……. 하나만 물어보자.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손가락에 반지를 두 개씩 끼고 다니는데?"

"그렇지만 손가락 개수가 부족하다."

"그래, 내가 문제였지. 상대가 가엘 크룩스인데."


적반하장으로, 가엘이 별 이상한 사람 다보겠다는 듯 눈썹을 작게 들썩거렸지만, 케이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중얼거리다가 무언가 방법을 떠올린 듯 서무장실에서 가엘을 걷어차듯 내쫓았다. 문 밖으로 내쫓긴 가엘이 할 수 있는 것은 어이없어하다가 제 자리로 돌아가 할일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평소처럼 순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이후로 가엘은 유독 유라와 자주 마주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원래 자주 마주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 '원래'가 이상한 것이긴 했다. 아무리 돌격대장과 유격대 평대원이라는 직급 차이가 있다곤 해도, 기병대든 돌격대든 유격대든 할 일이 없을 땐 사이 좋게 몬드의 너른 벌판을 뛰어다니며 순찰과 치안의 유지에 힘쓰는 것이 주 업무이기 때문이다.(바르카는 이걸 공공연히 짬처리라고 불렀다. 대장들만 아는 일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이 덜 마주쳐왔던 것은, 완벽하게, 유라 쪽에서 일방적이고 노골적으로 가엘과의 만남을 거부해왔기 때문이었다. 가엘은 특유의 무신경하고 무책임하고 무눈치한 논지의 말로 몇 번이고 유라의 신경을 긁으며 그녀의 원한을 차곡차곡 적립했으며, 종래엔 복수 대상 1순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남자였다. 

그런 견원지간 같은 관계를 영리한 서무장이 모를리가 없다. 그러나 케이아는 의도적으로 둘의 행선을 붙여 짜놓았다. 늘 그렇듯 그의 계략은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가문에서 완벽한 교육을 받아온 유라는 당연히 외관 치장과 예복 매너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그 교육의 질에 대해서 따지자면 라겐펜더의 케이아보다 못날 것이 없었다. 유라는 케이아의 계략이 시작된 지 5일 만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가엘의 그 꼬라지가 가엘의 빌어먹을 눈치 없는 대사들보다 정확히 10배 정도는 더 거슬린다는 사실 말이다. 일주일이 되는 날, 유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이봐요, 경. 나랑 얘기 좀 합시다. 당신 진짜 그 옷이랑 안 어울려!"

"이건 선물받은 옷이다. 바꿔입을 생각은 없어."


이어지는 흐름은 언제나와 같았다. 검 들고 따라나와, 결투다! 연무장은 연전연일 개판이었다. 

어쨌든 가엘은 이런 흐름으로 몇 번이고 유라의 호의를 거절했다. 케이아는 덕분에 꽤 자주 유라의 원한 어린 눈초리를 받았다, 억울하긴 했지만 조금만 참으며 웃어넘기면 그만인 일이었다. 결국 유라는 그녀의 입버릇인 복수 타령을 하며, 가엘을 사흘 내내 끌고다님으로써 마차 한 수레에 버금가는 옷을 새로 선물해주었다. 대부분 가엘의 봉급으로 산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골라준 것은 유라였다. 그것도 엄연히 선물의 범주에 드는 법이다. 가엘은 유라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고, 그녀의 몇 없는 호의와 그에게 있어 모처럼의 선물인 것을 내다버릴 생각은 없었다. 가엘은 유라의 선물을 감사히 입고 다녔다. 그리고 유라는 '내 선물이니 내가 간섭해도 된다'라는 말로써 가엘의 패션에 마음껏, 정말 마음껏 개입했다. 

그 다음부터 가엘은 언제나 귀족처럼 화려하고 멋스러운 옷차림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몇주 간의 고통스러운 릴레이가 끝난 셈이었고 케이아와 유라는 서로 안 보는 곳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거짓말처럼 처녀들 사이에서 가엘의 인기가 올라간 것은 덤이었다. 

금발의 여행자와 작은 꼬마 요정이 몬드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의 일이었다. 그 시점에서 가엘 크라우스는 누구나 첫눈에 흠모할 만한 백발의 미청년이었고, 누구도 흠잡을 수 없는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으며,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고 있음에도 기사보다는 왕자처럼 보였다. 흔히 몬드에 처음 오는 사람들이 그리하듯, 그들 또한 가엘이 과묵하지만 멋지고 완벽한 '무패의 기사님'이라고 착각했으며, 같이 마물을 토벌하러 가자고 틈만 나면 졸라댔다. 

물론 그들도 얼마 안 가 가엘의 본모습을 깨달았다. 겉포장이 어떻게 바뀌든 결국 그는 몬드에서 제일 가는 얼간이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한숨처럼 내쉬길 '첫인상이 가장 처참하게 박살난 인물'이라나 뭐라나. 가엘은 여행자와 페이몬의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타박을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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