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지수현 작가님의 장편소설 『열여덟, 스물아홉』과 이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드라마를 모티브로 하여 쓰여 졌음을 밝힙니다. 본 글은 영리적인 목적을 추구하지 않으며 1차 저작물임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bgm : I Tnink I - 별

 

 

 

 

 

 

 

 


 

 

 

 

열여덟 스물아홉


3화

 

 

 

 

 

 

 

 

 

1. 소우주에서 탈락된 혜성 하나

 

 

 

‘그만하고 싶어.’

‘서로 후회 할 말 하지 않기로 했잖아.’

‘후회 안 해.’

‘소우주. 지금 네가 나한테 무슨 말 한 건줄 알아? 그만하자는 거, 너 그거 지금…’

‘이혼해.’

‘우주야!’

‘이혼하자. 아니, …이혼해 줘, 혜성아.’

 

제발. 제발… 소우주가 애원한다. 무너지며 울던 우주의 얼굴. 헤어짐을 말하던 망설임 없는 차가운 목소리가 송곳처럼 날아와 마음에 박히는 느낌에 혜성이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꿈이지만 꿈이 아닌 장면. 처음엔 이해할 수 없어서 화가 났고, 조금 지나고 나서는 어쨌거나 이혼을 통보받았다는 생각에 모든 것이 괘씸해 이유 같은 건 궁금해지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혜성의 앞에서 스러져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던 우주의 모습만큼은 내내 혜성에겐 충격으로 남았다. 눈을 감으면 떠올라 혜성은 한 달을 넘게 잘 못 자던 차였다.

형. 괜찮으세요? 밴을 운전하던 호준이 물었고, 혜성이 물병을 열며 룸미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별 일 아냐.

드라마 세트의 주차장에 밴이 도착했다. 창문이 짙게 틴팅된 차체에서 내리자마자 혜성은 발걸음을 멈춰 세웠는데, 때마침 도착한 또다른 밴에서 내린 한나가 혜성을 알아보고 곧장 이 쪽으로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웬일이야?”

“케이블 단막극 해요. 오늘부터 촬영 시작. 나 세트장 바로 옆이야. 선배 드라마도 여기 용인인 줄 몰랐네.”

“어. 그래.”

“얘기 들었어요. 언니 사고 났다면서요.”

 

차분하게 걱정하며 한나가 말소리를 낮췄다. 별 거 아니라는 듯 혜성은 짧게 대답했다. 어. 괜찮아.

 

“실은, 전화라도 해볼까 했는데… 못하겠어서.”

“뭐라고?”

“아니, 그냥 내 생각이야. 선배.”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마치 그걸 혜성이 궁금해 하길 기다리는 모양새로 한나가 한참이나 말을 늘였다. 한나가 뜸 들이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혜성은 촬영 준비가 한참인 건너편을 내다보고 있었다. 실은 있지, 선배. 한나가 입을 떼길 기다리고 있던 혜성이 맞은편의 한나를 내려다봤다.

 

“괜히 언니가 나 미워하고 싫어하면 어쩌나… 나 그런 걱정이 돼.”

“왜.”

“응?”

“우주가 왜 널 미워하는데.”

그 일 때문에… 나 사실 그 이후로 언니한테 연락한 적 없어서.”

 

한나가 말을 줄였다. ‘그 일’이 뜻하는 것이 뭔지, 혜성 역시 알았으나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였다.

 

“아닐 거야. 신경 쓰지 마.”

 

그러나 그건 한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우주는 사람 미워할 줄 모르는 애야.”

“……”

“만약에 한나 네가 우주한테 미운 사람이 된다면, 그건 한나 네가 아주 나빠졌다는 뜻일 거고.”

“……”

“그럴 일 없을 거 아냐. 그렇지?”

 

촬영 잘하고. 동료로서의 격려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혜성이 한나를 지나쳤다. 우주를 감싸려고 둘러댄 것은 아니었다. 정말이었다. 우주는 그 누구도 싫어하지 못하는 사람. 차라리 뭐든 자기 탓을 해 버리고 말아야 속이 편한 애였다. 제 스탭들을 이끌고 한나에게서 멀어지며 혜성은 얼굴을 굳혔다. 그런 소심하고 착한 소우주가 이틀 전까지만 해도 죽도록 미워한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저였다는 사실을 방금 깨달아서.

 

 

 

 

 

 

 

 

 

 

2. 멈춰버린 우주 속 시간

 

 

 

우주가 병원을 나서는데 전화가 왔다. 누가 누군지 기억을 못하게 된 뒤로 웬만하면 전화통화는 피했다. 일단은 일시적인 거라는 생각으로 우주는 남들에게는 제 상태를 밝히지 않았다. 일은 쉬고 있던 중 이랬고, 앞으로 진행될 것 역시 몸 상태를 이유로 미뤄왔다. 웬만하면 전화를 받지 않고 은하가 메일이나 메시지로 대신 해결해주는 식이었다. 스물아홉의 소우주는 얼마나 철저한지, 핸드폰 속 저장 명에 소속과 직급, 이름 등을 모두 사무적으로 표기해두어 구분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 전화는 좀 달랐다. 우주가 핸드폰 액정을 코앞까지 갖다 대었다. [우리 찐♡] 애칭인 게 분명한 이름에 하트까지 붙인 걸 보고 미간을 구겼다. 수납을 하느라 은하도 하필 옆에 없었다. 이건 뭐지. 남편 이름도 [윤혜성]으로 저장해 뒀으면서… 혼란해 하며 우주가 전화를 받았다.

 

―야! 소우주!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여자였다.

 

―어제 재판 준비하느라 뉴스에 너 나온 줄도 몰랐어. 엄청 중요한 사건이었는데 대차게 졌거든? 술 마시고 여태 뻗어 자느라 사고 났다는 기사 이제 봤어. 아직 병원이야? 너 혼자겠네? 아, 그러게 왜 전화를 안 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 너 선우진이야?”

―얘가 뭐 잘못 먹었나… 왜. 교통사고 충격으로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렸어?

“어떻게 알았어?”

―아, 뭐래는 거야!

“진. 너 나랑 아직까지도 친해? 저장한 이름에 막, 하트까지 달려있는데. 우리 진짜 많이 친해?”

 

혜성과 은하는 우주가 회복해야 한다는 핑계로 좀처럼 많은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 답답하던 차에 잘 됐다 싶어 우주는 수화기를 귀에 바짝 갖다 댔다.

 

―낼모레 나이 서른인데 웬 우정테스트… 친하지, 그럼. 우리 서로 제일 구질구질 할 때부터 함께 했는데.

 

그래? 곧장 대답하는 우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침 수납을 끝낸 은하가 지갑을 닫으며 걸어 나왔고, 우주가 은하를 향해 급하게 손짓하며 마저 대답했다.

 

“너 지금 어디야, 진아? 우리 만날까?”

 

 

 

 

“아니, 이게 무슨… 그게 진짜야?”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벌써 세 번 째 재차 확인하며 묻는 진에게 고개를 끄덕인 건 은하였다. 우주는 소파에 엉덩이도 붙이지 않고, 진이 일하는 로펌의 변호사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다니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럼 쟤, 혜성이랑 이호ㄴ…”

 

말을 맺으려다가 진이 얼른 은하의 눈치를 봤다. 은하가 황급히 양 팔을 교차시켜 엑스 자를 그려 보았다. 응? 혜성이 뭐라고? 진의 책장 앞에서 우주가 돌아보았다. 진은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암말도 안 했어.

 

“와, 근데 네가 어떻게 변호사가 됐어? 너 진짜 공부 열심히 했구나.”

 

방 구경을 끝낸 우주가 자리로 돌아와 은하의 옆에 앉았다. 마냥 신기한 우주와 해탈한 은하 사이에서, 진은 혼자 심란해져 머리를 짚었다. 얘, 진짜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구나… 황망하게 중얼거리던 진이 이내 무릎을 탁 쳤다. 얘, 은하야!

 

“심리치료… 그래, 최면치료. 막 그런 거 있잖아! 얘 그런 거 받아봐야 하는 거 아냐?”

“이미 알아봤지. 근데 일단 아직 몸 회복이 중요하고. 기억이 자연스럽게 돌아올 확률이 높다고 해서 기다려 보기로 했어.”

 

저, 진아. 우주가 입을 떼려던 찰나였다.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열고 남자 직원 한 명이 안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선우 변호사님.

 

“무슨 일이에요?”

“유인석 의뢰인께 전화 왔는데요. 가리봉동 건물 세입자들이 우리가 제시한 조건으로는 합의 못 하겠다고, 변호사님 입회 하에 다 같이 만나고 싶다고 한대서요.”

“그럼 그래야죠, 뭐. 내 스케줄 보고 약속 잡아줘요. 내가 그리로 간다고.”

“알겠습니다.”

 

직원이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저를 찾아온 손님들에게 진이 다시 집중했을 땐, 우주는 입을 헤 벌리고 진을 선망하고 있었다.

 

“왜, 왜 그래?”

“와, 선우진… 뭔 말인진 모르겠는데 너 진짜 멋있다.”

“별… 야, 소우주 네가 더 멋있어. 너 스물아홉의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지?”

“흐음.”

“그래서, 너 내가 멋있는지 아닌지 확인하러 왔어?”

“아! 맞다!”

 

진에게 물어볼 게 산더미였다. 질문들이 넘쳐나 우주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그게 있잖아, 진아… 우주가 이제야 본론으로 접어가 보려는데, 이번에는 전화벨소리가 갑자기 공간을 가득 매웠다. 잠깐만. 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을 짚고 선 채로 수화기를 귀에 대고 전화를 받았다. 일 얘기인 것 같았다.

 

“네, 네. 수지 씨. 그런 판례는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한번 알아보고 다시 전화 드릴게요. 네…”

 

우주가 유리로 된 진의 사무실 바깥을 건너다보았다. 다들 서류더미들을 안고 바삐 다니며 일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일을 하러 왔고, 근무 시간인 것은 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 지금, 되게 민폐구나… 문득 깨달은 우주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이 비로소 전화를 끊고 뒤를 돌아 그런 우주를 봤다.

 

“너 바쁘지. 나 오늘은 이만 가볼게.”

“여기까지 왔는데 좀 더 기다렸다 같이 점심 먹구 가.”

 

진의 제안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에 손을 올린 채로, 들지 못하고 진이 아쉬운 듯 우주를 바라보았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은하의 팔을 당겨 일으킨 우주가, 진을 향해 히, 하고 웃었다. 아냐. 나도 아침부터 병원 갔다 왔더니 피곤해.

 

 

 

 

돌아가는 길. 거침없이 유턴을 하는 은하는 심지어 핸들을 한 손으로 잡고 있었다. 능숙하게 차간을 끼어들고, 내비게이션이 음성으로 알려주기도 전에 차선을 바꾸어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노련한 운전 실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주가 독백했다.

 

“우리 은하가 언제 다 커서… 운전을 하네…”

“신기해? 언니도 하잖아.”

“지금은 못하니까… 브레이크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도 몰라 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우주의 어깨는 좀 전부터 축 늘어져 있었다.

 

“있지, 은하야…”

“아! 맞다! 그걸 깜빡했네!”

 

언니, 잠깐만! 은하가 황급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뭔가 급한 일을 잊은 모양이었다.

 

“네, 사장님. 저희 러브어스 쇼핑몰인데요. 저번에 저희 발주 넣은 무지티 세트요. 베이지 컬러 원단이 바뀌었다고 하셨잖아요? 네. 제가 시장에 가야하는데, 언니 병원에 와서요. 일단 바뀐 상세컷 먼저 보내주세요. 시장은 내일 나가 볼게요. 네. 저희도 상세페이지에서 일단 빼 두어야 해서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은하가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후, 이 제품 오늘 업데이트 해야 하는데, 수정 안 하고 그냥 올라갈 뻔했네. 은하가 우주에게 설명하듯 덧붙였다. 무슨 뜻인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우주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쌀쌀한 것 같은 에어컨 온도에 우주가 반팔 아래 맨살을 비비며 창밖을 봤다. 우리 은하, 어른이 다 됐네… 기특하면서도 머쓱해서, 우주가 괜히 콧등만 긁었다.

 

 

 

 

 

 

 

 

 

3. 네가 나를 다시 모르게 되어도

 

 

[소우주. 병원 다녀왔어? 왜 가타부타 말이 없어?]

[집이다. 은하가 데려다 줬어.]

[그래.]

[너는 촬영 중? 점심 먹었어?]

[잠깐 쉬는 시간에 다른 스케줄 하러 왔어.]

[오늘은 언제 들어와?]

[촬영은 한 씬 밖에 안 남았는데 광고사 미팅이 있어.]

[웅…]

[왜. 심심해?]

[심심한 게 아니라… 됐어.]

[밥 먹고 쉬고 있어. 혼자 어디 나가지 말고.]

 

답장 없이 핸드폰을 엎었다. 불쑥 기분이 나빠진 탓이었다. 내가 앤줄 알아? 지 맘대로 나가지 말래, 왜. 우주가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천장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사실 나가래도 나갈 데도 없긴 하지만. 드라마 촬영 중인데, 또 다른 스케줄을 하러 잠깐 나왔다니. 진짜 바쁜가 보다. 넓어서 더 적막한 집을 둘러보며 우주가 생각했다. 하긴, 윤혜성이 그렇게 바쁘니까 걔랑 내가 이런 집에서 살고 있겠지.

 

“그나저나, 이제 뭐 한다…”

 

무료함에 이리저리 몸을 뒤채고 있을 때였다. 요란한 초인종 소리가 공간을 가르고 집안을 울렸다. 우주가 몸을 벌떡 일으켜 인터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미 우주를 내려주고 떠난 지 꽤 된 은하는 아닐 거고…

 

“누구세요?”

 

인터폰을 향해 물으며 우주가 손바닥만 한 화면 속을 들여다봤다. 그 속에는…

 

―얘, 새아가!

 

엄청난 미모의 웬 중년 여성 한 명이 우주를 새아가라고 부르고 있었다.

 

 

 

“쉬어야 하는데 괜히 시어머니가 오면 불편할까봐 오지 말까 했었어. 그런데 또 어떻게 그러니, 교통사고라는데.”

 

여자는 양 손에 백화점 로고가 박힌 쇼핑백을 여러 개 들고 있었다. 부엌의 식탁 위에 짐을 내려놓고, 여자는 안에 있는 것들을 부려놓기 시작했다. 모두 사온 것으로, 갈비탕이며 구이용 한우, 소포장된 반찬과 김치, 케이크와 타르트, 마카롱 같은 디저트까지 그 종류가 다양했다. 이건 주스, 또 이건 요거트. 아침마다 우주도 먹고 혜성이도 주고. 알지? 냉장고에 넣어두는 유리병들을 설명해주는 여자의 뒤에서 우주는 잠시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러니까 이건, 갑자기 부부의 집에 시어머니가 방문한 상황이고… 내 남편은 윤혜성이니까 이 분은 윤혜성의 어머니라는 것.

아… 그렇게 되는 구나… 논리적으로 수긍할 뻔 하다가 우주가 버럭 깨닫고 말았다. 뭐? 혜성이 엄마시라고?

 

“곽 대표한테 미리 전화 하고 왔어. 혜성인 촬영 중이라며?”

“네? 네…”

“혜성이 오기 전에 나 갈게.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엄마가 금방 차릴게, 우주야.”

“아니… 아니, 그게…”

“앉아있어. 환자인데. 응?”

 

시어머니(!)에게 떠밀려 식탁 의자에 앉은 우주의 마음이 안절부절못했다. 지금 우주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분명해 보이는 분 앞에서 단 둘만 남았다. 왜 혜성은 제 어머니에게까지 말을 안 했을까. 걱정하실 거라고 생각했나? 그렇다고 그 말을 우주가 스스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그래… 시어머니인데, 얼굴조차 모른다는 말을…

먹자. 사온 반찬들과 데워진 갈비탕이 정갈하게 식탁 위에 차려졌다. 우주조차도 잘 모르는 식기와 그릇의 위치를 단번에 알고 계신 것으로 보아 왕래가 꽤나 있었던 것 같다고 우주는 생각했다. 맛있다는 데만 골라서 포장해 온 거야. 우주 좋아하는 가나슈 케이크도 넣어 놨으니까 이따 꺼내 먹어. 우주가 울며 겨자 먹기로 숟가락을 들었다. 그 와중에도 잘 먹겠습니다, 인사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불편한 마음에도 시무룩하게 갈비탕을 떠 우주가 입에 넣었고, 너무 맛있어서 이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침도 먹지 못하고 병원에 다녀오느라 사실 배가 고프긴 한 상태였다. 우주가 곧장 밥을 한 그릇 가득 말았다. 숨도 쉬지 않고 밥을 욱여넣는 우주의 앞으로 혜성의 어머니가 물 컵을 밀어주었다.

 

“다치고 나더니 몸 회복되려고 먹을 게 당기나봐. 너 이렇게 뭐 맛있게 먹는 거 나 오랜만에 본다, 우주야.”

“네? 저 원래 돌도 씹어 먹었는데…”

“무슨 소리야. 밥은 만날 깨작깨작. 더군다나 요즘 맘고생 하나 싶어서 걱정했는데…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몸은 좀 괜찮니?”

“네. 오늘 병원 가서 상처 소독 새로 하구 왔어요. 잘 아물고 있대요.”

“아니, 그거 말구…”

“네? 그럼 어디요?”

“…아냐. 얘기하고 싶지 않으면 우리 하지 말자, 우주야.”

 

무슨 말씀이시지? 나 요기 말곤 다친 데 없는데. 우주가 하얀 드레싱이 새로 붙은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밥을 다 먹은 뒤에도 우주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혜성의 어머니는 한 눈에도 고급스러운 투피스를 걷어붙이고 설거지를 하셨고, 몸을 숙여 집안 이곳저곳을 직접 정돈 해주셨다. 물론 약간의 잔소리와 함께. 아무리 사람 써서 치우는 집이라도 그때그때 정리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야 하는 거야. 아니 근데, 왜 이렇게 여기저기 과자 봉지가… 너 생전 군것질은 안 하는 거 같더니, 요즘 입맛이 바뀌었니?

불편한 마음에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우주는 문득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부잣집 사모님 같으신 차림도 심상치가 않았지만, 그보다 왜 혜성이가 없는 시간인 걸 아시면서도 하필 이 시간에 오셨지?

해가 지자 갑자기 혜성의 어머니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허리 한 번 제대로 안 펴고 집안 정리를 끝내자마자 급히 가방을 챙겨 드셨다.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생긴 사람처럼 황급한 모습에 우주가 혜성의 어머니를 따라 정원으로 쫓아 나와 대문 앞에서 실랑이를 했다.

 

“벌써 가시게요? 저랑 과일도 드시고, 혜성이도 보고 가시죠.”

“얘가. 너 농담하니? 큰일 날 소리를.”

“네?”

“저녁에 일도 있구, 아무튼 이제 가봐야 해. 몸 잘 챙겨, 아가.”

“네, 아주머… 아니, 아니. …어머니.”

 

입에 붙지 않는 호칭을 가실 때에야 우주가 겨우 했다. 못내 아쉽다는 듯, 뒤돌아 서기 전에 혜성의 어머니가 팔을 뻗어 우주를 안았다. 잘 모르지만… 심지어 열여덟의 기억을 가진 우주로서는 오늘 처음 뵌 분이지만, 이상하게도 위로를 받는 느낌. 어떤 위로가 필요한지도 모르면서, 어딘가 힘에 부쳤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으면서.

우주가 얼떨떨한 채로 그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잘 있어. 이제 갈게. 꼭 붙잡아주시던 손을 떨어뜨리며 혜성의 어머니가 뒤를 돌았다. 문을 열어드리려고 우주가 걸음을 바삐 따랐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누구도 손대지 않았는데 대뜸 대문이 열렸다. 그 기척에 우주가 고개를 돌리면, 밤 늦게야 올 것 같던 혜성이 밴에서 내려 열린 문 앞에 멈춰서 있었다.

 

“윤혜성. 너 미팅 있다며? 왜 벌써 왔어?”

“왜 오셨어요.”

 

물음표도 없이 낮은 물음은 제 어머니를 향한 것이었다. 이상한 분위기라는 걸 우주가 곧장 알아차렸다. 그닥 밝은 얼굴을 애초에 본 적이 없기도 했지만, 혜성의 얼굴이 또 이정도로 굳은 걸 보기도 처음이라고 우주는 생각했다. 혜성을 마주하자마자 안절부절 못하시고, 잔뜩 긴장한 것 같은 어머니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혜성아, 엄만 그게… 우주가 걱정이 되어서. 좋아하는 반찬 갖다 주고 가려던 길에…”

“우리가 어떻게 살던 신경 쓰지 마시랬잖아요.”

“미안해. 미안해, 혜성아. 응?”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내뻗은 손을, 혜성이 곧장 몸을 빗겨 피했다. 그리곤 애써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가세요. 이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던 우주가 혜성과 혜성의 어머니 사이로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 마침 혜성이가 왔으니까… 어머님 모셔다 드리면 되겠다. 그치?”

 

혜성을 슥 쳐다보며 묻는데, 혜성은 우주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우주가 입을 더 열려고 하는 순간 어머니가 먼저 손 사레를 치며 우주를 만류했다.

 

“아냐. 어차피 차 가져왔어.”

“……”

“…엄마 갈게, 혜성아.”

“어머니…”

“나올 거 없어. 둘 다 들어가렴.”

 

우주의 인사도 기다리지 않고 혜성의 어머니가 황급히 대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곧 어머니가 타고 오셨던 검은색 그랜저가 골목에 빨간 전조등을 비추며 사라지고, 눈으로나마 그것을 우주가 배웅하는 동안에도 혜성은 자리에 선 채로 굳어 있을 뿐이었다. 혜성의 밴 마저 사라진 빈 골목을 잠시간 응시하던 우주가 대문을 닫고 다시 정원을 가로질렀다. 뻣뻣하게 서있는 혜성의 어깨를 툭 치고 그 앞에 마주섰다.

 

“너 뭐야?”

“뭐가.”

“뭐하는 거야? 너희 엄마한테.”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뭐?”

“소우주. 너 지난 오 년 동안 줄곧 이랬어? 내가 싫어하는 거 알면서 나 모르게 어머니 만나고, 집에도 들였던 거야? 그게 아니면 이게 뭔데? 왜 이렇게 이집에 드나드는 게 자연스러운 건데?”

“그게 무슨…”

“…됐다. 어차피 넌 모르지. 기억이 없으니까.”

“야. 윤혜성.”

“나와. 나 피곤해.”

 

 

 

 

킹 사이즈 침대. 가운데에 사람 하나는 거뜬히 자리할 것 같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우주와 혜성이 끝과 끝에서 등 돌리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작은 간접등만을 켜놓은 어두운 공간에서 서로의 숨소리만 엇갈리고 있는 게 우주는 여간 불편했다. 혜성은 잠을 자는 호흡은 아닌 것 같았다. 입술을 뜯으며 망설인 끝에 우주가 몸을 돌려 혜성의 너른 등을 마주했다. 옆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도 혜성은 기척이 없었다.

 

“저기… 미안.”

“……”

“아까 네가 왜 그랬는지… 어머니랑 사이가 어떤지. 기억을 잃기 전에 나는 다 알고 있었겠지. 뭔진 몰라도 나한테 두 번 설명해주지 않아도 돼. 그냥, 이럴 때 무슨 말이든 해줘야 할 거 같은데… 내가 아는 게 없어서 너한테 아무 말도 못 해주니까. 그게 좀, 미안하네.”

“……”

“그냥 난… 어머니 오셔서 밥도 차려주시고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는데 네가 그러니까… 놀라기도 했고, 네가 낯설어서.”

 

잠긴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잇던 우주가 갑자기 헛웃음을 뱉었다.

 

“방금 그 말은 좀 이상했다. 꼭 그런 모습 아니더라도… 난 지금 네가 뭘 해도 낯선데.”

“…내가, 낯설어?”

 

그제야 혜성도 몸을 돌렸다. 오렌지색 간접 등이 비스듬히 비추는 우주의 얼굴을 마주했다.

 

“거리감이 느껴지지. 가뜩이나 열여덟에도 넌 딴 세상 사람 같았는데… 지금은 더 그렇잖아.”

 

우주가 이불을 턱 끝 까지 끌어 올렸다. 다들 어른인데, 나만 바보 무지랭이야…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웅얼거리며 우주가 금세 시무룩해졌다. 혜성이 저도 모르게 팔을 뻗었다. 우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끝을 내미는데, 차마 머리칼에 닿기도 전에 우주가 혜성의 팔을 툭 쳐냈다.

 

“금 넘어왔어. 저리 가.”

 

우주가 덮은 이불을 들췄다. 침대 시트 위, 곰돌이 모양 마스킹 테이프가 정확히 둘 사이의 절반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가르며 붙어 있었다. 혼자 자지 못하는 우주가 고안한 특단의 조치였다. …아오. 혜성이 낮게 짜증내며 팔을 치웠고, 도로 몸을 홱 돌렸다.

 

“쉰소리 말고 잠이나 자.”

 

다시 혜성의 등짝을 마주하게 된 우주가 입술을 삐죽였다.

 

“야. 윤혜성.”

 

아, 왜! 혜성은 꿈쩍 않고 등 돌린 채로 대답했다.

 

“잘 자라.”

“……”

“잘 자라구우.”

“……”

“대답도 안하구…”

 

됐다, 됐어. 나도 잔다. 우주가 토라진 채로 눈을 감았다. 그리곤 일 분도 안 되어 잠이 들었다. 쌔근거리기 시작한 숨소리를 듣고, 여전히 잠들지 못한 혜성이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곤 저를 향해 있던 우주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주의 이마에는 아직 하얀 드레싱밴드가 붙어 있었다. 우주는 깊은 잠에 빠지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는 타입이었다. 곤한 숨소리를 들으며 혜성이 다시금 팔을 뻗었다. 하얀색 밴드 위를 가만 가만 매만지자 우주가 잠결에 얼굴을 찌푸렸다. 문득, 모든 게 신기하다고 혜성은 생각했다.

 

“…네가 나한테 잘 자라고 말 해준 게, 얼마만인지 너 모르지.”

 

집에 혼자 있는 게 신경 쓰여 미팅도 미루고 귀가했다. 혼자 우당탕탕 할 소우주가 불안하다거나 무슨 사고를 칠까봐 걱정되어서가 아니었다. 우주가 지금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또 모든 순간들이 얼마나 난관일지. 다 알지는 못해도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적어도 혼자 헤쳐나간다는 생각 정도는 안하게 해주고 싶어서 온 거였다.

혜성이 우주를 쓰다듬던 팔을 조심스럽게 거뒀다. 이 우주에 저를 다 아는 사람이라곤 소우주 밖에 없었는데. 그 앞에서라면 혜성이 한 번도 스스로를 다 내보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유일한 상대인 우주는, 십 년이 넘는 세월을 거꾸로 걸어 다시 혜성을 모두 모르게 되었다. 소우주마저 저를 알아주지 못하면 그만한 외로운 일이 없을 것 같다고 혜성은 늘 생각해 왔는데,

 

“이상하게, 지금도 나쁘지는 않다.”

 

위태로운 찰나의 평화라는 걸 알면서도, 혜성은 놓치기가 싫었다. 어쨌거나 함께 있다는 사실을.

 

 

 

 

 

 

 

 

 

 

4. 윤혜성의 우주

 

 

 

“스타펀뉴스 위우경 기자 왔댄다.”

 

<카인과 아벨>제작발표회 대기실. <윤혜성 님>이라고 적힌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현민이 가장 먼저 그렇게 언지를 줬다. 스타일리스트가 목 끝까지 조여준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하며 혜성의 얼굴이 곧장 심각해졌다.

 

“사생활 질문, 안 받겠다고 했어?”

“그런다고 안 할 작자냐. 어떻게든 돌려돌려 하겠지.”

 

혜성이 결혼한 것은 고작 스물 넷. 데뷔도 전에 이미 유부남이었던 배경에 대해 대중들은 궁금해 했지만 그 특이한 이력에 비해 알려진 비하인드 스토리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의 부인인 우주가 활발히 활동 중인 현대미술 작가라는 것과, 두 사람이 고등학교 동창생의 인연이라는 정보 정도. 그건 혜성이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언론에 이야기하는 것을 극히 꺼려해 온 탓이었다. 우주 역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을 빼놓고는 평소에 일절 인터뷰를 하는 일이 없었다. 사실 화살과도 같은 질문들을 매너있게 튕겨내는 것 정도야 혜성에게 일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위우경 기자… 혜성이 그 이름을 곱씹으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 혜성의 옆에서 호준이 생각난 듯 무릎을 쳤다.

 

“형수님 교통사고 난 것도 보도 막으려고 했는데 위 기자가 선수 쳐서 뉴스 났던 거죠?”

“그래. 요주의 인물이다.”

 

그러니까 회견장 좀 마저 둘러보고 와. 현민의 말에 호준이 당장 일어나 대기실 밖으로 튀어 나갔다. 스타일리스트마저 잠깐 자리를 비운 공간. 혜성과 단 둘이 남은 현민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위 기자가 너랑 한나 엮어서 쓴 이니셜 기사, 아직도 네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거 알지?”

“그런 걸 왜 신경 써. 사실이 아닌데.”

“넌 신경 안 쓰지만 우주 씨는 아닐걸.”

“우주 기사나 더 안 나가게 좀 해줘.”

“그래. 그 일에 대한 우주 씨 기사… 그것도 위 기자 짓이네.”

 

현민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이 연쇄작용 같았다. 여섯 달 전, 혜성은 함께 드라마 촬영을 하는 한나와 함께 지방 촬영장으로 떠나며 우주를 부탁한다고 현민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고, 그 자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치더라도 그 후에 위 기자가 기사를 내보내도록 막지 못한 건 엄연히 자신의 실책이었다고 현민은 생각했다. 그 하나를 현민이 제대로 해줬더라면, 두 사람은 여태껏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자신들에게 닥쳐온 위기를 가뿐히 이겨낼 수 있었을까.

이제 와서 심란해봤자 뒤 늦었다. 생각들을 애써 머리에서 털어내며, 현민이 혜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곤 오로지 혜성에게만 들리도록 말소리를 낮췄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너희 둘 구청에 이혼 신고하고 완전히 쫑 났으면, 아무리 발표 미루려고 해도 오늘 이 자리가 너 이혼 청문회 될 뻔했어.”

“……”

“오늘만 잘 버티자. 그럼 또 당분간 기자들 상대할 일 없잖아.”

 

 

 

 

“네. 스타펀뉴스. 질문해주시죠.”

 

어두운 정치물인 드라마의 장르와는 달리, 제작발표회장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유연했다. 연기할 때의 자아와 평상시의 모습이 완전히 분리되어, 컷이 들어올 때 빼놓고는 뻣뻣하고 숫기가 없는 혜성에 비해 이번 드라마를 함께 하는 동료 배우는 타고난 자아가 연예인이 아닐 리 없다 싶게 쇼맨십이 넘쳤다. 어느 언론 회견이 그렇듯 마지막은 질의와 응답 시간이었고, 끝까지 위 기자가 잠잠하다 싶어 방심한 사이에 당한 혜성이, 위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안 유리컵에 담긴 물을 천천히 들이켰다.

 

“네. 스타펀뉴스 위우경 기자입니다. 저는 윤혜성 씨에게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개인적인 질문은 받지 않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만 제 질문은 작품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어서요.”

“……”

“혜성 씨가 맡으신 이무열 역은 국정원 요원이죠. 극중에서 대의, 그러니까 자신의 임무를 위해 사랑하는 연인마저 떠나야 하는 운명을 지닌 인물인데요. 이미 가정이 있으신 혜성 씨의 입장에서 이런 주인공의 선택에 충분히 공감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혜성 씨 본인은, 이런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자신의 가정과 아내 분이 혜성 씨에게 몇 순위인지도 팬 분들은 알고 싶어 하실 것 같네요.”

 

말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간 꼬투리 잡아 어그로성 기사를 얼마든지 쓰겠다는 의도가 너무 낱낱이 보이는 질문에, 또 적의로 굳어버린 혜성이 그 표정을 숨기지 못한 때문에 순간 회견장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무대 아래에서 현민이 어떻게든 이 질문을 커트하려고 스탭들에게 신호를 보냈고, 현장의 피디가 그것을 진행자에게 전달하려던 찰나에 혜성이 마이크를 들었다.

 

“드라마의 장면들을 찍으면서, 무열의 입장과 심리에 공감하지 못한 씬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열의 역할을 입고 있는 동안에 저는 그 인물이 되어서만 생각하고 행동할 뿐, 거기에 제 개인적인 신념을 투시하지는 않으니까요.”

 

뒤늦게야 신호를 받은 진행자가 혜성의 말 사이를 기다렸다가 얼른 끼어들었다.

 

“네, 그렇죠. 앞선 질문에도 혜성 씨가 여러 번 비슷한 대답을 해주셨던 것 같아요. 그만큼 우리 혜성 배우님이 얼마나 이번 역할에 몰입하고 계신지 알 수 있는 답변이었던 것 같습니다.”

 

“뒤의 질문에 마저 답변하겠습니다.”

 

혜성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겉보기에는 차분한 혜성의 얼굴이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걸 간파한 사람은 현민 밖에 없었다. 현민이 팔을 높이 들어 엑스자를 그렸다. 그 쪽을 흘긋 보던 혜성이 이내 다시 시선을 보내 저 멀리 있는 위 기자와 정확히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 그건 무열의 기준에서 그렇단 거고. 윤혜성이었다면 조금 다르긴 할 겁니다. 전 무열처럼 대단한 사회적 정의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니라서요. 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고작해야 제 주변을 둘러싼 작은 우주 뿐이고, 그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는 유일한 사람은 제 아내거든요.”

 

혜성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본인의 가정에 대해 언급한 것은 사실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플래시가 산발적으로 터졌다가 사그라들때까지 혜성은 여전히 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제가 할아버지가 되고 나서도 옆에 있을 사람은 제 아내여서요. 많은 분들 궁금증 해결해 드리는 것보다 저는 제 아내의 생활을 보호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위우경 기자님. 이제 제 개인 적인 것에 대해서라면 그만 알고 싶어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5. 어느 여름밤의 우발적 정서

 

 

혜성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우주는 정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고작해야 한 바퀴도 겨우 돌 좁은 공간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혜성이 도착한 것을 보고 브레이크를 걸어 우주가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뭐야? 혜성이 물었다.

 

“너랑 은하가 하도 나가지도 말라고 하고, 또 나도 길도 모르고 해서… 그냥 여기서 타고 있었지.”

“자전거는.”

“아. 창고에서 찾았어.”

“그새 거기까지 뒤진 거야?”

“먼지 좀 뒤집어 썼지. 저녁은 먹었어?”

“생각 없어.”

“그럼 먼저 들어가서 쉬어. 나 이거 몇 바퀴만 더 돌고 들어갈게.”

“대체 야밤에 왜 그러고 있는 건데?”

 

우주가 자전거에서 내려 혜성의 앞으로 다가왔다. 체려을 한껏 쓰고 땀을 흘리며 양 볼이 붉어진 우주는, 근래 혜성이 본 중에 가장 활기가 넘쳐 보였다.

 

“대체 그림도 못 그리겠고… 그럼 소우주가 잘하는 게 뭘까. 생각하다가 떠오른 거야.”

“네가 자전거를 그렇게 잘 타는 편이었나?”

“자전거도 잘 타고, 나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기도 진짜 잘해. 운동은 뭐든지 좋아하거든. 그래서 이러고 있음 기분이 좀 나아질까 해서.”

“효과는, 있었어?”

“응. 확실히.”

 

하긴, 소우주 뜀틀도 잘 넘고 투포환도 잘 던져서 선생님들이 태릉 갈 인재가 미술계로 잘못 왔다고 종종 농담하시기도 할 정도였던 걸 혜성이 기억했다. 혜성이 들고 온 제 짐 가방을 정원 한 쪽에 아무렇게나 내려놨다. 그리곤 러기지 백의 앞주머니만 열어, 그 안에서 볼 캡을 하나 꺼내서 깊이 눌러 썼다. 혜성이 우주의 손목을 잡자 우주가 놀라 눈이 커졌다.

 

“그럼 가자.”

“어딜?”

“가보면 알아.”

 

혜성이 우주를 데리고 향한 곳은 한강이었다. 혜성이 빌려온 전동 킥보드를 보고 우주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기울었다. 씽씽이? 한발로 슝슝 타는 거? 야, 차라리 자전거를 빌리지. 뭣도 모르고 불평하는 우주에게 혜성이 일단 헬맷을 씌웠다. 이거 그런 거 아니거든.

우주의 비명소리가 곧장 이 근방을 쩌렁쩌렁 울릴 것이라는 혜성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처음 두 발을 킥보드 위로 딛는 순간부터 우주는 완전히 감을 잡더니, 이내 혜성의 주변을 빙빙 돌며 나름 기교까지 부리기 시작했다. 들판에 풀어놓은 개처럼 신나서 돌아다니는 걸 보니 데리고 나오길 잘했다 싶긴 한데, 산책 나와 진정 안 되는 골든리트리버를 부르려면 어떻게 해야 되더라… 제 턱을 톡톡 두드리던 혜성이 이내 그 방법을 깨달았다. 소우주! 빨리 와! 컵라면 먹자!

 

“우리 이렇게 종종 밤에 나오고 그랬었어?”

 

우주가 뚜껑을 덮은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말을 꺼냈다. 맞은편인 혜성의 앞에는 코코넛워터 하나뿐이었다. 넌 안 먹어? 육개장 사발면을 고르며 우주가 물었을 때 혜성은 촬영 중이니까. 하고 답할 뿐이었다. 아침에 부은 얼굴로 촬영장에 나갈 순 없다는 뜻이었다. 혜성이 모자를 고쳐 쓰며 우주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렇게 무장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알아봐서 곤란하니까. 어느 순간부턴 잘 안 나오게 되더라고.”

“아. 이 킥보드 너무 몸에 쫙쫙 붙길래, 나 내가 자주 타본 줄 알았어.”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너 나나 처제 없이 혼자서 이거 타러 나오면 절대 안 된다. 가뜩이나 이마 찢어진 애가.”

“아우, 알겠어. 알겠어.”

 

한창 열대야가 기승이라는 시기였다. 가족 단위로 한강에 나온 사람들이 많았고, 매점 앞 노천 테이블 근처에도 무리를 지어 자전거며 전동 휠을 타는 사람들을 보며 우주가 빈 젓가락을 입에 물었다. 이제 막 자전거를 타는 유아들이 아빠와 함께 줄지어 우주와 혜성의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얘랑 나랑 결혼한 지 오년이라고 했는데, 왜 우린 아직… 생각하며 혜성을 보다가 우주가 꿈에서 깬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미쳤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갑자기 우주는 얼굴이 홧홧해졌다. 볼이 붉어진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우주가 다 익은 라면을 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아한 듯 올려다보는 혜성에게 횡설수설 설명했다.

 

“아니, 저! 나 밀키스 마시려고! 매점 가서 얼른 사올게!”

“라면 불어. 앉아서 먹고 있어. 내가 사올게.”

“아냐! 내가 가, 내가!”

 

따라 일어난 혜성이 엉거주춤 했다. 쟤가 갑자기 왜 저래… 하는 표정이었다. 의자를 퍽 밀고, 우주가 성큼 성큼 테이블 바깥으로 돌아 나올 때였다.

 

“어, 어…!”

“소우주!”

 

자전거를 타며 오던 사람이 방향을 잘못 선회해 우주가 지나던 곳으로 돌진했고, 혜성이 순간 우주를 잡아 당겨 보호하기 위해 품에 안았다. 제 머리가 혜성의 가슴팍에 부딪히고, 그럼에도 튕겨나가지 않고 뒷머리를 감싸는 손이 있다는 것을 느끼며 우주가 혜성의 품속에서 그 상황을 천천히 파악했다.

죄송합니다! 하고 젊은 남자가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큰일 날 뻔했다는 듯, 씩씩거리며 숨을 쉬던 혜성이 그제야 품에서 우주를 조금 떨어뜨리고 물었다. 너 괜찮아?

우주가 혜성을 올려다봤다. 모자 아래에 가렸지만 걱정스런 얼굴의 윤곽이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윤곽만 보이는데도 정말 잘 생긴 얼굴에… 우주는 자신이 그 잘생긴 남자의 품 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얼굴과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우주는 이제 붉어진 양 볼을 숨길 수도 없게 되었다.

 

“우주야. 우주야?”

 

우주는 순간 제 가슴이 호흡을 빗겨간 느낌으로 뛰는 것을 깨달았다. 두근거렸다.

 

“…어?”

“너 괜찮냐고.”

“…응. 난, 나는 괜찮… 딸꾹!”

 

딸꾹질과 동시에 우주가 혜성을 밀치며 뒤로 홱 물러났다. 가슴은 갑자기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고, 엇박자처럼 딸꾹질도 나고. 둘중 어느 것도 혜성에게 들키기 싫어서였다. 우주가 그대로 뒤를 돌았다. 그리곤 라면과 혜성을 두고 그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주야! 소우주! 혜성이 부르는 소리에도 우주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맘 같아서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주가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뛰기 시작했다. 급하게 라면을 버리고 온 혜성이 따라 오는 것을 느꼈지만 달음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아씨, 자존심 상해.”

 

윤혜성이 뭐라고 심장이 다 뛰고 난리다. 소우주로서는 인정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에필로그

 

 

또 팔다 남은 김밥이야? 아침밥상을 마주하자마자 우주가 볼멘소리를 했다. 손가락을 감싼 반 깁스 때문에 우주는 젓가락 대신 포크를 쥐었다. 단무지를 콕 찍어 김밥을 하나 집어 들자마자 내용물이 우수수 쏟아졌다. 퍽퍽한 김밥을 욱여넣는 우주의 앞으로 우주의 엄마가 물 컵을 턱 내밀었다.

 

“우주 너. 병원 같이 다녀주는 친구 있다며? 왜 엄마한테 말을 안했어?”

“병원 같이 다녀주는 친구… 아. 윤혜성?”

“엄마 체크카드에 병원비 안 빠져나가서 너 학원가고 없을 때 은하한테 물어봤더니 그러더라. 그 친구가 병원비도 내준담서!”

“몇 천 원 하지도 않는 거… 그리고 나 걔 땜에 다친 거거든?”

 

“걔가 너한테 담 넘으라고 시키디 어디? 아니잖아!”

 

엄마가 열심히 벌어서 특강 비 내줬더니 손가락 삐끗해 와서 그림도 못 그리고. 아주 입만 살았지, 네가? 입안으로 들어오는 밥알보다 많은 잔소리에 우주는 체할 것 같아 가슴을 턱턱 두들겼다. 네,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요. 여느 때처럼 대충 능글을 부려 넘어가려는 작전이 이번만큼은 통하지 않는 듯했다. 계란국을 담던 국자를 쥔 채로 잠시 생각에 잠기던 우주의 엄마가, 이내 단호한 불호령을 내렸다.

 

“오늘 병원 갔다가 그 친구 데려와.”

 

 

 

 

우주가 물리치료를 받는 동안, 언제나처럼 혜성은 병원 밖에 먼저 나와 있었다. 12월이 되면서 병원 앞 회전교차로 한가운데에 세워진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수천 개는 되어 보이는 알전구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나 혜성은. 주변의 모든 빛을 빼앗아 혼자 빛나는 것 같은 그 형상에는 조금도 관심 없는듯 한 손으로 핸드폰을 매만지고 있었다.

 

[혜성아, 어젠 엄마가 약속 어겨서 미안. 올해가 가기 전엔 엄마가 꼭 한번 가볼게. 사랑해. 메리 크리스마스.]

 

혜성이 답장도 표정도 없이 핸드폰 플립을 닫았다. 어쩐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뒷모습… 새로 처방받은 약을 챙겨들고 병원 건물을 나오며 우주가 생각했다. 폴짝대며 혜성의 뒤로 다가간 우주가 손가락을 세워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혜성은 말없이 뒤를 돌아 우주와 눈을 마주했다. 우주가 코를 훌쩍이며 안경을 끌어 올렸다.

 

“어제는 잘 보냈어?”

“……”

“크리스마스였잖아.”

 

혜성에겐 빨간 날일뿐이었다. 빨간 날이라 병원이 문을 닫았고, 그래서 소우주를 볼 일이 없었던 날. 그리고… 언제나 처럼 엄마가 약속을 어긴 날. 어. 혜성이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그래. 너한테 무슨 따수운 대답을 바라겠냐.”

“그게 아니라,”

“너 떡볶이 좋아해?”

“뭐?”

“떡볶이 싫음… 순대? 김밥? 떡꼬치?”

 

탁구공처럼 튀는 우주의 화제 전환에 혜성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갑자기 웬 떡볶이… 어리둥절한 혜성의 앞에서 우주가 머리를 긁적였다. 저… 사실은 울 엄마가 널 좀 보고 싶대.

 

“내가 너한테 신세진다고 생각하나봐. 뭐…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 근데 병원은 니가 같이 가준다고 했던 거지 난 분명 괜찮다고 했는데!”

“그래서.”

“어?”

“결론이 뭐야?”

 

아, 암튼… 울 엄마가 요 앞 상가에서 분식집 하시거든. 너 맛있는 거 해주신다고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우주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신축 오피스텔 건물이 있었다. 잠시간 대답이 없던 혜성이 갑자기 발걸음을 떼 어디론가 향했다. 우주가 급히 혜성을 뒤따랐다.

 

“야! 대답 안하고 어디가?”

“저 상가, 가자며.”

“지름길 알아. 같이 좀 가!”

“나도 알아.”

“네가 어떻게?”

 

우주가 겨우 혜성을 다 따라잡아 옆에 섰다. 고작해야 재작년에 새로 생긴 신축 건물인데, 본래 대로라면 육교를 건너 빙 둘러야 하는 저 곳까지 빠르게 가는 샛길을 어떻게 아냐는 뜻이었다. 그제야 보폭을 맞춰주며 혜성이 발걸음을 조금 느리게 했다. 그리곤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내가 저기 살아.”

 

 

 

 

어머. 학생이 우리 우주 친구였단 말이야? 오피스텔 건물의 지름길뿐만 아니라, 혜성은 상가에 딱 하나 있는 ‘우주분식’으로 가는 길까지 훤하게 알고 있었다. 우주 엄마는 혜성을 보자마자 떡볶이 철판을 뒤적이던 나무주걱을 놓고 단골손님을 맞을 양으로 웃어보이다가, 혜성이 우주와 함께 온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안녕하세요. 짧게 인사하는 혜성의 목소리에도 우주가 본 적 없는 친숙함이 묻어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여기 산다고 했잖아.”

 

 

의아해 하면서도 우주는 가장 안쪽 자리로 혜성을 안내했다. 우주의 엄마가 냉장고에서 콜라를 두 개 꺼내 두 사람의 앞으로 내밀었다.

 

“교복입고 온 적은 한 번도 없어서 어느 학교 다니는지 몰랐어. 우주랑 같은 미술반?”

“아니야, 엄마. 얘는 연기과.”

“어쩐지. 태가 남달라.”

 

우주네 엄마의 호들갑에 혜성이 머쓱한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제야 우주는 뒤늦은 의문들이 들었다. 여기는 근방 직장인들이 주로 사는 일인용 거주공간인데, 어째서 아직 고등학생인 혜성이 여기가 집이라고 했던 걸까. 아무리 궁금한 건 못 참는 성미래도, 이런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는 일단 잠자코 있어야 한다는 게 우주가 18년을 살며 터득한 눈치였다.

 

“조금만 기다려. 맛탕이랑 잡채랑, 또 엄마가 탕수육도 금방 튀겨줄게.”

“어우, 그걸 누가 다 먹어. 엄마!”

“지지배. 지 혼자서 삼인 분은 거뜬히 먹으면서.”

“…아, 엄마!”

 

차려주신 음식이라고 혜성은 제 양보다 훨씬 무리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잘 먹었다는 인사를 예의껏 하는 걸 보며 우주는, 그래도 혜성이 그렇게 되바라진 애는 아니었다는 원래의 확신을 되찾았다. 그럼 대체… 진이한테는 왜 그랬던 거지?

뒷정리를 도우며 쭈뼛대는데, 찜솥에 새 순대를 뜯어 넣으며 우주의 엄마가 조용히 한숨을 뱉었다. 소독약을 뿌려 테이블을 행주로 닦으며 우주가 물었다. 또 왜 그래.

 

“애가 안 됐어.”

“누구? 혜성이?”

“그 학생 사는 동 동장이 여기 단골이야. 와서 얘기해주는데 가정사가 아주 복잡하드라.”

“왜?”

“부모가 어릴 때 이혼해서, 생부 얼굴도 모르고 양육비만 받았대. 애 아빠가 금방 새살림을 차렸대나. 그렇게 엄마랑 둘이서 여태 쭉 살았는데 글쎄, 애 고등학교 올라오기 전에 엄마도 재혼을 했다는 거야. 잘은 몰라도 엄청난 부잣집이라는데… 그 집에서 다 큰 새 아들 달갑지 않은 티를 냈겠지.”

“……”

“자긴 안 갈 테니까 엄마라도 잘 살라고 결혼해 내보내고, 그래서 애가 혼자 사는 거야. 열일곱 살 때부터.”

 

테이블을 닦던 손이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멈췄다. 부잣집 아들이란 소문 들리던 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던 모양이다. 우두커니 선 채로, 우주가 이미 혜성이 사라지고도 남은 자리를 분식집의 유리창 밖으로 가만히 내다보았다. 혼자 사는 구나. …그것도 완전히 혼자.

 

 

 

 

집에 돌아온 우주는 잠이 오지 않았다. 아까 잡채를 너무 많이 먹었나. 침대 위를 뒹굴던 우주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불쑥 앉았다. 머리맡을 뒤적거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저, 윤혜성. 내일 나랑 같이 미술관 안 갈래? 나 보고 싶은 전시가…]

 

“아니지. 내가 뭐라고 걔한테 미술관을 가쟤? 미쳤어? 너 지금 무슨 생각이야, 소우주?”

 

그래. 괜히 안하던 짓 하지 말자. 곧장 단념한 우주가 메시지를 모두 지웠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던 우주가 핸드폰 문자음에 우주가 화들짝 놀라며 다시 핸드폰을 뒤집었다. 발신자는 혜성이었고, 먼저 사진을 한 장 보냈는데 영화표 두 장을 찍은 것이었다. 뒤이어 혜성이 메시지를 한통 더 보내왔다.

 

[맛있는 거 얻어먹었으니까. 내일 병원 진료 끝나고 한 시 영화. 뭐, 싫으면 말고.]

“어, 어. 어! 안 싫은데! 아닌데!”

 

우주가 거의 침대에서 일어났다. 혼자서 열심히 아니라고 자기변호를 한 뒤에야 그 말을 혜성에게 답장으로 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우주가 서둘러 키패드를 두들겼다.

 

[그래! 영화 좋아! 내일 봐!]

[어.]

[그리구. 늦었지만 메리크리스마스.]

[너도.]

 

짧은 대화였다. 엄마 몰래 냉장고 속 맥주 한 캔을 마셨을 때처럼, 우주는 갑자기 마음이 탄산 지나간 것 마냥 욱씬거리고 양 볼에 순간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움찔거리는 발가락 끝을 우주가 힘껏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뭐야? 나 왜 이래? 이거 혹시…”

 

조심스럽게, 우주가 왼쪽 쇄골 아래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설마… 하는 순간 응답은 바로 찾아왔다. 두근, 하고 큰 진폭의 울림이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졌다. 마치 딸꾹질을 하는 것처럼. 우주가 다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곤 혼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미쳤어, 소우주…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나는 사랑을 믿기로 했다.

포슈어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