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BGM


· 추석의 꽃말은 연참!



옛날, 천하가 지금보다 좁고 사철 온난한 초여름 날씨가 계속되었다던 전설의 시대, 이 대륙에는 유(洧)라는 나라가 있었다. 유나라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대국(大國)으로, 세상 구석구석에 자리잡은 작은 나라들과 달리 이어져 내려오는 왕실의 정통이 있었고 또 이 세상이 생기면서 전해 내려오는 꽃의 약속이라는 화인을 부여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었다. 후계를 잇지 않는 왕실 여성이 맡는 화무(花巫)라는 직책이 이 약속을 관장했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자유로운 의지로 맺어지는 이 약속은 꽃송이와 이파리의 낙인이 약속을 맺은 이들 각각에게 나타나 상호간에 특별한 효과를 부여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화인의 갯수는 하나뿐, 따라서 맺을 수 있는 인연도 한 종류뿐이었지만, 또한 유나라 왕실의 전통에서 내려오는 한 가지 특별한 화인이 더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후계자의 인(印)이었다. 사철의 꽃이 한 꽃가지에 핀다는 서천의 전설에 따라 울타리의 모습으로 핀다는 이 후계의 화인은 대통을 이을 수 있는 왕실의 정당한 후계자에게만 나타난다고 여겨졌으며, 후계의 화인을 가진 이는 복수의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서약을 받을 수가 있었다.


유나라의 흔적이 전설 속으로 사라지고 땅에서 신들이 떠나가며 상제와 선녀들은 이제 무당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시대에 아직까지 이 제국에도 전해 오는 것이 있다면 이 꽃의 약속, 화인이었다. 어지러운 천하를 평정하고 지금의 하제국을 세운 선황제, 영울제에게도 이 울타리의 인이 있어 많은 유력 인사와 무사들과의 화인을 통해 그 세력을 모았다고 했고, 현 황제인 안평제 또한 화인을 가진 여러 형제들 사이에서 경쟁 끝에 마지막으로 황위에 올랐다. 


반대로 말하자면 후계의 인이 나타난다면 원하지 않아도 황권에 관련된 인물로서 파란에 휩쓸릴 수밖에 없고, 인이 없다면 반정을 도모하지 않는 이상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노릴 수 없다는 뜻이었는데, 태어날 때부터 있기도 하고 늦어도 8~10세에는 나타나는 이 후계의 인이 림에게는 없었다. 말하자면 후계 다툼으로부터 안전하고 관계 없을 황실의 일원이라는 보증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열 한 살이 되는 해에 제갈림은 영녕군주로서 봉작을 받고 현 계하왕부를 이어갈 인물로서 선택받았다. 현재 황위를 두고 경쟁하고 있는 후계들에게 조력자가, 혹은 지금과 같이 초야에 묻혀 사는 학자가 되리라는 운명을 그는 부여받았을 터였다.


그리고 그 연회의 날이 있었다.

 

천자는 융롱을 데리고 가겠다는 영녕의 요청을 승낙했다. 그 순간 연회장에 감도는 분위기란 고요하고도 빠르게 제각각의 파문이 번져나가는 것처럼 눈빛과 속닥임이 천막마다 만연했는데, 그 가운데 올곧은 눈을 한 꼭 두 사람이 있었다. 대개 무사가 황실의 주군을 모신다면 수호의 화인을 맺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인 것으로 특별한 계약이나 처치는 없었다. 융롱은 신변을 정리하고 진산(陣山) 가운데 위치한 영녕의 계하(季夏)왕부로 거처를 옮겼다.


대장군가 따님의 명성은 어쩌면 황실의 일원인 영녕보다도 세간에 잘 알려진 것이었다. 형제가 없고 벌써부터 무예의 수준이 범상치 않으니 장군가의 후계를 이을 것임은 명확하였고, 시원시원하니 병사들과도 거리낌없이 지내는 모습은 인덕이 있다고 하여 지략가며 미래를 입에 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장군으로서 군권을 장악하기도 좋을 것이라 벌써부터 이야기하곤 했다. 서 장군가는 아마도 세간에서 말하는, 타고나는 강골(强骨)이 이어져 오는 집안이었다. 황실 연회에서 달려드는 말을 막아낸 일도, 이미 성인이 다루는 철검을 다루는 근력과 체격이 아니었다면 무공의 수준이 높았다 하더라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서융롱이 산 속의 왕부인 영녕군주에게로 간다. 지략가들은 의아할 일이었고 야심가들은 더욱 어리둥절할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융롱 본인은 그 사실에 별다른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누군가 물어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고, 감상을 물어도 그러한가 보지요, 심심하게 대답하는 것이 썩 재미있는 대답은 나오지 않아 아직 어린 모양이라고 소문을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말했다. 어쨌든 아직 다들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산 속의 왕부란 생각보다도 별 것이 없는 곳이어서, 융롱이 아버지를 따라나가 다른 병사들과 어울리며 합을 겨루던 연무장도, 황도에 있는 저택들이라면 대개 쌓아 놓는 높은 담장도 없었다. 돌과 나무로 세운 낮은 담장이며 대문은 여느 산사(山寺)나 검박한 관리의 집과 같아, 왕부는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형식은 잘 갖추고 장식은 적은 채 호젓하였다. 


융롱과 영녕은 차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벽라춘(碧螺春)이 막 나오기 시작하는 때였다.

 

"보다시피 그리 특별할 것은 없어. 규모가 아주 크지도 않고, 병영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지. 솔직히 말하면 네가 와서 할 일이 있을지 고민이기도 해."


달라고 말할 때는 언제고 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가 싶을 수도 있었으나 필요하지 않은 일을 굳이 꾸며 붙이지 않는 것이 제갈림의 성격이었다. 융롱은 한층 더 태평스레, 그 말에 떠오르는 대로의 감상을 내놓았다.


"산과 공기가 좋아서 수련하기 좋을 것 같습니다."

"네가 원래 있던 곳에 비하면 심심할 텐데도?"

"이제 군주를 주인 삼게 되지 않았습니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죠."


영녕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제대로 보았다. 그는 이 담백한 성격의 호위무사가 참으로 싫지 않았다.


"그러면 내게 필요한 이야기나 좀 해 주어. 먼저는 네 주변에 대해서가 궁금하구나."

"제 주변이요?"

"대장군저가 있는 수도의 이야기, 중앙에서 지내며 보고들은 이야기 같은 것 말이야."


영녕은 궁금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책으로 얻을 수 없는 정보를 원했다. 대장군가의 입지와 주변 관계부터 재작년에 책봉을 받았다는 황태자와 또 한 세력 한다는 공주에 관해서,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수도에서는 어떤 소문이 돌고 사람들은 말에 휩쓸리며 여론이 형성되는지. 융롱은 잠깐 생각하다가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면 1공주님… 소양공주께서 저를 꽤 탐내셨다고 했지요."

"그래?"


영녕은 의아하여 물었다. 소양공주라 불리는 제 1공주는 산 속에 있는 영녕에게도 들려올 만큼 유력한 차기 황제의 후보자였으며, 황제의 소생 중에서도 맏이여서 그를 따르는 이들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공주라면 융롱을 필요로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다만 궁금한 것은, 그렇게 유력한 공주가 이미 점찍어 놓았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자신을 택한 이유. 보잘것없는 왕부로 군말없이 따라온 이유였다.


"그 분의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들었기에."

"예? 별달리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만……."


그러면 어째서, 하는 표정으로 영녕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알자 융롱이 덧붙였다. "군주께서 저를 부르셨잖습니까."


영녕은 다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 이런 사람이라니. 서융롱의 놀라울 정도의 진솔함에 그는 흡족하기도 했고 그런데 동시에 문득 불안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아이에게는 나를 택한 명확한 이유가 없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만들어 가면 되지. 곧이어서 림은 생각했다. 인연이란 필시 그런 것이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려서도, 또 그저 가만히 손 놓고 찾아오기만을 바라서도 안 되는 일. 그리고 두 사람의 시간은 이제 막 시작하는 참이 아니던가.





영녕은 융롱에게 처음 며칠간 여러 가지 것들을 질문했으며 그렇게 해서 대강 궁금한 점들을 많이 해소했다. 솔직담백하다고는 하나 촉망받는 장군가의 딸, 융롱은 확실히 여기저기서 보고들은 것이 많았다. 2년 전까지 후계에 관한 경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무마하기 위해 천자께서 태자 책봉을 하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1공주 측은 여전히 유력한 후보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는 점, 공주는 몇 번 융롱을 만났을 때에 자신의 호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암시를 담아 말한 적이 있다는 점 등이었다.


"하면 소양공주께서는 내가 못마땅하시겠군. 꼭 바라던 이를 눈앞에서 빼앗아간 것 아닌가."

"그럴까요?"

"한성격 하신다고 들었는데."


융롱은 영녕의 말에 잠시 길게 생각하는 듯하다가,


"큰 뜻이 있는 분이라면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영녕이 잔잔히 웃음지었다. 담백하게 뜻을 밝히고, 고요하게 멀리 이룬다. 


"너는 네게 와서 심심하지는 않고?"

"글쎄, 언니께서는 산책을 좀 하셔야겠어요."


융롱은 때로 이렇게 엉뚱하게 말을 받았다. 나이가 꼭 한 살 어릴 뿐이니 언니라고 불러도 좋다고, 비슷한 나이에 너무 격식을 차릴 것 없이 이야기하자고 영녕이 말하고서는 더욱 그랬다. 언니. 그 호칭이 무슨 정말 피로 이어진 언니라도 되는 것처럼 융롱은 림에게 참견을 해 댔다. "새벽같이 일어나셔서는 독서, 아침을 드시고 나서도 또 강독. 차를 한 잔 마시고 한숨 돌리고 나면 이번에는 습자를 하시니 이렇게 바깥공기가 좋은 곳에 계셔도 의미가 없잖습니까." "매일같이 익혀도 부족한 것이 학문이란다."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써 주지 않으면 굳어지는 것이 몸입니다." "내가 몸을 써서 뭘 하게?" 별 소리를 다 한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림에게 융롱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군주, 이건 호위 무사로서 제 책임이기도 합니다."

"뭐가 말이야?"

"언니께서는 계하왕부가 주변에 손 쓸 이도 없고 권력다툼도 없는 초야라 제가 할 일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기본적으로 호위가 하는 일이란 주군의 안녕을 책임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몸이 튼튼하셔야 안녕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제갈림이 보고 있으면 서융롱은 제 말에 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론 저는 군주의 곁에 머물며 군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지키겠지만 만일 제가 앞을 지키고 있을 때 뒤나 다른 방향에서 공격이 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잠깐이라도 제가 달려올 수 있는 시간을 벌 만큼 대항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은 일이나, 그렇지 않아도 빠르게 몸을 날려 공격을 피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안전을 지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빠르게 몸을 날리지 못할 거라고?"

"네."


융롱이 즉답했다. 제갈림은 이제 어이가 없었다. "화살이 얼마나 빠른데요. 제가 피하는 훈련을 해 봐서 압니다."


"내가 화살을 맞을 일이 어디 있다고 그러니."

"또 이를테면, 체질이 건강해야 약을 강하게 쓸 수 있고, 또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는 독수(毒手)를 이겨내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몸이 허약하면 아주 흔한 방으로도 사람을 해할 수 있고, 건강한 사람을 해치기란 비상한 독이 아니라면 어려운 일이 됩니다. 양도 어느 정도 이상 필요하니 눈치채고 방비하기도 쉽지요."

"더 해봐라."

"어딘가에 친정(親征)을 나갈 때도 직접 무기를 드실 수 있다면 그 편이 사기에 좋고 당위도 있습니다."

"내가 왜……."

"그야 언젠가는……."


눈이 마주치고 잠시 침묵이 돌았다. 그러고는 영녕이 먼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너 지금 내가 후계 다툼에 참여할 거라고 생각하니? 저 황태자 전하와 공주 전하가 있는 지금에서?"


아 하고 융롱은 조금 벙해진 표정으로 영녕을 마주했다.


"융롱, 내가 책봉을 받은 것은 후계의 화인이 없기 때문이야. 그런 미래를 가정한다는 것이 어디 내게 가당키나 하니."


거기에는 융롱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영녕군주는 곧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산책을 하는 것도 좋겠지."

"역시 그렇지요?"

"네가 같이 간다는 조건하에서 말이다."

"그야 당연합니다. 저는 군주를 곁에서 지키는 호위가 아닙니까."

"화살을 쏠 암살자 같은 것은 여기 없을 텐데도……."

"발을 헛디디시면 잡아 드릴게요."

"너 지금 내가 걷기도 잘 못 할 거라고 말하는 거니?"

"호랑이가 나오면 잡아 드리겠습니다."


참나. 너무 뻔뻔한 말에 영녕은 지청구를 먹이지도 못하고 있다가 "그래라." 하고 말았다. 융롱이 씩 웃었다. 


"그런데 정말로 몸을 쓰는 법을 배워 두시면 좋으실 겁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있든지요……." 

"네가 혼자 단련하기 심심해서 그런 것 아니고?" 

"그런 것도 있고요." 


하여간 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는데 어쩔 것인가. 영녕도 한 직설 하는 인물이었지만 이토록 속마음을 바로 내보이는 상대에게는 '그러냐.', '그렇다.' 말고는 대꾸할 의향이 없어지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 그것도 생각해 보마. 그런데……."


대신 영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를 했다.


"너도 낮에는 같이 책을 읽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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