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0.


옛날 어느 왕국에 칭찬받기 좋아하는 공주가 살았습니다

공주는 아들이 아니었기에 오빠들과는 달리 거친 흙과 모난 돌로 뒤덮여 언제나 흉년인 영토를 물려받았습니다.

공주는 이 땅을 반드시 좋은 곳으로 바꿔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칭송받는 여왕이 되어 보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즉위식을 치르고 공주는 세상에서 가장 척박한 왕국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여왕은 나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돌을 고르고 흙을 갈았습니다.

멋진 왕좌와 화려한 드레스 대신 양을 치거나 호미를 잡았습니다.

온갖 빛나는 장신구 보다 좋은 모종을 탐냈고, 우아한 가구와 값비싼 향수를 찾는 대신 벌레와 병든 잎을 솎아냈습니다.

여왕의 식사는 소박했고, 입는 옷들은 수더분했으며, 잠자리는 간소했습니다.


백성들도 여왕을 따라 소탈하고 부지런한 삶을 살았습니다.

재물에 욕심내는 자가 없어졌고,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싸움을 하는 자도 사라졌습니다.

모두가 여왕을 존경했고 따라 했으며 나라는 점점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어갔습니다.


한편 신하들과 왕족들은 걱정에 잠겼습니다.

여왕이 나라를 돌보느라 결혼은커녕 남자조차 멀리했던 까닭이었습니다.

무릇 사람이 모여 하나의 나라를 이루는 데에는 크고 작은 가족들이 있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남녀가 만나 합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자자손손 번성하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왕은 신하들과 왕족들의 충고를 귓등으로 들었습니다.

여왕에겐 오로지 살기 좋은 나라가 되는 것만이 중요했습니다.

비옥한 땅과 풍족한 작물이 있는 왕국의 군주가 되어 두고두고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만이 여왕의 목표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왕국은 풍요롭고 넉넉한 곳이 되어갔습니다.

땅은 걸고 기름졌으며 작물은 언제나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둘 여왕과 왕국을 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여왕의 나라를 천국과 가장 닮은 곳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백성들 모두 자신의 집 앞에 물을 길 수 있는 우물과 곡식을 거둘 수 있는 땅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름엔 시원한 그늘을, 겨울엔 따뜻한 군불을 주는 풍성한 숲이 왕국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나무마다 탐스러운 열매가 열렸고, 가축들은 풍족한 음식과 가죽을 주었습니다.

누구도 굶지 않았고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거나 지배당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여왕의 나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가 되었습니다.

여왕의 헌신적인 노력이 마침내 빛을 발한 것입니다.


하지만 태평성대엔 대가가 필요했습니다.

여왕이 쓰러진 것입니다.

오랜 시간 왕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여왕은 결국 병을 얻고 만 것이었습니다.


거친 땅을 힘차게 내디뎠던 여왕의 두 다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부지런히 밭을 일구고 가축을 치며 백성들을 지휘했던 여왕의 두 손에도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여왕은 꼼짝없이 병상에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처음엔 여왕을 걱정하던 백성들과 신하들도 오랜 시간이 지나자 여왕을 귀찮아했습니다.


여왕은 깊은 슬픔과 무기력에 잠겼습니다.

뒤늦게 자신의 헌신이 얼마나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아아- 내게 지아비와 자식들이 있었다면!”


뒤늦게 여왕은 후회했습니다.

신하들의 충고를 듣지 않을 것을 한탄했습니다.

지금껏 나라와 백성의 번영을 위해 결혼도 하지 않고 홀로 지냈던 게 이토록 후회된 적이 없었습니다.


여왕은 결국 대를 이을 자식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외로이 침대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여왕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여왕의 이야기를 대대손손 들려주며 후손들이 어엿한 가정을 꾸리도록 했습니다.

천하의 왕조차도 가족을 일구지 못하면 쓸쓸하기 짝이 없고, 여인은 모름지기 남편의 곁에 있지 않으면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입…… 응?


“뭐야, 이거?”


엿 같은 책이었잖아?


“짜증 나.”


희조가 혼잣말처럼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앳되고 청순한 목소리와는 달리 말의 내용이 꽤나 거칠었다. 쓰레기였네, 이거.


“미안, 이런 내용일 줄 몰랐어.”


어쩐지 아무도 안 빌려 가더라. 희조가 동화책을 탁, 소리 나게 덮더니 눈을 찌푸린 채 앞표지와 뒤표지를 살폈다. 책은 표지의 투박한 디자인만으로도 얼마나 출판사의 무관심과 냉대를 받았는지 가늠이 되었다. 희조의 어린 눈으로 봐도 요만큼의 소장 욕구가 들지 않는 책은 그 자체로 무성의함이 뚝뚝 묻어났다. 


‘글로벌 유교걸 시리즈 – 여아용 교양동화 전집 : 잠자는 침대 위의 여왕.’ 


그때야 동화책의 제목이 희조의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그 속을 읽고 다시 본 제목은 헛웃음이 터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께름칙한 기분까지 들게 만들었다. 기실 처음엔 이 제목에 끌려 빌려온 책이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따위의 이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요컨대, 어찌 되었든 ‘잠들었던’ 주인공이 끝내 사랑과 행복을 쟁취하는 내용이라 착각한 것이었다. 


“하!”


희조는 아무리 생각해도 책의 내용이 괘씸했는지 답지 않게 언짢은 한숨까지 뱉었다. 아직 교복이 입을 나이도 되지 않은 아이가 내는 탄성치곤 제법 구수한 느낌이었다.


침대 위에서 잠을 자는 여왕이 주인공이라서 빌려왔는데.


왜냐하면 그건-


“꼭 너 같아서.”


꼭 ‘이 아이’같아서.


희조는 책에서 잠시 눈을 떼고 침대 위로 시선을 주었다.


“거기다 여기 나오는 여왕도 너처럼 되게 예쁘거든.”


그리고 되게 멋지기도 해. 어쩌면 이 나라에서, 아니, 이 세계에서 가장 대단했던 사람이 아닐까? 희조가 어쩐지 곰곰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이었잖아. 하려고 생각도 않았고.”


아, 그리고-


“너랑 정말 닮은 점도 있어.”


누워있는 아이의 안색을 살피며 희조가 잇대었다. 어쨌든 여기 나오는 여왕도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이런 선택을 한 거잖아?


“설마 정말 칭찬 몇 마디 들으려고 이 고생을 했겠어?”


생각해봐. 이런 짓 한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아차. 희조가 제풀에 놀라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무심코 제 속을 너무 솔직하게 말해버린 것이었다.


“아무튼 아까 읽어준 이야기의 결말은 잊어.”


희조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꼭 비밀을 말해주는 사람처럼 그 조붓한 입술을 아이의 귓가에 바짝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있지, 이건 비밀인데-


“사실 여왕은 행복했을 지도 몰라.”


아프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귓속말은 목소리가 아닌 숨소리로 하는 것이었다. 정작 그걸 하는 희조는 모르지만, 듣는 아이는 아주 이른 나이에 희조를 통해 처음으로 배우고 있었다.


“결혼이니 뭐니, 남자니 뭐니, 그런 거 다아 필요 없다아?”


물론 너처럼 좋은 엄마 아빠를 둔 애들도 있겠지만, 나처럼 그렇지 않은 애들도 있거든. 꼭 남자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래야 행복하고 그렇진 않아. 아니…… 실은 엄청 불행해질 수도 있어. 엄청, 엄청나게.


“중요한 건-”


돈이야, 하고 말하려다 희조는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이 어리고 여린 병상의 아기 새에게 세상의 혹독함을 벌써부터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이건 희조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조숙한 양심이었다.


“그래, 중요한 건-”


돈, 이 아니고-


“네 행복이야.”


네가 좋아하는 사람, 네가 좋아하는 것, 네가 하고 싶은 일, 그런 걸 하는 게 좋아. 그럼 해피엔딩이야. 그러니까-


“얼른 나아.”


빨리 나아서 맛있는 것도 먹고, 재밌는 곳도 가고, 네가 좋아하는 동화책도 많이 봐야지.


“아, 그러고 보니 동화책 그림을 안 보여줬네.”


잠시만 그림 보여줄게. 이 책, 그림만큼은 정말 아름답거든. 희조가 몸을 일으키곤 덮었던 동화책의 한 가운데를 활짝 펴서 침대로 허리를 숙였다.


“너 예쁜 거 좋아하잖아.”


자, 이거 봐봐. 예쁘지? 여기랑, 이 페이지 자세히 봐봐. 옳지, 여기도. 와아. 이제 보는 건 잘 하네? 눈꺼풀도 잘 깜빡이고 고개도 예전보다 훨씬 잘 움직이는 것 같아. 희조가 곱게 눈을 휘어 접으며 아이 쪽으로 더 고개를 깊이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정말 곧 낫겠다, 그치?”


솔직히 아이가 빨리 나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걸 희조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매번 아이의 귓가에 대고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쇼맨십을 쥐어짜내 연극 조로 응원을 속삭였다. 아이가 하루빨리 낫길 바라는 마음은 단언컨대 진실했다. 비록 가정부로 일하는 할머니를 따라와서 시간이 될 때마다 말동무를 겸해 돌봐주는 주인집의 손녀 딸내미라 해도, 어쩐지 희조에게 아이는 연민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망가진 인형. 희조는 처음 이 아이를 접하고 그런 생각을 했다.


얘, 꼭 예쁜 인형 같아.


하지만…… 주인의 외면을 받고 버려진.


기실 그랬다. 주인집 사람들은 가족 모두가 사회에서 소위 ‘한자리씩 하는’ 이들이라 그런지 각자 엄청나게 바빴다. 때문에 항상 아이를 인형처럼 눕혀놓고 방치해두는 것 같았다. 그들은 가장 믿고 의지한다는 명분으로 집안 살림을 봐주는 희조의 할머니에게 아이의 간병까지 맡기다시피 했는데, 하루 종일 누워있는 어린아이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친구’라는 걸 간파한 희조의 할머니가 언제부턴가 빚쟁이들이 찾아오는 집에 희조를 혼자 놔두는 것을 피할 겸 희조를 주인집에 데려오기 시작했다.


“다음엔 글 말고 그림만 잔뜩 있는 책을 골라와야겠다.”

“……러.”

“응?”

“……시……러.”

“응? 뭐라고?”


불현듯 희미하게 들리는 말소리에 희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내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던 아이의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이는 게 보였다. 희조는 다시 책을 덮고 누워있는 아이의 입술 쪽으로 제 귀를 바짝 갖다 댔다. 요즘 들어 아이는 부쩍 말소리를 내어놓으려 안간힘을 쓰곤 했다.


“시러…….”

“뭐가 싫어?”


희조는 잘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 집안에서 아이의 말을 가장 잘 알아듣고 이해하는 이는 희조일지도 몰랐다. 다만, 아이가 있는 힘을 다해 겨우 완성한 두 글자, ‘시러’의 의미는 쉽게 파악하지 못했다.


“네가 읽어주는 게 좋은 게다.”


그때였다. 언제부터 들어와 있었는지 할머니가 말했다.


“눈으로 보는 그림보다, 네 목소리로 듣는 글이 더 좋은 거야.”


개차반 같은 이야기라도 네가 소리 내어 읽어주는 거, 그게 좋은 거다. 희조가 동그란 눈을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퇴근 준비를 한 할머니가 이제 그만 가자는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 진짜 빨리 가.”


희조가 중얼거리며 동화책을 제 가방에 넣었다. 처음엔 너무 더디게 흘러 괴로울 정도였던 이 집에서의 시간은 어느새 조금만 밍기적 거려도 재빨리 저녁으로 다다르는 속도를 지니게 되었다. 희조는 새삼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에겐 그저 유치할 뿐인 동화책의 이야기 따위를 아픈 아이에게 읽어주는 일에 이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니. 매번 새롭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일까.


“다음에 또 올게.”


다음에 또 오고 싶을 정도로-


“나 기다리고 있어야 해, 응?”


자신을 간절히 기다리는 ‘잠자는 침대 위의 여왕’ 때문일까.


“다음엔 더 재밌는 거 가져와서 읽어줄게.”


좀처럼 말수가 없는 희조가 여기서만큼은 열심히, 그것도 제법 살갑게 말을 쏟아내는 걸 희조의 할머니는 다소 경이로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유일한 보호자이자 실상 단 하나뿐인 식구나 다름없는 저를 돕기 위해 손녀인 희조는 그 숫기 없고 새침한 성격에도 나름 안간힘을 쓰며 저렇게 곰살궂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간병 아닌 간병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희조는 분명 주인집의 단 하나뿐인 ‘아픈 손가락’인 막내 손녀딸을 진심으로 딱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아마, 그 순수한 연민과 애틋한 진심이 오히려 어린아이에겐 더 선명하게 전해져서 저 ‘악명 높은’ 주인집 막내 손녀딸이 제 손녀, 희조에게만은 순한 양이 되는 것이라고 희조의 할머니는 확신했다. 


기특한 일이었다. 기실 짐승도 제 새끼를 버리지 않는 걸 생각하면 제 아들 내외는 그보다 못한 것들이었는데, 어째 그런 것들 사이에서 태어난 희조는 돌연변이라고 느껴질 만큼 천성이 착하고 다정한 게 가끔 희한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게 이런 상황에 통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아직 어린데다 날 때부터 병치레의 숙명을 타고났어도 주인집 손녀딸의 그 까탈스러운 성격은 가히 집안의 공주, 아니, 여왕으로 군림할 싹수를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과연 아이는 여태 적지 않은 간병인들을 울렸고, 말 그대로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들었으며, 종국에는 알아서 그만두게 만들었다.


한데 어째서일까. 아이는 희조에게만은 모든 것이 예외였다. 희조가 오는 시간이면 바로 얌전한 강아지처럼 굴었다. 주인집 사람들에게도, 그 관리인들과 친척들에게도, 심지어 희조의 할머니에게도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직 희조만이 이 사실을 모를 따름이었다.


“다시 볼 땐 더 건강해져 있기.”


제 할머니가 뒤에서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희조는 여느 때처럼 침대 위의 아이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다시 볼 땐 더 건강해져 있기. 그 말과 함께 희조는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이의 새끼손가락을 굳이 제 것과 꼭 맞잡았다. 이건 안녕이라는 말 대신 언제부턴가 희조가 고집스럽게 시작한 새로운 작별 인사였는데, 사실 이건-


‘죽지 말고 잘 버티고 있어.’


-라는 속마음을 희조 나름의 방식으로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아이가 사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희조는 할머니가 주인집 다른 관리인 어른들과 나눈 대화를 들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아이는 원래 병이 있었다. 그럼에도 병원 대신 이 집 한구석방에 누워있는 이유는 그 병이 뚜렷한 치료방법이 없는 선천적 면역성 난치병이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떤 불미스러운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투병을 겪어야 했던 아이는 더욱 예민하고 까칠해졌으며 어째선지 병실의 분위기를 끔찍이도 싫어해 의사가 회진을 돌 때마다 큰 발작을 일으켰다. 병원에서 나가고 싶다고 떼를 쓰다 못해 경기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어차피 뚜렷한 치료 책도 없었기 때문에 아이의 가족들은 결국 모든 물리적 치료를 포기한 채 자가 회복을 결정했다. ‘그러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의료진은 경고했다. 말하자면 자가 치료 중에 돌연사나 쇼크사로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사례가 있다는 것이었고, 혹 그런 일이 벌어져도 자기들에겐 책임이 없으니 병원에서 나가려면 어디 한 번 그래보라는 의도였다. 


그럼에도 아이는 결국 집으로 왔다. 열 손가락을 꼽아도 한참 남을 만큼 아직 어렸는데도 그 대단한 고집과 드센 성격에 부모는 물론 의사들까지 결국 항복하듯 포기한 까닭이었다.


“그런데 다행이지 뭐예요, 여사님. 우리 애가 여사님네 손녀, 그러니까-”


희조 양을 만나고 나서 세상에, 애가 완전히 바뀌었다니까요. 하루는 아이의 엄마가 희조가 없는 데서 희조의 할머니에게 작정을 하고 칭찬 일색을 퍼부어댔다.


“하루 걸러 왕진 오는 의사 선생님은 무슨 괴물 보듯 하더니, 어째 희조 양한테는 순한 강아지가 된다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제 위에 언니라도 하나 낳아둘 걸 그랬나 봐요. 아이의 엄마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을 계속 이었다. 글쎄, 희조 양이 온다고 하면 반나절 전부터 몸을 꼼지락 꼼지락대면서 필사적으로 전해요. 세수라도 한 번 더 시켜달라고, 머리라도 한 번 더 예쁘게 묶어 달라고. 


“잘 보이고 싶나 봐요.”


차암, 이러다가 희조 양한테-


“시집간다고 하는 건 아닌지 몰라!”


호호호! 하하하! 아이의 엄마는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갈증이 난다며 과일을 좀 내어 달라고 했다. 희조의 할머니는 속으로 혀를 찼다. 농담할 게 따로 있지, 제 새끼가 언제 죽을지 몰라 집 구석에 처박혀 세월아 네월아 누워있는 판에 아비란 인간은 코빼기도 보이는 법이 없고, 엄마란 사람은 매번 이렇게 실없는 농담만 내어 놓는 게 한심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여기기도 했다. 절망에 빠져 우울하게 있는 것보다야 차라리 이런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어찌 되었든 아이의 부모는 둘 다 호쾌하고도 무심한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면 극도의 낙관 주의자들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무심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었다. 설마하니 애가 죽거나 상태가 더 나빠지는 일이야 벌어지겠냐고 생각하는 태도가 기본으로 깔려 있는 게 그랬다. 


게다가-


“희조가 온 게 꼭 운명 같다니까요!”


희조가 온 걸 정말 운명처럼 여기는 것도 그랬다. 희조와 만난 후 아이의 병세가 드라마틱 하게 호전되었다는 점 또한 그들의 극단적 낙관주의를 더 심화시킨 것이었다.


“오죽하면 어머님께서 희조 양을 한 번 보고 싶다며 시시콜콜 묻기도 했으니까요.”


이 집안의 모든 권력을 쥔, 지역 최고의 알부자로 꼽히는 인물이자 가문의 모든 재산과 권력의 칼자루를 쥐 아이의 할머니가 심지어 희조의 존재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그저 외로워서 그러는 거예요, 사모님.”

“네?”

“한창 친구들 만나서 뛰어놀 때잖아요. 간병인 아주머니 아저씨들보다 같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눠주는 애가 더 마음이 갈 거예요. 우리 희조가 대단해서가 아니고…….”

“아이 참, 그래도 말이에요.”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안 그런단 말이야. 우리 애가 그래 보여도 성격이 대단해요. 사람을 얼마나 가리는데.


“어머, 어머, 그렇지 참. 언젠가 내가 이런 농담을 했거든요?”


너, 희조 언니가 차라리 남자였으면 좋겠지? 하긴, 그랬다면 네 남편감으로 엄마 아빠가 미리 꽈악 붙들어 놓을 텐데- 하고 말이에요.


“네?”


희조의 할머니가 황당한 투로 되물었다.


“그랬더니 우리 애가 막 표정을 엄청나게 찌푸리면서 입모양으로 욕을 하는 거야.”


엄마 바보, 멍청이라면서 말이에요. 아니, 글쎄 걔가 하는 말이-


“희조 언니는 언니라서 좋은 거래.”


예뻐서. 여자라서. 아름답고, 공주 같고, 여왕 같고, 백조 같아서.


“웃기죠?”


잘 깎인 값비싼 과일들을 맛깔스럽게 먹으며 아이의 엄마가 평소처럼 그저 태평하게 잇대었다. 내 배로 낳은 애지만 매번 놀란다니까요. 어쩜 비실비실 대면서도 희조 이야기만 나오면 악바리를 쓰는 게 진짜-


“나중에 희조를 어떻게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어떻게 하다뇨?”

“어머, 어머. 나쁜 뜻이 아니고요, 여사님.”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그 옛날이야기에 ‘은혜 갚은 호랑이’ 같은 거. 훗날 애가 건강해져서 희조한테…… 가만, 희조한테 뭐가 필요할까요, 여사님?


“네? 우리 희조요?”

“네에, 우리 예쁜 희조 양한테는 뭐가 필요할까요?”


뭐라고 해주고 싶네, 나라도. 아이의 엄마가 흥흥- 콧노래를 내며 잇대었다. 의사선생님 한 열 명쯤 불러와도 못한 일을 해줬잖아요.


“……필요한 거야 많죠.”


그러나 희조의 할머니는 말을 다 잇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만 말했다. 부모도, 집도, 돈도, 기회도, 심지어 앞으로의 미래조차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딱한 제 손녀에겐 모든 것이 필요하다고.


“보자, 나중에 희조 시집갈 때 혼수라도 우리가 해줄까?”

“사모님, 그런 말씀 마시고 그냥 애들 노는 거 따뜻하게 봐주시기만 해주세요. 그것으로 충분해요.”

“하여간 우리 여사님 천사 같으셔. 이래서 내가 여사님한테 이 커다란 집안 살림을 모조리 다 맡기는 거 아니겠어요?”


하지만 그래도-


“빚지고는 못 살죠. 어머님도 누누이 말씀하세요. 어디 신세만 지고 살지 말라고.”


게다가 우리 애는 더 그럴걸요. 


“네?”

“우리 애 말이에요. 누워서 골골대도 남한테 마냥 도움만 받는 건 끔찍하게도 싫어하거든.”


아이의 엄마가 처음으로 꽤나 의미심장한 투를 냈다. 애가 아직 어린데도 자존심은 얼마나 세고 욕심은 또 얼마나 많은지. 갖고 싶은 거 다 가져야 하고, 하고 싶은 거 다 해야 해. 빚지고는 또 못 살고, 지는 것도 싫어하지, 질투는 또 얼마나 많게요?


“그러니 오죽 답답하겠어요.”


몸이 아파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하는데 같이 놀고 싶어 죽겠다 싶은 사람이 생겼으니. 아이의 엄마는 꼭 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혀를 차며 잇대었다.


“그게 희조라서 더 안달복달하는 거 같아. 안 그래도 우리 애, 나 닮아서 예쁜 거에 환장하는데-”


희조가 또 예쁘잖아요, 여사님.


“아유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우리 애를 남자로 낳을걸.”

“사모님.”

“호호호! 농담이에요, 농담!”


그러면 더 큰일이죠. 진짜 나중에 커서 희조 보쌈이라도 해 올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같은 여자인 게! 희조도-”


우리 승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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