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오라지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이들은 그런 사람들이 더 단단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저 계속 애오라지 살아갈 뿐이다. 누군가는 남이 누리지 못하는 것들을 누리고 다른 누군가는 남들이 겪지 않아도 될 것들을 겪지만 고통 없이 자란 사람은 없다. 마음속에 쌓인 재 하나 없이 자라나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그냥 다 비슷비슷하다 여기는 게 편하다. 우리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외형을 선택할 수 없으며 미래를 정할 수도 없다. 당연히 과거도 바꿀 수 없다. 

'얼마나 무의미한가?'

폴 아이작은 생각했다. 어쩌면 그가 오늘 새벽 가장 싫어하는 꿈을 꾸었기 때문에 이리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짐승의 마음을 헤아리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폴."

아이작이 가장 혐오하는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빌어먹을 놈.

폴은 여성이 보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만 평온함을 느꼈다. 숨을 쉬는 기분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엔 어떻게 살아왔는지 잊을 만큼. 자신이 누구를 위한 무엇인지도 잊을 만큼. 온 몸에 남아있는 자국들 까지도 잊을 만큼. 왜 제게 궁금한 것들을 묻지 않고 그냥 갔을까. 그 숲에서 구해줬기 때문에 신뢰가 생겼을까? 겨우 그걸로 그 여자가. 헛생각 이었다. 너무 우스웠다. 그는 그녀를 떠올렸다.

"하하, 보고 싶네. 자꾸 이러면 싫어할 텐데."

폴은 구석에 꽂아 뒀던 편지 뭉치를 꺼냈다.

안부,

임무,

임무,

임무,

임무.

그녀를 보고 나서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답장도 하지 않았다. 날개가 부러진 새는 날지 못한다는 걸 그는 잠시 잊고 있었다. 묶인 짐승은 떠날 수 없다는걸 폴 아이작은 잊고 있었다. 파란 눈동자에 푹 젖어버린 게 틀림 없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편지들을 모두 태웠다. 책상 구석에 약간의 그을음이 졌다. 

아무도 없는 재무실에서 폴은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했다. 그는 울었다.

-

"그놈들을 며칠 가르친 소감은 어떻지? 완전히 글러 먹었나? 새로 뽑을까?"

자라드는 지친얼굴로 소파에 앉아있는 여성을 향해 물었다. 그는 선생 노릇을 하느라 지친 그녀의 모습이 재밌는지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그러나 실버는 정말이지 힘이 하나도 없었다. 육체적 노동을 계속하는 게 아닌데도 체력적으로 입은 손해가 큰 느낌이었다. 

"다들 잘 배웁니다. 잘 배우는데…"

"그런데?"

자라드는 의자 뒤로 크게 기대었다.

"저 하루만 쉬면 안됩니까."

"지금 휴가 내는 건가?"

자라드는 크게 웃었다. 뚱한 얼굴로 쉬게 해달라는 얼굴이 재미있어서였다. 감정 한 자락도 비치지 않던 여자가 꽤 많이 변했다. 

"휴가 아닙니다. 호위는 계속 설 겁니다. 기사단 갱생… 그거 조금만 쉬게 해주십시오."

소리 내며 웃던 자라드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실버에게 다가갔다. 

"실버."

"네 전하."

그는 여성의 맞은편에 앉았다. 대화하기 좋은 자리였다. 그는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했던 말, 사과하지."

뜻밖의 말에 실버는 왕을 쳐다봤다.

"살아도 산 게 아니던 시기였어. 하루에도 기분이 몇번씩 왔다 갔다 하긴 했지만, 그때는 정말… 죽겠다 싶었어. 아무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고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고."

자라드는 눈을 감았다.

"그게 변명이 될 수 없다는건 알아. 내가 감히 할 말이 아니었지. 상처 준 것, 용서해."

여성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자라드가 눈을 뜨자 그제야 실버는 입술을 열었다.

"제가 서왕국에서 헤이론으로 전하를 업고 넘어올 때 말입니다."

그 말에 자라드의 속눈썹이 조금 흔들렸다.

"전하를 자라드라고 불렀습니다. 꽤 여러 번."

조금은 긴장해 있던 자라드의 입이 조금씩 벌어졌다. 그가 웃었다.

"하하하하하! 그래서?"

여성은 미미하게 웃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둘은 눈을 마주쳤다. 

"전하."

"그래."

"감히 말씀 드리자면, 세상에는 쉽게 용서되는 게 많습니다. 모욕같지도 않은 모욕도 있지요. 상대에 따라 다르지만."

자라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는 오래 전에 용서했습니다."

여성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왕의 머리칼을 잠시 손가락 사이에 얽었다. 자라드는 파란 눈이 휘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 몸에 손을 댄다는건 참 묘한 기분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용서해, 자라드."

잠시 멈칫하던 그가 바람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자라드는 창가로 향했다.

"네가 신기한 여자인 건 알고 있나?"

"그렇습니까?"

그의 눈에 다시 평소 같은 표정을 짓는 실버가 보였다. 그는 오래간만에 집무실의 오래된 책장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 실버, 곧 축제가 열린다."








소설 [죽은 장작에게]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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