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이 없어서 소주도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런 자리에서 이것저것 술을 고르는 것도 번거롭고 맥주를 마시고 배만 부른 것보다는 나았다. 진우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신명이 의아한 얼굴로 진우를 돌아보자 진우는 바로 사과의 말을 했다.


"미안. 일부러 웃은 건 아니고 내가 신명이 외모만 보고 술 잘 못 마실 거라고 편견을 갖고 있었나 봐."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인가 싶었지만 진우에게는 부탁해 놓은 일도 있고 어쨌건 사회 생활하러 나온 자리이니만큼 표정 관리에 힘썼다.


"아, 그래요?"

"응. 소주는 못 마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

"아, 그러시구나."

"한신명, 네가 웬일이냐. 이런 델 다 오고."


조금 늦게 도착한 세림이 신명의 등을 툭 치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래도 동기라고 과대인 세림이 보내주는 단체 채팅방 공지 외에는 연락도 주고받아 본 적 없는 사이인데도 세림이 오니까 한결 든든하고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세림은 특유의 넘치는 에너지로 선배들에게도 쾌활하게 인사를 한 후 자리에 앉았다. 곧 주문한 술과 안주가 서빙되었다. 진우가 먼저 소주 병을 들어 신명의 앞에 놓인 빈 잔을 채워 주었다.


"술 강제로 권하고 그런 분위기 아니니까 신명이가 마시고 싶은 만큼 적당히 마셔."


진우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계속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복학하기 전에는 장진우와 제대로 인사 한번 한 적이 없는데 대체 자신의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든 건지 신명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네."

"에이~ 그래도 첫 잔은 다 같이 마셔야죠. 다들 잔 채웠죠?"


세림이 맥주가 가득 찬 자신의 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귀여운 후배의 당찬 건배 제의에 선배들도 웃으며 하나둘 술잔을 들어 올리고 신명도 따라 잔을 들었다. 모두 즐거워하며 잔을 가볍게 부딪혔다.





조용히 앉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오늘 술자리는 단순한 같은 과 사람들의 친목 모임이 아니라 인문대 학생회 집행부들의 모임이었다. 오늘은 학생회로서 모인 건 아니고 맛있는 것 먹고 편하게 놀기 위한 자리라고 설명하기는 했는데 신명은 도대체 이런 자리에 왜 외부인인 자신을 부른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 지나서 하는 얘기지만 우리 진짜 아슬아슬 했었어."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눈이 작고 날카롭게 찢어진 남자 선배 하나가 불쑥 지난 선거 이야기를 꺼냈다. 연한 갈색으로 염색한 단발머리 선배가 맞장구를 쳤다.


"영문과 후보가 갑자기 사퇴 안 했으면 떨어졌을 수도 있었을 거야. 걔네는 우리보다 선거 운동 기간도 길었고 홍보도 더 잘 되고 있었으니까."

"진짜 운이 좋았죠. 제 평생 운은 거기에 다 끌어 쓴 거 같아요. 그 영문과 후보가 갑자기 휴학했다고 그랬죠?"


세림이 과장되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옆자리에 앉은 다른 선배에게 물었다.


"응. 갑자기 무슨 사고가 났댔나? 나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


결국 선거는 진우와 세림, 단독 후보의 찬반 선거로 치러졌고 두 사람은 투표자들 중 과반수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군대 시절 얘기를 곱씹고 또 곱씹는 복학생들처럼 선거 이야기를 곱씹었다. 신명은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였다. 처음에는 신명에게 열심히 말도 걸어주고 신명이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신경도 많이 써주었으나 이들이 아무리 친절한 이웃이라도 그것은 맨정신일 때 가능한 일이었다. 술이 몇 잔 돌고 적당히 취기가 오르고 그들끼리 흥이 나기 시작하면서 신명은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신명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신명의 바람대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묻혀있을 수 있게 되었다. 신명은 학생회 사람들의 대화를 적당히 귓등으로 흘리면서 남들이 웃을 때 한 박자 늦게 따라 웃거나 아무 때나 적당히 고개를 끄덕거리고 그러다 심심하면 술과 안주를 집어 먹었다. 머릿속에는 1차가 끝나면 집으로 튈 생각만이 가득했다. 손가락 하나가 신명의 술잔 옆을 정말로 가냘프게 톡톡톡 두드렸다. 그 가냘픔이 너무 어이없어 표정 관리를 하는 것도 잊고 옆을 돌아보자 진우가 신명의 귀에 대고 작게 속닥였다.


"재미 없어?"

"......."


이 새끼는 진짜 뭐지 싶었지만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 저렇게 작게 말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겠다 이해해 보려 했다. 신명은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아 대충 대답했다.


"아니요."

"재미 없어 보이는데. 얘기도 너무 안 하고. 내가 오라고 한 건데 재미 없으면 정말 미안하잖아."

"재밌어요. 저 원래 말 잘 안 해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진우가 생글거리며 신명을 바라보았다. 신명은 정말 이 새끼가 자신한테 원하는 게 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결국 제 앞의 술잔만 단번에 비워냈다. 진우가 신명이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기 무섭게 채워주며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이야기를 꺼냈다.


"아, 전에 신명이가 부탁한 거 있잖아. 경영학과에 사람 찾아달라는 거."

"원호요? 찾았어요?"


원래도 커다란 신명의 두 눈이 더욱 커졌다. 신명의 반응에 진우도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아니, 아직. 너희 학번에는 조원호라는 학생이 없었고 그 아래 학번은 내 친구가 후배들한테 물어봐 준다고 했어. 경영학과가 학생들이 많다 보니 시간이 걸리나 봐."

"아... 네..."


신명은 노골적으로 시무룩해 했다. 사실 이 방법으로 원호를 찾는 다는 건 가능성이 아주 낮은 이야기였다. 십 년 전 친구의 현재 모습도 모르면서 그 남자가 원호라고 생각하는 건 순전히 신명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경영대 건물에 있었다고 해서 꼭 경영학과 학생이란 보장도 없었다. 다른 과 학생일 수도 있고 애초에 세연대 학생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신명은 원호를 찾고 싶었다. 정확히는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작은 가능성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한 것이었다.


"후후훗."


신명이 한창 생각에 빠져 있는데 진우가 옆에서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나를 한 번 돌아보라는 듯한 노골적인 웃음이라 신명은 황당해 진우를 쳐다 보았다. 진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을 했다.


"아니, 신명이 표정이 되게 다양하구나 싶어서."

"네?"


신명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항상 이런 얼굴만 하고 다니길래 난 신명이가 표정이 별로 없는 줄 알았거든."


진우가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 물고 불퉁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지어 보여 주었다.


"그런데 눈이 이만하게 커지기도 하고 눈썹이 이렇게 쳐지는 모습도 보니 너무 재밌네. 귀엽기도 하고."


이번에는 눈썹 위로 검지 손가락을 올려 팔자를 만들어 보였다.


"아... 네..."


장진우는 정말 뭘까 싶었다.


"찾고 있는 사람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신명이 전화로 원호를 찾아달라 부탁했을 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넘어 가길래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으려나 생각했는데 아니었는 모양이었다. 사람에게 부탁을 해 놓고 맨입으로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딱히 숨기고 싶거나 숨겨야만 하는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신명은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중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는데 걔가 갑자기 전학 가는 바람에 연락이 끊겼거든요. 며칠 전에 경영대 건물에서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봐서 경영학과에 다니는 거 아닐까 해서요."

"아... 이런 이야기해서 기운 빼놓고 싶지는 않은데 잘못 본 거나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학교 학생이어도 경영학과가 아닐 수도 있고."

"그건 저도 염두에 두고 있어요. 그래도 우선은 찾아보고 싶어서요."


진우가 신명의 마음가짐을 이해했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원호를 찾는 일에 대한 당위성을 따지는 대신 가능성을 높이려는 듯했다.


"중학교 때 친구라고 했지? 학교는 어디 나왔고 몇 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 알아두면 찾을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아... 성운중 나왔고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요."

"1학년 때 만나서 3년 내내 친하게 지냈나 봐?"

"아니요. 그건 아니고 1학년 때 잠깐 친하게 지냈어요."

"잠깐 이면 얼마나?"

"겨울 방학 기간 정도였으니까... 두 달 정도요."


생각해보면 참 짧은 인연이었다. 어려서 그랬는지 같은 상처를 지녀서 그랬는지 두 소년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둘 도 없는 친구가 되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사 갔다고 연락이 끊겨? 핸드폰 없었어?"

"아... 없었어요. 저는 있었는데 걔가..."

"정말? 왜? 집이 엄하셨니?"

"이유는 저도 잘..."


신명은 말끝을 흐렸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개나 소나 다 갖고 있던 핸드폰을 원호만 가지지 못 했단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부모님이 교육 방침상 사주지 않으셨다고 말할 걸 그랬나 짧은 후회가 스쳤다.


"많이 좋아하는 친구였나 봐. 이렇게 찾는 거 보니까."

"공통점이 많아서 금방 친해졌거든요."

"공통점? 어떤 거?"


가볍게 시작한 이야기가 점점 대답하기 곤란한 사적인 영역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 그게..."


뭐라고 둘러댈까 열심히 생각해 봐도 술을 마셔서인지 귀가 웅웅 울릴 정도로 술집 안이 시끄러워서인지 마땅한 핑곗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신명이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있자 진우는 그런 신명을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제 술잔을 홀짝였다. 신명은 몸통이 서까래만큼 굵은 뱀이 제 몸을 둘둘 감아 서서히 조이는 것처럼 속이 답답해 오는 기분이었다.


"둘이서만 속닥속닥 무슨 재밌는 얘기를 그렇게 해요!"


술이 꽤 오른 세림이 소리를 꽥 질렀다. 세림은 둘이서만 머리를 맞대고 무슨 비밀 얘기를 하길래 자신들을 따돌리는 거냐면서 소란을 피웠다. 진우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런 게 아니라면서 세림을 달래려 했다.


"그러면 둘이 한 잔씩 마셔요!"

"마셔라! 마셔라!"

"와아~ 마셔라~"


세림이 좀처럼 달래지지 않자 진우가 난감한 얼굴로 신명을 돌아 보았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곤란한 질문에서 구해준 동기를 위해 신명은 잔을 들었다. 주변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결국 진우도 잔을 들었다. 두 사람이 가볍게 잔을 부딪히고 술을 마시려는 순간 진우가 갑자기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잠깐, 나 전화 온다. 나 이것만 받고 와서 다시 마실게."

"우~ 우~ 비겁하다."

"장진우 술 마시기 싫어서 도망간대요!"


여기저기서 야유가 쏟아졌다. 진우는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굽신굽신하는 제스처와 함께 전화기를 들고 술집 밖으로 나갔다. 신명만 혼자 술잔을 들고 동그마니 남았다. 진우가 떠나자 테이블 위가 급격하게 조용해졌다. 남은 사람들은 혼자 술잔을 들고 있는 신명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어... 진우도 없으니까 그냥 없던 일로 할까?"

"그, 그래. 그러자. 요새 때가 어느 땐데 술 억지로 먹이고 그러면 안 되지."


분위기는 한층 더 어색해졌다.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신명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제가 진우 선배 몫까지 두 잔 마실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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