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요, 김 팀장님. 그쪽 내 일에만 엄청 예민한 거 알죠?”

 

 

  서류 뭉치들을 테이블 위로 툭툭 치며 정리하던 성규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던 행동을 멈추고 시선을 들었다. 급격히 싸해진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건 그 말을 내뱉은 장본인도, 저격을 당한 김 팀장도 아닌 지금 이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이었다. 침을 넘기는 소리조차도 크게 들릴 것만 같은 정적 속에서 다들 눈동자만 굴리며 눈치를 보았다.

 

 

“그걸 이제 알았어요?”

 

 

아, 김 팀장님, 제발. 아마 다들 똑같이 생각을 했을 거다. 누군가는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꽈악 감아버렸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규는 그저 서류를 손에 쥐고 우현을 한 번 흘기더니 자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눈치만 보던 성규 팀의 팀원들은 하나 둘 우현에게 살짝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하곤 성규의 뒤를 밟았다. 영화 킹콩을 보면, 킹콩이 걸을 때 쿵, 쿵, 하며 걸음걸이가 엄청 크게 들려오는데 꼭 성규의 뒤를 따라가는 내 발걸음 소리가 킹콩의 발걸음 소리 마냥 크게 느껴지는 이 순간에, 비웃는 소리가 모두에게 들려왔다. 성규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뇨,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

 

 

오, 팀장님…. 우현의 말에 입이 떠억 벌어지는 건 우현 팀의 직원이었고 그 중 손으로 입을 막는 사람도, 환장하겠다는 얼굴로 이마를 짚는 사람도 보였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우현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성규에게 우현은 약 올리는 듯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우현은 팀장실로 들어갔고, 그 험악한 분위기가 가득한 사무실에 남은 건 성규와 그의 팀, 그리고 우현 팀의 직원들이었다.

 

 

“………”

 

 

직원들이 성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성규는 눈썹을 살짝 올리더니 곧 인상을 확 구기고는 꼭 아까의 우현처럼 헛웃음을 내뱉었다. 가죠, 하는 말과 함께 성규가 사라졌고 그 뒤를 쫓아가는 직원들도, 사무실에 남아있는 직원들도 모두 같은 다짐을 했다. 조만간 두 팀장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말겠다, 하고.

 

 

  우현과 성규는 처음부터 이런 사이는 분명 아니었다. 첫 만남 때 우현은 성규에게 환하게 웃으며 안녕하세요, B팀 팀장 남우현입니다. 하고 부드럽게 말을 내뱉었고 성규는 아, 네. A팀 팀장인 김성규예요. 잘 부탁드려요. 하며 받아주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둘 다 유능하고 젊은, 또 나이대도 비슷하다 보니 위에서도 서로 잘 맞춰가며 실적을 올려보라는 말도 했었다.

 

 

“커피 심부름?”

 

 

A팀의 막내 서정은 선배의 심부름으로 카페에 내려왔다가 남 팀장을 만나고 살짝 당황했다. 어제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남 팀장님의 얼굴을 보려니 괜히 껄끄러운 기분에 네에, 하며 애꿎은 지갑만 만지작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비품실에서 두 팀장님 대체 왜 그러는 거냐며 뒷담 아닌 뒷담을 했는데 서정은 괜히 찔리는 마음도 들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아르바이트생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했다. 아메리카노 아이스로 세 잔이랑, 라떼 한 잔, 그리고 모카 한 잔 주세요.

 

 

“딸기 쉐이크는요?”

“네?”

“김 팀장님은 안 드신대요?”

“아메리카노 드신다고…….”

 

 

아메리카노? 의아하다는 얼굴을 한 우현에게 고개를 끄덕인 서정이 아르바이트생에게 카드를 내밀고는 우현의 눈치를 보았다. 딸기 쉐이크라니. 서정은 커피 심부름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딸기 종류를 사본 적이 없었다. 팀장님이 딸기 쉐이크를 먹는 다는 건 상상해본 적도 없었고.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자신의 위로 우현의 손이 보였다.

 

 

“계산은 제가.”

“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뇨,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서정이 목덜미를 긁적이며 감사하다는 말을 했고 받은 진동벨을 손에 쥐며 자리에 앉았다. 잠시 뒤에 나온 커피를 손에 들고 카페에 빠져나오던 서정은 테이블에 앉아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우현에게 다시 감사하다며 인사했다. 서정은 회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남 팀장이 좋은 사람이긴 하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아메리카노가 김 팀장님꺼라고요?”

“어, 남 팀장님.”

“그럼….”

 

 

그리고 언제 나타난 건지 서정의 옆에 선 우현이 아메리카노를 하나 빼가더니 그 안에 자신이 사온 것을 집어넣었다. 딸기 쉐이크. 당황한 얼굴로 우현을 바라보던 서정을 알아챈 건지 우현은 웃어 보이며 그거 드리세요, 하고는 어느새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아니. 아…….”

 

 

안 되는데…. 서정은 어쩔 줄 몰라 눈만 껌벅이고 있는데 우현이 자신의 층에 도착하더니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 그럼 조심히 올라가요. 그런 우현을 보고 있던 서정은 급하게 우현을 불러 세웠다. 저기, 남 팀장님…! 그 목소리에 우현이 뒤를 돌더니 특유의 환한 웃음을 하고 말을 했다.

 

 

“내가 커피 바꿔갔다고 하세요.”

“………”

“꼭 말해요.”

 

 

그렇게 유유히 사라지는 우현의 등을 바라만 보고 있던 서정이 닫히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멍하니 쳐다봤다. 아, 어떡하지. 바로 위 층에서 내린 서정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무거웠다. 꼭 말하라는 건, 이걸 김 팀장님한테 꼭 전달하라는 이야기겠지. 사무실에 들어선 서정이 테이블 위로 하나하나 커피를 올려두고는 마지막으로 남은 딸기 쉐이크를 손에 꼭 쥐고 팀장실 앞에 섰다.

 

 

“…팀장님, 딸기 쉐이크 드세요.”

 

 

서정은 말을 떼지는 않았지만 이게 뭐냐는 얼굴로 쳐다보는 성규를 제대로 쳐다도 못보고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메리카노를 샀는데 앞에서 남 팀장님이 이걸로 바꿔 가셔서….”

“……….”

“그래서 아메리카노로 바꿔 드리려고 했는데 남 팀장님이 꼭! 전해드리라고 말씀하셔서요.”

“……….”

“죄송해요. 지금이라도 다시 사올까요?”

 

 

서정은 팀의 막내이기도 했고, 성규의 성격이 엄청 까다로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성격도,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심지어 남 팀장처럼 잘 웃는 사람도 아닌데 저렇게 인상을 팍 구기도 있으니 더 긴장이 되어서 그냥 아메리카노로 다시 사올걸 그랬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둥실둥실 떠다닐 때쯤, 굳게 닫혀있던 성규의 입이 열렸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어, 괜찮으세요?”

“네. 딸기 좋아해서.”

 

 

서정의 걱정과는 다르게 성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딸기 쉐이크를 한 입 마시더니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진짜로 딸기를 좋아했구나. 남 팀장님 말이 사실이었네. 근데 둘이 사이 안 좋지 않은가? 어떻게 안 거지.

 

 

“근데 남 팀장이 그래요? 나 이거 좋아한다고?”

“그냥 딸기 쉐이크 왜 안 사가냐고….”

“아아. 네. 고마워요. 나가봐요.”

 

 

서정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팀장실을 빠져나왔고 성규는 서정이 나가고 나서야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올려져있는 딸기 쉐이크로 시선을 옮겼다. 정말 거슬린다. 그리고 생각을 할수록 이상한 사람이었다. 성규는 우현을 만난 지 두 달쯤 지났었나, 우현에게 이상하다고 말을 했었다. 쓸데없이 자신의 일들을 다 기억하고 알고 있는 사람.

 

 

  우현의 첫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우현은 자신에게 나쁘게 대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 이상했던 거였지.

 

 

‘요 앞에 냉면 어떠세요? 요즘 덥기도 하고.’

‘좋네요.’

 

 

우현이 이상하다고 처음 느낀 건, A,B팀이 처음으로 회의를 한 날이었다. 나눠서 일을 하고는 있지만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때문에 회의할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러다 보면 꼭 점심시간이 겹치곤 했다. 그리고 그날은 유독 덥기도 했고 다들 입맛도 없어 보여 대충 때우자 싶은 분위기였다. 성규도 아무 생각 없이 파일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우현이 뭔가 고민하는 듯 싶더니 콩나물 국밥이 먹고 싶다며 말을 해왔고 다들 나쁘지 않은 눈치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메밀 알레르기 있지 않아요?’

‘네? 남 팀장님 메밀 알레르기 있으세요?’

‘아뇨. 김 팀장님, 당신이요.’

 

 

다른 직원들은 미리 내려가 있었고 남 팀장과 마무리를 하고 있었는데 우현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얼굴로 말을 해왔다. 아, 나 메밀 먹으면 안 됐지. 성규가 바빠서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우현이 알아차린 것이었다.

 

 

‘성규씨 메밀 먹고 어릴 때 응급실 갔다면서요.’

‘아…….’

‘근데 냉면을 먹을 생각을 하네요?’

 

 

이상한 사람이네. 우현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정리 다 했으면 나가자며 걸음을 옮겼다. 성규는 회의실에 가만히 서서, 자신이 언제 그런 말을 우현에게 했나 생각을 해보았지만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아 인상을 구겼다.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내가 우현씨한테 그런 말을 했었나요?’

‘응? 아, 메밀.’

‘…어, 네.’

‘우리 팀장 모임 때 성규씨가 그랬잖아요. 메밀 알레르기 있다고.’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는 그 짧은 시간동안, 성규는 기억도 나지 않는 그때를 떠올렸다. 팀장 모임이라…. 가물가물하게, 그 예전 언젠가 그런 모임을 가졌던 그때 자신이 그런 말을 했었다는 걸 알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이상하다고?

 

 

‘참 이상하네요.’

‘저요?’

‘네. 우현씨요.’

 

 

나는 그 자리에 남우현이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우현은 그런 사소한 걸 하나하나 기억하다니, 그게 훨씬 이상했다.

 

 

  프로젝트는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새로운 게 시작되다보니 야근을 하는 날은 많아졌다. 어느새 하늘은 어둑해지고 빈 사무실에 성규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남아서까지 하고 있었는데 도저히 원하는 게 나오지 않으니 머리가 아파지기도 했다.

 

 

“집 안 가요?”

“…할 일이 남아서요.”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성규는 괜히 어색해져 모니터만 바라봤다. 아직 퇴근을 안 한 건지 우현은 뭔가 바스락 거리며 성규에게로 다가오더니 봉지 안에서 조각 케이크를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렸다. 성규는 우현과 자신이 이런 걸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 생각하며 우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뭐예요?

 

 

“단 거 먹으면 머리 돌아가지 않아요? 난 그렇던데.”

“……….”

“요 밑에 카페에서 사온 거예요. 저번에 먹어봤는데 맛있어서.”

 

 

딸기가 얹어진 초코 케이크. 성규는 그걸 보고, 오늘 일을 마무리하는 건 물 건너갔다고 생각하며 포크를 건네주는 우현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딸기를 좋아해요? 큰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좋아하지 않나? 뭐 시킬 때 은근 딸기만 시키잖아요.”

“……….”

“특히 카페 오면 항상 딸기 쉐이크 먹잖아요.”

“제가요?”

“네. 그쪽이요.”

 

 

집 갈 때 종종 딸기 쉐이크 사가는 거 봤는데. 아, 맞아. 근데 성규씨 아메리카노 안 좋아하지 않아요? 저번에 보니까 손도 안대는 거 같던데. 우현은 줄줄 말을 내뱉었고 성규는 그게 다 맞는 말이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체 왜 이런 거까지 다 알고 있는 거지. 성규는 그동안 의문만 품고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싶었던 마음을 물어보기로 했다.

 

 

“원래 그렇게 오지랖이 심해요?”

“나요?”

“네.”

“아뇨. 남의 일에 관심 없는데요.”

“……….”

“근데 성규씨는 남 아니잖아요.”

 

 

그럼요? 성규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우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성규씨 좋아해요.”

“네?”

“좋아하니까 관심 생기고 이런 거 다 아는 거지, 아니었으면 관심도 없었어요.”

 

 

그리고 포크로 케이크를 조금 퍼주며 성규에게로 건네주었다. 얼른 먹어봐요, 맛있다니까. 장담해요. 환하게 눈꼬리를 휘면서 웃는 우현을 보며, 우물우물 입 안에 가득 찬 단 맛은 꼭 지금의 감정을 착각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어때요? 맛있죠?”

 

 

이상하게 우현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겠어서 고개만 끄덕거리며 시선을 돌리지도 못하고 케이크로 고정했다. 딸기가 올려진 조각 케이크. 딸기. 내가 좋아하는. 그리고 우현이 날 좋아한다고 했고. 그동안 내가 우현이 불편했던, 더욱 틱틱거렸던 이유는 내게 너무 관심이 많던 우현이 이상하고 적응이 되지 않아서 그랬던 거였는데 그게 다, 날 좋아해서. 성규는 마음 속 어디선가 새록새록 올라오는 이 감정들이, 분명 단 걸 먹어서 그런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큰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 과정에서 전 직원들이 매일 야근을 하는 날도 있었지만 성황리에 마치니 다들 후련한 듯 했다. 팀장님, 오늘 저희 회식 안 합니까? 프로젝트도 끝났고 내일 주말인데 말이죠-. 건형의 말에 성규는 시간을 슬쩍 보더니 그럴까요, 오늘 조금 일찍 마무리 하도록 하죠. 하며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 이후로 우현과 별다른 일이 생기진 않았다. 우현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고, 꼭 그런 말을 내뱉은 적도 없었다는 듯 굴었다. 내가 혹시 그날 다른 말을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였으니. 물론 신경은 쓰였지만 워낙 일이 바쁘기도 했고 다시 물어보기도 그랬다. 우현씨, 혹시 나 좋아한다고 했었나요?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이다.

 

 

“B팀도 불러야죠?”

“…어, 네. 제가 연락해볼게요.”

 

 

성규는 정리한 파일들을 책상 한 구석에 놔두고는 우현의 번호를 찾았다. 그날 이후로 성규가 달라진 게 있다면 이렇게 연락을 하는 게 조금 눈치가 보인다는, 그 정도였다. …김성규입니다. 오늘 저녁에 되시나요. 그리고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고 바로 1이 없어지는 걸 보고 성규는 괜히 어색함에 핸드폰을 꼬옥 쥐었다. 그리고 당연하게 답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화면에 뜨는 남 팀장이라는 이름에 깜짝 놀라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네, 남 팀장님?

 

 

“왜요?”

“네, 아. 오늘 저희 팀 회식하는데 B팀도 같이 하면 어떤가 해서요.”

“……아아.”

 

 

잠시 동안 말이 없는 우현에 성규는 남 팀장님? 하며 다시 불렀고 우현은 그제야 좋다며 장소를 찍어달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성규는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고 생각하며 전화가 끊기자마자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저녁 시간대가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지 고깃집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하나 둘 자신의 앞 잔에 채워진 잔을 들고 건배사를 정하려고 하는데 건형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희 두 팀장님의 화목함을 바라는, 어때요? 하며 옆 사람에게도 의견을 구하는데 다들 좋다는 눈치였다. 성규는 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우현이 우리 좀 친하게 지내라는 뜻 같다며 의미를 해석해주었다.

 

 

“…정말 어이없는 건배사네요.”

“저희 좀 화목해질 필요는 있지 않나요?”

“어이없고 좋다고요.”

 

 

팀원들도 이렇게 말을 하는 걸 보면 우현과 자신이 평소에 트러블이 많았단 걸 다시 한 번 느낀 성규가 그런 일이 잦아지지 않도록 조금 조심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럼 저희 두 팀장님들이 화목하기를 바라며, 건배! 큰 목소리가 이 공간에 울렸다. 사실 저희 팀장님들 싸우실 때마다 가운데에서 얼마나 난감했는지 몰라요. 그제야 속이 시원한지 팀원들이 그동안 쌓였던 속마음들을 조금씩 꺼내기 시작했다. 성규는 넘어가는 소주가 평소보다 더 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맞아, 근데 이번에 유독 야근이 많지 않았어요?”

“아휴, 말도 마. 나는 정말 집에 들렀다 나오는 수준이었어. 회사에 이불 놔둘까 생각까지 했다니까.”

 

 

그리고 이 시끄러운 공간에서 성규는 왠지 모르게 우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사실 평소 성규는 남의 일에 원체 관심이 없는 성격이었지만 우현이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는데, 성규도 사람인지라 신경이 쓰이는 거였다. 뭐, 우현은 기억도 안 나는지 잘도 술을 넘기고 있었고. 이렇게 눈치 보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보기도 그랬다. 그러니까 성규는 이 상황이 너무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김 팀장님, 그렇게 술 마시고 내일 골골거리시려고요?”

 

 

답답함에 술을 벌컥 넘기니 앞에 앉은 우현이 말을 건넸다. 술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에 골골거리시겠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꾸역꾸역 집어넣은 성규가 어색히 웃으며 오늘 술이 잘 받네요, 하며 맞받아쳤다. 몇 잔 마시고 나니 술기운이 올라오는 게 꼭 담배가 말려 주머니를 뒤지는데 며칠 전 금연을 하겠다고 담배를 싹 어딘가로 치웠던 게 떠올랐다.

 

 

“팀장님, 어디 가세요?”

“편의점요. 담배 떨어져서.”

 

 

성규는 자신의 말에 각자 주머니를 뒤지는 팀원들에게 됐다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저녁이라 찬 공기가 바깥을 가득 채웠고 답답함이 조금 가시는 기분에 눈을 살짝 감았다. 잡다한 생각들을 하느라 그런 건지 피곤함이 몰려왔다.

 

 

“여기요.”

 

 

그리고 피곤함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우현이 성규의 뒤를 따라 나와 담배를 한 대 건네었다. 거절을 하지도 못하게 불도 주며. 성규는 담배가 꽂혀있는 우현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다 아무 말 없이 받고 입으로 가져갔다. 금요일 밤이라 시끄러운 이 공간에 꼭 우현과 성규, 우리 둘이 있는 곳은 누군가 음소거라도 해놓은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우현씨.”

“네.”

 

 

취기가 점점 올라왔고 눈도 느릿느릿 감겼다. 술을 핑계로 성규는 우현에게 뭐라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정도로 취하려면 아직 멀었는지 용기가 나지 않았고, 또 그런 걸 물어본다면 정신이 확 깨버릴 거 같았다. 이런 식으로 넘기면 안 되는 건 아닐까? 아니, 그냥 없던 일로 해야 되나. 그게 맞는 걸까.

 

 

“성규씨, 주말에 저랑 영화 볼래요?”

“……네?”

 

 

그리고 성규가 한참을 아무 말도 없자 우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영화, …영화. 성규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채기 위해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사실 아까 성규씨한테 문자 왔을 때, 다른 의미인 줄 알고….”

“……….”

“주책이죠?”

“……….”

“근데 말 나온 김에 진짜로 저희 영화 보러 갈래요?”

 

 

멍하니 대답도 하지 못하는 성규에게 우현이 살짝 다가오더니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조금 그런가요? 정말 이상하게 그런 우현이 너무 안쓰러워 보여서 성규는 덜컥 대답을 하고 말았다.

 

 

“아, 아니요. 봐요, 영화.”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정말요, 정말이죠? 하는 우현이 얼마나 기뻐보였는지, 성규는 우현이 말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이 감정에 부흥을 못해주면 이 사람은 많은 상처를 받을까?

 


  다음날은 정말 우현의 말대로 골골거리며 잠에서 깼다. 담배를 피우고 들어간 성규는 그 자리에서 맥주 잔에 소주를 부어 죽어라 마셨다. 우현이 대리를 불러주고 자신이 기어 오다시피 집에 들어왔던 게 드문드문 떠올랐다. 김성규, 쪽팔려서 얼굴 어떻게 들고 다닐래….

 

[아침에 일어나면 연락 한 번 줄래요?]

[그리고 냉장고 안에 약 사다 뒀으니까 꼭 먹고요.]

 

문자는 어제 있었던 일이 없던 일이 아니라는 걸 성규에게 다시 알려주는 거 같았고 침대에 누워 몸도 일으키지 못하고 겨우 눈만 떠서 본 그 문자들을 무시하진 못했다. 꾸역거리며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여니 텅텅 빈 냉장고 한가운데 덩그러니 숙취해소제가 놓여있었고 가스레인지 위에는 자신은 올려둔 기억이 없는 냄비가 하나 올려져 있었다.

 

[북엇국도 조금 했어요. 함부로 막 해서 미안해요.]

[근데 성규씨 속 쓰릴까 봐 조금 걱정돼서]

[아, 집엔 들어가야 되니까 성규씨한테 비밀번호도 물어봤어요. 집 비밀번호도 바꿔야 할 거 같아요.]

 

그 문자들이 이런 의미였구나. 성규는 북엇국을 그릇에 조금 담아 식탁에 앉았다. 직접 만든 걸 먹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우현이 잘 한 건진 몰라도 맛도 좋았다. 그리고 가만히 바닥을 드러낸 그릇을 앞에 두고 가만히 앉아, 자신이 연애를 언제 했는지 생각해보았다. 몇 년이 지났지. 내가 몇 년 동안 연애를 안 했지. …이 감정이 무슨 감정일까, 연애할 때 이런 감정이었던 거 같긴 한데. 내가 너무 오래 연애를 안 해서 착각을 하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남우현이 너무 안쓰러워 보여서 그런 걸까.

 

  어제 우현과의 약속으로 영화를 보러 나오게 된 성규는 자신이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친절하고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우현에 종일 이상한 감정이 마음 속 어딘가에 돌아다녔다. 이런 게 사랑받는 거구나, 근데 나는 이정도로 같은 마음은 아닌데.

 

 

“성규씨, 영화 별로였어요?”

“재밌었어요. 진짜로.”

 

 

우현이 조금 불안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동안 어떻게 이런 우현의 마음을 몰랐었지 싶을 정도로 티가 나는 사람이었다. 성규는 그런 우현에게 정말이라며, 불안하지 않게 웃어주는 것 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근데 전에 저한테 고백했을 때요. 그 이후엔 왜 평소랑 똑같이 행동했어요?”

“아, 그거.”

 

 

그리고 첫 번째로 궁금했던 것. 성규는 딸기 케이크를 주며 자신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그날, 그 이후엔 왜 우현이 이런 식으로 다가오지 않고 똑같이 행동했는지를 물어보았다. 민망했나? 아니면 없었던 일로 하고 싶었나.

 

 

“사실 좀 후회했어요. 우리 그때 한창 프로젝트나 뭐다 바쁠 때였는데.”

“……그쵸.”

“성규씨 더 피곤하게 한 걸까 봐 바로 후회되더라고요.”

 

 

안 그래도 미안해요. 우현은 목덜미를 긁적이며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그럼 우현씨 원래… 처음부터 남자 좋아하고, 뭐 그랬어요?…”

“아뇨.”

“근데 왜….”

“성규씨가 워낙 멋진 사람이었나 봐요. 절 바꾼 거 보면.”

 

 

그리고 두 번째로 궁금했던, 우현이 원래 성향이 이런 쪽이었는지를 물어봤다. 성규는 그 대답을 듣고 어떠한 반응도 하지 못했다. 우현이 자신에게 고백하고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던 것이,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서, 그냥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바보 같은 건 나였다.

 

 

“나 무슨 취조 당하는 줄 알았어요.”

“………”

“궁금한 거 또 있어요? 말만 해요. 다 대답해줄 테니까.”

 

 

우현은 정말 다 대답이라도 해줄 것 마냥 환하게 웃어보았다. 진짜 다 대답할 수 있는데, 궁금한 거 지금 물어봐요. 나중엔 물어봐도 답 안 해줄 거예요. 성규는 그런 우현을 보며 같이 웃어주었다. 제일 궁금했던 건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아뇨, 없어요.”

 

 

…내가 만약 당신과 연애를 하는데, 당신과는 같은 감정의 속도로 따라가지 못해도 괜찮아요?

 

 

  회사에 조용히 도는 말이 생겼다. 팀장님들이 건배사를 하고 나서 분위기가 좋아진 거 같다며, 그건 A,B팀뿐만이 아닌 다른 팀까지도 알 정도로 작지만 크게 퍼졌다. 심지어 부장님까지도 요즘 남 팀장과 김 팀장이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기 까지 했으니. 이정도가 되니 성규는 대체 평소에 자신과 남 팀장이 어떤 관계였는지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내가 남 팀장과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나요?”

“그렇지 않았어요? 만나시면 항상 분위기가 좀 살벌하셔서.”

“……그런가요.”

 

 

성규가 말을 읊조리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팀원이 입을 성규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근데 정말 요 근래엔 남 팀장님과 트러블이 없으시네요.”

“……….”

“그리고 도는 말들이, 아마 남 팀장님이 김 팀장님을 자주 찾으셔서 그런 것도 있을 거예요.”

“……….”

“점심때마다 오시고, 퇴근도 같이 하시지 않아요?”

 

 

생각해보니 정말 그러네요…. 성규는 꼭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대답을 해왔다. 사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우현이 자신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해준다는 것을. ‘연애’를 안 하는 것뿐이지 꼭 연애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우현은 왜 그 이후로 다시 고백을 안 하는 걸까. 내가 아직도 혼란스러운 걸 알고 있는 건가.

 

 

“성규씨, 일 남았어요? 뭐 도와줄까요?”

“아뇨, 끝났어요.”

“그럼 가요. 데려다줄게.”

 

 

끄덕. 우현은 종종 아침에 성규를 데리러왔다. 운전하는 게 피곤한 아침에 남이 태워주는 차를 타고 출근을 하는 건 꽤나 행복한 일이었는데 우현도 성규가 좋아하는 걸 알았는지 자주 와주었다. 그리고 그런 날엔 성규가 차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우현이 데려다주게 되었다. 그러다 성규는 피곤하지 않냐며, 이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했지만 우현은 정말 괜찮다는 듯 더욱 자주 성규의 출퇴근을 책임져주었다.

 

 

“우현씨, 고마워요.”

“별로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

 

 

최근 들어 계속 들어왔던 그 말들이 오늘따라 거슬리게 다가와서, 성규는 차에서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걸음을 떼지 않았다. 우현은 그런 성규를 보다 차 문을 열고 나와 성규에게로 다가왔다. 왜요, 할 말 있어요?

 

 

“우현씨, 힘들지 않아요?”

“뭐가요?”

“…이런 일들이요. 자꾸 저 챙겨주는 거.”

 

 

그리고 우현은 그런 성규의 말에 잠깐 무언가 생각하는 듯 했다. 성규는 그저 가볍다면 가볍게 물어본 질문이었는데 우현은 많은 생각을 하는 지 한참이나 답이 없었다.

 

 

“혹시 성규씨가 힘들어요?”

“……….”

“요즘 저희 팀원들이 그러더라고요. 제가 성규씨랑 친해진 거 같다고, 무슨 사이라도 되는 거 같다며.”

“……….”

“역시 그런 거 조금 불편한가요.”

 

 

우현은 그 언제처럼 씁쓸한 듯 웃으며 성규와 마주했다.

 

 

“아니면 혹시 제가 안쓰러워요?”

“……아니,”

“내가 안쓰러워서 그동안 저 받아준 거였으면 안 그래도 돼요.”

“……….”

“제가 좋아하는 마음이 성규씨를 힘들게 할 수도 있었겠어요.”

 

 

이게 뭐지?

 

 

“미안해요, 이제 그만해야겠다.”

 

 

단순히, 난 그냥 물어본 거였는데. 우현은 또, 또 웃음을 띠며 조곤조곤 말을 내뱉었다. 생각을 해보면, 회사에 돌던 그 말이 우현에게도 당연히 들어갔을 거였는데, 우현은 나보다 더 깊고 많은 생각을 했구나. 나보다 더 혼란스러웠구나.

 

 

“그리고, 나 또 정말 미안한데.”

“……….”

“안아 봐도 돼요?”

 

 

한 번도 안아본 적이 없는 거 같아서. 제가 성규씨 많이 좋아하거든요. 근데 끝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슬프기도 해서. 우현이 어울리지 않게 주절거리며 말을 이었다. 성규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요.”

“……….”

“미안해.”

 

 

내 마음이 당신에겐 조금 힘이 드나봐. 그리고 꼭 우는 것 같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그게 아니라고 해야 되나. 아니, 그랬다가 나중에 우현이 더 상처를 받으면? 그렇다고 난 우현을 안 좋아하는 건 아닌데, 단지 그 정도의 감정은 아닌 거 같아서. 그냥 그런 건데.

 

 

“들어가요.”

“……….”

“내일, 아니. ……네. 먼저 갈게요.”

 

 

당연하게 내일 보겠다는 그 말을 내뱉지 못한 우현이, 항상 자신에게 등을 보이지 않던 우현이 등을 보였다. 성규는 우현이 이곳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그 순간까지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있었다.

 

 

  우현은 적당함을 유지했다. 그 예전처럼도 아닌, 자신에게 잘 대해주던 최근도 아닌 딱 그 중간을. 분명 예전엔 왜 이렇게 많이 만나지 싶을 정도로 자주 부딪히곤 했는데 확실히 그것도 다 우현의 노력이었는지 그 노력이 끊김과 동시에 우현을 만나는 일이 확연하게 줄어들기도 했다.

 

 

“남 팀장님이 전달해달라고 하셔서요.”

 

 

그리고 이건 최근에 가장 듣기 싫지만 자주 듣는 말이었다. 우현이 오지 않으니 B팀의 팀원이 성규에게로 오는 일은 잦아졌다. 네, 거기 두고 가세요. 곧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성규는 지치는 기분에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벌써 그런 일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나가는데 왜 이렇게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한 건지.

 

  아. 사무실에 성규의 신음 소리가 울렸다. 팀장님, 또 어디 부딪히셨어요?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함께 ‘또’라는 그 말이 머릿속에 박혀 들어왔다. 정말 말 그대로 또였다. 근래에 성규는 갑자기 걸어가다 책상 모서리에 찧는 등 사소하게 다치는 것들이 많아졌다.

 

 

“저번엔 커피 마시다가 뜨거운 물을 쏟으시더니. 팀장님 너무 고생하시는 거 아니에요?”

 

 

성규는 좀 쉬셔야 할 거 같다며 말을 이어오는 팀원에게 괜찮다는 말을 해주긴 했지만 안 괜찮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진짜 이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 자꾸 우현이 머릿속에서 잊히지가 않았다. 우현과 같은 감정으로, 같은 속도로 가지 못할 걸 알면서도 자꾸 떠오르고 자신의 인생에 파고 들었다. 우현에 기대치에 못 미쳐서 언젠간 우현도 지치게 할 게 분명한데. 난 왜 자꾸 이렇게 우현을 찾게 되는 건지. 왜 자꾸 우현을 보고 싶어 하는 건지.

 

  일에 집중을 하면 잡다한 생각들은 모두 잊을 수 있을 거 같아 하지 않아도 되는 야근을 계속 했다. 집에 있는 시간보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다. 성규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단순히 우현의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우현에게 기대면 그건 우현을 위한 일이 아니니 이 마음을 버리려고 노력했다. 우현도 그러고 있을 테고, 그러다 보면 우리는 언젠간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하고 마주 보는 날이 올 것이라고, 슬프긴 하지만 그런 날이 올 때까진 그러기로 했다.

 

 

“……….”

 

 

오늘도 하늘이 어둑해지는 걸 보고 나서야 성규는 짐을 챙겼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오랜 시간 일을 한 탓에 기운이 빠진 성규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잠을 이겨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띵. 성규가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춘 엘리베이터 안에 누군가 들어왔다. 성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정말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 보고 싶었던 우현이 눈에 들어왔다.

 

 

“……….”

 

 

한참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규는 방금까지 피곤해 죽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들이 하나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고 작고 큰 모든 생각들이 우현으로 가득 채워졌다. 어떡하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아니, 말을 건네도 되는 걸까.

 

 

“커피 한 잔 할래요?”

“……….”

“아, 뭐 카페 가고 그런 거 말고. 간단하게 캔 커피.”

 

 

지하에 다 와 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성규지만 우현은 아니었다. 우현의 물음에 성규가 작게 …네, 하고 대답을 하니 우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 층을 눌렀다. 우현이 캔 커피를 사오는 동안 성규는 어떤 말을 꺼내야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머리가 터져버릴 거 같았다.

 

 

“여기요.”

“아, 고마워요.”

“뭐. 별로.”

 

 

우현은 고개를 으쓱이며 캔 커피를 성규에게로 내밀었다. 어색함이 맴돌았다. 어둑한 하늘을 보니, 웃기게도 우현이 자신에게 딸기 케이크를 건넸던 그날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났구나.

 

 

“…우현씨는 왜 야근했어요? 우리 남은 일이 있었나?”

 

 

나는 당신을 잊으려고 한 거거든요. 어이없죠. 성규는 차오르는 말을 꾸욱 내리 담으며 물었다. 우현은 그 말을 듣고 캔 커피를 벌컥벌컥 넘기더니 성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일을 하면 아무 생각도 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

“난 생각보다 당신을 잊는 걸 못하더라고요.”

“……….”

“웃기죠.”

 

 

뭐?

 

 

“왜, 왜요?”

“……….”

“내가 뭐라고, 왜요?”

“……….”

“왜 날 못 잊어요? 내가 대체 뭐라고, 왜 당신이 그렇게, 왜.”

 

 

눈물이 차오를 거 같았다. 난 이렇게 당신에게 이기적인데 당신은 왜 아직도 고생을 하고 있는 건지. 당연히 나 같은 건 예전에 잊은 줄 알았는데. 왜 나 같은 거 때문에.

 

 

“많이 좋아한다니까요.”

“대체 왜…….”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내가 당신을 잊는 것보다 당신이 날 좋아하는 게 빠를 수도 있어요.”

 

 

우현은 그런 말을 내뱉고 성규의 표정을 보더니 농담인데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없기입니다, 하며 성규를 보고 웃었다. 뭐, 그냥, 그만큼 좋아한다는 거죠. 그렇다고 강요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다는 거지. 다시 한 번 커피를 마시며 목이 탄다고 장난같이 말을 하는 우현에 성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왜 이렇게 잘해줘요, 왜!”

“…성규씨.”

“나는 당신을 지치게 할 수도 있는데, 내가 그 기대치에 못 미칠 수도 있는데.”

“……….”

“나와의 연애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행복하지 않을 텐데. 대체 왜.”

“……….”

“나는 나만 잊으면 되는 줄 알고, 당신은 나 같은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데.”

 

 

횡설수설 말을 하는 성규를 마주하고 있다 인상을 구기며 자신이 지금 뭘 들은 거지 하는 얼굴을 한 우현이 입을 열었다. 성규씨, 진정하고, 지금 내가 잘못 이해한 거 같아서.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아니, 물어볼게요.

 

 

“…성규씨가 저 좋아하나요?”

“네. 맞아요, 좋아해요. 좋아하는데!”

“아…….”

 

 

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신없이 왔다 갔다 거리며 와, 아니,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우현씨, 지금 제 말 들은 거 맞아요? 성규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며 우현을 잡았다. 우현씨, 잘 들어요.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게 중요하지 뭐가 중요해요?”

“좋은 사람이 아닌,”

“지금 나한텐 김성규가 제일 중요해.”

“데…….”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요.”

 

 

근데 그런 김성규가 날 좋아한다는데, 이것보다 중요한 일 있으면 어디 말해 봐요. 말도 안 되는 말을 세상에서 제일 진지한 얼굴로 말을 하는 우현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좋아하면 다가 아니잖아. 당신이 나한테 지치는 걸 보기가 싫어.

 

 

“맞춰가면서 만나자는 거예요.”

“……….”

“처음부터 완벽한 연애가 어디 있어.”

“……….”

“서로 맞춰가며 좋아하는 게, 그게 연앤데.”

 

 

그리고 어떻게 당신이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보다 더 날 좋아할 수 있겠어요. 난 정말 오래 좋아했다니까. 성규를 꽉 껴안으며 이것 봐, 당신이 날 좋아하는 게 더 빠르죠? 하는 시답잖은 소리를 늘어놓는 우현을 가볍게 친 성규가 어깨에 푹 얼굴을 파묻었다.

 

 

“…좋아해요.”

“그거면 됐어요.”

 

 

어찌 되었든, 나에게 와주면 된 거라고.

 

 


  커피 심부름?

  서정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던 우현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서정의 손에 들려있던 음료를 대충 훑던 우현이 방긋 웃었다. 딸기 있네요. 서정은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김 팀장님이 딸기 좋아하시더라고요.”

“봐. 난 김 팀장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어요.”

 

 

탈까요? 문이 열리자 먼저 걸음을 하는 우현의 뒤를 서정이 졸졸 따랐다. 서정은 어색한 분위기에 헛기침을 하다 자신의 층을 안 누르는 우현에 대신 우현의 층을 눌러주었다. 어, 저 서정씨랑 같이 내려요. 서정은 그 말에 왜요? 하며 묻고 싶었다. 잠시라도 이 어색한 공간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는데.

 

 

“이거 내가 김 팀장 전달해줄게요. 그럼 수고해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우현은 서정의 손에 들려있던 딸기 쉐이크를 꺼내들었다. 어, 네…. 서정은 근데 왜 온 거지, 하고 의문을 가지다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김 팀장님한테 할 말 있나보지.

 

 

똑똑. 노크 소리에 성규가 들어오라는 말을 하다 보이는 인물을 보고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성규의 테이블 위에 쉐이크를 올려둔 우현이 그대로 성규를 안았다.

 

 

“보고 싶었어.”

 

 

지방에 내려갈 일이 생겨 이틀 정도 보지 못했는데 그 시간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졌는지. 성규가 그런 우현을 더욱 꽉 안았다. 바로 왔어? 씻고 온 거야? 샴푸 냄새 나는데. 밥은?

 

 

“일 끝나자마자 바로 왔고 집에 갔다가 씻고도 왔어. 밥은 너랑 먹으려고 아직 안 먹었고.”

“배고프겠다.”

“그것도 그거지만 김성규 너무 보고 싶어서.”

 

 

남들보다 느렸지만 성규와 우현의 감정이 비슷해졌다. 그 과정에서 어긋나기도, 멀게 돌아오기도 했지만 결국엔 당신이 지금 내 옆에 있다는 게 큰 행복이고 소중함이었다. 성규에게 있어 우현은 사실 처음이 아닌데 처음인 것 마냥 설레는 사람이었다. 그동안에 느꼈던 설렘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내게 그 누구보다 특별한 사람, 소중하고, 날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 성규가 우현에게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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