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제 그만 할까요.”

피곤해 눈꺼풀이 푹 꺼지고, 살도 많이 내려 전처럼 윤도 나지 않는 얼굴을 한 리환이다. 그러나 본연의 색이 가득한 어롱거리는 눈빛에는 어떠한 체념도 화도 미움도 없었다. 그저, 그 안을 가득채운 것은 이쯤이면 이 말을 짐작을 했을만한 석우 그 자신뿐이었다. 석우가 선물한 반지는 아직 리환의 왼쪽 약지 손가락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헐거워진 반지는 힘을 주지 않는데도 손을 조금만 움직여도 손가락 반 마디를 남기고 흘러내려와 손에 끼워져 있었다. 그런 반지를 쳐다보던 석우가 다시 리환의 손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아무리 끼워 넣어도 헐거워진 반지는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빙빙 돌았다. 마치 제 마음이 갈 곳을 잃어 이제 적을 두지 못해 허공을 떠도는 것과 비슷해 보여 울컥한 석우는 그런 리환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석우가 한숨과 함께 토해낸 진심 한 끝은 다잡았던 리환의 마음을 다시 와르르 무너지게 했다.

한 번의 실패는 석우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갔다. 고등학교 시절, 목을 매단 아버지의 비참한 최후를 처음 목격한 석우는 좀 먹듯 자신을 갉아가며 이 자리에 힘겹게 올랐다. 그리고 남은 것은 이혼 합의서와 양육권 분쟁뿐이었다. 아내를 닮아 예쁘지만 석우의 모습도 반 이상 닮은 수안이는 좀처럼 말이 없는 아이였다. 그렇다고 발달이 더디다거나 어디가 부족하다거나 보살핌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더 필요한 아이도 아니었다. 평범했지만 조용했다. 남들의 평가로는 애어른이라고 했다. 성격은 어릴 때 결정 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던 석우는 결국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노년을 보낸다고 하던 어머니를 다시 서울로 모셔와 수안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석우의 전 아내는 그 사실을 듣고 일찌감치 자신의 변호사를 통해 양육권 소송을 알려왔다. 머리가 지끈거리게 아파도 석우의 손에 남은 건 이제 수안뿐이었다. 수안마저 자신의 곁에 없으면 제 인생을 통째로 부정 당하는 느낌이 들 것만 같아 어떻게 해서든 수안을 제 곁에 두는 것이 온전하다고 느꼈다. 하루가 무엇인가, 일주일, 아니 한 달에 세 번이라도 만나면 수안은 석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눈에 새기기에 바빴다.

오랜만에 주말 아침이 비는 날이었다. 수안은 잠도 덜 깬 채 나와 석우가 일어나 아침을 먹는 식탁에 오롯이 서서 석우를 쳐다보았다. 석우가 그런 수안을 안아 무릎에 앉히고 왜 잠을 더 자지 않고 나왔느냐고 물었더니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아빠 얼굴 잊어버렸어요.”

솔직한 아이의 대답에 석우는 숟가락을 내려두고 자신의 칠분의 일정도 될 만한 아이의 작은 몸을 껴안고 조심이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이렇게 아이의 몸을 껴안고 온전히 느껴본 적이 언제던가 싶을 정도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아이는 어느새 훌쩍 커 있었다. 찰랑거려 목을 가리는 아이의 머리를 서툰 손길로 대충 묶어주어도 아이는 이가 두 개 빠진 입술을 훌쩍 올리며 웃었다. 뭉클함. 그리고 본능으로 탄생한 부정(夫情)은 석우에게 앞으로 더 나아갈 동력을 심어주었다. 그 날 석우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연락이 가득 올 휴대폰을 끄고 집에서 빈둥대며 수안과 하루를 보냈다. 수안은 잠이 든 밤 아홉시까지 한시도 석우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잠이 든 그 순간까지 석우의 손을 놓지 않았다. 석우는 자그마하지만 어느새 태가 나고 있는 수안의 손을 잡고 뽀뽀를 했다. 아빠 담배 냄새 나요, 라며 거짓을 말하지 않던 수안의 얼굴이 생각나 빙긋 웃으면서도 정말 담배 냄새가 그 작은 손에 밸까 오래 입을 맞추지도 못하고 금세 입술을 떼어내고 자고 있는 수안의 얼굴을 수없이 쓰다듬다 겨우 발걸음을 떼어내 허전한 침실에 홀로 누웠다. 이깟 불빛이 없는 휴대폰은 석우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었다. 그렇게 서팀장, 서팀장 이름대신 석우를 부르던 사람들과 하루 연락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늘 지루하게 자리하던 두통이 사라졌다. 담배도 손에서 쥐지 않는 시간이 늘어났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이런 휴식이 아닐까 석우는 생각했으나 수안이 잠들자마자 휴대폰을 켜는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협탁에 둔 휴대폰이 제 몸부림을 끝낸 것은 휴대폰을 끈 지 꼬박 15시간이 지난 후였다.

많은 연락 중 가장 시급하게 연락을 해야 할 것은 자신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김대리의 연락이었으나 김대리는 한 번 연락이 닿지 않자 그 후로는 연락을 더 해오지 않아 석우를 웃음 짓게 했다. 합이 맞다는 것은 이런 것을 의미하는 걸까. 일요일 늦은 밤에 부하직원에게 전화를 하는 상사가 되고 싶지는 않아 석우는 짧게 남긴 메시지 하나를 쳐다보며 내일 근사한 술이나 밥이라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정갈한 몇 글자가 머릿속에 떠돌았다. 시시콜콜한 거래처 직원들이나 간혹 흑심 품은 몇 몇이 석우에게 주말인데 무엇을 하냐는 검은 속내를 드러낸 연락이 보였다. 골프 약속도, 입에 맞지도 않는 한정식집에 오도카니 앉아 부대끼는 술을 주고받는 주말이 아닌 이런 주말을 보낸 것이 낯선 것은 석우도 마찬가지였으나 무엇인가 남지 않는다고 해서 남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몇 걸음만 가면 제 침대에서 고요히 자고 있는 수안을 통해 깨달았다는 것이 참 늦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결혼을 한지 9년 만에 이혼을 했고, 이혼을 한지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석우는 자신이 아주 소중한 것을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 채 잃을 뻔 했다는 사실에 조금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석우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보다 머리가 좋은 편이었고 남들보다 머리 하나쯤은 더 컸다. 하지만 머리가 좋다고 해서 그 감정의 흐름과 깊이를 모두 다 따라간다는 가정은 석우에게 통하지 않았다. 제 앞에서 수줍게 러브레터를 건네며 웃던 같은 반 학생에게 나는 너, 관심 없는데. 라는 말로 고백을 일축하고도 왜 그 학생이 자신을 향해 눈을 흘기며 우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도시락을 같이 나눠 먹던 친구 하나가 석우에게 너 참 매정한 놈이라는 걸 말해주어 그때 알았다. 진심을 팽개치는 행위는, 자신에게 있어 아무런 해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석우는 겁이 났다. 상대를 불문하고 진심이 다가오면 대처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진심에는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는 통상적인 행동이나 말도 석우에게는 모두 거부반응만 일으킬 뿐이었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한 결과로 아버지는 자살을 했고, 아버지의 앞으로 남은 빚은 고스란히 석우에게 되돌아왔다. 석우에게 진심이란 두렵고 무서운 것이었으며 최우선의 가치는 결코 아니었다.

거래처에서 몇 번 밥을 먹고 때로는 회식을 하던 여자는 어느 날 석우에게 불편한 연락을 해왔다. 평소와 달리 서팀장님이 아닌 서석우씨 라는 다소 어려운 호칭으로 시작된 긴 문장에 끝은 그래서 결정은 우리 둘의 몫이라는 말이었다. 석우는 처음 문자를 읽고 곱씹다 이내 눈썹 끝을 올려 불편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한참 바쁜 시기라 다른 것에 발을 묶일 수 없었다. 석우는 밤늦게 답을 했다. 당신 뜻대로 해요. 아직 말조차 놓지 않은 두 사람에게서 흐르는 냉랭한 기운이 휴대폰 사이 너머로도 느껴졌다. 서로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 만남이 길어질수록 여자의 배가 불러오고 있어 웨딩드레스 피팅이 어려워지기 전 얼른 식을 치러야 한다고 말해 석우는 대뜸 준비도 되지 않은 여자의 손을 이끌고 제 본가에 내려갔다. 오랜만에 집을 찾아 온 석우를 반기던 석우의 어머니는 낯선 여자의 방문에 놀람과 동시에 반색했다. 네가, 드디어 라고 시작되는 절절한 호소 같은 울음은 석우를 더욱더 머리 아프게 했다. 하지만 여자는 자신이 드디어 석우의 테두리 안에 들어왔다는 듯 뿌듯한 웃음을 감추지 않고 어머니의 등을 도닥이며 마치 무엇이라도 된 냥 굴었다. 그 모습을 마냥 지켜보는 석우였다. 그 어떤 긍정과 부정도 석우는 여자에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다복한 가정이 꾸려질 줄 알았던 여자의 지나친 바람으로 남게 되었다. 여자도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여자였기에 다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꿈이라며 만나던 순간부터 말을 했다. 연민조차 들지 않는 여자에게 석우는 그러냐며 무심하게도 액정도 끄지 않은 휴대폰에 있는 시계만 볼 뿐이었다. 그 결과 남편이자 아빠의 자리는 늘 부재했다. 석우는 제가 보고 자란 것이 그런 것뿐이라고 여기며 자신에게 애초에 부정이라는 것을 기대한 여자를 탓했다. 여자는 그런 석우에게 맹렬히 저항했지만 석우는 도통 굳은 나무처럼 변할 줄 몰랐다. 지친 여자는 떠났고 그것이 꼬박 9년이 걸렸다. 석우는 여자가 그 정도 견딘 것도 대단하다고 여겼다. 아이가 있어서 그랬을까. 어느새 길어진 옛 생각을 접으며 석우는 침대 가운데에 누워 잠을 청했다. 몇 시간밖에 남지 않은 기상시간이었지만 잠이 잘 올 것만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꿈같은 주말이었다. 삼일 째 야근이 이어지자 체력이 좋은 석우 조차도 힘에 부칠 정도였다. 갑자기 주식이 요동치는 원인을 알기 위해 정제계에 아는 지인들이나 기자들에게 연락하는 것만 하루였다. 누가 장난을 치나, 불을 지피나. 요새 뜨고 있다던 모 펀드의 장난질 치고는 뒤에 악질이 숨어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찾아내기가 어려워 하루가 고단했다. 바쁘더라도 성과가 있다면 이렇게 쳐지지는 않을 텐데. 저보다 앞서 며칠 째 더 야근을 하던 김대리는 오늘 드디어 gg를 외치고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신혼이 오래 이어질 것 같다던 김대리의 말이 결혼 한 지 1년이 넘어서도 정말 사실로 이어지고 있자, 드디어 김대리의 휴대폰에서도 불이 나기 시작해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었다. 되도록 빨리 출근하겠습니다. 와도, 별 볼일 없는 것 알잖아. 그래도 팀장님 이렇게 며칠 째 퇴근도 못 하시고 계신데. 나는 내가 불안해서 이러고 있는 거고. 가 봐, 얼른. 조금이라도 졸기 위해 편한 자세로 의자에 누웠지만 굳은 승모근이 풀릴 줄 몰라 관자놀이가 당기듯 아파 오는 석우는 서랍에 둔 진통제를 물도 없이 삼키고 눈을 꾹 감았다. 꿈에서는 수안과 보냈던 지난 주말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곱씹은 문자들 사이로 보이던 검은 속내들 속 힌트.

대선과 맞물린 모 메신저를 통해 주먹구구식으로 퍼지고 있는 증권가 찌라시라고 불리는 말도 안 되는 루머들. 석우에게도 출처 없이 와 있어 미련 없이 스팸 처리를 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래도 펀드매니저라고 본능적으로 정보 수집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말도 안 되는 문장들을 곱씹으며 으르렁 댔었는데. 그 끝 문장에 자신이 속해 있는 펀드 회사의 이름이 거론되다 말았다는 사실을 왜 놓쳤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람이 붕 떠 있으면 될 일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곱씹으며 퇴근한지 이제 막 두 시간도 지나지 않은 김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대리는 두 통의 전화를 놓쳤고 그 사이 석우는 회사를 벗어나 찌라시의 출처를 찾아 거리를 헤매다 결국 모 기자와의 통화를 통해 출처를 파악했다. 정보가 없어 후달리면 패를 까고 덤비면 되지. 덤빌 패가 없으면 애초에 이 자리를 탐내질 말던가. 어느 정도 수습이 된 상황을 정리하고 나자 이번에는 석우가 세 통의 전화를 놓치고 이제 막 네 통의 전화를 놓치려고 하는 찰나였다.

“어, 미안합니다.”

어느덧 석우가 있던 곳은 길거리에 술집이 즐비한 골목이었다. 골목에서 빠져 나와 담배와 함께 전화가 울리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뒤에서 누가 툭 치는 바람에 휴대폰이 바닥에 뒹굴었다. 액정은 박살이 났고 휴대폰은 꺼졌다. 뒤를 돌아보면 밤인데도 흰 얼굴이 유난히 눈에 띄는 저와 눈높이가 비슷한 남자가 술에 취해 고주망태가 된 여자를 익숙하게 한쪽 어깨에 걸쳐 맨 모습이었다. 흔한 골목의 모습이었다. 마른 여자를 어깨에 걸친 남자도 퍽 말라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는데도 제법 가볍게 드는 것에 놀란 석우가 이내 바닥에 뒹굴고 있는 제 휴대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양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비단 화가 났다거나 기분이 상해 그런 것이 아니라 차일피일 미룬 백업이 후회 돼 이름도 모를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이 싫어 굳힌 인상이었다. 남자는 여자를 일단 자신의 차로 태울 모양인지 질질 끌리는 여자의 발을 상관하지 않고 저쪽에 세워진 차로 끙끙대며 안고 가고 있었다. 최대한 다치지 않는 선에서 움직이고 있으니 걸음이 느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 자기 때문에 상한 휴대폰의 상태를 보고는 더 마음이 급해졌는지 하얀 얼굴이 질리기까지 해 행동이 더 느려졌다. 결국 석우는 고주망태가 된 여자의 한쪽 팔을 살짝 잡아 균형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석우의 행동에 남자가 놀라 엇, 소리를 내기도 전 석우가 빠른 걸음으로 여자를 차 쪽으로 데리고 가자 남자도 이끌리듯 석우 보폭에 발을 맞췄다. 그리고 힐끔, 석우가 뒷문을 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이내 문을 열자마자 석우가 여자를 제법 곱게 팔을 놔주며 남자의 품에 안기게 했다. 담배. 석우는 여자에게서 나는 옅은 향수 냄새가 전 아내에게서 나던 향수 냄새라는 것을 기억했다. 그러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담배뿐이었다. 얼른 담배라도 펴서 이 향기를 내보내야겠다는 생각. 급하게 뒤를 돌아서서 최대한 차와 먼 골목 끝으로 향해 바람을 등지고 담배를 태웠다. 후우, 깊은 몇 모금의 담배를 태우자 이내 옅게 부유하던 여자의 향수냄새가 걷혔다.

톡톡.

그리고 이내 석우의 등을 손가락으로 장난스럽게 찌르듯 치는 느낌에 담배 향을 채 갈무리 하지 못하고 돌아보면 아까 그 남자가 석우의 깨진 액정을 한 휴대폰을 들고 서 있었다. 무척 난처하고 미안한 표정에 석우는 본능적인 저항심이 생겼다. 표정이 몇 개 밖에 없는 석우로써는 남자의 표정에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였을 것 같아 다시 표정을 원래대로 굳혔다. 보통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석우는 뜻하지 않은 오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내민 휴대폰에 시선만 둘 뿐 가져가지 않는 석우를 쳐다보는 표정에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포커페이스인가. 아니면 정말 저 표정이 진심인가. 전자이건 후자이건 석우에게는 영 맞지 않는 피드백임은 분명했다. 상황에 따른 피드백이 대체적으로 프로토콜 마냥 머릿속에 짜인 석우에게 이 남자는 그 정도가 맞지 않았다. 결국 두 모금 정도는 더 태울 수 있는 담배를 아쉽게 바닥에 비벼 끈 석우가 끈질기게 거두지 않는 남자의 손에서 제 휴대폰을 가져가 주머니에 넣었다. 상태 확인도 하지 않고 바로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는 석우를 보고 남자는 그제야 머쓱한지 뒷목을 살짝 긁었다. 흰 목덜미에 작은 발진 같이 분홍빛이 띄었다 사라졌다. 밤인데, 네온사인도 여기저기에 흩어져 정확히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그 모습이 잔상처럼 머릿속을 떠다녔다. 이번에는 술이 생각났다. 이왕이면 독주. 금방 마시고 취하지만 금세 깨는 독주. 입안을 혀로 굴리며 씁쓸한 담배 내음을 느끼다 주머니에서 무엇을 찾는지 코트며 입은 베이스, 바지를 모조리 다 더듬거리다 이내 손에 걸리는 것에 환한 미소를 짓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얼굴을 가다듬다 리환이 내민 것은 명함이었다. 조금 상하긴 했지만 제법 멀쩡해보이는 명함에는 박리환이라는 다소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세 글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한의원. 닥터로군. 석우는 제 명함을 줘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이런 상황에서 명함 교환을 해야 하는 것은 마땅한데도 어쩐지 손에 선뜻 가지 않는 석우였다. 남자는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던 그때처럼 끈질기게 석우의 행동을 관찰하듯 눈을 마주쳤다. 희고 조그만 얼굴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눈을 피하기에 석우는 지나치게 인간관계에 서툴렀다. 결국 재킷 안주머니에 있는 명함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리환에게 내밀자 리환은 잘 보이지 않는지 잠시 뒤로 몇 발 물러서다 이내 아,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당장 배상을 하기에는 힘들 것 같고, 내일 제가 이쪽으로 전화 걸겠습니다. 아, 전화 망가졌지. 다른 연락처는 혹시 있으신가요?”
“제 쪽에서 연락드리죠.”
“아, 네. 그런 방법이. 저는 일행이 보시다시피 만취 상태라 데리고 들어가야 해서 시간이 좀 모자란 관계로 죄송하지만 이쯤에서 인사드리겠습니다. 내일 꼭 연락 주세요!”

항상 포마드로 넘겨 가르마까지 정확한 석우와 다르게 샴푸만 했는지 어디선가 익숙하게 맡은 적 있는 샴푸의 향이 찰랑거리는 머릿결과 함께 숙여졌다 사라지자 석우는 독주의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결국 석우의 발걸음은 수안이 잠든 집이 아닌 골목 어디쯤 자리 잡은 술집으로 향했다.

“팀장님. 해결 하셨다면서요!”
“그래.”
“역시. 팀장님 아니면 이걸 누가 해결하겠어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근데 어제 집에 안 들어가신 거예요?”
“응.”
“와. 그 와중에 술도 드신 거예요? 체력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부는 그쯤 하고. 이제 뒤처리는 김대리가 할 수 있겠지?”
“그럼요. 아, 그런데 아까부터 부장님이 찾으시던데 알고 계십니까?”
“알아. 왜 찾아 그 꼰대는 갑자기.”

자신보다 선배이지만 일처리 능력으로 보나 연줄로 보나 석우보다 한참 밑이었으나 그놈의 배경이 부장을 집어삼켰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 그는 전형적인 자리놀음이나 할 양반이었다. 별로 위협이 되지 않을 인물이라고 늘 생각은 해왔으나 생각한 것을 그대로 내뱉을 수 있는 사이까지는 아니기에 술냄새가 묻어 있는 재킷 대신 항상 스페어로 회사에 놔두고 다니는 재킷을 걸치고 언젠가 이름 모를 누군가가 선물이라며 사준 향수를 뿌렸다. 제법 잘 어울려 그 브랜드로 계속 사고 있긴 했으나 이제는 지루해질 타이밍이었다. 조금 더 가볍고 흩어지는 향수 어디 없을까. 예를 들자면 어제 그 샴푸향기처럼….

“그러니까 저보고 라디오 코너에 출연을 하라고요.”
“그래. 이번에 네가 잡은 그 사건이 꽤 이슈가 돼서 홍보팀에서 아주 혈안이 되어 있는 모양이더라고. 이참에 너도 등판하면 좋지 뭘 그래.”
“말재주 없습니다.”
“대본은 작가들이 다 써준대. 넌 그냥 감수 봐주고 틀린 내용 있으면 수정해서 읽으면 돼.”
“몇 번 가야 하는데요.”
“특별 초대석이라 한 번이지 뭘 몇 번씩이나. 왜. 몇 번이나 가고 싶어?”
“두 번 이상이면 하지 않으려고 해서 한 말이었는데요.”
“하여튼 독한 놈. 일만 좋아하지 다른 건 다 잼병이지. 어떻게 딸은 낳았나 몰라.”
“부장님.”
“그래. 알았다고. 그럼 너 스케줄 비워뒀다고 위에 얘기한다.”

네 라고 곧이곧대로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은 석우의 진심이었다. 네, 하고 말면 등판하지 못해 안달이 난 쪼무래기 1, 엑스트라 1,2 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인생이 그렇게 끝나기에는 석우는 그동안 포기하고 달려온 것들이 너무 많았다. 훌쩍 커버린 수안부터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아픈 무릎과 손목을 가지고 수안을 돌보는 어머니가 그 중에서도 제일이었고 정이나 사랑 따위는 없었으나 책임을 포기한 전 아내와의 관계도 그러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 아직 빈속이라 어지러워 잠시 아득해졌던 앞을 다시 바라보며 아직 아침인데도 뿌연 서울의 하늘을 쳐다보며 수안이 녀석 마스크는 쓰고 등교 했을까 걱정하는 걸 보면 어디서 배우지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부정이라는 감정은 쉽게 씨앗을 틔운다고 생각했다.

평생 방송국에 갈 일이 없던 석우는 안내 받은 문자를 경비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경비는 수더분한 인상으로 수고하란 말과 함께 문을 열어주었다. 회사-집-회식장소 혹은 골프장만 다니던 석우에게 방송국은 별천지였으나 딱히 눈길을 끌만한 것은 없었다. 1층에 오도카니 서 있다 미팅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갈 때 쯤 석우는 문자가 온 휴대폰 번호로 그제야 전화를 걸었다.

“네, 김행아 PD입니다.”
“서석우입니다.”
“네. 서석우. 서석우. 서석우가 근데 누구죠.”
“김행아 라디오 PD님 아니십니까.”
“아, 아! 잠깐만요. 태희야, 그 사람 이름이. 아, 죄송합니다. 팀장님. 제가 네, 맞아요. 김행아 PD 맞습니다. 우리 미팅하기로 했죠. 어디에 계세요. 그쪽으로 제가 모시러 갈까요?”
“방송국 1층입니다.”
“제가 갈게요. 금방 갈게요!”

급하게 끊긴 전화에 석우는 불쾌한 마음이 잠시 올라오다 사라졌다. 사실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것에는 크게 무리가 없었으나 어제 회식을 하고 제대로 쉬지도 못해 도살장 끌려 나가는 심정으로 온 이곳이기에 속이 영 좋지 않아 그럴 기운이 없다는 편이 더 정확했다. 평소와 달리 챙겨 입지 않은 편안한 옷은 다행히도 방송국에서는 특별히 튀진 않았다. 그래, 아무리 튀더라도 저기에서 크고 마른 체격에 남자가 제 입술만큼 핑크빛 코트를 입고 서 있는 것보다야 덜 튀겠지….

“어? 엇. 어!”

그리고 저 얼굴은 석우가 기억을 하고 있는 얼굴이다. 한달음에 보폭 몇 번으로 대번 석우가 있는 곳까지 온 리환은 마치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것 마냥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꾸벅 해왔다. 그때와 달리 샴푸향이 나진 않았으나 무슨 향수를 뿌리는지 몰라도 여태껏 맡지 못했던 향이 잠깐씩 흩어져 나와 석우는 좋지 않던 속이 조금 더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왜 연락 안하셨어요.”

석우는 대답대신 액정이 깨진 채로 잘 켜져 있는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아, 작동이 되시네요 다행히. 네. 그래서 연락 안하셨어요? 액정은요. 손 봐야 하잖아요. 갈 시간이 없습니다. 정확한 견적이 나오면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견적 보러 갈 시간이 없어서. 그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오늘 견적 보러 가실….

“박리환!”
“어, 뭐야. 너 내가 연락도 안했는데 나 온 것 어떻게 알았어?”
“내가 도깨비야. 어떻게 네가 연락도 안 했는데 알아. 누구 좀 만나러 왔지.”
“누구?”
“응. 우리 코너 게스트 분. 펀드매니저.”
“서석우입니다.”
“그래, 서석우씨. 엥? 어? 뭐야. 둘이 아는 사이에요?”

그러고 보니 행아는 석우의 차림새도 물어보지 않고 급한 나머지 1층으로 내려 왔다는 사실을 엘리베이터도 버리고 비상계단으로 뛰어 내려오며 알았다. 어차피 전화 다시 하면 받을 테니 금세 만날 수 있었지만 첫 만남부터 너무 어그러진 모습이다 싶어 좀 조용히 만나고 싶었는데 리환 때문에 다 틀렸다고 생각해 한껏 인상을 찌푸리자 그런 행아에게 꿀밤을 놓는 리환이었다. 못생긴 얼굴 더 구기지 말고 이거나 받아가. 이걸 뭐 여기까지 배달을 해주냐. 안 가져가잖아 도통. 오늘 갈 생각이었는데? 거짓말 하지 마. 서로 으르렁 대는 것처럼 보여도 보이는 분위기는 연인 사이의 그것이라 석우는 가만히 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 석우를 먼저 알아차린 건 리환이었다. 아, 죄송해요. 저는 얘 이것만 주고 갈 거였는데. 게스트로 오셨다고요? 우와. 유명한 분인가보네. 너 몰라? 이번에 ○○ 펀드 주가 폭락하는 것 막으신 분이 이 분이잖아. 아, 나 뉴스에서 봤어. 아, 이 분이 그 분이구나. 그래. 그래서 우리 특별 초대석에서 자문 해주기로 하셨어. 갑자기 비행기 탄 기분에 석우가 뭐라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이마를 긁고 땅을 바라보다 이내 헛기침을 하자 리환의 흰 손이 대뜸 석우를 향해 내밀어졌다.

“잘 버시는 분 같은데 견적 나와도 좀 살살 다뤄주세요. 박리환입니다. 한의사에요. 통성명 순서가 좀 이상한 것 같지만.”
“제 소개는 김PD님이 다 하신 것 같고. 서석우입니다.”
“나도. 저는 김행아에요. 라디오 PD에요.”
“김PD님은 주량이 약하신가 보네요.”

아는 척은 굳이 안 해도 됐는데. 먼저 아는 척을 해온 리환이기에 별다른 뜻 없이 석우는 대뜸 행아를 향해 말했다. 그 말뜻을 모르는 행아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자 리환이 난처한 표정을 짓다 이내 행아의 귀에 귓속말을 해댔다. 그러자 삽시간에 행아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어, 어우. 왜 하필 그때. 그때 네가 휴대폰 깨트렸단 분이 서석우씨였어?”
“그래. 너 때문에 나 생돈 날리게 생겼으니까 너도 반 배상해.”
“아냐. 이거 잘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야. 태희도 그때 취해서 남자친구 부르라니까 너 부른 거잖아. 태희도 1/3 책임지라고 하자.”
“참나. 이제 덤탱이 씌울 데가 없어서 태희한테까지 씌우냐.”
“나 요새 돈 없어. 그 사람 조금 있으면 생일이라 돈 모으고 있단 말이야.”
“이팔청춘이다, 너 정말.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더니.”
“아직 배우지도 않은 사람보다는 낫거든요.”

그러면서도 리환이 안긴 한약이 담긴 박스를 소중히 끌어안고 잘 마시겠다는 행아를 보는 리환의 표정은 따뜻했다. 감정 읽기에 능숙하지 않은 석우가 봐도 소중한 것을 대하는 모습임은 틀림없어 보였다. 미팅 시간이 지체 되어 빨리 올라오라는 연락이 행아의 휴대폰으로 왔다. 행아는 석우에게 이만 올라가자며 리환에게 같이 갈 것이냐고 물었다. 리환은 외부인도 되냐면서 능청스럽게 얘기하면서 같이 걸음을 했다. 어차피 사전미팅이라 금방 끝날 거라며 작가가 대본 나눠주면 다음주 토요일까지 숙지만 해오시면 된다고, 피드백은 메일이나 메신저나 아무거나 다 환영이라는 행아의 말에 석우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행아에게 건네진 한약 박스는 어느새 다시 리환에게 넘겨져 있었다. 행아가 들기에는 다소 무거워 보이기는 했다. 라디오 부스 옆에 달린 조그마한 회의실로 행아가 먼저 들어가고 리환은 밖에 있는 소파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석우는 어느새 잠잠해진 속을 잘 다스리며 행아가 커피 괜찮냐는 말에 고개를 습관적으로 끄덕였다.

“안 돼. 서팀장님은 오늘 율무차 마셔야 돼.”
“여기에 율무차가 어딨어. 찻집인 줄 알아?”
“그럼 그냥 차 종류는 뭐 있는데.”
“녹차”
“그래, 그럼 녹차.”

자신이 마실 것인데 아무렇지 않게 주체는 빠지고 객체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더니 녹차가 큰 머그컵에 우려졌다. 그리고 그걸 스스름없이 내미는 행아에게 석우가 그걸 멍하니 보고 있자 어깨를 으쓱하며 기웃거리며 라디오 부스를 구경하는 리환을 쳐다보았다. 말 들으세요, 고집 세서 안 드시면 드실 때까지 잔소리 할 거예요. 정말 그럴 모양인지 라디오 부스를 한참 구경하다 아직도 석우가 녹차가 담긴 머그컵을 받아들지 않자 자신이 대신 받아들며 석우에게 내미는 리환이었다. 또다시 끈질기게도 석우를 쳐다보는 눈빛에 석우가 졌다는 듯 녹차를 받자 자신은 행아에게 오랜만에 커피 좀 달라고 한다. 정작 커피를 마시고 싶은 사람에게는 녹차를 주더니. 이게 웬 심술인가 싶어 석우가 한마디 하려 하자 말을 막은 건 리환이었다.

“어제 술 드셨잖아요. 그리고 아침도 안 드셨고. 보니까 며칠 야근도 하신 것 같은데 그 속에 서석우씨같이 양인들이 커피 마시면 대번 속 버려요 그거. 지금도 울렁거리는 것 참으시는 눈치인데 커피 마시면 속이 쓰려서 못 참으실 걸요. 제 말이 맞죠?”

생김새로는 한의사보다는 방송국답게 연예인이나 아님 배우를 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저렇게 말을 하자 저도 모르게 신뢰도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품질이 좋은 제품을 홍보할 때 얼굴도 중요하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석우는 말없이 또 고개만 끄덕이자 뒤에서 이 광경을 보던 행아가 낮게 한숨을 쉬며 리환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어깨를 또 으쓱했다. 조금 있으면 태희 와. 이렇게 노닥거리는 거 알면 너도 혼나고 나도 혼나고 서석우씨도 혼날 걸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희가 씩씩거리며 라디오 부스로 들어왔다. 뭐야, 다 모였는데 왜 회의 안하고 찻집 흉내야? 다들 시간이 남아돌아요? 나는 지금 원고 까이고 왔는데? 김행아, 너 내가 주제 바꾸자고 했어 안 했어! 갑자기 불똥은 행아에게로 튀었다. 행아는 재빨리 석우에게 태희가 손에 쥐고 있어 구겨지기 일보직전이 대본을 사수해 석우에게 넘기고는 국장에게 깨지고 온 태희를 달래며 라디오 부스 안으로 쏙 사라졌다. 문을 열었다간 사달이 날 줄 알라는 표정이라 리환은 찔끔했고 석우는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주어진 대본만 손에 쥐고 있을 뿐이었다. 와중에 리환은 얌전히 소파에 눕혀져 있는 한약 박스를 먼저 뜯더니 한약 한 봉지를 냉큼 주머니에 안에 넣었다. 그리고 마치 무슨 기밀 사항 전달하듯 아까 석우 앞에서 행아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처럼 석우의 귀에 대고 귓속말을 했다.

“가라는 얘기에요, 이거.”
“아직 회의 안 했는데.”
“대본 전달 받고 숙지하고 오라는 내용이 회의의 골자였나 보죠. 가요, 휴대폰 견적 내러. 행아랑, 태희한테 청구해야 할 돈도 있으니까 우리 꼭 영수증 처리해요.”

잊지 말라는 듯 당부하는 리환의 어느 쪽에 맞장구를 쳐야 할지 몰라 석우가 인상을 찌푸리자, 제가 너무 장난스럽게 얘기 했나요. 근데 정말 영수증 청구해야 걔들이 돈 줄 거란 말이에요. 그 말에 알았다며 석우가 주차장으로 발을 옮기자 리환이 반색을 하며 좋아한다. 다행이다. 저 오늘 차 안 끌고 택시 타고 왔는데. 신세 좀 질게요. 신세 진다는 말을 왜 저렇게 해맑고 기쁘게 하는지 모르겠다며 석우가 재차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안전벨트까지 맨 채 얌전히 조수석에서 기다리던 리환은 석우가 차를 출발시키려고 하자 히터를 대뜸 켜더니 잠깐 기다려 달라 말하고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한약 봉지를 꺼내 히터 앞에 팔랑거렸다. 그리고 곧 한약이 뜨끈하게 약간 데워지자마자 다시 히터를 끄고 그대로 한약을 봉지 째 석우에게 내밀었다. 석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을 하자 이를 잘못 이해한 리환이 쓴 약 싫어해요? 그래도 어떡해요. 몸에 좋은 건 다 쓴 법인데. 뜯어줘야 마실 거예요? 석우는 아까 행아가 한 말이 생각났다. 마시기 전까지는 분명히 계속 잔소리를 해댈 거라는 말. 결국 석우는 갑작스럽게 차에서 한약을 마시게 되었다. 좋은 약이 몸에도 쓰다지만 써도 너무 써 표정 변화가 잘 없는 석우까지 인상을 팍 쓰게 만드는 맛이었다. 속이 요동쳤다. 토할 것 같진 않지만 가히 그쯤은 맞았다.

“드세요.”

그리고 석우에게 봉지까지 까서 내민 레몬 사탕. 무슨 성인 남자 주머니에서 저런 사탕이 나오나 싶어 석우가 봉지까지 깐 사탕을 입에 넣지도 못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자 또 이를 잘못 해석한 리환이 석우의 입에 사탕을 툭 까서 넣어주었다. 리환의 결 좋은 손가락이 잠시 석우의 아랫입술을 스쳤다. 출발 안하세요? 입술에 닿은 감촉이 사라지지 않아 사탕을 입에 넣어두고도 맛보지 못한 석우를 보고 리환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석우가 다시 헛기침 한 번 하며 다소 거칠게 차를 몰았다.

“제 덕에 휴대폰 교환하시고 좋으시겠어요.”
“바꿀 생각은 딱히 없었는데.”
“액정 교환이나 휴대폰 교환이나 값이 비슷하다는데 설마 액정 교환만 하려고 했어요?”
“네.”
“이런 수작에 안 넘어가게 생기셔서는 허당이시네요.”
“모르고 당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
“음 그래도, 넘어가주실 생각이잖아요.”
“주어가 빠지면 그 말, 상당히 오해할 수 있는 말인데….”
“네. 오해하라고 한 말인데요, 오해해서 들으셨으면 잘 들으신 거고요.”

방금 산 휴대폰이 차 어딘가에 굴러다니는지 석우와 리환은 관심이 없었다. 겹쳐진 두 입술에서는 A/S 센터에 들리기 전 잠시 맛 본 레몬 사탕의 향이 미미하게 감돌았다. 태희를 한껏 달래놓고 나오자 사라진 두 사람을 찾기 위해 행아가 석우나 리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두 사람 모두 다 전화를 놓치고 말았다.

리환은 석우가 어떤 배경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관심이 크게 없었다. 그건 석우도 마찬가지여서 두 사람의 만남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과는 다른 색을 띄고 있었다. 명백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지 않은 만남을 하는 것은 석우로써는 낯선 일이었고 리환으로써는 낯익은 일이었다. 때때로 리환과 일주일에 한 번을 만나기도 했고 매일 만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불안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리환은 석우의 연락이 오면 오는 대로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 대로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기했다.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거나 혹은 의심하거나 오해하는 일 없이 같은 온도로 늘 석우를 바라보는 리환의 온도가 언제쯤 자신만큼 오를까 석우는 내심 기대도 했으나 여전히 미온적인 태도로 석우를 대하는 리환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석우에게 거부 반응을 보이는 리환도 아니었다. 리환은 석우가 다가가는 만큼 다가왔고 석우가 멀어진다면 애써 그 거리를 좁히려 들지 않았다. 현명한 걸까, 아니면 헤어질 준비를 한 채 만나는 걸까. 인생에서 이런 감정이 처음인 석우와 다르게 리환은 모든 것이 다 여유로워 보였고 경험이 많아 보였다.

라디오 코너에 나가고 나서 석우의 입지는 대단히 넓어졌다. 잘생긴 얼굴에 돌싱남, 거기에 억대 연봉을 자랑하는 스펙까지. 어디 하나 꿀릴 것 없는 프로필에 사람들은 환호했고 궁금했다. 하지만 석우는 한 번 이상 출연은 하지 않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기 때문에 리환의 친구인 행아가 부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방송국에 발걸음 하지 않았다. 행아도 리환에게까지 부담을 주며 석우를 데려오라고 하지는 않았다. 주말이 가까워지는 주중. 주말은 온통 수안에게 맡기기로 한 석우이기에 그들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주중의 늦은 밤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환은 딱히 불평을 토하진 않았다.

리환의 집은 복층구조로 밑층은 어머니가, 윗층은 자신과 같이 한의원을 운영하는 절친한 형이 산다고 했다. 잔소리를 할 사람이 필요한 사람과 잔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사람이 사는 구조라 트러블 하나 없이 10년도 더 넘게 같이 살아 거의 친형제나 다름이 없는 지훈을 소개 받는 자리에서 석우는 잠시 떨었다가 이내 주량도 약한데 술을 좋아하는 지훈이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나, 잘 보인 건가. 응. 근데 나한테는 아뇨. 왜. 나 뭐 잘못 한 것 있어? 지훈을 방에 눕혀놓고 나와 2차를 시작하려는 듯 소주와 맥주를 한데 섞어 소맥을 마는 리환의 행동이 영 자연스러워 석우는 사실 속으로 좀 놀랐다. 그렇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먹음직스러운 소맥을 한 잔 타서 석우 앞, 자신의 앞에 둔 리환과 함께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잔을 기울이길 몇 번. 붉게 얼굴이 달아오른 리환이 거나하게 취했다. 주량이 약하지는 않지만, 빨리 마시면 취한다는 행아의 팁 아닌 팁을 주워들은 덕에 속도 조절을 한 석우는 거의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취중진담이랬던가. 이때가 아님 좀처럼 듣기 어려운 리환의 진심을 듣기 위해 석우가 리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잘 섞인 소맥을 다시 한 번 리환에게 내밀자 마치 물마시듯 쭉 한 잔을 모두 마신 리환이 달큰한 숨을 내뱉으며 석우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리고 들숨, 날숨, 들숨, 날숨. 몇 번을 심호흡 하더니 이내 입술을 뗐다. 술을 마셔 체온이 높아졌는지 더 붉은 입술은 저절로 석우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많지. 일단 이 얼굴. 잘생긴 얼굴부터가 문제지. 너무 잘 생겨서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사람들이 늘어나잖아요. 그리고 또. 고개를 떼어낸 리환이 석우의 얼굴을 장난감처럼 죽죽 늘어뜨리고 웃음을 터트리다 피곤해 쑥 꺼진 눈꺼풀을 마사지 하듯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주었다.

“이, 눈. 메말라서 보기만 해도 슬픈 이 눈. 이 눈이 많이 잘못했지.”
“내 눈이 왜.”
“처음 볼 때부터 메말라서 적시고 싶게 만들었잖아, 서석우 당신이.”
“그런 적 없는데.”
“그랬어. 눈은 거짓말 못해. 입은 거짓말을 해도.”

내가 거짓말 하는지 어떻게 알아. 석우가 리환의 손을 끌어당겨 입에 가져다 대었다. 석우가 리환의 손을 꼼꼼히 그리고 촘촘히 핥자 안 그래도 체온이 오른 리환의 몸이 금세 분홍빛으로 물이 들었다. 그 모습에 석우가 시선이 빼앗겨 혀가 느리게 움직이자 리환이 그런 석우의 입 속에 있던 제 손가락을 빼고 대신 술 냄새가 가득한 입술을 부볐다. 마치 알아달라는 듯, 제 진심을 다 고해 바친다는 듯 파고드는 간지러운 혀 놀림에 석우는 모른 척 눈을 감고 그것을 모두 다 받아주었다.

새벽에 깬 석우는 리환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침이면 늘 주스를 갈아서 리환에게 가지러 온다던 어머니였으니 너무 늦게 깨면 이 황당한 상황을 어머니에게 들킬 수도 있었다. 이미 술에 취해, 그리고 밤에 취해 곯아떨어진 리환을 떼어놓고 가기란 물가에 수안을 두고 발을 돌리는 석우의 심정과도 같아 마지막으로 셔츠까지 모두 다 꿰어 입고 재킷만 걸치면 되는 상황에서 석우는 결국 못 참고 이불을 등까지 꼼꼼히 덮은 리환을 돌려 눕혔다. 그리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아주 잠시 혀를 넣어 진득한 키스를 마치고 서둘러 집을 빠져나갔다.

“그냥 가기나 하던지. 남은 사람 어떻게 하라고….”

그러면서도 얼굴 붉힌 것을 숨기지 않는 리환이었다.


주말에 리환은 어머니와 함께 오랜만에 마트 쇼핑을 가기로 했다. 평소 마트 쇼핑은 행아와 어머니의 담당이었다. 리환이 껴드는 건 그만큼 많은 짐이 있다는 얘기였으므로 리환은 열일 제쳐두고 차를 운전해 어머니와 함께 쇼핑에 나섰다. 과연 계절이 바뀌는 시기라 그런가 짐이 늘어날 만큼 부피가 큰 물건들 위주로 쇼핑을 하는 어머니 곁에서 종종 거리며 카트를 끄는 리환은 오늘도 연락 하나 없는 무심한 남자를 속으로 타박하며 그래도 주말이니까, 아이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암묵적인 룰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리환이 카트 가득 물건을 실고 더 필요한 것 없냐며 어머니에게 묻자 어머니는 그렇다며 개운한 표정을 짓다 이내 온 연락에 리환의 눈치를 봤다. 리환은 이런 상황을 자주 겪였기에 알았다며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필시 중환자가 생겨 병원에 가봐야 하는 일일 것이다. 의사라고 주말에 매번 칼 같이 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환자 상태가 나빠지거나 혹은 응급상황이 생긴다면 주말이 무언가 자다가도 가야 하는 것이 의사인 것이다. 내가 저래서 한의사를 한 거야. 스스로 리환이 생각하며 제법 묵직하게 찬 카트를 낑낑대며 끌고 계산대로 향하는데 누군가 수월하게 카트 한쪽을 끌어준다. 요새는 마트에서 이런 것도 대행해주나 싶어 리환이 감사하다고 얘기하려는데 익숙한 옆얼굴이 보였다.

“뭐에요?”
“너야말로.”
“나야 쇼핑 나왔지.”
“이걸 다 너 혼자 골랐다고?”
“엄마랑요.”
“아, 어머니….”

삐죽 올라섰던 눈썹이 대번 다시 평정을 되찾는다. 이 남자는 생각보다 눈썹으로 감정 표현 할 때가 많아 리환의 시선은 눈보다는 항상 눈썹에 집중 되어 있었다. 주말에는 늘 아이와 지낸다는 올바르고 참된 아버지를 표방한다던 그가 갑자기 마트에 나타나자 리환은 그것이 온통 다 거짓말이었나 싶어 간담이 서늘해지려는데 화장실을 다녀왔는지 마트 직원과 함께 종종걸음으로 석우에게 다가오는 수안이 보였다. 수안의 얼굴은 석우의 휴대폰을 켜면 바로 보이는 얼굴이기에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낯이 익은 것 같았다. 정작 수안은 낯을 가리느라 기다란 석우 다리에 매달려 얼굴의 반도 내놓지 않은 채였다. 실제로 보는 것과 간접경험은 확실히 다르다고 리환은 생각했다. 생각보다 가슴이 더 쿵쾅거리고 마음에서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어, 그러니까 이건. 음. 잔소리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리환이 나서서 왈가왈부를 하며 다시 남들이 말하는 그 정상으로 돌려놓거나 온전한 상태로 돌려놓기에는 이미 벌어진 상황이라. 자신이 수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막막함이 아주 오랜만에 느껴졌다. 수안을 소개시키려는 듯 석우가 뒤에 숨은 수안을 앞으로 끌어당기는데 무슨 느낌에서인지 수안은 석우의 뒤에서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리환은 그런 수안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고작 10살 남짓한 어린 아이에게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비춰질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땅에 떨어져 긁히는 기분이었다. 리환은 석우의 어깨를 수안 모르게 툭툭 쳤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고 먼저 카트를 끌고 계산대로 향했다. 물건이 많아 정리를 같이 해야 금방 끝날 텐데도 리환은 고집스럽게 석우가 바로 뒤에 있는데도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카트를 끌고 그대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차장에 세워진 자신의 차에 쓸어 넣듯이 물건들을 모두 다 집어넣고 서둘러 카트를 끌고 원래 자리에 두었다. 잔돈을 가져와야 하는데 주차장의 문이 열리고 수안과 석우가 보이자마자 바로 뒤를 돌아서 뛸 듯이 차에 몸을 실었다. 자신을 좇아오고 있는 석우의 발걸음이 느껴졌지만 리환은 애써 무시하며 차에 시동을 켜고 출발했다.

운전하는 내내 석우에게서 연락이 왔지만 리환은 받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만한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란 존재가 석우 뿐 아니라 석우 가족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일격을 당한 기분이었다. 좋은 의도에서 석우가 리환을 수안에게 소개시켜주려고 했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지만 리환도, 수안도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그럼 대체 언제 준비가 되는 걸까. 리환은 어떻게 운전을 했는지도 모른 채 집에 도착했다. 마침 담배가 떨어져 편의점에 가려던 지훈이 리환을 보고 알은 체를 하려다 열이 오르는 것처럼 벌벌 떨고 있는 리환을 발견하고 놀라 달려왔다. 왜 그래, 리환아. 박리환. 형. 미안한데, 나 차에 있는 물건들 좀 정리…. 그래, 알았어. 너 뭐 열 나는 거야? 약 지어줄까? 병원 갈래? 아니, 좀 쉬면 돼. 석우씨한테 연락할까? 됐어. 오늘 주말이라 그 사람 딸이랑 보내는 날이야. 아니, 그래도 너 이렇게 안 좋은데…. 됐어. 리환이 딱 잘라 거절하자 더 말을 보태지 못한 지훈이 알았다며 리환을 먼저 올려 보내놓고 쇼핑한 물건들을 정리했다.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리환은 엉켜버린 생각의 타래를 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디가 처음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르겠다. 처음 만남부터 어긋났던 걸까. 그가 이혼남이고 딸이 한 명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멈췄어야 했나. 진심으로 사람을 대함에 있어 불어올 후폭풍에 대해 살며 한 번도 걱정하거나 근심하거나 후회해본 적 없는 리환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막상 닥친 그의 세계는 무척 커다랬다. 그걸 내가 과연 짊어질 수 있을까. 리환은 큰 고뇌에 빠졌다. 리환의 왼쪽 약지에는 둘의 만남을 기념하는 반지가 있었다. 거하게 커플링이라거나, 아님 무언가를 약속하고 맞춘 것이 아니었다. 주중에 공연을 보고 온 날 길거리에서 팔던 반지가 예뻐 관심을 보였더니 석우는 그 자리에서 냉큼 가격도 깎지 않고 리환에게 반지를 내밀었다. 반지는 껴주는 것이라는 말에 9년의 결혼생활 동안 한 번도 반지를 빼지 않아 작게 흔적이 아직도 남은 석우의 네 번째 약지를 힐끔 쳐다보는 리환의 표정은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뭐 이렇게 결의에 가득 차 있는데, 리환아.”
“몰라. 갑자기 막 긴장 돼서요. 왜 이러지 나?”
“결혼반지는 이 가격보다 몇 배는 비싸.”
“다이아도 이만한 거 있고?”
“얼만큼 큰 걸 원하는데.”

석우야 뜻 없이 한 말이겠지만 그 말을 들은 리환은 그만 주저앉고 싶어지는 걸 간신히 참았다. 결혼이라니. 생각하지도 못한 고백 아닌 고백에 리환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내민 손을 그만 거두고 싶어 값을 치루고 이제야 케이스를 받아든 석우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석우는 그런 석우의 손을 더 꽉 잡고 놓지 않았다. 해는 이미 다 저물었고, 길거리에는 조금의 사람뿐이 남아 있지 않았다. 노점상들은 때늦은 저녁을 먹느라 석우와 리환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환은 자꾸만 가슴이 뛰는 걸 어쩌지 못하고 석우와 떨어져 걸으려 했지만 석우는 그럴수록 리환의 허리까지 잡고 걸었다. 리환이 달달 떨자 석우의 손이 허리를 타고 어깨에 넘어 왔다. 왜 떠는데. 귀에 속삭이는 석우의 말에 리환은 첫 만남 때 얼마나 자신이 맹랑한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으으,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며 반지 케이스를 손에 쥐고 리환 들으라는 듯 딱딱 부딪히는 석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석우는 그런 리환을 모른 체 하며 리환의 집 근처까지 리환을 바라다 주었다. 곳곳을 비추는 전봇대가 아니었다면 등이 하나도 없어 어두울 거리였다. 내일도 일 나가야 하는 석우이기에 이만 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평소 같으면 정도 없이 먼저 등 보이고 걷는다고 작게 보챌 리환이었지만 오늘은 반대였다. 리환이 얼른 가라고 석우를 떠미는데도 석우는 꼼짝달싹 하지 않았다.

“왜요. 평소에는 등 보이고 걷지 말라고 해도 고집스럽게 걷더니.”
“오늘은 장난칠 기분 아니라서.”
“그게 장난이었어요?”
“리환아.”
“왜요, 서석우.”
“다음에는 네가 말하는 다이아 이만한 것 박힌 걸로 사줄게.”
“…누가 말이 그렇댔지, 진짜 사달래요.”
“그럼 이걸로 그냥 끝 해?”
“아니! 또 그건 아니지. 사람이, 참 중간이 없어 보면.”
“모 아니면 도지.”

그래서 그때 내가 선택한 건, 모였을까 도였을까. 리환은 그때 당시를 회상하며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계속 울리는 전화 진동소리를 결국 죽여 놓고 리환은 하루 내내 아프고 또 아팠다. 그리고 무뎌지기 위해 노력했다. 다듬어지고 다듬어져야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딱 맞는 반지는 아니더라도 흘러내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렇게 하루, 이틀, 삼일, 일주일을 꼬박 전화를 피했더니 살도 그만큼 내렸다. 아슬아슬하게 끼고 있는 반지는 조금만 긴장을 풀면 또그르르 굴러가기 일쑤였다. 반지 다시 맞추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간호사 중 한명이 말했다. 리환은 그저 웃으며 다시 반지를 서투르게 덜덜 떨며 낄 뿐이었다.

보는 사람마다 왜 말랐는데 다이어트냐며 핀잔이었다. 오랜만에 한의원에 온 환자들도 모두 다 너무 말라 걱정이라며 어디 아픈 것 아니냐는 얘기를 들었다. 프로의식제로. 아픈 것 그대로 티내는 것만큼 환자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없는데 리환은 아차 싶어 밥도 더 많이 먹기로, 더 많이 웃기로 했지만 죽여 놓은 전화를 살리지 않는 한 내린 살이 붙을 일도, 마음이 꽉 찰 일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숙제검사를 맡는 아이처럼 죽여 놓은 휴대폰을 켜자 한바탕 폭격이 일어났다. 배터리의 반이 닳도록 이것저것 온 것들을 확인하는 동안 부재중 통화의 숫자가 아프게 마음을 짓눌러 리환은 울음이 터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석우의 마지막 메시지는 서투르게 대해서 미안하다는 진심어린 사과의 문자였다. 일주일 동안 빤히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채근하지 않고 리환의 집을 아는데도 찾아오지도 않은 채 리환을 그대로 내버려둔 것은 석우에게는 큰 용기였음이 분명했다. 리환은 주말에는 수안과 지내야 하는 석우를 배려하기 위해 퇴근을 하자마자 석우의 회사 앞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운전한 차 때문인지 어깨가 조금 결렸다. 긴장한 탓일지도 모른다. 석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야근이 꼬박 다 끝난 오후 9시였다. 평소라면 더 했을 텐데 체력이 받쳐주지 않는지 아님 사전에 약속이라도 있던 건지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나오는 석우 앞에 리환이 섰다. 석우는 생각지도 않은 인물이 제 앞에 서 있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석우의 휴대폰은 처음 만난 그 날처럼 누군가에게 전화 통화를 하기 위해 켜진 상태였다. 이번에 상대는 리환, 자신이었다.

“전화 한 번 더 해보고 안 받으면 내일 가보려고 했어.”
“미안해요.”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그러는 당신은.”
“네가 안 챙겨주니까. 잔소리 안 들으니까 입맛이 없더라고.”
“와퍼로 때우지 말고 점심이라도 잘 먹으라니까.”
“너 보니까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갈까?”

리환이 끌고 온 차를 본 석우는 미련 없이 자신의 차키는 접어두고 리환의 차에 올라탔다. 리환이 시동을 켜고 차를 출발시키려 하자 석우는 그런 리환의 목덜미를 잡아 채 키스를 했다. 확실히 오고가는 입술 속에 뜨거움은 여전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키스를 끝낸 석우가 리환의 오른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여전히 석우의 왼쪽 손가락에는 리환처럼 헐거운 반지 하나가 껴져 있었다. 리환은 하마터면 운전을 하다 도중 큰 소리로 울 뻔 해 한숨을 연거푸 내쉬며 겨우 잘 가는 식당 앞에 차를 세웠다.

“운전 힘들면 내가 하고.”
“아뇨. 괜찮아요. 밥 먹으러 가요.”
“얘기 좀 하자.”
“밥부터 먹고. 배고프다면서요.”
“네가 더 고파, 리환아.”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당신. 내가 당신을 바꿔 놓은 걸까, 아니면 스스로 바뀐 걸까. 리환이 잡힌 손깍지를 내려다보다 이내 자신도 손을 꽉 쥐고 다시 핸들을 돌려 리환과 석우의 집 중간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24시간 카페라 사람들이 끊이지 않지만 이 시간대에는 유난히 술집이 붐벼서 그런지 조용한 카페였다.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름이 오려는지 이맘때쯤이면 제법 겉옷을 입지 않아도 견딜만한 바람이 불고는 했다. 리환은 피곤한지 테이블에 앉자마자 팔을 베고 누웠다. 부스스 쏟아지는 리환의 결 좋은 머릿결을 석우의 큰 손이 쓰다듬었다. 리환은 남이 머리 쓰다듬어주는 것을 좋아했고 석우는 리환의 결 좋은 머릿결을 만지는 걸 좋아했다. 마치 배고픈데 밥 먹자는 것처럼 리환이 속에서 토해져 나오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었다.

“우리 이제 그만 할까요.”

팔을 베고 누웠던 리환이 일어나 석우에게 말했다. 석우는 리환의 두 손을 부여잡고 마치 동앗줄이라도 된 것 마냥 처절하게 붙잡고 또 꽉 붙잡아 떨며 한숨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울음을 토해냈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에 섞여 크지 않은 울음소리였지만 리환에게는 선연히 와 닿는 울음소리였다. 체념의 울음일까. 제 제안에 대한 긍정에 대답일까. 리환은 와르르 무너지는 마음속에서도 해답을 찾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내가 아는 그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 그래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렇게.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리환의 손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애를 낳을 수도 없으니 억울해 할 필요도 없었다.

“미안해.”
“사실 나 안 괜찮은데 괜찮다고 해야 석우씨가 마음이 편하겠지.”
“네 인생 망치는 건 여기까지 해야 하는 걸 아는데.”
“석우씨.”
“그걸 아는데, 나 너 못 놔주겠다. 미안해. 나는 너랑 수안이 둘 다, 포기가 안 돼. 저울질 할 수 없는 대상이야. 나한테 세상이, 너무, 가혹하다.”

아니, 내가 당신에게 가혹하고 잔인했지.
잔인하리만큼 두 사람을 견주라고 내가 당신에게 선택을 미뤘지.

리환의 손이 석우의 눈물로 젖어들었다. 리환은 필사적으로 석우가 매달리고 있음을 알았다. 자신의 최대치를 보여주며 매달리는 석우에게 리환은 더 이상의 선택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손이 붙잡힌 채 리환이 석우에게로 다가갔다. 석우가 눈물이 흠뻑 젖은 얼굴을 하며 리환을 쳐다보았다. 그런 리환이 석우에게서 손을 빼자 바로 석우가 리환의 손을 잡을것처럼 놀라 퍼뜩거렸다.

“서석우,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해.”
“후회할 거야 너는 아마.”
“후회하지 않게 해줄 거잖아요, 당신이.”
“그래, 그럴게.”
“약속 지켜. 나는 해냈으니까.”

그렇게 항상 메말랐던 석우의 눈이 젖어 있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고맙습니다.

김왕에 살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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