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ASMR이라고 알아요?"

"어엉?"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약간 멍하니 정신이 없어 보이는 석진에게 윤기가 말을 건넸다. 


"약으로 안 되면 새로운 걸 시도해 보라는 소리예요. 바닷소리, 물건 만지는 소리, 속삭이는 소리, 책 읽어주는 소리 뭐 이런 거요."

불면증 약을 처방받으러 왔는데 윤기는 엉뚱한 소리만 한다. 석진은 말도 안 된다는듯 비식 웃으며 말꼬리를 흘렸다. 

"약도 안 듣는데 그런 게 통할 리가 있겠냐..."

아 이따가 나가면 커피라도 더 마셔야겠다. 오늘은 유난히 정신을 못 차리겠네. 

며칠 전 남준에게 옷을 돌려받은 뒤로는 계속 이 상태이다. 가디건은 약간 애증이 담겨서 다시 보기도 싫고 입기도 싫어서 쇼핑백 채로 그냥 구석에 쳐박아뒀다. 그런데 그것이 자꾸 석진의 기를 누르는 건지 가위가 눌리는 건지, 오랜만에 좀 심하게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윤기는 그런 석진의 상태를 알고 있음에도 꿋꿋이 민간요법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뭐... ASMR이 뭐의 약자인 줄은 아냐는 둥 오감을 자극하는 소리를 들으면 뇌가 쾌감을 느껴서 심리적인 안정감 등을 느낄 수 있다는 그런 얘기들. 유사과학이니 뭐니 그래... ASMR 다 좋다 이거야. 일반인들에게는 효과가 있다 쳐, 그런데 나는 센티넬이잖아. 일반 수면제도 잘 안통하는데 그거라고 통할 리가... 

"신경이 예민해서 잠을 못자는 거면 자연의 소리 이런 거라도 들으면서 자 봐요. 심신을 편안하게 하면 또 시너지가 날 지도 모르잖아요. 아니면 철학책 읽는 거 들으면 뭔 소린지 모르겠으니까 잠이 잘 오지 않을까요?"

"내가 신경이 예민해? 전혀 그런 적 없는뎁"


이렇게까지 윤기가 강하게 말하는 것은 석진이 꽤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센티넬이 된 후로 석진은 알 수 없는 불면증이 생겨서 때마다 고생하는 중이다. 학창시절 발현하여 센티넬이 된 지 10년이 넘어가는 이 시점에, 이유도 모르고 몇 년 간 이렇게 불면증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다. 윤기가 담당의가 된 후로 불면증이 심해질 때마다 수면제 처방을 이리 저리 달리해 봤지만 석진의 불면증은 그닥 나아지지 않았다. 

언젠가는 석진이 며칠간 심하게 잠을 못잤을 때... 최후의 처방책으로 윤기가 석진의 집에 따라가서 가이딩을 해주면서(기껏해야 손을 잡고 자는 것이었지만) 재운 적도 있다. 웃기게도 가이딩이 효과가 있었는지, 윤기랑 같이 잔 날이 석진에게는 그나마 제일 효과가 좋았다. 

하지만 석진은 그 사실에 기분이 상했고 그래서 윤기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고작 잠을 잘 잔다는 것 때문에 전속 가이드를 둘까, 순간 생각했던 자신이 너무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아 물론 잠은 중요하지, 중요한데! 

그 이유로 가이드를 두기엔 석진은 이 센티넬 세상에서 '가이드'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석진에게는 그 대상이 누가 됐든(그게 설령 윤기가 아니더라도) 숙면의 위한 죽부인 대용으로 사랑이 앞서지 않는 대상을 평생 끼고 살 자신이 없다. 

그러기엔 석진이 너무 잘생겼고 인기가 많았다. 

인기에 휘둘려 가벼운 사랑을 하면 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그 마음 속에는 진실한 사랑을 위한 마음이 싹트는 법. 석진은 진정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알콩달콩하게 살아가는, 그런 소박하지만 원대한 꿈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따위 불면증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확고한 대상을 만나야만 했다. 

사실 그런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고 해서 불면증이 나을거라는 보장은 없다. 다만 그런 사랑이 있으면 이따위 불면증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니 석진이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겠지만. 


어쨌거나 만성불면증 환자가 된, 센티넬 계의 특이케이스 석진은 잠을 때문에 무표정이거나 찡그리고 현장에 나가 있는 적이 많아 본의아니게 '냉미남', '얼음 왕자' 등의 수식어를 갖게 됐다. 덕분에 외모에 홀려 다가오는 사람이 조금 줄었으니 다행이려나. 

석진 개인적으로는 불면증이 좀 길어지는 것 같으면 이렇게 수면제를 처방받아서 먹었고, 그것도 안될 것 같은 날엔 가이드를 두는 대신 술을 마시는 걸 택했다. 그마저도 안 되면... 오늘처럼 그냥 안 자고 생활하는 거지 뭐. 


얼굴엔 피곤이 가득한데도, 저렇게 '나 안 예민해' 하면서 버티는 석진을 보자니 괜히 아니꼽다. 저 형은 꼭 작은 일에는 크게 엄살 피우면서 진짜 중요한 거는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한다니까? 아우 승질 나.

"알게 모르게 무던히 넘기려고 해서 밤에 골병나는 거 아니에요? 아님 가이드라도 구해서 끼고 자던가요."

홧김에 뱉은 말에 급속히 석진의 얼굴이 굳는다.

"...."


앗차. '가이드'라는 말에 예민한 걸 알면서.. 

본인에게는 냉랭한 표정을 지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잊고 있었다. 저 형은 무표정일 때 진짜 무섭다는 걸.


"아, 아니 진짜 그러라는 건 아니고... 말이 그렇다는 거죠. 큼큼 저번에 준 캐모마일 티는 마셔봤어요?"

당황해서 화제 전환을 할 겸 말을 돌리는데, 크게 화를 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지 순순히 넘어가줬다. 석진은 굳었던 표정을 풀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잠시 짓더니 짧게 '아.' 거렸다. 

"캐모마일... 그거 어디다 뒀더라?"

받은 건 생각이 나는가 보다. 윤기는 석진의 눈치를 살짝 보다가 풀어진 것 같은 모습에 숨을 돌리고는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비싼 거니까 잊지 말고 찾아서 챙겨 마셔요. 그리고 오늘은 ASMR도 한번 시도해 보시고요. 꼭이요"

"약은?"

"당분간 금지예요. 뭐 먹어도 약발이 먹히지도 않는다면서 약은 또 왜 찾아요."

"플라시보 효과라는 것도 있다면서. 뭐라도 먹어야 좀 덜 불안하단 말이야."

"대신에 오늘은 차 마셔봐요. 자 이제 나가보세요."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다. 쉽지 않은 건 둘다 마찬가지라서 평소에 잘 맞는지도 모르겠다. 


"야아 윤기야아"

"넵 수고하셨습니다."

매정하게도 진료실 문이 닫혔다. 은근 예약환자가 많은 의사센티넬이라 많은 시간을 빼주지 않는다. 물론 석진이 S급 센티넬이기 때문에 진료예약을 안 하고 가도 다른 예약자를 미루고서라도 먼저 봐주긴 한다. 그게 길지 않아서 그렇지.

석진은 닫힌 문을 살며시 째려보곤 곧장 병원을 나섰다. 피곤할 때 이목을 끌었다가는 괜한 시비만 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다행히 간단한 훈련만 있는 날이니 그것만 빨리 끝내고 숙소에서 쉬어야겠다. 잰 걸음으로 나오면서 윤기가 해준 조언을 상기해본다. 캐모마일이랑 ASMR... 그나저나 캐모마일 그거... 그때 횟집에 두고 온 것 같은데? 마실 일도 없는 차 따위. 챙기는 것도 신경 못 썼네 쩝. 숙소에서 ASMR인지 뭐시긴지 그거나 좀 찾아봐야겠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어어"

훈련장에 오니 후배들 몇 명이 인사를 건넸다. 대충 받아주고 주변을 보니 못 보던 무리가 보인다. 한쪽에 오밀조밀 몰려있는 모습을 보니 신입 센티넬들 교육이 있는 듯했다. 이론 교육만 잔뜩 듣다가 훈련장에 오니 신기한 게 많은지 두리번 거리는 녀석들을 보자니 피식 웃음이 났다. 

좋을 때다. 새로운 능력이 낯설면서도 내가 뭔가 히어로가 된 것만 같고, 거창한 게 아니어도 국가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는 애국심에 불타올랐었지. 현실은 그냥 국가의 뒤치닥거리를 하는 개가 됐지만. 

익숙하게 훈련을 위해 보호 장비를 입고 있는데, 신입 센티넬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엇.... 저거.


"저좀 잠깐 봐요."

신입 훈련생들을 인솔해온 센티넬 중에 하나를 손짓해 부르곤 안부를 묻는 겸 말을 건넸다.

"잘 돼 가요?"

"네 그럼요. 이번 신입들이 꽤 실력이 좋더라고요. 배우는 속도도 빠른 것 같아요."

대충 끄덕거려주고는 이제 궁금한 걸 물어볼 차례다. 석진은 은근슬쩍 본인에게 눈에 익숙했던 그 아이를 콕 집어 물었다.

"쟤는 어때요?"

"정국이요?"

"이름이 정국이에요?"

"네. 전정국이요. 정국이 완전 에이스예요. 이번 등급 평가 때 A급 떴어요."

"A급이요??"

의왼데. 눈빛만 산 당돌한 앤 줄 알았더니. 놀래는 눈치를 보이자 인솔자는 본인이 신이 나서 이것저것 정국의 정보를 늘어놓았다.

"네에! 신체능력 계열인데 전반적으로 일반 사람에 비해 2배 이상 힘이 세요. 아직 발현된 지 얼마 안 돼서 가끔 완력 조절에 실패할 때가 있는데 조금만 적응 돼면 자유자재로 완력 조절이 가능할 것 같아요. 배우려는 의지도 강해서 잘만 되면 3개월 뒤부터 현장에 투입될 지도 몰라요."

아. 오늘 여러 번 놀란다. 그냥 애송이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3개월 뒤는 너무 빨라요. 잘한다고 무턱대고 내놨다가 금방 다쳐오는 수가 있어요."

"앗, 네네! 윗선에 잘 전달할게요. 역시 현장 경험 많으신 S급 센티넬이셔서 그런지 안목이 남다르시네요! 호호"

"하하 아닙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뭔가 눈빛이 반한 눈빛이길래 황급히 대화를 마치고 훈련을 한다고 자리를 떴다.

오.. 제법인데. 남준의 앞을 가로막던 싹퉁머리 없던 꼬맹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깍듯하니 인사도 잘하고, 실력도 꽤 좋다고 하니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석진의 마음에는 안 들어도 지금으로서는 정국이 남준의 연락처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니 너무 멀리 두지는 않을 생각이긴 했다. 지금은 조금 빈정상해서 남준에게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 사람이 너무 궁금해질 때쯤 여차하면 정국을 찾아가 안부도 묻고 전화번호도 뺏어올 요량이었다. 

그리고 3개월 뒤면 현장 투입도 생각 중이라니, 앞으로 본의아니게 자주 볼 수도 있겠어. 석진은 개인 훈련장소로 떠나기 전 정국을 한번 더 눈에 담고 갔다. 




아~ 요즘처럼 평소에도 현장 일이 많이 없으면 소원이 없겠다. 오늘처럼 훈련만 하고 들어오면 되는 스케줄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석진은 생각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약간 그런 거 왜 있지 않나, '오늘은 사람이 별로 없네'라고 말하면 갑자기 손님이 몰려와서 미어터지는 가게처럼. 요즘 사건이 많이 없네, 라고 내뱉는 순간 이상한 일들이 마구 생길 것 같은 불안함이 있다. 만에 하나라도 일으킬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석진은 오늘도 입을 꾹 닫고 묵묵히 훈련을 하고 돌아왔다. 

"휴우..."

샤워를 마치고 나른하게 멍 때리며 식탁 의자에 앉아있다가, 느즈막히 윤기가 해준 조언이 생각나 간단하게 맥주를 챙겨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침대 협탁에 있는 태블릿을 들어 유튜브를 켰다.

"음 AS... 뭐였지? ASMR이랬나...?"

전혀 관심이 없는 분야지만 들어보라고 하도 성화이니 예의상 검색을 하고 몇 개 들어볼 생각이다. 윤기야 내가 이렇게 말을 잘 듣는다. 그러니 제발 만났을 때 잔소리좀 그만 하겠니... 석진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스크롤바를 내려 몇 개를 콕콕 찍어 틀어보았다. 

숲 소리야 뭐.. 경치는 좋다. 

바다도 뭐... 바다낚시 가고 싶다는 잡생각만 더 든다. 요즘 낚시 안간 지 한참됐네 조만간 바다낚시 한번 가자고 할까.

사람들 먹는 걸 대체 왜 봐? 작게 속삭이면서 먹으면 이게 잠이 와? 배고프기만 할 것 같은데... 

연예인들이 하는 팬서비스 차원의 ASMR은 관심이 없고, 립스틱 뭉개고 이런 건 재밌긴 한데 과몰입에 미안하지만 청소 생각에 마음이 갑갑해진다. 


"... 생각보다 ASMR 장르가 꽤 넓구나?" 

이런 걸 듣고 본다고 잠이올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보다보니 재밌긴 하다.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기웃거려본 결과, 그나마 석진의 심신 안정에 도움을 줄 만한 장르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것은 글씨쓰는 영상과 책 읽어주는 영상 정도? 사각사각 연필이 긁히는 소리가 꽤 듣기 좋았다. 석진도 글씨를 못쓰는 편은 아니지만 저렇게 어른스러운 글씨를 써보고 싶기도 했다. 석진의 글씨는 어른스럽다기보다는 알파카처럼 귀여운 편이지(?). 석진은 필기체 연습하는 걸 한참 구경하고 있다가 이번엔 책 읽어주는 영상으로 넘어왔다. 

삶에 도움이 될 만한 여러 글귀들을 잔잔한 음악과 함께 들려주는 것도 꽤나 운치 있었다. 하지만 자칫 들으나마나 한 뻔한 이야기에 시간을 낭비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싶다. 또 사람 목소리란 게 취향을 타는 장르라... 이리저리 맘에 드는 목소리를 찾고 싶어서 눌러보다가 철학책인듯, 뭔가 진지한 책을 읽는 계정까지 넘어왔다. 

"오 이건 또 뭐야..."

목소리가 제법 섹시하잖아.

삶과 예술...? 내용은 전혀 모르는 분야인데 그냥 목소리가 맘에 들어서 계속 듣고 있었다.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도 너무 튀지도 않고. 멍 때리며 듣다가

 ...어. 

홀린듯이 영상이 끝날 때까지 듣고 말았다. 무려 40분 동안.

어라라? 

언제 시간이 이렇게...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흘러가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이렇게 들으면서 평안해질 수도 있구나. 라디오 듣는 사람는 이런 심정일 걸까. 

늦은 밤까지 남의 목소리를 듣는데 점점 마음도 평안해지고 나른해지는 느낌에, 이 정도면 ASMR 효과 성공인 듯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 사람 목소리는 또 듣고 싶네. 다른 영상에 묻혀 계정 못 찾기 전에 서둘러 구독을 눌렀다. 


"Real me.. 목소리 참 좋으시네."

석진은 오늘은 이만하면 성공이라 생각하고 침대 깊숙히 몸을 파묻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석진이 훈련장 문을 열자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이름 모를 후배들. 대충 인사를 해주고 개인 사물함 자리로 가는데 몇몇이 따라 붙었다. 

따라 붙는 녀석들은 늘 다른 사람이었지만 목적은 대개 비슷했다. 잘생기고 훤칠하고 능력좋은 센티넬. 이 비현실적인 조건을 두루 갖춘 김석진과 어떻게든 친분을 쌓아 그 인맥을 자랑하고 싶어서, 혹은 김석진의 애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싶어서. 

몇 년 전의 김석진이라면 전자나 후자나 크게 관여하지 않고 지금보다 훨씬 개방적으로 사람들을 대했었다면 요즘엔 조금 피곤하다. 그 사이 예전보다 더더욱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석진은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의 위치에 있었고, 그 덕분에 누군가의 입에 쉽게 오르내리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모두가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데 예민해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의 행적, 외모, 능력, 과거의 연애사... 반짝거리는 석진의 모든 것은 저들에게 먹어보기 아주 쉬운 먹잇감이 됐다. 얼굴이 알려진 타칭 공인이라는 이유로 석진을 씹고 뜯고 맛보는 와중에 그런 말 한번도 해본 적 없다는 듯, 웃는 낯짝으로 살갑게 다가오는 저들이 석진은 때때로 역겹기까지 했다. 

어떨 땐 차라리 명령하고 복종만을 요구하는 상급자들이 편하다. 그들은 차라리 탐욕을 숨기진 않으니까. 그래서 요즘의 석진은 석진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던, 특별히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몇 외에는 지인을 더 두지 않는다. 더 늘릴 필요도 못 느끼니까.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친하지도 멀지도 않은 딱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중이다. 


"요즘 훈련장에서 자주 봽네요!"

"어 그러게"

"훈련하실 게 많으신 거예요?"

"야, 이미 현장 경력이 몇 년이신데. 그냥 몸 풀러 오시는 거겠지"

본인들끼리 물어보고 답하고 난리가 났다. 귀찮긴 해도 후배들하고 너무 벽을 쌓을 일도 없으니 사물함에 가방을 넣고는 보호장비 주섬주섬 하면서 사람 좋은 표정으로 대충 끄덕여준다. 그런데 이렇게 내치지 않고 애매한 거리를 유지해주면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애들이 있다. 꼭 지금처럼.

"아 그런가? 헤헤. 요즘 현장이 덜 바쁘신가봐요. 쉬엄쉬엄 하시구"

"야 너 입...!!"

석진은 보호장비 챙기던 움직임을 그치고 후배 녀석을 쳐다봤다. 옆의 후배는 그 말을 듣자마자 친구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일. 

"...? 허억!! 🫢!!!"

뒤늦게 녀석도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깨닫고 눈이 엄청 커지며 자신의 손을 들어 입을 막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

"아 아니 저는... 자주 봬서 좋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데..."

침묵이 길어지자 입이 가벼운 후배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횡설수설 변명인지 해명인지 모를 말을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그 녀석의 유일한 장점은 친구를 잘 뒀다는 거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옆 친구가 녀석의 머리통을 잡고 같이 석진을 향해 90도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 내가 이래서 따라붙는 애들이 있으면 피곤하다니깐. 

"어이 후배. 센터 언제 들어왔지?"

"네? 아 네넵 2년 전입니다!"

"현장 경험은?"

"두어 번 정도..."

하. 석진은 한숨을 짧게 내뱉었다.

"센터에 들어온 지 2년씩이나 됐는데 현장 경험이 적다는 건 그만큼 능력치가 높지 않다는 말일테고."

움찔. 

"현장이 많은지 적은지 돌아가는 상황도 모르고 있는 데다가, 보통 한번 현장에 나가기 시작하면 계속 출동하는데 두어 번밖에 안 나갔다는 건 현장에서 일을 개판으로 처리했다는 말일테고."

녀석의 몸이 한 번 더 크게 움찔했다. 

"오늘도 훈련장에 있는데 트레이닝복에 땀 자국 하나 없다는 건."

"....."


적당히 말하고 그만 말하려고 했는데 자꾸 말을 붙일수록 슬금슬금 열이 받는다. 알게 모르게 목소리도 좀 커지고.

"현장이 많아도 현장이 적어도, 목숨 걸고 일하는 건 다 똑같아. 쉬엄쉬엄 해도 되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죄송합니다..."

자꾸 주변 이목이 몰리는 느낌이다. 이성적으로는 그만 말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화난 입이 멈출 생각을 안한다. 


"내가 너같은 애들 꽤 많이 봤거든?"

"..."

"하나같이 현장 나가서 살아돌아온 애를 못 봤어."

"........"

"목숨 잘 챙기고."


- 띠링띠링띠링

하. 역시 왜 불길한 예감은 하나 같이 이렇게 피해가는 법이 없다.

석진의 팔찌에서 현장 출동 신호가 울리며 빛을 내고 있다. 훈련장에 있을 때 현장 연락을 받는 용도로 쓰는 도구다. 

공교롭게도 하필 지금.


석진은 황급히 사물함에 제대로 차지도 못했던 훈련용 보호장비를 대충 처박아두고 챙겨왔던 가방을 도로 꺼냈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훈련장 출입문을 열었다. 

훈련장 출입구엔 자신과 같이 훈련 출동 명령을 받은 센티넬 몇이 같이 가려고 다가왔다. 대충 보니 힘깨나 써야하는 애들이다. 


.... 오늘 퇴근이 좀 늦겠네. 

뒤에서 누군가 털썩 소리를 내며 주저 앉아 엉엉 우는 소리를 들으며, 석진과 무리는 훈련장을 떠났다. 







랩진랩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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