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포스터가 카페 창에 걸렸다. 연준은 커피잔을 든 채 미소 짓고 있는 포스터 속 남자를 보며 웃음 지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마음을 녹이는 겨울, 우리 같이 커피 마실까요?’라는 문구가 포스터 속 남자, 배우 서정원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연준은 두 걸음을 뒤로 크게 물러나서 포스터가 예쁘게 잘 붙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서정원의 얼굴을 보며 내내 웃었다.

서정원은 데뷔작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어모은 아주 유명한 배우였다. 잘생기기로 유명하고, 또 연기를 잘하기로도 유명했다. 그리고 몇 존재하지 않는 우성 알파로도 유명했다. 사람들은 그런 서정원을 여러 이유로 좋아했다. 잘생겨서, 연기를 잘해서, 또 우성 알파와 한 번 자 보고 싶어서.

연준 역시 그런 서정원을 좋아했다.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서정원은 연준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열 살 때 부모님이 한날한시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다음, 함께 산 고모 집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모님과 살던 달동네로 돌아와 혼자 산 열네 살 때부터 연준은 늘 혼자였다.

가난하다는 이유와 달동네에 산다는 이유, 또 고아라는 이유로 학교 친구들은 연준과 가까워지려고 하지 않았고, 선생님도 딱히 연준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친구 하나 없이 외롭게 학교를 다니던 연준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다른 애들이 다 이차 성징과 함께 발현을 할 때도 아무런 징후가 없었다.

알파 또는 오메가, 아니면 완전히 베타라고 형질이 확정되는 애들과는 달리 연준은 그 무엇도 정확하게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연준은 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알파도 오메가도 또 베타도 아닌 돌연변이라는 놀림을 받고 너무 슬퍼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던 날, 연준은 아주 늦은 밤 버스정류장 앞 커다란 옥외 티브이에서 나오는 서정원의 공익 캠페인을 마주했다.

‘알파, 오메가, 베타. 그리고 형질의 이름을 가지지 않은 모든 우리는 다 같은 ‘사람’입니다.’라는 인간 평등 캠페인을 본 연준은 한참이나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서정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다섯 번이나 본 다음에야 연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내내 서정원의 말을 떠올렸다. 발현하지 않은 저도 돌연변이가 아니라 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서정원이 말해 준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였다. 배우 서정원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리고 서정원을 좋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준은 오메가로 발현했다. 발현 과정에서 무척 힘들고, 많이 앓았지만, 그래도 서정원 덕분에 늘 고민하던 일이 해결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러다 닳겠다.”

“아…. 안녕하세요, 사장님.”

“포스터 몇 장 더 있는데 남는 거 가지고 가.”

“정말요? 제가 가져도 되는 거예요?”

“어차피 한두 장 남잖아. 남으면 버리기밖에 더 해.”

연준이 서정원의 팬이라는 것을 아는 카페 사장은 서정원의 굿즈나 홍보물 같은 게 도착하면 늘 연준을 챙겨 주고는 했다. 연준은 포스터 속 웃는 광고 모델 서정원을 보며 또 웃음 지었다.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 될 것 같았다.

 

 

‘연준아, 미안한데 오늘 오전 타임 대타 좀 해 줄 수 있어? 최경호 이게 잠수 탔어. 오늘 여기 대관해서 뭐 찍는다고 해서 더 바쁘거든. 좀 도와줘, 응? 시급 내가 두 배로 쳐 줄게. 앞으로도 주말에 괜찮아? 아니다. 이건 나중에 얘기하고. 아, 지금 벌써 왔어. 빨리 좀 와 주라. 아, 그리고 너 진짜 좋아할 거야. 지금 카페에 네가 좋아… 아, 네네! 아무튼 좀 부탁해!’

토요일 아침 일찍 온 사장의 전화에 솜이 꺼진 이부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난 연준은 얼른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안 그래도 주말에만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구할 생각이었는데 다행이었다. 부디 주말 타임까지 제가 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선 연준이 빠른 걸음으로 달동네 계단을 내려갔다.

 

 

카페에 도착한 연준은 밖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서 있는 것을 보며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페를 대관해서 뭔가를 찍는다더니 유명한 사람이 온 모양이었다. 연준은 줄을 선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사이로 들어갔다. 누구냐며 저지하고 막아서는 경호원과 스태프에게도 아르바이트생이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결국, 사장님이 나온 뒤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밖에 난리지? 아, 오늘 중요한 날이라고 내가 경호 그 자식한테 몇 번을 말했는데 힘들 것 같으니까 잠수나 타고…. 아, 내가 늙는다. 늙어.”

“오늘 무슨 촬영하는 거예요? 드라마 촬영이에요? 어제는 그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아니, 무슨 시청률 얼마 나오면 뭐 한다고 공약한 거 지킨다고 어젯밤에 갑자기 연락이 온 거야. 원래 다른 지점에서 하기로 한 건데 거기 머신에 문제가 생겼다나 뭐라나. 그래서 나도 당황스럽긴 한데 그래도 기회잖아. 홍보도 되고. 그래서 경호한테 전화해서 설명 다 했더니 그 뒤로 잠수 탄 거야.”

사장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주말에만 아르바이트를 하던 최경호를 비난했다. 연준은 사장님이 충분히 화날 상황이라 생각하며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침 내내 내가 진짜 얼마나…. 아, 맞다! 연준아. 너 오늘 땡잡은 거야, 진짜. 최경호가 나한테는 엿 줬는데 너한텐 은인이다, 은인. 오늘 온 연예인이 그 네가 좋아하는 그 사람.”

“…네?”

“저기 나온다. 저 사람! 서정원!”

사장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연준의 눈이 커지고 입술이 벌어졌다.

“아….”

서정원이었다.

카페 로고가 자수 놓아진 에이프런을 허리에 두른 채 카운터로 나와 무표정하게 선 남자는 몇 번을 다시 봐도 서정원이 맞았다. 연준은 넋을 놓고 멍하니 스태프의 설명을 듣고 있는 서정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진짜 잘생기기는 했다. 아까 카페 들어오는데 진짜 다른 세상 사람 같더라. 그런데 성격은 좀 별로인 것 같아. 지금도 얼굴 좀 봐. 하기 싫어 죽겠다는 얼굴이잖아.”

“…….”

연준은 사장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스태프 말을 경청하고 있는 잘생긴 얼굴만 보였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던데. 계 탄다 그러나? 연준이 너 경호가 잠수 타서 계 탔네? 서정원도 보고, 같이 일도 하고.”

“가, 같이… 이, 일을… 해요?”

“저 배우가 주문받으면 네가 음료 만들어야지.”

“아…….”

생각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연준은 사장에게 이끌려 꼼질꼼질 서정원에게로 다가갔다.

“저기….”

사장이 말을 걸자 서정원과 옆에 있던 매니저, 스태프들의 시선이 닿았다. 연준은 귀와 목이 빨개진 채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손만 마주 쥐고 손가락을 꾹꾹 눌렀다.

“오늘 일일 아르바이트 도와드릴 저희 직원이 와서요. 오늘 일하시는 동안 옆에서 음료 만들어 줄 친구입니다. 연준아, 인사드려.”

“…안녕하세요. 하연준이라고 합니다.”

그대로 허리까지 푹 숙여 인사한 연준이 용기 내어 고개를 들어 저를 시선만 뚝 떨어뜨려 내려다보고 있는 서정원과 눈을 맞췄다. 서정원은 눈동자만 느릿하게 움직여 연준을 살폈다. 옆에 서 있던 매니저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서정원을 슬쩍 밀자 그제야 연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 잘 부탁합니다.”

“아…. 제, 제가 더 잘 부탁드립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정원의 손을 잡은 연준이 순간 확 느껴지는 찌릿하고 홧홧한 감각에 어깨를 움츠렸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것은 물론이고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막 극렬하게 반응하는 기분이었다.

“이 친구가 배우님 엄청 팬이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일하고 싶다고 면접 때 말할 정도였다니까요.”

분위기를 풀려고 소리 내어 크게 웃는 사장에게로 서정원의 못마땅한 시선이 꽂혔다. 팬이 한둘도 아닌데 도대체 그런 말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시끄럽게 구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방송사에서 공약 이행 현장을 촬영하기 위해 나온 카메라도 있었고, 유리 바깥에는 수백 명은 될 팬들도 저를 지켜 보고 있었다. 서정원은 자꾸 등 뒤에서 저를 찌르는 매니저 순종을 흘끗 보고는 다시 연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아…. 아니에요. 제가, 제가 더 감사해요. 배우님 연기하시는 거 보면서 매일 힘도 나고, 너무너무… 좋았어요.”

“이런 큰마음도 받고 제가 꼭 보답해야겠는데요.”

싱긋 기분 좋은 사람을 연기하며 웃는 서정원을 보며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연준은 마구 뛰는 심장 위를 두 손으로 꾹 눌렀다. 서정원은 정말 너무나 좋은 사람이었다. 정말 다정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상냥하고 다정할 줄은 몰랐기에 마음이 막 들뜨고 설렜다.

“자, 그럼 십 분 뒤부터 손님 받겠습니다.”

스태프의 말에 서정원이 연준에게서 시선을 떼며 아까보다 사람이 더 많아진 유리 밖을 바라보았다. 연준은 멍하니 서정원을 보다가 유니폼으로 빨리 갈아입으라는 사장의 말에 얼른 준비실 옆 휴게실로 들어갔다.

“직접 보니까 어때? 좋아?”

“네에…. 너무너무 좋아요. 살면서 한 번은 꼭 만나고 싶었는데… 이루어질 줄 몰랐어요. 사장님, 오늘 저 불러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 앞으로 정말 열심히 일할게요.”

“그래, 그래. 아, 그런데 우성은 다르더라. 난 베타라 그런 거 전혀 못 느끼는데도 아까 서정원 딱 보자마자 뭔가 기에 확 눌린다고 해야 하나…. 넌 괜찮았어? 오메가잖아.”

“아…. 전 그런 반응 안 일어난 지 좀 오래됐어요.”

“아직도 그 억제제 먹어? 그거 먹지 말라니까. 그게 너무 독해서 그런 것 같다며.”

“작년부터는 아예 안 먹어요. 안 먹는데도 똑같은 거 보면 그냥 아예 이렇게 변했나 봐요.”

사장의 걱정에 연준은 작게 웃으며 에이프런을 허리에 둘렀다. 오메가로 발현한 뒤 학교에 다니려면 억제제를 사야 하는데 돈이 모자라 고모에게 연락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고모가 사서 보낸 억제제를 먹은 뒤로 연준의 페로몬은 점점 약해졌고, 몇 년을 먹다 보니 이제는 알파가 봐도 오메가인 걸 전혀 모를 정도로 향이 거의 나지 않게 되어 버렸다.

거기에다가 언젠가부터는 억제제를 먹지 않아도 히트 사이클이 오지 않게 되었고, 알파의 페로몬도 감지하지 못하게 됐다.

“저기 사장님? 실례합니다.”

열린 문 사이로 서정원의 매니저 얼굴이 쓱 들어왔다. 연준은 얼른 순종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네네, 지금 나가요.”

“그게 아니라 하나 확인할 게 있어서요.”

“확인이요?”

“네, 오늘 저희 배우님이랑 일하시는 직원분 베타 맞으시죠?”

“아…. 그건 갑자기 왜….”

사장이 조금 당황한 눈으로 연준을 살폈다. 연준은 두 손을 맞잡은 채 순종의 눈치를 보았다.

“아실 수도 있지만, 저희 배우님께서 오메가를 극도로 안 좋아하셔서요. 개인적인 사정이기는 하지만… 워낙 그쪽으로 결벽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신경을 쓰시거든요. 베타이신 것 같기는 한데 혹시나 해서요.”

솔직하게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려는 연준의 앞을 막은 사장이 웃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럼요. 연준이 베타 맞습니다. 오메가면 배우님께서 오메가를 그렇게 싫어하시는데 아까 같이 있을 때 모르셨을 리가 없죠.”

“아, 다행이네요. 저희도 그럴 것 같긴 했는데 정말 혹시 모르는 거라서요. 확인 감사합니다. 불쾌하셨을 텐데 이런 거 여쭤서 정말 죄송해요. 연준 씨.”

순종의 사과에 연준은 얼른 손을 저으며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괜찮다고 답했다. 제가 한 것은 아니지만, 사장님의 거짓말에 동조한 게 되어 버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사장님, 그냥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오메가인 거 티도 안 나고 같이 있어도 몰랐다잖아. 하루 일하는 건데 뭐 어때. 너도 같이 일하고 싶은 거 아니야? 기회 놓칠 거야?”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내가 책임질게. 들킬 일도 없지만. 나가자.”

먼저 휴게실을 나가는 사장을 보며 작게 한숨을 폭 내쉰 연준이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서정원은 벌써 몇 시간 째 끊이지 않는 손님의 방문으로 짜증이 머리끝까지 찬 상태였다. 시청률 50%가 넘으면 제가 맡았던 카페 사장 역할처럼 진짜 카페에서 일일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는 공약을 내걸 때부터 차오른 짜증이었다. 그 공약은 철저히 대표와 제가 광고 모델을 하는 이 프랜차이즈 카페 측의 이익 관계를 통해 정해진 것이었다. 저의 의지는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고, 저는 지금 제 의지가 조금도 들어가지 않는 엿 같은 일일 아르바이트, 아니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삼백 건도 넘게 주문을 받으며 계속 웃고 있는 입이 다 아플 정도인데 옆에서 음료를 만드는 알바는 힘들지도 않은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며 아주 열심이었다. 서정원은 에스프레소를 추출하여 컵에 붓고, 물을 따르는 연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 즐거워서 하는 건지 계속 웃으면서 음료를 내주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저 직원은 연기의 길로 노선을 틀어야 했다. 즐거운 척 연기하는 거라면 타고난 연기자일 게 분명하니까.

아, 씨발. 위약금 물고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네. 서정원은 딱 두 시간만 더 참자 생각하며 치솟는 스트레스를 짓눌렀다. 극렬한 심리적 요동에 짙은 페로몬이 한 번씩 갈무리되지 못하고 묻어 났다. 그럴 때마다 카페 여기저기에 있는 오메가들의 시선이 저절로 서정원을 향했다. 오메가라면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좋은 향이었다. 연준도 저도 모르게 서정원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너무나 많이 몰려들어 약속된 시간보다 한 시간을 더 일한 뒤에야 카페를 닫을 수 있었다. 정리하는 스태프들에게 마지막 인내심을 쥐어 짜내며 인사한 서정원이 짜증이 묻은 예민한 얼굴로 카운터를 벗어났다.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이럴 때 따라 들어가면 괜히 짜증만 듣는다는 것을 알기에 순종은 서정원의 뒤에 대고 말한 뒤 사장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정말 수고 많았고, 너무 좋은 추억이었다 따위의 말들이었다.

그런 분주한 사람들 사이에서 설거지를 마친 연준은 에이프런에 손을 닦고 휴게실로 들어갔다. 저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가고 청소까지 한 다음에 집에 갈 수 있으니 다들 갈 때까지 잠시라도 앉아서 조금 쉴 생각이었다. 일곱 시간 동안 내내 서서 왔다 갔다 하며 일을 했더니 다리도 아프고 피곤하기도 했다. 연준은 서정원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휴게실 문을 열었다.

“…아….”

문을 열자마자 무언가 짙고 좋은 향이 확 연준을 뒤덮었다. 연준은 순간 심장이 쿵쿵 세게 뛰기 시작하고, 다리에 힘이 확 풀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갑자기 왜 이러지? 영문도 모른 채 연준은 겨우 사물함을 짚고 섰다. 그 소리에 서정원이 고개를 기울여 연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 오늘 고생 많았어요.”

“아…. 아니, 아니에요. 배우님께서 더 고생 많으셨어요. 손님이 계속 오셔서….”

“그래도 뭐 난 뭘 만들지는 않았으니까.”

서정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더욱 심장이 쿵쿵 아주 빠르게 뛰었다. 연준은 아플 만큼 마구 뛰는 심장 위를 누른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놀란 서정원이 넘어지듯 주저앉는 연준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왜 그래요? 어디 안 좋기라도….”

“괜찮, 아…. 괜찮아요.”

“…….”

제가 잡은 연준을 눈동자만 내려서 보던 서정원이 인상을 썼다. 그리고 그대로 연준의 몸을 휴게실 벽에 밀쳐 세웠다. 놀란 연준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서정원과 눈을 마주했다. 뭔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불쾌한 것 같기도 한 서정원이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다가와 연준의 목덜미에 코를 가까이 댔다. 약하지만 분명히 나고 있었다.

종일 지겹게 맡은 생크림 향 같기도 하고, 딸기와 바닐라 향이 섞인 것 같기도 한 그런 달착지근한 향이었다. 단순히 베타의 체향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서정원은 완벽한 확인을 위해 페로몬을 완전히 풀었다. 아까보다 확 짙어진 페로몬, 그것도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연준은 온몸을 벌벌 떨었다. 싸구려 억제제 때문에 모든 것이 무뎌졌어도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까지 반응하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그동안은 희귀한 우성 알파를 만난 적이 없기에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갑자기 서정원의 몸이 뒤로 확 떨어졌다. 연준은 그대로 바닥으로 주저앉아 서정원을 올려다보았다. 몸 여기저기가 축축했다. 그런 연준의 위로 혐오와 경멸이 담긴 서정원의 시선이 뚝 떨어졌다.

“씨발, 오메가였어?”

클리셰 클 씨 @dearmycl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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