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암살자처럼, 지독한 냉기를 몰고 눈보라는 소리없이 휘몰아친다.

 차가운 코끝을 비비며 이불을 걷는다. 돌아보니 옆자리가 비어 있다. 베개 밑에 손을 넣어 단도와 휴대폰을 한 손에 집었다. 칼날에 반사된 액정의 불빛이 아프게 눈을 찌른다. 오전 세 시 삼십 칠 분. 그리고 너는 없다.

 맨살 위에 두터운 점퍼를 대강 걸치고 문을 열었다. 무방비 상태의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눈발. 흐드러진 꽃잎처럼 바람결에 무심히 흩날리는 눈송이들 사이로 너의 뒷모습이 보인다. 작고 동그란 머리. 맑게 빛나는 하얀 목덜미. 예쁘게 각이 잡힌 어깨와 곧게 뻗은 다리. 설핏 드러난 발목에 시선이 꽂히는 순간 스르르 손아귀에 힘이 풀리며 단도가 떨어졌다. 날렵한 칼등이 콘크리트 바닥에 격렬히 입을 맟추며 완전한 고요에 흠집을 낸다.

 안 잤어?

 절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고운 손가락 사이에 당당하게 끼우고서, 너는 절반쯤 뒤를 보며 말한다.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있어야 할 라이터가 잡히지 않는다. 웃기게도 담뱃갑은 그대로 있다. 너는 웃으며 보란 듯이 나의 금장 라이터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화낸다. 협박해도 그냥 웃기만 한다.

 끊기로 했잖아.

 응. 그래야지. 먼 훗날의 일을 말하듯 너는 초연한 목소리로 바람 속에 연기를 흩는다. 새 담배라 그런지 맛이 좋네. 쓸데없는 소릴 하며 필터를 깨무는 입술 사이로 눈송이 하나가 흘러든다. 그리고 후, 연기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잠이 안 온다.

 짧아진 꽁초를 발밑에 떨어뜨리며 너는 시선도 함께 떨어뜨렸다. 툭툭. 가벼운 발길질에 작은 불씨는 선명한 구멍을 만들며 눈을 태운다. 어젯밤 최 상무의 사무실에서 보았던 하얀 카펫에도 같은 구멍이 있었다. 내가 수금해온 만 원짜리 다발 몇 개를 으스대며 돌려준 뒤, 최 상무는 날더러 진우를 불러오라고 말했다. 그 두 사람이 이후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카펫을 갈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그의 말이 계시처럼 머릿속을 맴돌 뿐이었다.

 그만 돌아가자.

 점퍼에 두 손을 찌른 채, 나는 너의 곁으로 천천히 두 걸음 다가선다. 달빛은 얼룩처럼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침묵 속에 잠긴 너의 눈빛 또한 그러하다. 불투명한 근심의 장막은 쓸쓸하게 너와 나의 사이를 가로지른다. 최 상무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나는 쉽사리 묻지 못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최 상무'지만, 우리에게 그는 '형님'이기 때문이었다. 피 한 방울 나누지 않고도 그는 손쉽게 우리의 '형님'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동생'이 되는 일은, 때로 죽기보다 어려웠다.

 안 추워?

 담배 냄새가 묻은 너의 손가락이 벌어진 옷깃 사이로 들어와 내 살갗을 만진다. 가슴에 닿은 손마디가 차다. 차가운 살갗에 차가운 손가락이 닿자 놀랍게도 가슴은 뜨거워진다. 슬리퍼 밖으로 삐죽 삐져나온 발가락을 보고서 너는 애처럼 웃는다. 너 정말 급했구나, 하고.

 새로 산 담배를 처리하는 문제로 잠시 옥신각신하다 결국 너는 나에게 두 개비가 빈 담뱃갑을 넘겨주었다. 담배값이 올라서 당장 끊지 않으면 감당이 안 될 거라는 내 말에 한 번 대꾸도 못하고서. 감각이 없어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담배와 라이터를 양쪽 주머니에 넣고 너의 등을 민다. 마지못해 앞장서 걷던 너는 갑자기 눈을 빛내며 무릎을 굽혀 몸을 숙였다.

 나 이거 빌려줄래?

 조심스레 칼자루에 손바닥을 감으며, 너는 차분히 묻는다. 어디에 쓸 것인지 잘은 몰라도, 어디에 쓰기에도 그 칼이 너무 작다는 것만은 안다. 설마 그런 장난감을 들고 싸우려는 건 아니겠지. 비웃는 말에도 너는 마냥 진지하기만 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배게 밑에 권총을 놓고 잘 걸 그랬지. 진심에 가까운 농담에도 너는 웃지 않는다.

 돌아오면 상으로 담배 한 대 허락해줘.

 무책임한 가정법에 대기 상태에 있던 질문들은 줄줄이 목이 베어 즉사한다. 나는 아무 것도 묻지 못하고, 어떤 것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약속한 거다? 그저 칼을 쥐고 웃는 것만으로 너는 내 가슴을 벤다. 가슴부터 차오른 핏물이 목구멍에서 넘실댄다.

 빨간 슬픔에 나는 익사하기 직전이다.






 야, 또 짜장면이냐.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쪼개며 툴툴대자 허겁지겁 비닐 껍질을 벗기던 애들이 일시정지 상태가 된다. 뭘 눈치를 봐, 불기 전에 먹어. 그제야 애들은 눈치를 보며 나머지 비닐을 뜯었다. 내껀 특별히 곱배기로 시켰다고 짜장면 그릇을 슥 밀어주는데 화도 못 내겠고 미치겠다. 그러니까 난 짬뽕이라니까, 짬뽕.

 불어터지기 직전의 짜장면을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는 새까만 뒤통수들. 벌써부터 희끗한 새치가 올라온 막내의 머리털을 가만히 바라보다 짜장면 그릇을 내려놓았다. 형님, 왜 안 드십니까. 나보다 세 살이 어린 동생이 짜장면 양념이 묻은 입으로 묻는다. 우리는 성도 다르고 생긴 것도 다르고 나이도 내가 더 어린데 어째서 내가 너의 형님이냐. 물으려고 보니 그마저도 반말조다. 갑자기 모든 게 전부 잘못되었단 생각이 든다.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냐.

 혼잣말이었는데 소리가 너무 컸나 보다. 그게 무슨 말씀이냐며, 이 목숨 다하는 날까지 형님을 모실 거라는 되도 않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 목숨이 다하는 날이 바로 내일이 되거나 오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

 오늘도 괜찮은 거니, 너의 목숨은.

 네게서 뺏은 담배 한 대를 꺼내 끄트머리를 물고 불을 붙인다. 짜장면 뒤에 먹는 담배맛이 기가 막히다고들 하던데, 내 입맛엔 영 쓰기만 하다. 옆에서 녀석들이 저도 한 대만 달라고 굽실거리는 걸 꺼지라고 했다. 요즘 담배값이 얼만 줄 알아? 건강과 지갑을 위해서 그냥 끊어. 그렇게 따지면 내가 제일 먼저 끊어야 할 텐데. 온통 앞뒤가 안 맞는 말들뿐이다.

 바닥에 내려놓은 휴대폰이 운다. 담뱃재를 털지도 못하고 급하게 뒤집어진 휴대폰을 엎었다. 네모난 액정에 최 상무의 이름이 뜬다. 예, 형님.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기 너머의 최 상무는 몹시 언짢은 기색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몇 대 맞을지도 모른다. 짜장면을 먹은 것이 후회가 된다.

 재떨이에 담뱃불을 비벼 끄고 일어선다. 내가 일어서자 애들도 우르르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우네 애들은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대답을 못 한다. 오늘 아침 일찍 진우 형님이 데리고 나가지 않았습니까? 질문도 대답도 아닌 모호한 추측이 고작이다. 빈약한 정보의 대가로 지갑을 열어 오만 원짜리 두 장을 건넸다. 이걸로 진우 애들 밥이나 좀 사줘라. 고막이 터져라 예, 형님! 하고 외치는 애들을 뒤로 하고 담배를 하나 더 물었다. 기름이 다 되었는지 라이터가 잘 켜지지 않는다.

 빨리 와라. 내가 다 피워서 없애버리기 전에.

 잘못 나간 주먹처럼, 제 몸을 갉으며 부싯돌은 힘차게 헛돈다.





 최 상무의 사무실은 도로변에 위치한 상가건물 3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라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2층엔 캐주얼한 분위기의 이자까야와 당구장이 서로 입구를 마주보고 성업중이었다. 이 건물이 통째로 조직의 것이니 저 두 곳도 조직원 중 누군가의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내게도 저런 자리가 주어질까. 2층을 돌아서 3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서서 나는 잠시 건물의 밑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한참 올라온 것 같은데 고작 이 정도 높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내가 도착했을 때, 최 상무는 다리 한쪽을 비스듬히 다른쪽 다리에 올려놓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너무나 새 것으로 보이는 검은 소파에선 역할 정도로 가죽 냄새가 났다. 두 팔을 넓게 벌리고 손가락으로 탁탁 소파를 두드리며, 일정한 리듬에 맞춰 최 상무는 노래하고 있었다. 노래의 가사가 욕으로 꽉 채워져 있다는 건, 더 이상 가죽 냄새를 맡을 수 없을 만큼 후각이 마비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저 멍청한 새끼를 어쩌면 좋으냐, 민호야.

 그의 눈동자가 하얀 카펫 끄트머리를 향한다. 어제 보았던 검은 구멍은 보이질 않고, 그곳엔 웬 남자가 구부정하게 등을 말고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터진 입술에선 퐁퐁 눈물 같은 핏물이 떨어져 카펫을 더럽혔다. 성급히 걸음을 떼자 발밑에서 와자작 알사탕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옆으로 어제까지 책상 위에 멀쩡히 올려져 있던 액자 틀이 보였다. 발도 없는 액자가 어쩌다 여기에 누워 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내가 돈 받아오랬지 이딴 거 주워오랬냐, 이 돌대가리 새끼야.

 최 상무의 손을 떠난 금목걸이 몇 개가 까만 머리통을 때리고 스르르 카펫 위로 미끄러진다. 죄송합니다. 떨리는 목소리에 내 눈이 질끈 감긴다. 죄송할 걸 알면서 이딴 짓을 해? 묵직한 펜던트가 너의 눈밑을 스치고 날아가 벽에 맞아 두 동강이 난다.

 제가 마무리하고 오겠습니다.

 반지를 한 움큼 잡아쥐던 최 상무의 손이 패물함 안에서 꿈틀거린다. 내가 너의 앞을 가로막고 선 것이 불쾌한 눈치다. 운이 없으면 명패로 맞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최 상무는 별 반응이 없었다. 나는 최 상무가 마음을 정하도록 충분히 기다렸다가 몸을 돌렸다. 쪼개진 팬던트를 들어보니 무게가 상당하다. 피가 묻은 금목걸이를 손이 아프도록 꽉 쥐고서 반대편 팔로 너를 잡아 일으켰다. 꽤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있었는지 너는 제대로 서지 못하고 불안하게 비틀거렸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나는 최 상무를 등진 채 너의 손을 잡고 카펫 밖으로 구두코를 뻗었다. 민호야. 구두의 뒷굽이 매끈한 대리석 바닥에 닿자마자 최 상무의 기분 나쁜 목소리가 늘어난 고무줄처럼 뒤통수를 잡아당긴다.

 손에 쥔 건 두고 가라.

 어느쪽 손을 말하는 걸까. 나는 잠시 갈등한다. 그리고 오른팔을 접어 원래 있던 곳으로 금목걸이를 되돌려 놓는다. 에우리디케와 함께 지상으로 향하는 오르페우스처럼, 나는 뒤 한 번 돌지 않고 저벅저벅 사무실을 걸어나왔다.

 개 같은 새끼. 분을 못 이긴 외마디 비명이 금목걸이 대신 빈 벽을 때린다.





 젖은 구두를 벗고 마룻바닥에 올라선다. 회색 양말엔 짙은 얼룩이 졌다. 마른 수건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대강 발을 비볐다. 닫힌 문 앞에서 너는 고갤 숙인 채 발끝만 바라보았다. 젖은 발이 시려워서 그러고 선 건 아닐 테다.

 담배 좀 주라.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겨우 참고 거칠게 손목을 잡아 끌었다. 쓰러지기 직전의 볏짚처럼 너는 그 정도 악력에도 힘없이 끌려 온다. 어깨를 밀어 소파에 앉히고 구급상자를 꺼냈다. 뺨에 난 상처는 벌써 피가 말라붙어 적갈색 펜으로 그은 것처럼 갈변했다. 우리에게 흉터는 훈장과 같아서 이 정도 상처는 긁힌 거나 마찬가지라지만, 그게 너의 일이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상처의 크기를 가늠한 내 얼굴이 심각하게 변한다.

 주소.

 빨간약을 덜어내 상처에 가져가자 말간 살결에 구겨진 이불처럼 주름이 진다. 눈꺼풀을 파르르 떨어가면서도 너는 몸을 빼거나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무엇이든 잘 참는다는 건 네가 가진 가장 쓸모없는 장점이었다. 결코 참을 일을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게 이 세계의 불문률이므로.

 전화번호.

 소독약을 묻힌 면봉에 연고를 조금 묻혔다. 너는 여전히 말이 없다. 면봉을 살살 굴려 상처 위에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찢었다. 손찌검도 경우가 있지 얼굴에다 그딴 걸 집어던지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글부글 속이 끓는다.

 이름.

 손바닥으로 반창고를 가볍게 눌러 붙이며 너의 눈에 시선을 맞춘다. 이름. 내가 두 번 묻자 너는 마지못해 그 자의 이름을 뱉는다. 아파트 몇 동 몇 호에 사는지, 언제 집을 비웠다가 언제가 되어 돌아오는지까지도. 거짓말을 못 한다는 건 네가 가진 가장 쓸모있는 단점이었다. 우리가 같은 편인 한, 그 단점은 내게 유용하게 쓰일 것이 자명하므로.

 라이터가 망가졌다.

 거짓말. 내가 담배를 주기 싫어 그러는 줄 알았는지, 너는 가벼이 웃으며 내 주머니를 뒤진다. 상처 벌어지니까 웃지 말라고 해도 무소용이다. 신나게 담배 개비를 꺼내 라이터를 켜는 손놀림이 짓궂다. 내가 괴로워 하는 걸 즐기려고 일부러 더 그러는 것만 같다.

 진짜네. 진짜 안 켜지네.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고서야 너는 시무룩하니 물었던 담배의 꼬랑지를 내린다. 기름이 없어서, 아니면 부싯돌이 명이 다해 그런 것 같다고. 사실적인 원인을 찾는 대신 나는 현실적인 결론으로 도피한다.

 그만하자. 이제.

 입술에 달라붙은 담배 개비를 느리게 떼어내며, 너는 사무실에서 그리고 현관에서 그랬던 것처럼 발끝만 본다. 열 배의 중력이 작용하는 것처럼 거실의 공기가 무거워진다. 매달린 모든 것이 낙하할 듯 기운다. 손끝의 담배도. 입술의 한숨도. 눈가의 슬픔도.

 오천이야.

 앞뒤가 모두 잘린 너의 말을, 나는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게 돈 얘기라는 것도 몰랐다.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있다면, 그건 돈과 김진우일 것이다. 맹목적인 믿음은 멀쩡한 귀마저 닫히게 만든다. 뭐가? 하는 되물음에 너는 내게로 단어를 정조준해 분명하게 시위를 당긴다.

 받아야 할 돈. 오천이라고.

 오천.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돈이다. 누가 누구에게서 받을 돈이냐에 따라 판단은 달라질 것이다. 문득 최 상무가 사무실을 얻으면서 우리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네가 잘 돕기만 한다면 한 몫 잡고 장사 정도는 할 수 있게 오천씩은 내주겠다고. 이제 막 대단한 스폰서를 잡은 참이니, 그 정도 거드름을 피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거드름을 네가 진심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받아야 할 퇴직금처럼 여기는 것도 같았다. 최 상무라는 인간이, 우리의 '형님'이란 자가, 얼마나 탐욕스럽고 비열한 인간인지 알면서도.

 내가 너한테 오천 주면, 그만둘래?

 담배 끊는 대가로 오천이 생긴다면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라고, 너는 넉살좋게 받아치고 그림자처럼 시선을 내린다. 그런 말이 아니지 않느냐고, 퉁명스레 말하려다 내 수중에 오천은커녕 오백도 없음을 깨닫고 입을 닫았다. 일단 돈부터 벌어야 했다. 너를 이 지옥에서 끌어내려면. 내가 지옥의 왕이 되는 수밖에는, 내게는 그 방법밖에는 없다.

 금방 돌아올게.

 양말도 없이 구두를 신고 쌓인 눈을 밟는 발끝이 아리다. 저도 아픈지 눈은 까만 눈물을 흘린다. 고통을 덜기 위해 본능적으로 발걸음은 빨라진다.

 한밤의 마법이 걷힌 골목의 눈길은, 이제, 더러운 진창이 되었다.





 열둘. 그리고 열셋. '틴에이저'라는 이국의 단어를 최첨단의 유행처럼 가슴에 품고 다니던 그때 그 시절. 내게 맥가이버나 배트맨보다 절대적인 존재가 있었으니, 소위 '윤 회장'이라 불렸던 동네 유지가 그 주인공이었다. 우습게도 나는 윤 회장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들리는 풍문으로 그의 이름을 익히고 그의 영향력을 가늠할 따름이었다. 표를 끊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누군가 새치기를 한다. 실랑이가 붙는다.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내가 누군지 알아?' 하는 식상한 레파토리를 내세우며 윤 회장의 이름을 들먹인다. 아무도 그 남자를 건드리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었다. 대통령이 높은 줄은 알아도 높아서 뭐가 좋은 줄은 몰랐던 내게 윤 회장은 세상 그 누구보다 높고도 '좋은' 존재였다. 나도 윤 회장처럼 되고 싶었다. 아니, 윤 회장 밑에서 일하는 치들처럼 윤 회장의 권력을 빌려 쓰고 싶었다는 게 옳은 말이리라. 윤 회장 밑의 사람들은 밥을 먹고도 계산을 하지 않았고, 슈퍼에서도 '외상'을 외치며 술과 담배를 함부로 집어갔다. 망나니처럼 굴어도 누구 하나 싫은 소릴 하지 않았으며,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마저도 그들 앞에선 굽신거렸다. 그렇게 한심한 양아치로 살다가도 몇 년 뒤엔 자기 이름으로 된 오락실과 술집을 개업하고 좋은 차를 끌고 나타나 사람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든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니 빈곤한 가정 형편과 무관하게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았던 내게 윤 회장 밑에서 일한다는 게 얼마나 달콤하고도 영예로운 일이었는지는 굳이 보태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리라.

 열여섯. 그리고 열일곱. 또래의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서 필기를 하는 동안, 나는 어두침침한 뒷골목 슈퍼에서 담배 심부름이나 하는 것으로 조직에 첫 발을 디뎠다. 부푼 꿈을 안고 들어간 조직에선 나 같은 애송이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키거나 이유없이 쥐어패는 것 말곤 어떤 역할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포커에서 돈을 땄을 때의 이야기지만) 심부름값은 말도 안 될 만큼 두둑하게 챙겨 주었다. 담배와 박카스를 사오고 재떨이를 비우고 숙소를 청소하며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비싼 양복을 사 입고 명품 지갑 두 개를 부모님께 선물하던 날, 나는 현관 안에 발 한 번 못 들여보고 의절을 당했다. 며칠 전 윗선의 지시로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던 곳이 아버지가 다니던 공장의 노조위원장의 집이었다는 걸, 나는 몰랐다. 그날 내가 놓은 불 때문에 노조위원장과 그의 아내가 숨을 거두었단 사실도,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새로운 '형님'을 모시고, 내 밑으로 나이 많은 '동생'이 생기고,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식구'로 살며, 나는 내 진짜 가족을 잃었다. 어렸던 날의 상처는 쉽사리 아물지 않아 그 이후로 나는 두 번 다시 집에 찾아가지 않았다. 몇 년 뒤, 동네에 커다랗게 걸린 현수막으로 여동생이 명문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접한 게 내가 간직한 가장 최후의 기억이다.

 진우를 알게 된 것도 그 맘때쯤이었다. 진우는 원래 조직 내에서도 말썽이었던 행동대장 밑에 있다가, 그 사람이 사고를 치고 감방에 가게 되면서 최 상무 밑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진우는 나와 달랐다. 아니, 그 어떤 건달과도 달랐다. 조용하고, 수줍고, 자주 웃고, 많이 맞고, 잘 참았다. 그리고 말도 안 되게 예뻤다. 저렇게 예쁘장하게 생긴 놈이 제대로 주먹질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이라던 최 상무의 말처럼, 진우는 주먹을 쓰거나 연장을 다루는 데에 서툴렀다. 실전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해도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몸에 큰 상처 하나 없는 건 행운이라면 행운이고 기적이라면 기적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었지만, 진우는 치고 때리는 것보단 피하고 막는 일에 능했다. 인간의 기질 자체가 그랬다. 공격 본능보단 방어 본능이 앞서는 타입이었다. 최 상무는 그것마저도 못마땅해했다. 싸움은 선빵이 중요한데 때리질 못해서야 어찌 쓰겠느냐며. 아이러니하게도, 조폭으로서 자격미달이랄 수 있는 진우의 선한 기질은 내게 강력한 이끌림으로 다가왔다. 진우를 보고 있으면 너무 일찍 잃어버린 순수와 동심이 떠올라 막연한 그리움으로 마음이 일렁였다. 맑고 깨끗한 피부와 깊고 커다란 눈동자는 나의 오해를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렸던 날 윤 회장의 권력이 부러웠던 것처럼, 나는 진우의 순수가 부러웠다.

 최 상무는 대놓고 진우를 미워했다. 툭하면 손찌검을 하고 일거리도 잘 주지 않았다. 몇 안 되는 시시하고 골 아픈 일들을, 진우는 시시하게 해내거나 골 아프게 만들었다. 그런 일이 거듭될수록 최 상무의 포악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진우는 견디고, 또 견뎠다. 진우가 그런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는 건 확실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최 상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잘 버티다 좋은 스폰서를 잡아 떳떳하게 독립하는 것. 그래서 부모님께 작은 식당을 하나 차려드리는 것. 목표에 가까워지기 위해 진우는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런 진우를 모르는 척할 수 없어, 나는 종종 최 상무 몰래 진우의 일을 도와주었다. 나중엔 최 상무도 그것을 알고 악질적으로 나를 이용해먹었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진우처럼 무작정 참고 견디는 것이 전부였다.

 공짜로 먹는 밥이 마냥 부러웠던 열둘의 나는 매일같이 먹는 짜장면이 지겨워질 만큼 나이를 먹게 되었고, 슈퍼에서 진상을 떨거나 패악을 부려 얻은 술과 담배는 기껏해야 내 몸을 더 상하게 만들 뿐이란 사실을 깨달을 만큼 현명해졌다. 지금 내가 바라는 건 좋은 외제차도, 최신식 기계로 가득찬 오락실도 아니다. 짜장면도, 담배와도 그만 이별하고 너와 함께 이 진창에서 탈출하는 것. 오직 그것뿐.

 너. 김진우. 나와 세상을 가르는 유일한 타자. 나의 영원한 2인칭.

 너와 나의 목표는 여즉 별처럼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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