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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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죽어가는 마당에 이제와 큰 의미도 없었지만, 그래도 천마는 과거를 되짚어 생각해보았다.


한(漢)의 천자 유영에게 도움의 손길을 거절한 시점부터?

아니면, 그 이전 전대(前代)천마 스승 마지후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평생 숙적이 될 또하나의 수제자 사형 혈마를 마저 청소하지 못한것?


아니지. 훨씬 그 이전.

생부라 일컫는 무림맹주 남궁현이라 작자의 장자로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세상은 나를 패륜아라 일컫으나, 자식을 버리는 부모가 진정 ‘패륜’이 아니더냐.

내 아비가 날 버렸듯, 나도 ‘남궁우’라는 이름을 버렸다.

그래. 난 죽는 순간까지 ‘천마 류태오’로 죽을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는 순간, 천마는 저도 모르게 그나마 온전히 남아있는 왼쪽 한팔의 손가락으로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보았다.

축축히 피로 젖은 바지주머니안에 뭔가 작고 단단한 것이 만져졌다.

손가락끝으로 굴리니, 평생 하도 만져대서 닿아빠진 낡은 구슬의 감촉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완전히 맨몸으로 쫒겨난 것은 아니였지. 크크’


류태오가 태어나는 순간, 생모 채유아는 산고(産苦)로 유명을 달리했다. 제 애미를 죽이고 태어난 아들이기에, 남궁현은 더더욱 제 장남을 미워했다.


그런 생모의 마지막 유품이 이 구슬이었다.

초록빛을 띄는 정체를 알수없는 검은 구슬.


‘잊고 있었다. 나를 낳은 여인의 유품.’


100여년의 무림생활중 수많은 기연(奇緣)을 만나 온갖 진귀한 영약과 보물들을 얻어왔기에 - 정확히는 죽이고 빼앗았기에 – 그동안 천마는 태어나 처음으로 받은 이 소중한 구슬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린시절, 아기때 버려진 고아 소년은 생모가 그리워질 때마다 이 구슬을 만지고 또 만졌다.


아아. 얼마나 오랜 세월 이 구슬은 나와 함께 해왔는가.


나중에 하오문을 협박해 뒤늦게 얻은 정보로는 생모 채유아가 건강한 아이의 탄생과 축복을 위해 100일 불공을 드리다가, 정체모를 수상한 노파를 만나 얻은 진귀한 화석으로 만든 구슬이라 한다.


천마는 폐부 깊은 곳에서 찌를듯한 아픔을 느꼈다.

8살이 되서야 어깨너머 배운 천자문을 통해, 구슬에 새겨진 두 자의 한자를 겨우 읽을 수 있었다.


「영생(永生)」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아이가 될 아들을 위해 만삭의 산모 채유아는 그녀 깊은 가슴속 소망을 이 진귀한 구슬에 새겼다.


천마의 가슴속 고통은 버려졌다는 아픔과 어머니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었다.


그가 태어나는 동시에,  그를 사랑하는 이 세상 유일한 자를 잃었다.


“자아. 이제 골로 가기전에 마지막 할말은 있느냐?”


지금 혈마는 천마의 몸을 가지고 유희를 즐기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의도적으로 치명적인 곳만 피해서 천마의 고통을 극대한으로 이끌어 올렸다.

혈마의 검이 천마의 갈라진 가슴 사이로 삐져나온 심장을 꾹 질렀다.



“크악!”

그러나 이제 천마는 더 이상 비명지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흐으으… 크윽..”


“어떠냐? 천마.

세상을 피바다로 만들어 놓고 설마 더러운 아수라놈이 극락왕생을 원랬던 것은 아니겠지”


‘흥. 진짜 아수라는 네놈 혈마겠지.’

고통으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천마는 이를 악물었다.

손바닥안에 감춰진 구슬을 마지막 남은 왼손바닥 안에 세게 쥐고 작게 중얼거렸다.


“영…생…”


“뭐라? 영..모?”

혈마는 천마의 목소리가 개미 기어가는 소리처럼 작게 들리자, 내공을 끌어모아 귀에 집중시켰다. 

평생을 기다려온 천마의 최후의 말 한마디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영…생…어머..니..”


혈마는 천마의 말을 듣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핫! 죽을 때가 되니까 제 에미를 찾는군. 그것도 천하의 천마가!”


혈마가 검끝으로 천마의 꼭 쥐어진 왼손을 툭툭 쳤다.


“세상은 천마가 불사(不死)의 몸이라 모두 믿고 있지. 크크

하지만 결국 네놈 류태오도 결국 인간에 불과하다. 

보아라! 네 온몸에서 뿜어나는 뜨거운 피가 그 증거이니라!

5살 어린 애처럼 질질 짜며 에미나 찾는!

고작 너같은 하쟎은 애새끼 뒤에서 평생을 2인자였던 내가 스스로 한심스럽구나.”


자신의 시뻘건 피로 피범벅이 된 천마는 핏구덩이 한가운데 누워 이제 이미 송장이나 다름없었다.

혈마의 혐오와 경멸어린 시선이 숨통이 끊어져가는 천마의 얼굴에 머물렀다.


이상하게도 천마는 더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편안했다.

마치 어머니의 태(胎)속에 있는 것처럼.


천마의 입가에 불현듯  옅은 미소가 번번다.

‘이 천마의 마지막 제물은 네놈이겠구나.

혈마.’


 어차피 저승길 가는 먼길에 지옥에 같이 데려갈 동반자로는 혈마 놈 하나면 완벽했다.

‘ 큭! 아암. 그렇지. 당연히 혼자 디질 수는 없지 않은가.’


천마는 구슬을 입안 혀밑으로 밀어 넣았다.

파앗-

갑자기 천마가 제가슴을 쑤셔대고 있던 혈마의 검날끝을 잡았다.

“어..어엇! 너 뭐하..”


하나 남은 천마의 마지막 왼손바닥은 혈마의 날카로운 검날에 깊이 베어 검은 핏물이 튀어 천마위의 손바닥 살점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믿을 수없는 무서운 장력으로 혈마의 몸을 그에게로 당겨지게 했다.

‘이..이럴수가.천마놈 내공을 모두 소진한 것이 아니였나.’


저역시 평생을 무림바닥에 딩굴던 혈마는 본능적으로 자전마공(紫電魔功)을 펼쳐 보랏빛 강기가 자연스럽게 그의 몸에 방어막을 형성했다.


하지만 자전마공 내 양(陽)의 기운은 엄청난 음(陰)의 검은 그림자에 스르륵 잠식되어 수증기처럼 사라졌다.

혈마는 시커먼 강기가 커다란 파도처럼 밀려와 제몸을 덮치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차.

천마가 음양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운기운행하여 내공을 갑절로 제것으로 흡수하는 체질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기억해냈다.


“크크큭. 소용없어. 사형!

우린 같은 스승밑에서 자란 것을 잊었나.네 놈이 내 약점을 알듯이, 혈마 네놈 무공의 치명적인 약점을 설마 이  천마가 모를리가.”


말과 동시에 천마는 혀밑에 숨겨둔 구슬을 뱉어 공기에 띄웠다.

천마가 작게 중얼거거렸다.

“천마등공(天魔登空)”


검녹색 구슬은 공중에 붕 떠 있더니, 중앙에서 작은 회오리가 생기며 회오리가 점점 커져 허옇게 원을 그리며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설마..천마신공(天魔神功)?”


혈마는 제 눈을 의심했다.

죽은 스승 마지후조차 보여준 적이 없는 천마교주의 비전무공 ‘천마신공’ 이었다.

죽기직전까지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천마의 후계자만 안다는 전설의 위력최강의 마공이었다.

하지만 내공손실 역시 최강이라 생사(生死)가 갈릴 위기 아니면, 역대 천마들은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하…하..하지만 이제 내공이 바닥난 네놈이 어떻게?”


“원래 본원진기도 타고나게 내가 더 많았쟎아. 잊었어? 사형?”


단전에 남아있는 진신내력과 태어날 때부터 지닌 본원진기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아랫배에서 정수리 꼭대기까지 끌어모아 생의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천마는 이곳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고자 했다.


  • 후회는 없다.

 100여년의 원없는 삶을 살았다

 이제야 어머니를 뵐 수 있겠구나.


서서히 단전에서 회음부를 거쳐 중요혈점을 통해 솟구치는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천마는 자신의 본원진기를 연료로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시작했다.

핑그르르 회오리를 일으키며 팽이처럼 공중에 떠있는 구슬을 향해 천마가 갈을 외외쳤다.


“천.마.대.멸.겁!”


순간,푸른 섬광이 구슬에서 터져나왔다.

혈마는 생존본능에 저도 모르게 천마의 가슴팍에 꽂힌 제 검을 포기하고, 재빨리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푸른 번개가 혈마의 몸을 정통으로 내리쳤다. 

동시에 혈마는 수천만 갈래의 살점으로 조각나는 자신의 몸을 목격해야만 했다.


“후후. 사형. 수라도(修羅道)에서 또 보지.”

눈이 시릴 정도의 푸른 빛 한가운데서 천마는 평온한 미소로 웃고 있었다.


삽시간에 암흑이 천지를 덮었고 끝없는 고요가 계속되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천마의 눈에 한줄기 환한 빛이 보였다.

천마는 저도 모르게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순간, 자신이 공중에 붕 떠있는 느낌을 받았다.



바로 그때 거대한 귀두도 형태의 도끼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천마는 바로 옆으로 허리를 굽혀 미끄러지며 이를  피하자, 눈앞에 나타난 은색 철갑옷을 입은 거구의 무사 2명이 눈앞에 튀어 나왔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뭔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


‘ 이건 또 뭔 소리냐? 천축국에서 온자들인가?”



곧 천마의 귀가 트이며, 그들의 발음이 명확히 들려왔다.



“Get her!”


둘 중 땅딸한 갑옷사내가 외쳤다.


“금발 계집애다! 어린 프랑스 계집이닷!”


키가 9척은 넘어보이는 키다리 사내가 신이 난듯 달려 들었다.


“캬아~~ 얼마만에 영계냐! 실컫 먹어 해치워야지!”



검을 도로 허리춤에 넣으며 땅딸보 무사가 보호구를 벗었다.

빨간 머리의 색목인이었다.


“아놔! 씨발! 이젠 지옥에서도 합공당하는 거냐?”



천마는 순간 빡쳐서 바로 위로 뛰어올라, 홍당무 색 머리 백인 사내의 머리통을 한 손에 쥐어 잡았다.


붉은 머리 땅달보가 귀엽다는 듯 자신의 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천마를 내려다 보았다.


“요 귀요미! 영국오빠들이랑 놀고 싶구나? 치마부터 벗겨야지!”



그 때 9척 장신의 기사가 뒤에서 허갑지겁 달려 들었다.

“이봐! 토마스! 귀족인 내가 먼저다!

간만에 처녀 아이를 따먹..”


동시에 홍당무색 땅딸보의 머리통이 뽀각 소리를 내며 아래로 툭 떨어져 바닥에 뎅구르르 굴러갔다.



“어…어…어떻..게..”



자신의 에스콰이어(견습기사)가 눈앞에서 즉사한 것이 믿기지 않는 듯 9척장신의 웨일즈 출신 기사는 제 두 눈을 비볐다.


분명히 윤기나는 아름다운 금발의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심지어 프랑스 소녀의 손은 아직 덜자라 조막만했다.


“아수라멸천장!!”


천마가 귀여운 작은 한 손을 뻗어 섬광을 뿜었다.

허연 불빛이 번쩍 하더니, 벼락이 번쩍했다.

새하얀 번개가 천마가 발견된 프랑스 촌 구석의 양치기 집 천장을 뚫고 하늘까지 치솟았다.


“으아아아아악!”


허연 뇌수가 터지며 위로 튀어올랐다.


웨일즈에서 바다건너 위세좋게 프랑스까지 넘어와 영광스럽게 100년전쟁에 발을 담갔던 31세의 아서 맥켄지 남작은 이렇게 뇌수가 터진채 말그대로 객사(客死)했다.


귀족의 허울좋은 품위와 다르게, 한창 나이 성욕에 넘친 그의 갑옷 가랑이 사이 코드피스는 부풀어 하늘높이 치솟아 있었다.


천마는 갑자기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이런 젠장! 주화입마가 아직도 안풀렸나?’



순간적으로 폭주한 천마는 그길로 바로 정신을 잃었다.

 



         ********


짹.짹 짹.

먼발치 새들이 평화롭게 지저귀는 소리가 아늑히 들려 왔다.


"잔! 잔! 잔느야! 오빠야 오빠! 정신차려!'


귀청 떨어지게 큰 목소리가 류태오의 편안한 단잠을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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