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죽은 와시즈 이와오가 눈 앞에 불쑥 나타난 날, 아카기 시게루는 이제 그만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와시즈는 갑자기 나타났지만 처음부터 거기 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누군가 공들여 묶어준 리본장식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아카기는 걷고 있었으므로 점차 와시즈와 가까워졌다 거리에 넘쳐나는 미소녀 캐릭터 광고판에서 톡 튀어나온 것 같은 소녀가 큰 눈을 치켜뜨고 아카기를 노려보는데 어째서인지 아카기는 그 소녀가 바로 와시즈 이와오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손에 낀 검은 장갑과 고풍스런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때문만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눈때문이었던 것 같다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 끝에는 죽어버리라고 외치던 광기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하지만 왜지?

 아카기가 가까워지자 와시즈, 현대 사회의 미소녀 캐릭터의 몸에 갇혔다고 밖에 생각 못할 와시즈가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내리치는건가 싶었지만 와시즈는 가볍게 지팡이 끝으로 아카기의 가슴을 쿡 찔렀다

 -악마

 그리고는 사라져버렸다 당연하다 와시즈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으니까.

 아카기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화려하 네온싸인, 떠들며 지나가는 행인들, 나태하고 즐거운 공기가 한데 섞여 있었다 누구도 와시즈 이와오를 보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오로지 아카기 시게루만이 와시즈를 본 것 같았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내가 미쳐가는 모양이군.

  

와시즈는 불쑥 나타나서 불쑥 사라졌다. 위스키를 마시는 아카기 옆에서 얼음에 장난을 치기도 하고 뒤에 매달려 마작패를 보며 훈수를 두기도 했다. 아카기는 왜 나타났는지 묻지 않았다. 어차피 귀신이니 다음 생이니 하는 것을 믿지 않았으므로.

 -아카기, 늙었군. 약해빠진 타법이야.

 -요즘은 아무도 목숨을 걸지 않아. 경찰에 잡혀간다고.

 -흥, 나약한 것들 사이에서 나쁜 물만 들었군. 이런 건 겜블이 아냐, 마작도 아니야! 한심해졌군, 아카기!

 와시즈가 아카기의 머리를 때려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아카기는 웃으며 술만 마셨다. 어두운 방안에서 아카기가 떨리는 손을 올려두었을 때 옆에 앉아있던 와시즈가 말했다

 -오늘은 손이 떨리고 내일은 아침 메뉴가 생각이 나지 않고 토요일쯤엔 주소를 잊어버리고 다음달엔 머릿속이 하얘지겠는걸

 -당신도?

 -너보단 오래 살았지 난 신이니까

 하긴 처음 만났을 때 와시즈는 이미 70대였다.

 -그래, 죽어가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서 젊은이들을 죽여버렸잖아

 -흑역사는 넘어가자고 어차피 지금 죽어가는건 아카기 너니까

 와시즈는 화를 내는 것처럼 얼굴을 구기다가 이내 히죽히죽 웃었다

 -내가 죽어가는 건가?

 -몸은 몰라도 정신은 확실히 죽어가고 있지 몸뚱아리가 중요해? 오래 살고싶어?

 -아니

 -그래 그래야 아카기 시게루지

 와시즈가 주먹을 쥐고 기뻐했다 그리고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아카기는 또 혼자 남아 멍하게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변화는 눈치채고 있었다 언제나 투명한 유리를 들여다보듯 훤히 보이던 마작판의 흐름이 보이지 않았다 기억은 제멋대로 잘려나갔다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이가 걱정어린 얼굴로 부축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와시즈는 점점 더 자주 나타났다 아카기는 장례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왜 도망다녔어?

 -딱히 당신을 피해 도망다닌 건 아냐

 자고 일어났더니 와시즈가 가슴팍에 올라타 아카기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죽은 줄 알았던 와시즈가 간신히 되살아나 아카기를 찾아다닌다는 말은 들었지만 굳이 그 앞에 나타날 생각은 없었다 승부는 끝났고 아카기는 졌다

 -삐졌거든

 -뭐?

 -난 신에게 사랑 따위 받지 않으니까 신에게 사랑받는 강운에게 진 게 분해서

 -아카기 시게루가 삐져서 내 앞에 안나타났다고? 그 악마가?

 -본인 가슴팍에 올라타서 악마라고 하는 건 무례한거야

 와시즈는 한참을 웃었다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아예 침대를 구르며 웃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머리카락은 곱게 빗겨져 있고 옷매무새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현실이 아니니까.

 -내가 이겼어

 -맞아 당신이 이겼어

 -나는 신이니까

 뿌듯해하는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났다 키득키득 웃는 아카기를 보며 와시즈가 말했다

 -왜 웃어?

 -아니 정로 당신이 이겼어 나에겐 당신처럼 죽을 기회따위는 없겠지

 도박의 밑바닥, 목숨도 돈도 모두 내던져야 갈 수 있는 그 밑바닥에 닿는 순간 눈을 감는것이 아카기의 소원이었다 와시즈는 입을 다물고 눈썹을 찡그렸다 여전히 미소녀의 형태를 하고 있어서 모든 것이 과장되어 보였다

 -하지만 나도 네가 떠난 다음 다시 그런 승부는 하지 못했어

 -어디에도 없겠지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지 않고 와시즈는 아카기 주변을 배회했다 가까워진 죽음의 그림자처럼 자연스러웠다 마지막 밤, 와시즈가 말했다

 -아카기, 승부를 내자 우리 둘이서 마작을 하는거야 각각 두 자리씩 맡아 엉망이지만 너랑 나라면 할 수 있어

 -무엇을 걸고?

 -돈은 필요 없어 시시한 도박은 너도 질렸지 네 죽음을 걸자 내가 이기면 넌 죽을 수 없어 뇌가 쪼그라들어서 스스로를 잊어버리더라도. 네가 이기면 넌 죽는거야. 온전히, 아카기 시게루인 채로. 어때 멋진 게임이지?

 아카기는 불을 붙이며 씩 웃었다

 -좋아, 좋은 승부다

 테이블에는 아카기와 와시즈 뿐이었다 잡음조차 나지 않는 공간에서 마작패를 내려놓는 소리 외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와시즈는 소리지르고 울고 웃고 방방 뛰고 아카기의 머리를 쥐어 박았다 아카기는 식은땀을 흘리며 웃었다 아주 긴 밤이었다


 아카기가 마지막패를 쓰러뜨렸다 하네만으로 마무리 된 게임의 끝은 조용했다

 -네가 이겼어

 와시즈는 울고 있었다 분해서 우는 것도 같고 슬퍼서 우는 것도 같았다

 -네가 이겼어, 아카기 시게루

 -당연하잖아, 네 자리 모두 내가 움직여야 했는데 이건 나 혼자 치는 거잖아 넌 환상이니까

 -네가 이겼어

 -그래 난 이제 아카기 시게루로 죽을 수 있어

 -아카기 시게루가 죽는다니

 -왜 슬퍼하는거야?

 -이제 이 세상에 더 이상 내가 남지 않는다는 소리니까

 -당신은 이미 죽었잖아

 -멍청한 놈 내 육신을 말하는 게 아니야 진짜 도박을 이해하고 있는 마지막 사람 그게 너고 그건 내 마지막 나 란 말이야

 와시즈가 아카기를 찾아다닐때 우린 동류라는 말을 했다고 들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아카기는 알고 있었다 태양이니 암흑이니 악마나 귀신이니 했지만 두 사람은 근본이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 나타난 걸지도 모르겠다

 -뇌에 염증이 생겨서 환상을 보는 줄 알았는데 혹시 귀신이야?

 와시즈는 눈물 맺힌 눈으로 아카기를 한심하게 쏘아보았고 아카기는 크게 웃었다 그럴리가 없었다 와시즈는 환상이고 아카기의 머릿속은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카기는 와시즈가 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도 알 것 같았다 게임 속 미소녀는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고 재생한다 어떤 변칙도 없이 영원히 사는 신처럼.


 아카기가 주변인들과 만나고 죽음을 선택하는 그 마지막 순간 와시즈도 함께 있었다 와시즈는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와시즈, 하나만 알려줘. 나도 신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와시즈는 아카기 귀에 정답을 속삭였다 아카기는 희미하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영원한 암흑으로.

 

  

 

 

+듀공님 그림 보고 쓴 썰 백업

~ 하는 걔 /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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