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으면서 읽어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떤 별의 빛도 필요하지 않을 만큼 환한 하늘. 그 너머로 보이는 성좌들의 빛을 헤아린다. 헤아리고, 또 헤아린다. 모르겠다.

별들이 너무 많아서, 찾을 수 없는 것인가.

- 281화, 구원의 마왕

 

저는 전독시를 만나기 전부터 별을 좋아해왔고, 281화의 저 대목도 몹시 좋아합니다.

화제를 갑자기 천체물리학으로 틀어서 종장까지 김독자의 삶이 별의 일생과도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이미 빠져있는 과몰입의 파도 속에 몸을 맡겨버릴 수도 있겠으나, 이 글의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므로 정신을 차려봅니다.

네 번째 표제로, 발터 벤야민의 ‘성좌’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그래도 별 사진은 하나 넣고요.





 

발터 벤야민은 누구일까요?

눈가에 물기 없이는 말할 수 없는 발터 벤야민 씨의 삶. 그의 친구였던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해보겠습니다. 

「학식이 대단했지만, 결코 학자가 아니었다. 주제는 텍스트와 텍스트 해석을 아우르지만 결코 문헌학자가 아니었다. 종교가 아니라 신학에, 그리고 텍스트 자체를 신성하게 여기는 신학적 유형의 해석에 크게 이끌렸지만, 결코 신학자가 아니었고 성경에 특별히 관심이 있지도 않았다. 타고난 작가였지만, 최대 야망은 전적으로 인용들로 이루어진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프루스트를 번역하고 생존 페르스를 번역한 최초의 독일인이었고, 그 전에 보들레르의 『파리 풍경』을 번역했지만, 결코 번역가가 아니었다. 서평을 쓰고 생존 작가와 죽은 작가에 대한 여러 에세이를 썼지만, 결코 문학비평가가 아니었다. 독일 바로크에 관한 책을 한 권 썼고, 19세기 프랑스에 대한 엄청난 미완의 연구를 남겼지만, 문학이건 다른 쪽이건 결코 역사가가 아니었다. 나는 그가 시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할 것이지만, 그는 시인도 철학자도 아니었다.」

- 발터 벤야민 1892~1940, 한나 아렌트, 이성민 譯, 필로소픽

뭔가 설명이 된 것 같으면서 전혀 안 된 것 같기도 한 저 문장을 저는 좋아합니다.

친구의 말을 들었으니 이번에는 본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1892년 6월 15일 상인 에밀 벤야민의 아들로 베를린에서 출생하였다. (중략) 나는 프라이부르크와 뮌헨 및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 독문학, 심리학을 전공하였다. 1917년에는 스위스로 가서 그곳의 베른대학에서 나의 학업을 계속하였다. (중략) 일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첫 몇해동안 나는 주로 독일문학공부에 전념하였다. 이 분야의 첫 연구결과로서 나온 것은 나의 논문 ‘괴테의 친화력(1924)’이었다. (중략) 호프만슈탈은 나의 다음 번 저서, 즉 ‘독일 비극의 원천(1928)’에 대해서도 매우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 책은 17세기의 독일연극에 새로운 견해를 부여하려고 하였다.」

-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中 ‘나의 이력서’, 발터 벤야민, 반성완 편역, 민음사

 

위에 적은 것 외에도 많은 명저로 알려진 벤야민은 독일 출생의 문예비평가입니다. 그의 저서는 대개 난해하고, 신비한 이미지들로 가득합니다. 안타깝게도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하여 저서도 얼마 출간되지 않았으나, 사후에 비로소 명성을 얻어 현대예술이론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고 많은 저서가 출간되었습니다. 그 불우한 삶에 대해서 다시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리겠습니다. 

「1940년 9월 26일, 미국으로 이주하려던 발터 벤야민은, 프랑스-스페인 국경에서 목숨을 끊었다. (중략) 그 후에, 이 자살로 마음이 흔들린 국경 관리들은 그의 일행이 포르투갈로 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몇 주 뒤에 비자 정지는 다시 해제되었다. 하루만 빨랐어도 벤야민은 무사히 통과했을 것이다. 하루만 늦었어도 마르세유에 있는 사람들은 당분간 스페인을 거쳐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오로지 이날만 재앙이 가능했다.」

- 발터 벤야민 1892~1940, 한나 아렌트, 이성민 譯, 필로소픽

 발터 벤야민은 유대계 독일인이었으며, 한나 아렌트가 말한 대로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하려다 비자가 정지되어 불가능해지자 국경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생전에 그의 저작물은 게르숌 숄렘 같은 몇몇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해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저작은 사후 15년이 지나서야 출간되기 시작했고 출간 즉시 평단에서 각광받았습니다.

그가 남긴 이야기들은 그가 죽고도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제대로 이야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벤야민의 성좌(獨Konstellation)

발터 벤야민에 대해서는 이쯤 하고, 이제부터는 그의 ‘성좌’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벤야민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념은 영원한 성좌이며, 그 요소들이 이러한 성좌의 점들로 파악되는 가운데 현상들은 분할되는 동시에 구제된다.

- 독일 비애극의 원천 中 인식비판적 서론, 발터 벤야민, 최성만 김유동 譯, 한길사


원문에서는 이념, 성좌 등등에 대해 복수형을 쓰고 있는데 저는 난폭하게 단수형으로 바꿔 적었습니다. 왜냐하면, 안 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더 이해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네. 벤야민의 이야기는 어렵습니다…;;;

이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 양반들이 벤야민이 제출한 연구 ‘독일 비애극의 원천’의 단 한 단어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선언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확실히 그들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저술은 거의 대부분 인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모자이크적인 기법”이 최고의 자부심이었던 작가. (중략)…를 그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 발터 벤야민 1892~1940, 한나 아렌트, 이성민 譯, 필로소픽

그렇습니다. 저는 평소 상징으로 점철된 글을 쓰기도 읽기도 좋아하는데, 그래도 힘듭니다;;;



힘들어요….



어휘가 어려워서도 주석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그의 ‘시적이고 은유적인’ 사고방식 때문인데, 그래서 분명히 읽히긴 잘 읽혔음에도 무슨 말인지 정리하기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 시적인 이미지는 전달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벤야민의 성좌에 대해 그 이미지를 난폭하게 가져와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밤하늘을 상상해봅시다.

공기도 맑고 날씨도 좋은 날의 밤하늘이라고 가정해봅시다.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걸 그냥 ‘아 별들이 모래알 한 줌 아무렇게나 던졌을 때처럼 무작위로 널려있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중 일부를 골라 자꾸 이으려고 하죠. 그리고 그렇게 이으면, 그건 ‘이야기’가 됩니다. 별자리 이야기.

 

무작위로 널려있는 것 같은 별들 중 일부를 골라냅니다. 그 중 몇 개의 점을 연결한 뒤 ‘백조가 날아가는 모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스파르타 왕비를 어떻게 좀 해보려고 변신한 제우스의 이야기를 집어넣습니다. 백조자리의 탄생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시간이 나시면 백조자리 찾는 법을 한 번 보고 가시는 것도.






밤하늘에 별이 있습니다. 밤하늘에 박힌 들로. 그냥 두면 무작위의 반짝임들입니다. 그 중 일부를 골라내는 것이 분할입니다. 분할한 것들에서 그럴 듯한 의미를 찾아내서 연결하여, 파악합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구제되어, 비로소 이야기가 됩니다.

다시 벤야민의 이야기를 읽어보겠습니다.

이념은 영원한 성좌이며, 그 요소들이 이러한 성좌의 점들로 파악되는 가운데 현상들은 분할되는 동시에 구제된다.

- 독일 비애극의 원천 中 인식비판적 서론, 발터 벤야민, 최성만 김유동 譯, 한길사

그렇게 벤야민의 방식으로, 인간은 밤하늘에 백조자리의 이야기를 올려놓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밤하늘을 분할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언가로 두려 하면 백조자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거기 있는 점, 별을 골라낸 뒤 연결하여 파악하고 의미를 이야기해야 성좌, 백조자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불행했던 문예비평가는 절대적 이념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좌 방식으로 하는 읽기를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기’라고도 말했죠.

그것은 섬광처럼 휙 스쳐 지나가버린다. (중략) <한 번도 씌어지지 않았던 것을 읽는다>고 말할 때의 이러한 읽음은 가장 오래된 읽음이다. 즉 사람들은 모든 언어가 생기기 이전에는 동물의 내장으로부터, 또 별이나 춤으로부터 읽는 행위를 했던 것이다.

-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中 ‘언어의 모방적 성격’, 발터 벤야민, 반성완 편역, 민음사


아아 또… 어휘는 분명 쉬운데 혼란이….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부연해봅니다.

별들을 밤하늘에서 하나씩 분할하고 연결해내지 않으면 의미는 없습니다.

연결하여 이름지어야 이념이고, 그제야 의미가 읽히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념은 영원한 성좌입니다.

밤하늘에는 참으로 많은 별자리들이 이름지어져 있습니다. 




 


구제 비평

이렇게 벤야민이 말하는 성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체적으로 파악한 뒤 연결, 구제(의미를 형상화)하는 것이 벤야민의 문학비평, 구제 비평(獨Rettende Kritik)입니다. 이 구제는 ‘구원’이라는 표현으로 옮겨지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낯익은 단어죠.


구제는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이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비평은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하는’ 것입니다.

흔히 착각되는 경향이 있지만 비평은 부정적인 관점에서의 분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그 앞에 구제라는 단어까지 붙는 벤야민의 방식은, 고전들을 편견과 몰이해에서 구제하여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부여하는 방식의 비평입니다. 물론, 냉정한 시각을 버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냉정한 시각이 없이 분석은 정합성을 잃습니다.






그럼 이제야 전독시를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텅 비어있던 우주의 사이사이를 잇는 새하얀 선들이 보였다. 서로 결코 만날 일이 없을 것만 같던 별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수식언의 맥락’을 이해했다.

(중략)

별과 별 사이에 이야기가 있었다.

- 312화, 김독자 컴퍼니

저는 저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김독자 컴퍼니의 동료들은 성좌가 아니니까요. 저때까지 그들 중 수식언의 맥락에 자리를 받은 것은 김독자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성좌’인 것처럼 표현되고 ‘수식언의 맥락’을 빌어 이야기될까요?

물론, 원작에 그 이유가 적혀있습니다.

잊고 있었다.

예언이란 모두 비유라는 것을.

이 <스타 스트림>에서 사람은 곧 이야기다.

- 188화, 73번째 마왕

성좌들뿐만이 아니라 김독자와 유중혁, 그리고 김독자 컴퍼니의 동료들을 비롯한 인물들 모두가 ‘설화’ 즉 ‘이야기’의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밤하늘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밤하늘을 절대적인 무언가로 보면 거기에는 아무 이야기도 없습니다.

어쨌거나 아름답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허전하니 별을 찾아내 연결해볼까요? 백조자리입니다. 출처↓


이와 같이, 312화에서 김독자는 거기서 ‘만날 일 없을 것만 같던’ 별을 보았습니다. 동료들입니다. 그들이 수식언의 맥락에서 연결되어 새하얀 선들이 되고 마주보았습니다. 우리가 무작위인 점들 중 몇 개를 골라 이어서 백조자리를 이야기하는 것처럼요.

 

떨어져 있던 점(동료들)이 연결되어 선이 되고, 서로를 마주봄으로써 이야기(김독자 컴퍼니의 설화)를 자아내는 광경이 312화에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 만들어진 이야기가 그들의 설화이고, 그 설화들이 이어져 만들어진 이야기가 전독시인 것이죠.

 

 

 

 

 

스타 스트림

여기서 다시, 발터 벤야민 씨의 이야기가 필요해집니다

이념은 단자이다. 요컨대 모든 이념은 세계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이념의 재현을 위해서는 다름 아닌 이 세계의 이미지를 축소판으로 그려내는 일이 과제로 주어져 있다.

- 독일 비애극의 원천 中 인식비판적 서론, 발터 벤야민, 최성만 김유동 譯, 한길사 


아, 어휘는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는데 다시 찾아오는 혼돈이여…;;


단자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려면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의 이야기로 넘어가야 하지만, 그걸 설명하면 논점일탈이 되고 너무 길어지므로 간단히만 적어두겠습니다(이래서 전 철학이 어렵고 벤야민이 어렵습니다ㅜ. 한 사유를 이해하려면 알아야 하는 역사가 너무 많아서). 단자, 모나드는 한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를 말합니다. 라이프니츠는 이를 통해 모든 것이 창조의 시점부터 신의 뜻대로 이미 조화롭게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정조화’. 아마 이후 다른 표제에서 말씀드리게 될, 까요?;

 





어쨌거나, 벤야민이 말하는 이념은 모나드이며, 세계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야기의 세계’인 전독시에서 그 이야기들은 어떤 세계에 속해 있습니까?

물론 스타 스트림입니다. 스타 스트림이 성좌들에게 수식언을 주고, 수식언의 맥락에 성좌들의 자리를 마련합니다.

281화에서 유중혁이 올려다보았던 것처럼, 스타 스트림은 하늘입니다. 그 안에 성좌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좌는 아니지만, 설화, 즉 이야기를 가진 다른 화신들도 그 아래에 있습니다.

 

스타 스트림이야말로, 전독시의 절대적인 이념입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을 향해 미소합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완벽한 이야기입니까.”

- 534화, 작가의 말

그 아득한 법칙을 느낀 순간, 한수영은 이 세계가 마치 체스판 같다고 생각했다. 존재도 근원도 알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의지가 지배하는, 극도의 완결성만을 추구하는 체스판.

- 535화, 작가의 말

스타 스트림은 완결되어 있습니다. 완벽하고도 절대적인 세계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 벤야민 씨는 절대적인 이념은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독시 안에는 그 절대적인 이념이 있네요. 이미 결정된 이야기가.

 



 

 

결정된 이야기의 세계 안에서

그러면, 그 안에서 우리의 주인공 김독자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 번 보겠습니다.

필사적으로 시나리오의 사다리를 올라서는 화신들을 조롱하며, 또 꼭대기를 향하는 사다리를 하나씩 걷어차면서.

그렇게 비극의 희생자는, 다시 비극의 주체가 된다.

공포에 젖은 화신들을 향해, 나는 말했다.

 

“나는 이 시나리오를 부수고 싶습니다.”

- 328화, 신의 천적

비판하고,

 

나는 다른 화신들과 성좌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이제 선택하시죠.”

(중략)

“거대 성운의 꽁무니에 붙어, 평생 그들의 수족이 될 것인지. 아니면 이 신화 속의 거신들과 함께 새로운 ‘신화’의 주인이 될 것인지 말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성운이 받은 ‘메인 시나리오’의 내용이 갱신됩니다!]

- 329화, 신의 천적

구원하고, 


[그냥 요괴들일세. 위대한 뜻을 좇는 그대가 어째서 하찮은 미물들의 행사에 신경을 쓰는가?]

 

“그들도 분명 ‘시나리오’를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부처의 화두나 우주의 진리를 논하며 참된 길을 좇는다는 당신들이, 어째서 인간 아닌 것들의 삶에 대해서는 그리 무심하십니까?”

- 432화, 이계의 신격

또 비판하고, 


나는 바닥에 쓰러진 요괴들을 하나둘 수습했다.

 

【당신누구당신누구당신누구】

 

그들은 나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내 손끝에 다가와 킁킁 냄새를 맡고는 부리나케 달아났다. 그리고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먼 나무 둥치에 숨은 채 이쪽을 훔쳐보았다.

 

[버림받은 일부 요괴들이 당신을 따릅니다.]

- 432화, 이계의 신격

또 구원하고, 


“이 세계선의 너는 쓰레기였어. 힘없는 노인을 죽여서 첫 번째 시나리오를 깨려는 양아치가 너였지.”

【첫 번째 시나리오는 원래 그런 거야. 그딴 건 안 궁금—】

- 478화, 단 하나의 설화

계속해서 비판하고,

 

허공에 멈춰선 칼날.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넋을 잃은 김남운의 경동맥을 희미하게 파고든 채 멈춰 서 있었다.

나는 반쯤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네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야.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 480화, 단 하나의 설화

계속해서 구원하고 있습니다.

 

나열하니 더 분명해보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김독자는 ‘독자’이자 ‘비평가’로서, 멸살법을 비판적으로 ‘읽으며’ 동시에 ‘구원’하고 있습니다. 버려진 이야기들을 구원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김독자는 멸살법의 세계에 대해 벤야민이 말한 성좌의 방식으로, ‘구제 비평’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구원의 마왕’을 ‘구제 비평가’로 번역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스타 스트림은 정말 이름을 잘 짓습니다.






이름 없는 것들

여기까지 이야기했으니, 이제 확신하는 투로 적어도 될 것 같습니다.

전독시에서 성좌는 물론 장르로서의 성좌물을 소재로 이어받은 것이지만, 이런 시각으로 읽을 때 다른 하나의 의미도 생겨납니다.

 

이야기의 세계를 다룬 이야기, 즉 메타픽션인 전독시에서 성좌는 발터 벤야민의 성좌의 패러디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역시 외신들이 등장할 때입니다.

그들은 무엇입니까? 

이제는 이름조차 잊어버린, ‘이름 없는 것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중략)

‘멸살법’의 인물들이 시나리오 속에서 바뀌었듯, 그 이야기를 읽는 나 역시 변했다.

나는 이제 그가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헤아리는 나이가 되었다.

- 479화, 단 하나의 설화

이해할 수 없어 헤아림 받지 못한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김독자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이 됩니다.

 

그렇게 김독자의 뜻을 한수영이 ‘이해’하고, 

[대상은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활자와 활자를 잇는 것은 맥락이다. 맥락이 없는 바다에 펼쳐진 활자들은 마치 처음부터 읽지 못하게 만들어진 책 같았다.

(중략)

한수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맥락 없는 문장들을 어떻게든 연결해보는 것이 전부였다.

- 491화, 전지적 작가 시점

맥락을 연결해냈을 때,

 

[‘이야기의 적’은 당신에게 이해받길 원합니다.]

(중략)

‘이름 없는 것들’이었던 모두가, 그곳에서는 이름이 있었다.

- 492화, 전지적 작가 시점

이해받기를 원하던 그들은 비로소 이름을 받고,

 

[설화, ‘예상 표절’이 <김독자 컴퍼니> 전원에게 자신의 이해를 공유합니다!]

[설화, ‘별의 구원자’가 <김독자 컴퍼니> 전원에게 자신의 생각을 나눕니다.]

 

모든 설화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493화, 끝의 시작

설화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새로운 이야기를 자아냅니다.






저는 첫 번째 표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전독시가 웹매체의 불행편과 행복편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 표제 ‘제4의 벽과 소격효과’에서는 작가와 주인공에게 보내는 우리의 선한 피드백이 더 좋은 이야기를 자아내는 양분이 될 수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세 번째 표제 ‘애도 일기’로는 이제 막 걸음마를 딛는 초보 작가라 해도 온 힘을 다해 이야기를 써서 전달했을 때, 누군가를 구원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음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네 번째 표제, ‘성좌’를 통해서는 우리가 독자이자 비평가로서, 이미 쓰여진(결정된) 이야기라 해도 거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고 말함으로써 이야기를 구원할 수 있음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본래 저는 어떤 글이건 마음을 먹으면 몹시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실, 분석이나 해체라는 것부터가 글에 대책없이 몰입해버릴 경우 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충분히 거리를 두고 읽어야만 보이는 것을 읽어야 하고, 더 멀리 거리를 둠으로써 증거를 찾아야 하니까요.

그러나 보통은, 이해하려는 입장에서 사유를 연결하여 귀기울여 들으려 하는 편입니다. 그게 더 즐거우니까요.


어딘가에 분명히 생전 벤야민의 저작처럼 이해받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름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우리는 언제든 벤야민이 말하는 성좌 방식으로 그 이야기들을 읽고, 의미를 연결하여 구제할 수 있습니다. 현재 받고 있는 이해보다 더 많은 이해를 받을 수 있는, 좋은 이야기임을 외칠 수 있습니다.






다시, 처음에 보여드렸던 밤하늘을 한 번 보겠습니다.

이제는 그저 아름답다기보다는, 분할하여 연결할 수 있는 점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읽는 이야기들은 대개 작가의 손을 떠나 우리에게 온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결정되어 적힌 상태에서 그 이야기를 맞이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기회는 언제나 남겨져 있습니다. 벤야민이 말한 성좌의 방식으로, 절대적인 이념은 없으니까요.

‘멸살법’에서 유일하게 설명되지 않는 존재들.

나는 묻고 싶었다.

너희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 421화, 은밀한 모략가

김독자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기억에는 두서가 없었고, 서로 일관적으로 연결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이을 수 있었다. 마치 이어지지 않는 별자리를 잇듯이.

어쩌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그것들을 연결할 수 있었다.

(중략)

수만 년, 수십 만년, 어쩌면 수백 만년에 달하는 고통의 이야기. 세계선에서 버려져, ‘설화’로 인정받지 못한 이야기. 세계의 무의식이 되어, 먼 우주를 떠돌며 오래된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실패한 설화의 파편들. 끝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목소리들.

- 421화, 은밀한 모략가

제가 생각하는 벤야민의 성좌에 대한, 원작에 드러난 가장 확실한 암시가 저 문장에 담겨있습니다.

멸살법의 이야기를(그러니까, 유중혁을요) 충분히 사랑하고 손을 내밂으로써 김독자는 그것들을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

그때도 지금도, 그것을 ‘읽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421화, 은밀한 모략가

이미 쓰인 것은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읽을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다시, 벤야민이 말한 ‘성좌’의 방식으로, 의미를 찾아내고 연결하여 숨겨진 이야기들을 ‘구제’할 수는 있습니다. 어딘가에 있을 이해받지 못한 이야기를, 우리는 언제든지 구원할 수 있습니다.

김독자가 멸살법에 대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이계의 신격’의 촉수를 쥐었다. 내 손끝에 감응하듯, 촉수들은 나무 넝쿨처럼 손끝을 감았다.

공포의 기록자들은 말했다.

‘이계의 신격’은 불가해한 존재들이라고.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 정체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고.

그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지금의 내 행동은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일 수도 있다.

(중략)

자신이 숨겨온 소중한 것을 내어주듯, ‘이계의 신격’들이 뻗은 덩굴의 끝에 작은 꽃들이 맺혔다. 꽃에서 향기가 흘러나왔다. 향기는 곧 노랫말이 되었고, 이야기가 되었다.

- 421화, 은밀한 모략가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숨겨져 있던 그것들은 비로소 향기가 되고, 노랫말이 되고, 이야기가 되어 우리에게 닿을 것입니다.






전독시에 언급된(혹은 그랬다고 제가 생각하는) 발터 벤야민의 ‘성좌’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표제는 아직 결정을 못했습니다. 이걸 해보자고 결심하고 적어놓은 표제가 2x개라고 트위터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게 농담이 아닌 데다가 점점 늘어나고 있으므로 무엇부터 해야 할지 좀 난감합니다.;; 아마도 ‘희생양 제의’ 혹은 롤랑 바르트의 다른 이야기들 중 무언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Reference

전지적 독자 시점 / 싱숑 / 문피아

Cosmos: A Spacetime Odyssey / Seth MacFarlane, Ann Druyan, Brannon Braga, Mitchell Cannold / 20th Television

발터 벤야민 1892~1940 / 한나 아렌트 / 이성민 譯 / 필로소픽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발터 벤야민 / 반성완 편역 / 민음사

독일 비애극의 원천 / 발터 벤야민 / 최성만 김유동 譯 / 한길사

러셀 서양철학사 / 버트런드 러셀 / 서상복 譯 / 을유문화사

덕후 짤방 from google 출처 알지만 너무 광기어린 덕후로 보일까봐 생략….

AM이라고 불러주십사. 한참 늦게 빠진 중혁독자때문에 아드레날린 과다분비중. 교감신경이 미쳐 있음. 모르겠다 당분간 이렇게 살아보자. twitter / @Rathesia

AM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