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W.rain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이제 안다. 지민은 바라는 거 없는 채로 살다가 문득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적이 있다. 어쩌다 회사에서 외근을 나오면서 바다가 훤히 보이는 호텔에 묵었었는데 그 이후부터는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원하기만 해서 그랬다는 걸 알았다. 원하기만 하고 그것을 마침내 이루었을 땐 이루었다는 성취감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래서 잠깐 고민을 했었다. 내가 만약 정국을 원하기만 하는 거라면 이루었다는 무언가를 성취해야 하는데 사람에게 느끼는 성취감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느라 하루를 다 써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을 바라보는 동안에 내 감정만 더 쌓는 시간을 주는 셈이 된다. 




“좋아해요”

“........”



정국은 갑작스러운 지민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지민을 쳐다봤다. 오히려 눈을 피하지 않는 정국에 지민은 이 말을 왜 꺼냈는지에 대해 잊을 뻔했다. 지민의 고백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편적인 의미와는 다르다. 지민은 정국을 잡기 위함이 아닌, 정국을 보내기 위해 꺼낸 말이다. 하지만 지민은 거짓으로 된 말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의도는 대답을 원하고 말한 고백은 절대 아니다. 무서워서라도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는, 실제로 그런 반응을 보인다면 상처를 받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지민이 어느 때보다 슬퍼 보였다. 고백하는 사람의 표정이라고 하면 모두가 아니라고 대답할 정도의 우울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때요, 여기서 빨리 도망가고 싶죠”

“.......”



지민의 말에 정국은 아차 싶었다. 지민의 말에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지민의 말이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본능적으로 아쉬운 감정이 든 자신 때문에. 자신이 좀처럼 쉽게 이곳에서 발길을 떼지 못한다는 걸 이미 아는 것 같았다.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은 게 왠지 서운한 기분이 드는 내 감정에 이질감을 느끼는 중이다. 지민은 사실 정국의 반응을 최악까지도 생각했었다. 바로 이 자리를 박차고 간다거나 적어도 미쳤냐는 소리는 들을 줄 알았는데 정국은 너무도 태연하게 지민을 쳐다보며 생각이 많아 보였다. 




“굳이 그렇게 말 안 해도 돼요”

“거짓말은 아닌데….”

“........”

“안 믿어도 상관은 없어요”



정국은 지민의 진지한 표정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잘 되던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싫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불편한 것 또한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떠한 감정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처음으로 저보다 더 죽음을 원하는 사람의 삶을 응원하며 며칠을 살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두고 가는 것에 걱정을 동반하는 다른 무언가의 감정은 밀어냈다. 결국, 이곳을 떠날 테지만 그 이름 모를 감정은 이곳에 두고 가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감정을 정국이 밀어내는 동안 지민은 정국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 둘의 존재는 결국 같은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둘은 이미 그것을 알면서도 몰라야 한다. 그게 맞는 거고 그래야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이미 정국은 상처를 안은 채 이곳에 왔고 확실하게 말하자면 또다시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정국에게는 이 사랑의 무게보다 자신이 받을 상처의 무게가 더 무거웠다. 그렇게 정국은 자신을 밀어내는 지민에게 어떠한 저항 없이 그저 동이 틀 때까지, 가능한 한 아주 천천히 밀려날 생각이다. 그 사이 이 일렁이는 감정까지 파도에 휩쓸려 소멸하기를 바란다.


















우리 셋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신속하게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아침 장사를 준비 중이신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렸다. 우리 때문에 집에서 좀 더 일찍 나와 식당에 앉아 밥을 먹고 있던 범준은 보이지 않는 지민이 있는 방을 괜히 목을 빼고 확인하는 듯했다. 작은 목소리로 박지민은, 이라고 묻는 범준에게 정국은 멋쩍게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 그러고 말없이 고요한 밤에 파도 소리만 들린 채로 하염없이 영원할 것 같은 바다를 쳐다만 보다가 그렇게 한 마디 대화 없이 잠자리에 들었었는데 정국은 알고 있다. 지민이 잠에 들지 못했다는 것을. 잠깐 방을 나서면서 뒤를 돌아 확인한 지민은 쥐 죽은 듯이 곤히 잠에 들어 있었고 차마 깨우지 못하고 그대로 나왔다. 범준은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굳이 깨울 생각은 없는지 더 말을 붙이진 않았다.



결국, 지민의 배웅 없이 차에 올라탄 정국은 식당을 벗어나 지민과 함께했던 장소들을 몇 초 안에 눈에 담았다. 그러다 유치원을 기준으로 시원하게 뻗어있는 담벼락에 빼곡히 채워져 있는 그림들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그 잠깐 안에서 정국의 눈은 있을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을 벌어본다. 




“그새 정이 많이 들었나 보다 너”

“........”

“뭐야 진짜 서운한가 보네”

“나 좀 잘게. 도착하면 깨워줘”



태형은 운전하면서 백미러로 힐긋힐긋 쳐다보던 석진과 눈을 마주치며 정국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전날 밤같이 나갔다가 들어왔을 때 석진과 태형은 깨어있었지만, 그 둘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깰 정도의 정신은 아니어서 그대로 잠에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둘이 무슨 일이 있었나 싶으면서도 싸웠다는 분위기는 전혀 아니라서 차에 타기 전 일부러 둘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딱 봐도 기운 없는 정국의 모습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일단 태형은 지민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고 유난히 지민을 걱정하는 듯한 정국의 모습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이런 표현이 괜찮나 싶으면서도 마치 실연을 당한 사람처럼 보이는 걸 애써 흐린 눈으로 바라보기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인 걸 알기에 그냥 흘려보냈다. 태형은 고민하는가 싶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바쁜지 전화 연결이 안 되자 몇 번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가 결국 장문의 문자를 보내고 눈만 감고 있는 건지 진짜 잠에 든 건지 모를 정국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지민은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눈만 깜빡이며 누워 있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마치 이곳에 처음 온 첫날 같았다. 이상하게 주인 어르신들은 지민을 깨우러 오지도 않았다. 그냥 오늘 확 죽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지민은 다시 눈을 스를 감았다.

감았다 뜬 지 1초밖에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방 안에 내리쬐던 해는 온데간데없이 달빛이 스미고 있었다. 지민은 저리는 몸을 일으켜 일어서는데 누군가 지민의 팔을 잡아 제대로 돌아 세웠다. 지민은 반사적으로 팔을 잡아 온 손을 쳐냈고 당황한 상태로 확인한 사람은 다름 아닌 범준이었다. 아니 얘는 갑자기 안 잡던 팔을 잡고 난리야.




“뭐야”

“야 넌 무슨 하루 종일,, 죽은 줄 알았다.”

“넌 은근 그 말 되게 달고 산다”

“.......”



지민의 말에 평소 같았으면 뭐라 대꾸라도 할 애가 말없이 지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지민은 그런 범준의 모습에 다가가 팔을 가볍게 치며 왜 그러냐고 하려던 차에 방 안 화장실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나온 사람을 확인한 지민의 동공이 커졌다. 




“.... 아버지”




















3개월이 지났다. 정국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아직 전시를 위해 준비를 하는 단계까지는 아니었다. 민지의 가족들은 어떻게 사실을 알았는지 정국이 돌아온 집으로 돌아온 당일 말없이 정국의 어깨를 털어주며 민지를 용서해달라는 말을 전했다. 정국은 오히려 민지의 바람을 핑계 삼아 나쁜 생각을 먹은 자신이 용서를 구해야 했었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 정국이 집으로 돌아온 것 자체가 그에 대한 벌이 아니었나 싶다. 처음에 그렇게 지민의 배웅도 없이 서울로 올라온 날 정국을 혼란스럽게 만든 건 민지의 가족의 사과도, 생각보다 차분해 보였던 부모님도 아니었다. 지민의 부재였고, 지민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처음에는 애써 그런 감정을 눌러보기도 외면하기도 했지만, 외면은커녕 꿈속에서까지 나오는 지민에 의해 정국은 저의 무의식에서는 살아 있으면서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지민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니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싶은 거지. 다시 그때를 생각해 봐도 사랑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리고 이제야 이유를 깨닫기에는 이 성찰은 쓸모없다는 사실 또한 정국을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없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치 민지를 잃은 그날의 악몽을 반복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차라리 지민이 환상이었으면 하다가도 깜빡이도 없이 태형의 입에서 내뱉어지는 지민의 이름 때문에 환상만으로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오늘도 얘 작업실에서 안 나와?”

“응 오늘도. 역시나”



 태형은 석진과 외근하는 김에 같이 저녁이나 먹자며 꼬셔서 고기를 배부르게 먹고 나서 다시 들어가 봐야 한다는 석진을 데리고 끝까지 저녁을 거절한 정국의 작업실로 왔다. 그런데 어쩜 한 번을 밖으로 안 나오는지 너무 큰 작업실에서는 그림이 잘 안 그려진다고 작은 컨테이너에 안락하게 작업실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정국이라서 화장실을 가려면 무조건 나와야 하는 걸 아는데 아무리 잘 안 간다고 해도 정국은 너무 안 나왔다. 사실 그러면 그냥 자유롭게 정국의 작업실을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어째서인지 그러지 못하게 하는 정국 때문에 맘대로 들어가 볼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둘에게는 작업 중인 그림을 굉장히 잘 보여주곤 했는데 이제는 허락 없이는 볼 수도 없었다. 아, 아니지 허락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처음에는 슬럼프가 와서 그런가 했지만, 전시회 측 얘기를 들어보면 전과 별로 차이 나지 않은 실력이며 오히려 더 실력이 좋아졌다는 얘기만 할 뿐이었다. 



“오늘도 헛걸음 같은데 그냥 가자”

“얘 그림 안 보여주는 이유 내가 짐작해 봤거든”

“네가 짐작해서 뭐 할 건데”

“아 들어 봐봐”




태형은 며칠 전 정국이 안 보여준다는 거에 익숙해질 때쯤 알고 있었지만, 습관이란 게 무서웠다. 정국이 화장실 간 사이 살짝 가려져 있는 그림을 정말 살짝 들춰봤었는데 글쎄 정국이 잘 그리지 않던 인물화였다. 이목구비가 완성된 그림이 아니어서 누군지는 몰랐지만, 태형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민지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지는 몰라도 결혼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서로 사랑했었다는 걸 지켜본 태형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 그림의 주인공이 민지인 게 가장 말이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거든. 보여주지 않는 이유도 그렇고 모든 게 딱 떨어지는 이유라고 생각이 됐으니까. 밉지만 잊히지 않는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정국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태형의 말을 듣던 석진은 확신에 찬 태형과 다르게 생각이 많아 보이는 눈치였다.

석진은 태형의 말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국이 전에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에 대해 꽤 진지하게 한번 말해줬던 기억을 떠올리면 절대 그 그림의 주인공은 민지가 될 수 없었다.




‘형 나는 지나간 애정은 선 하나로도 남기고 싶지 않아’




석진이 적어도 정국의 마음 안에 들어가서 확인한 건 아니지만 정국에게는 민지는 이미 지나간 애정이라는 걸 안다. 그리움 또한 애정이라 할 수 있지만,



 ‘그리운 건 머물러있는 애정이라고 생각해. 한 번 미워지면 그리워지는 것조차 사치더라고’




라고 했던 정국의 말을 석진은 잊지 않았으니 민지는 더 이상 정국의 마음에 머물러있는 사람이 아니다.




















하루 종일 지루한 타자 소리 규칙적인 손가락 운동이 지켜갈 때쯤 지민은 칼같이 퇴근 시간에 맞춰 의자의 엉덩이를 뗐다. 6시 정각에 맞춰 일어나는 지민을 본 직원들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표정으로 유유히 나가는 지민의 모습을 보다가 문이 닫히고 발소리마저 사라지자 제대로 숨을 쉬었다. 직원들에게 지민은 3개월 전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직원이었다. 어떠한 설명도 없이 심지어 인계도 없이 원래 이곳에서 일을 했던 사람처럼 어떠한 피드백도 필요 없을 정도로 깔끔한 일처리는 물론 야근을 할 일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가장의 의문인 것은 그런 지민에 팀장님의 무관심이었다. 사실 직원들 맘 편하자고 무관심이라고 표현을 하는 거지만 팀장님은 지민에게 어떠한 요구 사항과 하루해야 할 일을 자신이 맘대로 정해주지 않고 지민이 해오는 일을 보고 할 수 있는 일을 시키는 듯했다. 처음에는 직원들의 불만의 소리가 있었지만 그 불만은 지민의 일처리 능력에 의해 금방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상한 점은 아직도 그 누구도 지민과 일상적인 대화를 해본 사람이 없다는 거다.




“지민 씨는 낯만 안 가리면 엄청 인기 많았을 텐데”

“낯을 가리는 게 아니라. 그냥 말을 안 하는 것 같던데”

“팀장님은 그래도 몇 번 대화해보시지 않으셨어요?”

“글쎄요. 저도 여러분들이랑 비슷해서”




팀장님은 직원들의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지민에 대해 어떠한 말도 삼가라는 부탁이 지민의 개인에게서 온 당부만이 아닌, 외부의 압력도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팀장님 외근 나가신 건 잘 해결되신 거죠?”

“계열사 직원 한 분 덕분에 잘 해결됐습니다. 자 이제 우리도 퇴근합시다.”



팀장은 흩어지는 직원들 사이로 회사 앞에 딱 봐도 용건이 있는 사람처럼 우뚝 서 있는 지민을 발견하고 지민의 등을 톡톡 건드렸고. 지민은 팀장의 손길의 뒤를 돌아 확인했다. 지민은 여전히 둘만 있는 이 시간을 불편해하는 팀장 아니, 다름 아닌 석진의 모습에 자신도 이럴 땐 덩달아 불편하고 한 편으로는 미안했다. 지민은 3개월 전 결국 자신을 찾으러 온 아버지에 의해 정국과 12시간 정도 차이로 서울을 올라오게 됐고 그대로 자신이 일하던 회사로 또 꼼짝없이 출근할 거라고 생각했던 예상과 다르게 자리를 정리하고 같은 계열의 회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던 거다. 대신 또 잠수를 탈것을 대비해 팀장의 자리로 발령을 내리지 않고 팀원으로 들어가도록 손을 썼다. 아버지는 지민의 잠수로 얻은 거 없이 손실만을 생각하며 지민을 꾸짖는 데에만 집중하셨다. 지민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석진은 지민의 등장에 당황스러움도 잠시 그곳에서 보던 지민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서 마치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라 오히려 기시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민 씨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여쭤봐도 됩니까”

“음 제벌 2세 정도?”

“.......”




구라 같으면서도 현재 전개되는 상황으로 봐서는 제일 그럴듯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런 속내와는 다르게 석진의 표정은 못 미더워 보였는지 지민은 굳이 안 믿어도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곧이어 딱 봐도 비싼 외제차가 지민 앞에 섰고 지민은 익숙하게 차 문을 여는 기사에게 짧은 고개 인사를 했다. 예의가 몸에 밴 사람이라 그 흔한 편견에 쌓여있는 제벌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보이는 건 영락없는 제벌이었다. 그렇게 지민이 석진에게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고 석진은 차에 타려는 지민을 잠시 다시 불렀다.



 “왜 안 물어봐요”

“.......”

"정국이 말이에요"

“왜 물어봐야 되죠?"

“........”

“그러면 그쪽은 왜 저랑 일하는 거 말 안 해요?”

".........."




사실 방금 이 질문은 그냥 찔러본 거다. 이미 정국에게 얘기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정국이라면 내 얘기를 들었다면 왜 그때 배웅조차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묻고 싶어서라도 연락을 취했을 거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석진은 지민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3개월 동안 일하면서 자신도 지민이 왜 이곳에 있고 어떤 경우인지조차 묻지 못했는데 정국에게 쉽게 지민의 얘기를 꺼내는 건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석진은 지민의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해도 상관은 없는데,,”

“마냥 안 궁금한 건 아닌가 봐요”

“.........”

“정국이가 엄청 걱정했었는데... 걱정이 필요 없어 보이시네요”




석진은 지민의 옷매무새를 천천히 훑으며 말했고 지민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봐봐, 이런 거. 지민은 항상 이런 게 싫었다. 겉모습만 보면서 사람을 판단하는 상황이 말이다. 석진은 고의적이 아니라고 해도 얼마든지 편견에 쌓인 말을 한 건 사실이다. 꽤 많이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극복이 된 건 아니었나 보다. 무뎌지기만 했을 뿐. 지민은 석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차에 올라탔고 계속 서 있는 석진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이내 차를 출발 시켰다.




















현재까지 우리 회사가 건재한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을 거다. 베푸는 거 하나는 잊지 않고 하는 성격의 아버지 때문에 지우고 갈 수 있었던 인연이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연결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도 범준에게서 온 연락을 30분째 무시하고 있었다. 서울 구경을 시켜달라는 말은 3개월 전부터 해왔던 범준은 아예 시간까지 뺐다며 쐐기를 박는 중이다. 이러나저러나 지민의 대답은 결국 알겠다는 대답일 게 뻔했지만, 조금만 더 아닌 상황을 누리고 싶다가도 이내 휴대폰을 들어 알았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지민이다. 


밤 8시 버스라고 했던 범준은 코앞에서 환승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이미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민에게 30분 정도 늦을 것 같다는 문자를 보냈다. 지민은 고개를 저으며 차 안에서 기다리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니다 차까지 갔다가 오는 게 나중에 더 귀찮을 것 같다. 그냥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더 편할 것 같다. 30분 정도면 버스 네다섯 대 정도 보내는 시간이니까 그냥 사람 구경이나 해야지,



했는데 뭐야 지금 이 눈이 떠지는 느낌은 자다 일어난 느낌이 분명하다. 지민은 버스 두 대쯤 보낼 때쯤 눈이 슬슬 감기더니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잠에 들어버렸다. 급하게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30분 좀 안 되게 잠에 들었었나 보다 범준에게 아직 도착한다는 연락이 없는 걸 보면



“깼어요?”

“.......”




뭐지 환청인가. 지민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떡하니 서서 자신을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는 거다. 전정국이다. 환청에 이어 환영인가 싶을 정도로 현실감이 제로다. 눈만 깜빡인 채 정국을 쳐다보는데 정국은 그런 지민에게 억울한 감정이 들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눈앞에 마법처럼 나타나 있는 지민에 그냥 좋았다. 왜 이곳에서 졸고 있는지 왜 옷차림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짐작했던 그대로 명품으로 둘러싸여 있는 건지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정국을 올려다보기만 하는 것만 빼면 말이다.

일단 지민은 그대로 벌떡 일어나 정국을 보지 않고 차 있는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갑작스러운 지민의 행동에 정국은 가만히 있다가 곧바로 지민을 따라가는데 지민은 차 문을 열자마자 시동을 걸었다. 정국은 당황스럽다는 듯이 지민을 쳐다봤지만, 지민은 일단 상관하지 않고 최대한 정국과 눈을 맞추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그때 울리는 진동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버스 한 대가 들어서는 모습이었다. 아 이 새끼는 여러모로 도움이 안 되는 놈이다. 지민은 못 이기는 척 전화를 받았고 잔뜩 신이 난 목소리의 범준이 곧 내리니 정류장 앞에 그대로 서 있으라는 말을 했다. 그에 지민이 대답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자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정국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 알았어 빨리 내리기나 해”



 지민은 일단 시동을 다시 끈 뒤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차에서 내리면서 앞을 가로막는 정국에 여기서도 피하면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고 정국을 봤다. 정국은 한참 쳐다보다가 휴대폰을 건넸다. 지민은 정국의 그 행동이 어떤 목적으로 건넸는지 알고 있다. 그래 그냥 번호를 알려줄까 하는 생각과 더 욕심 내봤자 나만 또 힘들 텐데 뭐 하러 그러냐는 생각이 머릿속을 공존하고 있었다. 



“번호 줘요. 우리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




지민은 머리를 굴렸다. 핸드폰을 대놓고 들고 있는 상태라 없다고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밑밥이라도 깔아놔야 뒤에 걸리는 거 없이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어떤 말을 해야 나중에라도 정국과의 인연을 정리할 때 수월할지 생각해야 했다. 이제는 나만 감정 손해를 보고 살 수는 없다.




“못 주는데,,”

“.... 네?”

“저 그쪽 좋아해서 못 준다고요”

“.......”



그래 누가 들으면 개소리인가 싶겠지 좋아하면 원래 번호를 더 따고 싶은 게 정상일 테니까 근데 나는 지금 그런 게 아니라고. 정국도 당연히 어이가 없었다. 말을 구성하는 단어들은 전혀 조합되어 본 적 없는 것처럼 너무 어색한 문장들이었으니까 마치 정국이 지민의 말을 이루는 문장 중 한 단어가 된 것 마냥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정국의 포커스는 지민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이 아닌, 번호를 거절당한 이 상황인 거다. 중요한 건 정국도 왜 이렇게까지 감정이 상하는 건지 모른다는 거다. 그냥 그동안 지민을 보고 싶어 했던 것부터 왜 그런지에 대한 의문에 정의 내린 것 하나 없었다. 하지만 지민의 번호를 무조건 알아내고 가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어? 뭐야 둘이 서울에서 이미 만난 거야?”

“넌 좀 조용히 하고 차에 타”




언제 발견하고 온 건지 범준의 말에 지민은 한 번 얘기 시작하면 끝낼 것 같지 않은 범준을 억지로 조수석에 태웠다. 범준은 언짢아하며 눈짓으로만 정국에게 못한 인사를 하고 지민에 의해 차에 먼저 타게 됐다. 그 모습을 보던 정국은 곧바로 차에 타려는 지민의 팔을 잡아 세웠다. 지민은 집힌 팔에 그대로 돌아 다시 정국을 마주했고 동공이 흔들리는 정국의 얼굴에 하마터면 번호를 냅다 적어줄 뻔했다. 내가 어떻게 참고 있는 건데 이렇게 쉽게 만나질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3개월 전에 그렇게 무모하게 고백은 하지 않았을 거다. 그땐 정국을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 같다. 정국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이긴 하다. 그때 지민의 말이 어떤 의미로 한 건지 알고 있는 것과 상관없이 지금 눈앞에 있는 지민을 보니 그냥 보낼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번호는 줄 수 있잖아요”

“아........”



정국은 어쩔 줄 모르는 지민의 모습에 지민의 팔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천천히 풀었다. 지민에게 이해가 안 되고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이렇게 하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 같다. 이렇게 그냥 스칠 수 있었던 곳에서도 만났는데 다음이라고 없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요. 대신,”




지민은 정국의 뜸 들이는 말에 말없이 정국을 쳐다봤다.




“다음에 보면 거절하지 마요”

“.........”

“대답해 줘요”

“알았어 그럴게”




지민은 자신의 대답을 듣고는 씩 웃으며 미련 없이 뒤돌아가는 정국의 뒷모습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우린 어차피 다시 못 볼 거다. 내가 생각 없이 혼란스러운 네 마음에 금방 가라앉을 돛단배를 띄웠다. 너의 그 감정은 아마 잠시일 뿐인 호기심이고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민들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했으니 내가 불어줄 때 날아가면 된다.

 



 































비온 뒤 맑음은 반드시 있어. 그 끝엔 무지개가 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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