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세포는 기존에 존재하는 세포에서 태어나죠.

그 말은 즉, 모든 세포는 하나의 세포에서 생겨난거죠."


라는 주인공의 말로 시작하는 이 영화에서 연결은 제법 섬뜩하게 다루어진다. 우리는 연결이라는 개념 뒤에 ‘타인’, ‘타자’의 개념이 이어지는 것에 익숙해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인간’ 아닌 다른 생명체, 생명체 아닌 환경, 지구를 넘은 미지의 우주와의 연결까지도 이어진다. 이때의 연결은 지구, 이 우주에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의미로도 느껴져 어떤 든든함이나 따뜻함마저도 느껴진다. 이처럼 우리에게 연결이라는 개념은 흔히 ‘다른’ 존재와 함께 생각하는 것이 익숙하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과의 연결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게 될까? 리나는 쉬머[1]에서 돌아와 쉬머가 어땠는지를 묻는 연구원들에게, 처음에는 변형이 심하지 않았다가, 등대에 가까워질수록 심해졌다고 말한다. 변형은 복제, 메아리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복제와 메아리로 변형되는 형체 또는 형태들은 등대에 가까워지면서 자기 자신을 닮아가고, 등대에 이르러서는 자기 자신이 되어 나타난다. 주인공과 인물들은 영화에서 ‘변형된’ 형태들을 마주한다. 영화에서 형태가 변형되는 과정을 게임 속 캐릭터가 겪어나가는 과정에 비유한다면. 이 영화의 최종보스는 자기 자신이다. 영화에 대한 평들 중 “마지막에 등장하는 자기 자신이 별로 무섭지 않았다. 차라리 다른 부분들이 더 무섭다”는 의견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최종보스는 단순히 가장 공포심을 유발하거나, 가장 강한 존재라는 의미만을 갖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게임 레벨의 난이도는 주관적인 것처럼 공포심이나 강함 역시 주관적인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종보스는 사람에 따라 어렵지 않은 존재, 무섭지 않은 존재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최종보스가 게임에서 쉬웠다고 해서, 그 최종보스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최종보스는 ‘최종’의 존재로, 최종보스를 깨고 나면 게임은 끝난다. 모든 것이 낯설고 기묘한 쉬머라는 세계 안에서, 그 모든 것 중 최종보스는 자신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상식의 수준으로 여겨졌던 모든 것들을 변형하면서 끊임없는 질문들도 함께 던진다. 영화가 시작할 때, 쉬머에서 돌아온 리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What do you know?”라는 물음을 받는다. 이 질문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물질적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물질적 세계를 왜곡하는 역할을 한다. 쉬머라는 세계에서 상식은 비틀리고 왜곡된다. 쉬머에 가기 전에는 나무에 대해 안다, 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쉬머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나무에 대해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쉬머에서 변형된 그것은 나무일까? 프리즘을 통해 빛은 굴절되고, 하얗다고 생각했던 빛은 무지개색이 되지만, 그럼에도 그것의 본질은 빛인 것처럼, 영화에서도 우리의 상식적 세계는 비틀리고 소멸되지만 그 와중도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영원히 사라졌다고 생각한 케인이 돌아왔을 때 리나는 상식적 세계에서의 물음을 던진다. 어디에 갔는지, 어떻게 돌아온 것인지와 같은 익숙한 관점에서의 질문들을 던졌을 때 케인은 모른다고만 대답하다가,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데?”라고 되묻는다. ‘어디’라는 공간과 ‘어떻게’라는 삶의 양상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공간에는 다양한 사회적 의미들이 얽혀있고, 이런 공간 자체가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을 구성, 재생산하는 데에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 생명체는 물질적인 실체를 지니고 공간을 배경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공간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쉬머에 가지 않았던 리나에게 이 질문은 지극히 당연하며, 변하지 않는 상식적인 것이다. 쉬머는 상식적인 시공간의 영향력까지도 소멸한다. 쉬머에서 돌아와 이 세계의 소멸을 겪은 이후, 리나는 돌아온 케인에게 “케인이 아니군요”라고 묻고, 케인 역시 “아닌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다. 돌아온 케인의 “당신이 리나인가요?”라는 질문에 리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둘은 말없이 포옹하고 둘의 얼굴을 비슷하게 비추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리나의 질문이 처음에는 케인 자체보다는 이 세계에 대한 질문이었다면, 돌아온 후에는 리나와 케인 서로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쉬머에서 돌아온 케인은 리나의 기억 속 케인이 아니다. 리나는 이전에 케인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케인이라는 존재가 쉬머에서 돌아오면서 리나에게 ‘낯설게’ 다가온다. 케인의 존재 자체도 리나와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우리가 ‘안다’라고 생각한 타인과 그와의 관계에 대해서 정말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 쉬머로 들어간 케인은 자멸했지만 쉬머에 들어간 케인이 등대에서 마주친 자기 자신인 ‘케인’은 돌아왔다. 우리는 기념비적인 사건이 있거나 새로운 다짐을 할 때 “이전의 나는 죽었어, 오늘부터 나는 새로 태어난거야!”라는 말을 한다. 여상하게 쓰던 이 문장은 영화 속에서 문장 표현 그대로 재현된다. 쉬머의 등대에서 리나와 케인이 백린탄으로 ‘자기 자신’을 죽이고 그 이후에 쉬머 밖으로 ‘돌아’온다. 영화의 결말에서 돌아온 것이 리나인지, 리나가 아닌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들 한다. 쉬머에서 변형되어 나타난 리나는 정말 리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이 때 변형된 리나는 리나가 아니라고 생각해보자. 그럼 “이전의 나는 죽었어, 오늘부터 나는 새로 태어난거야!”라는 말에서 이전의 나와 변형된, 새로 태어난 오늘의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내가 아니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변형된, 어제와 다른 자신 역시 나로, 변형되기 전의 자신도 나로 받아들인다. 영화는 변형된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최종보스로는 자신을 등장시켜 그것을 자신이 ‘죽인’ 것처럼 하여 돌아오는 결말의 형태를 지닌다. 이는 세계에 대한 인식을 거쳐 마침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까지도 비틀어 보게 한다. 자기 자신이 당연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인식을 ‘어떻게’ 같은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며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연결, 결국에는 자기 자신과의 연결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한다.

여기, 리나의 기억 속 케인은 자멸하고 쉬머에서 돌아온 케인이 있다. ‘리나와 케인’이라는 두 사람의 관계라고 생각하는 이 관계는 쉬머를 거쳐 돌아오면서 [자멸한 케인과 쉬머에 가지 않은 리나, 돌아온 케인과 쉬머에 가지 않은 리나, 자멸한 케인과 돌아온 케인, 자멸한 케인과 쉬머에 간 리나, 돌아온 케인과 쉬나에 간 리나]······ 둘, 넷, 여덟, 열여섯의 관계로 확장한다. 관계의 확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제거를 통해서 나타난다. 이 영화의 제목인 〈서던 리치 : 소멸의 땅〉에서처럼 쉬머에서는 우리의 공간적 상식이 소멸한다. 소멸의 땅, 이라는 공간의 제거와 자멸하는 케인과 리나. 우리 삶의 일부는 작게는 술, 담배 등으로부터 크게는 쉬머에 들어가는 것으로 파괴된다. 우리는 변화에 본질적으로 파괴가 내재된다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변형은 (필연적으로) 이전의 모습이 파괴되어 사라진다는 것을 포함한다. 쉬머에서 돌아온 이후 연구원이 우리의 환경을 파괴하려고 왔다는 말에 리나는 변화라고 표현한다. 변화와 파괴는 함께 나타난다. A가 A+가 되어 본질적인 변화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가 붙는 과정에서 A의 일부는 파괴된다. 삶의 일부를 파괴하는 방식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나’를 구성하고, 이전과 달라진 나는 또 달라진 다른 사람들과 함께한다. 이로써 관계는 다양한 양상으로 확장된다. 우리 삶은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형태로든 파괴되고, 자멸하면서 이어진다. 이 영화에서는 이를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충동으로, 세포에 프로그래밍 되어 결정된 것이라고 인물의 입을 통해 말한다. 앞서 인간이 과거와 현재의 자기 자신에 대해 탐색하면서 삶이 이어지고, 변형되는 것도 자멸의 본능이지만 나아가 다른 사람과 연결되고자 하는 본능 역시 자멸의 본능으로 나타난다. 사회화는 사회에 부적합한 자신의 모습을 파괴하고, 사회에 적합한 자신의 모습으로 변형해가는 과정인 것처럼,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세계와 맞춰 살아가기 위해 크게 혹은 작게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이 영화에서는 케인은 소멸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새로운’ 케인이 돌아와 리나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된 것으로 이를 드러낸다.

결국 이 영화는 이어짐, 확장성을 상징하는 연결의 개념을 소멸로부터 도출해낸다. 우리는 연결의 개념에 당연하게 ‘타자’를 상정한다. 이 영화에서는 연결과 관계 내에서 이런 타자의 형태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타자라는 개념 자체도 왜곡한다. ‘상식적인’ 상황을 왜곡하고, 결국 타자로 상정하지 않을 자신조차도 타자가 되며 자신의 개념도 흐려진다. 우리는, 흔히 타자와의 구분을 통해 자기개념을 설정한다. ‘네가 아닌’ 나, ‘동양 아닌’ 서양, ‘남자 아닌’ 여자, ‘장애인 아닌’ 비장애인 ·······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기 개념은 타자가 없다면 존재하기 어렵다. 타자화를 경계하고, 연결과 연대가 유의미한 가치가 되는 이 시대에 이 영화는 자기 자신조차 타자화하는 방식을 통해 연결과 그 형태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늘 나 아닌 ‘남’으로 존재했던 여성이 이 영화에서는 ‘나’로서 존재한다. 리나를 비롯한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은 과학자, 의사와 같은 역할이다. 생물학적 남성의 삶이 기본형인 사회에서 영화는 생물학적 여성의 삶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사회에서 배제되어 타자화의 대상인 ‘남’으로 존재했던 여성이 타자화 없이 세계, 자기 자신과의 연결됨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타자화와 연결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영화는 삶의 형태의 기본이 되는 연결과 연결의 양상, 타자와 타자 개념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하면서 타자화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결국 모든 사람은 ‘하나의 세포’에서 출발하여 파괴와 소멸을 거쳐 연결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1] 쉬머 : 이 영화에서 갑자기 나타나 모든 것을 왜곡하는 미지의 공간으로, 영화의 주된 공간적 배경이다. 국가에서는 이곳을 연구하기 위한 인력을 보내는데, 이전에는 리나의 남편인 케인이 포함된 남성 집단을 보내고, 이후에는 리나가 포함된 여성 집단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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