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있나요, 라는 대사가 나오지?"

 "그렇군요."

 "이 대사에 담긴 의미는 사랑하냐는 뜻이야."

 "아, 진짜요?"

 "질문이긴 하지만 거의 사랑하는구나, 하고 확정 짓는 말이지."

 "아, 진..."

 "딴청 피우는 거 다 보인다."

 "그야 메이크업이랑 동시에 하면 정신없으니까요, 어쩔 수 없죠."

 "메이크업도 알려주는 것도 나 혼자 하는데 무슨. 눈이나 제대로 감아."

 "네~"


 카시마는 그제야 눈을 감았다. 핀잔을 주긴 했지만, 평소라면 각각 따로 했을 일이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이번 연극은 기간이 너무 촉박했다. 적당히 준비하면 될 일이기도 했지만 호리는 그래도 될 사람이 아니었다. 문화제 때 성대하게 올릴 극이든 간단하게 올릴 극이든 모두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싶었다. 그게 설령 카시마가 왕자님 역할을 맡지 않은 극이라도.

 명시하건대 카시마가 아가씨를 사랑하게 된 집사나 운명적인 사랑을 발견한 귀족 공자나 어느 날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하늘의 계시를 받은 청년 따위를 맡은 것은 아니었다. 이 연극에는 분명히 주인공인 왕자님 역할이 존재하고 있지만 카시마는 그 역할을 맡지 않았다. 못했다. 




 "나도 왕자님 역할... 하면 안 될까?"


 미리 맞추기라도 한 듯 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몰렸다. 딱히 누군가, 그 누군가가 강요한 것도 아니지만 미미하게 존재하던 불문율을 깨자는 말이었다.


 "카시마가 왕자님 역할에 정말 어울리긴 하지만... 곧 입시 준비도 해야 하고... 한 번쯤은 왕자님 역할도 해보고 싶어서."


 '정말 어울린다'에서 한 번, '한 번쯤은 왕자님 역할도 해보고 싶다'에서 또 한 번, 부원들은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왕자님 역할만 이리된 것뿐이지 로만고교 연극부의 배역은 잘하는 사람을 뽑기보단 그때그때 지원자를 받는 편이었다. 곧 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해야 할 불쌍한 부원의 제안을 못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다.


 "... 그런데, 부장은 어떤 것 같아요?"

 "괜찮아요?"

 "쟤 평소에 엄청 성실하잖아. 잘할 것 같은데."


 부원들이 시선이 또 한곳으로 몰렸다. 연습할 때 이렇게 척척 맞으면 좋으련만. 호리는 어이없어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화이트보드의 '왕자님' 옆에 어색한 이름이 적혔다. 




 호리는 화이트보드는 지긋이 쳐다보았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2년 동안 거의 고정이었던 이름이 바뀌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단연 호리만 그런 건 아니었다. 부원들이 화이트보드를 보다 흠칫하는 걸 몇 번이나 보았다. 심지어 왕자님 역의 본인마저도.


 "선배도 지금 딴청 피우시는 것 같은데요?"

 "미안. 잠깐 딴생각하느라."

 "간지러우니까 빨리 끝내주세요."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사실, 문제는 왕자님 역할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역할은 시키면 됐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카시마가 무슨 역할을 맡을지였다.

 뛰어난 연기력에 키가 너무 작아 눈에 띄는 호리처럼 카시마는 미모가 뛰어나 눈에 띄었다. 또 항상 주인공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학생들도 카시마를 더 주시할 것인데다 인기인이기까지... 카시마는 대도구 일도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고 했으나 이 얼굴을 무대에 세우지 않은 건 막대한 손해였다. 이 말을 들은 노자키는 짜게 식은 눈을 하였지만 호리는 눈치채지 못했다. 




 "어때요?"


 카시마는 긴 치맛자락을 움켜 집고는 빙글빙글 돌았다. 치마가 한 바퀴, 두 바퀴 돌 때마다 하늘거리는 장미 장식은 정말이지 대단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시간도 없었는데 저런 건 또 어디서 구한 건지. 부원들은 호리를 보고 카시마에 대해선 너무 유난이라고 놀리곤 했지만, 사실 본인들도 만만치 않았다. 카시마의 의상 피팅은 작은 패션쇼나 다름없었다. 그러고 보니 왕자님 의상을 입을 때는 척척 포즈를 취하더니만 치마를 입자 빙빙 돌기만 했다. 아무래도 드레스가 어색한 모양이었다.

 부원들은 밤낮없이 고민했다. 카시마 본인보다 더 고민했다. 카시마는 옆에서 대도구 일을 해보고 싶었다고 재차 주장했지만 그게 대도구 담당인 호리에게 붙어 배우로 회유시키려는 속셈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더 고민이었다. 역을 정해주지 않으면 카시마는 계속 대도구를 맡겠다고 주장할 터이다. 대도구를 맡은 카시마가 일으킬 사고는 정말이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치요에게 배경 대타를 맡겼던 그날 이후로 호리는 카시마에게 대타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일절 하지 않음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주님 역을 시키자!"


 아무도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마이클 잭슨과 중화냉면처럼, 신데렐라에 나오는 누더기 원피스처럼, 서로 동떨어져 있는 조각을 기워놓은 듯 안 어울린다기보단 생각지도 못했다, 에 가까운 조합이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주인공 역할을 못 하게 되었다면 다른 주인공 역을 시키면 되는 일이었는데. 부원들은 새삼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것을 느꼈다.


 "괜찮은 것 같죠?"


 카시마는 신난 표정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원래 머리색에 가까운 푸른 가발이 한 가닥씩 흘러내렸다. 창가에서 새어 나오는 햇빛을 받아 헝클어진 잔머리마저 귀한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땋아 올린 머리의 가발을 한 카시마는 누가 코디한 거 아니랄까 봐 귀신같이 어울렸다. 카시마는 그날의 분장을 하고 있었다.

 잔뜩 흥이 오른 부원이 분장 놀이를 하던 그때 그 분장을 하자고 제안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보아도 그 분장은 카시마에게 너무 어울렸으니까. 굳이 이 카시마의 팬으로 보이는 부원이 아니더라도 그날의 카시마의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호리로서도 만족스러운 코디였다. 무대에 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어쩐지 다른 마음이 드는 것이 찝찝했다. 노자키와 같이 수영장에서 카시마를 맞닥뜨린 이후 괜찮아진 줄 알았다. 하지만 어쩐지 예전과는 달라진 무언가가 느껴질 듯 말 듯 했다. 갑자기 손을 잡아 오며 ...저주받을 때는 나도 함께할게요... 라고 한다던가, 뜬금없이 자기가 끓인 커피면 인스턴트라도 좋다던가, 하는 일들에 어떤 종류의 동요를 느끼었는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호리는 인상을 찡그리며 대본을 펼쳤다.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공연이 내일인데 잡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그냥 연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카시마에게 말을 걸면서도 어디론가 말을 돌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대본 외웠지?"

 "약간 덜 외웠어요."

 "잘하는 짓이다."

 "주신지도 얼마 안 됐잖아요~"

 "너는 그 얼마 동안 외울 수 있잖아."

 "과대평가에요."

 "너 하기 싫은 일에만 과대평가라고 하지, 아주."

 "그럼 선배가 저를 너무 귀여워해서 과하게 기대한 거라고 쳐요."

 "됐다. 맞춰보기나 하자."


 카시마는 곁눈질로 대본을 훑으며 연기를 시작했다. 덜 외웠다는 것치고는 지문도, 대사도 물 흐르듯 잘 이어졌다. 걱정했던 춤 부분도 꽤 자연스러웠다. 걱정해야 할 건 따로 있었다. 카시마는 자꾸만 실실 웃어댔다. 


 "왜 자꾸 웃어대? 그런 장면 아니라니까."

 "선배랑 연기하는 거 오랜만이잖아요. 리허설 때는 제대로 할게요."

 "내일이 리허설이고 공연이거든. 똑바로 해라."

 "그럼 제가 안 실실댈 만큼 자주 어울려주셨어야죠."

 "되게 당당하네. 네가 땡땡이만 안쳤어도 2배는 어울려 줬을걸."


 카시마는 미소를 머금고 대사를 계속했다. 아무래도 그만 웃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호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오늘은 둘뿐이고 생각 외로 대본도 동선도 준수하니 내일 더 제대로 연습시키면 될 일이지 싶었다. 넓은 부실에서 대사가 울려퍼지니 둘뿐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연습은 점점 대본의 끝을 달려갔다. 감정은 고조되었고 동작은 이야기에 스몄으며 대사는 마음과 동화되었다. 호리의 복잡한 마음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연기가 좋았다. 정확히는 무대가 좋았고, 연극이 좋았다. 연극을 볼 때면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면서도 벅차올랐다. 그런 모순적인 감정도 좋았다.

 카시마는, 카시마를 보았을 때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남자 이상형이든 여자 이상형이든 카시마는 주인공이었고 후배였고... 카시마는 카시마였다. 무대에 선 카시마 자체가, 무대가 아니더라도, 그런 모순적인 감정이...

 무르익은 창가의 빛이 조명처럼 비춰온다. 무대에 있는 배우를 빛나게 만든다. 색 없는 빛을 그대로 머금어 온통 푸른색이다. 카시마의 푸른색이다. 카시마는 대사를 이어갔다.


 "어디를 보고 있나요."


호리는 대본에 없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왕자님?"

성적(@EGlhDa)님 커미션 기반 연성입니다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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