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 전 마지막으로 써 둔 글입니다. 결말까지 작성해 놓았지만 보고싶은 장면을 먼저 구체화시키고 빈틈을 메워가는 제 글쓰기 과정상 중간중간 플롯 문체로 작성되어있을 수 있다는 점 유의부탁드립니다. 끝까지 책임지고 쓰지 못해 죄송하고 감사했습니다.



엄마. 나 휴학했어요. 내일 저녁쯤 내려갈게요.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어렵게 들어간 체대이건만 정국의 적성에는 입학과 휴학, 복학과 다시 또 휴학을 반복할 정도로 맞지 않았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다시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편입이던 자퇴던 할 생각으로 휴학 신청을 했다. 최대한 아무 일도 없어 보이게 간결한 문자 메시지를 남긴 정국은 잔뜩 피곤함에 젖은 얼굴로 기차까지 예매하고 나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너무 평소답게 고막을 때리는 알람에 마지못해 일어났다. 정국은 매우 평소답게 반쯤 잠든 상태로 택시를 잡아 역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매일 보던 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어른인데 아이처럼 어느 하나에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며 시간을 너무 허비했다고 느꼈다. 정국은 우중충한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나는 회색빛 생각들을 안고 금세 기차역에 도착했다. 탑승 단계를 생각없이 하나씩 거치다 보니 어느새 이슬비가 내리는 자그마한 창에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면 희미하게 빗소리가 들려오는 창 밖은 당연하게도 온통 회색이었다. 흑과 백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애매하고 어중간한 자신과 하늘이 오늘따라 많이 닮아 보인다고 생각하며 정국은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역에서 다시 버스로 15분 정도 도심을 감상하다가 빌딩 숲이 잦아들면 배차 간격 40분, 악마의 44번 버스로 갈아탄다. 정국의 집은 44번 버스를 타고 네 정거장을 지나 삼거리 슈퍼 안쪽 골목으로 조금 걸으면 그제서야 붉은 담장으로 정국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익숙한 풍경과 낯선 얼굴,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완벽한 막장 드라마의 엔딩이었다. 지민은 어떻게 하다 보니 그 쪽 댁에 신세지게 되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정국의 귀에는 지민의 근황이나 정보 따위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형식적인 반응을 하며 얼빠진 얼굴로 내내 서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6개월 정도만 더 지낼 거예요.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최대한 서로 편해지는 쪽으로 노력해봐요"

지민이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떨떠름 했던 정국은 어쩔 수 없이 눈을 마주쳐 찬찬히 얼굴을 훑었다. 턱을 지나고 입술. 시선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눈이 마주치자 지민이 싱긋 웃었다. 묘하게 끌리는 얼굴이었다. 자꾸 생각나는 눈빛에 이상한 아우라같은 걸 풍기고 있었다. 정국이 자신의 이상형을 떠올리기 시작할 때 쯤, 시끄러운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어머 아들 왔니? 정국아! 아들!"

조금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세차게 열어젖히면서 들어온 김여사가 어색한 공기를 알아차리고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 정국은 얼결에 악수하던 손을 후다닥 뿌리쳤다. 김여사와 지민이 동시에 허공에 홀로 떠 있는 지민의 손을 바라봤다가 의아하게 정국을 바라봤다. 정국의 눈빛이 자신을 원망하는 듯이 느껴졌는지 다시 김여사가 말을 이었다. 

"아니 엄마가 이 스마트폰이 자꾸 꺼져서 서비스 센타 맡겼다가 니 문자두 아까 찾을 때 봤다 얘!"

"......"

"내려오는 줄 알았으면 저 그 뭐야 갈비찜! 그거 했지~ 휴학 한 번 해도 도통 내려오질 않던 놈이… 아 지민이는 이미 인사 했니?"

"그럼요. 어머니 피곤하실 텐데 먼저 들어가 계세요."

뻐끔뻐끔 말 할 타이밍을 놓친 정국이 눈알만 굴리면서 자신보다 휠씬 살갑게 김여사를 대하는 지민을 보고 있었다. 눈꼬리를 휘며 김여사를 방으로 들여보낸 지민이 저녁준비를 하려는지 부엌으로 향하다가 망부석이 된 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또 다시 싱긋 웃으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짐 무거워 보이시는데 짐부터 푸시는 건 어때요?"

"아..."

낮은 싱크대에 김여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게 견딜 수 없게 어색해 정국은 잽싸게 안방으로 들어왔다. 외투를 벗고 있는 김여사에게 다가가 슬쩍 지민에 대해 물어볼 생각으로 속삭였다.

"엄마. 근데 저 사, 아니 저 분은 언제부터 지내게 된 거야? 말도 없이?"

"하숙한 지? 한 1년 됐나? 기억이 잘 안 나네... 암튼 지민이가 얼굴 못지않게 하는 짓도 싹싹하고 그래서 아들래미 한 놈 더 생긴 기분이라 엄만 좋아~"

"하숙? 어쩌다ㄱ,"

"아유 맞다! 작년에 니가 고쳐준 에어컨 있잖어. 히마리가 없는지 또 고장났었어~"

박수를 치며 에어컨 얘기를 하는 김여사에 정국은 드디어 제가 나설 수 있는 일이 나왔는지 번뜩 대꾸했다.

"어 그럼 내가..."

"아니 벌써 지민이가 다 고쳐놨어~ 새거 하나 사라지 뭐니 글쎄"

빼빼 말라가지고 허여멀건한 쟤가? 라고 소리칠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정국은 기가 차서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얼굴에 구멍이란 구멍은 다 커진 채로 굳어버렸다. 김여사가 지민을 어지간히 예뻐해야 말이지. 지민과 김여사가 같이 지내는 걸 일주일만 봐도 김여사가 정국 못지않게 지민을 아끼고 소중히 대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루는 김여사가 정국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매일 해주던 과일주스를 지민에게도 만들어 주었더니 다음 날 정국이 그 큰 믹서기에 남은 주스를 한 입에 털어넣었다. 김여사가 그 모습을 보고 웃자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던 건지 오기로 설거지까지 했던 정국이었다.



그러나 형식적이던 정국과 지민도 두 달 정도가 지나자 처음의 딱딱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꽤 친해졌다. 5월의 햇살처럼 둘 사이가 자연스러워지니 김여사도 자주 집을 비워 점차 둘만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둘은 청소기를 돌리거나 마당에서 빨래를 널다 말고 문득 각자의 첫사랑이나 서로의 첫인상 같은 걸 묻기도 했다.

"근데 난 너 처음봤을 때 엄청 놀랐다?"

"왜."

"너무 커서. 어머니가 나랑 동갑이라고만 말씀하셨지, 체대생이라고는 말 안해주셨거든."

"풉, 내가 그렇게 커?"

"응. 어머니한테 실수하면 뚜들겨 맞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난 오히려 너 보고 놀랐는데.

빨래를 털던 지민이 의아한 얼굴로 정국을 바라봤다. 뜨거운 햇빛 덕에 저절로 미간이 쪼그라들었다. 지민은 작은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눈가에 드리웠는데도 잔뜩 준 힘을 뺄 수 없었다. 불편한 얼굴로 물었다.

"왜? 나 뭐 특별한 것도 없는데?"

정국은 묵묵히 분홍색 수건을 빨랫줄에 걸고 연하늘색 집게로 양쪽을 고정시키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지민은 아직도 손에 털다 만 빨래를 들고 정국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정국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읭? 하는 얼굴로 저를 보고있는 지민에게 어깨를 들썩 하며 자신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선 지민을 놀리기라도 하듯 빈 바구니를 들고 터덜터덜 집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말했다.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나와 마치 비웃는 듯하게 말이다.

"너무 작아서."

뒤통수에 달린 눈으로 지민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본 건지 정국은 씨익 웃으며 조금은 빨라진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비가 온 뒤 더욱 맑게 피어나는 구름처럼 정국은 새하얗게 치유되고 있었다. 동시에 정국의 마음에는 분홍빛 공기가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싱그러운 여름의 초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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