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word: 해군사관학교 1기생/주인공이 진성 게이/성격 더러움/원작 모름/대식가


해군사관학교 1기생이 되었다.

졸업장 따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게 목표인데,

인생이 개같이 꼬이기 시작했다.

시발, 아무리 생각해도 난 군대랑 안 맞는 것 같아.

.  

망나니의 해군학교 생활기

written By. 시쟌

-14-

~포기는 김치 담글 때나 쓰는 말이다.~


“……그게 뭔 소리냐?”

“다른 세계면 다른 세계죠, 뭐.”

윤이 육포를 찢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우물우물 씹어 먹는 윤은 축 가라앉은 분위기를 보며 표정을 구겼다. 육포를 씹을 때마다 욱신거리는 뺨이 영 기분을 나쁘게 했다.

“다른……, 그런 게 있어?”

“있더라고요.”

어깨를 으쓱인 윤이 느긋하게 대답하며 과자봉지를 슬쩍 까기 시작했다. 차마 상사가 있어서 술은 못 마시고 애꿎은 볶음밥과 육포를 비롯한 음식만 번갈아 먹는 윤을 보며 가프가 머리를 긁적였다.

“나 자는 중인가?”

“아닙니다.”

그나마 가장 괜찮은 결론을 내린 가프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보가드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카즈키를 포함한 세 사람은 말문이 막혀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음식 포장을 뜯어 하나씩 맛보는 윤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아…, 다른 세계 말이지~…?”

“응.”

영 납득할 수 없었던 보르살리노가 슬쩍 묻자 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폭탄을 던져놓고 태연하게 우물우물 육포를 씹던 윤이 슬쩍 눈치를 보며 술을 잔에 따라 눈치를 쓱 살피더니 한 모금을 홀짝 마시고 냉큼 내려뒀다.

까마득하게 높은 상사의 앞에서 벌어지는 여러모로 말문이 막히는 뻔뻔한 기행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거나 말거나 견문색 패기까지 펼쳐서 윤의 상태를 살핀 가프가 생각했다. 믿지 않기엔 미묘하게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있고 반대로 믿기에는 다른 세계라는 게 애초에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싶었다.

“다른 세계면 어떤 세계냐?”

“그냥 뭐 사람 사는 곳 다 똑같죠. 돈 많고 권력 있는 놈들이 한자리씩 차지하고 없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대로 못살고.”

“거긴 혈액형이 AB…라는 괴상한 느낌으로 있냐?”

“넹, 왜 혈액형이라는 게 보통 ABO 형식, Rh 형식으로 나뉘잖아요. ABO 형식은 AB 항원에 따라서 크게 네 개로 나뉘는 거고. 그게 A형, B형, O형, AB형. Rh식으로 들어가면 종류가 더 다양해지는데 보통은 Rh+, 드물게 Rh-가 존재하고 그 외에 주요 5개 항원에 따라서 OH나 D형, 아예 Rh 항원이 존재하지 않는 null도 있고…….”

가프의 질문에 묵묵히 생물학 시간에 배웠던 지식과 따로 알아봤던 내용을 떠올리며 적당히 이해하기 쉽게 대답하고 있는데 분위기가 점차 조용해졌다. 열심히 말하는 도중에 그것을 느낀 윤이 닭튀김을 입에 넣다 말고 어깨를 으쓱였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조용히 서로 눈치만 보는 보르살리노와 텐세이와 이미 듣고 있지도 않은 가프, 팔짱을 낀 채 언제나처럼 굳은 표정으로 말이 없는 사카즈키까지 시선으로 훑은 윤이 입을 열었다.

“말해봐야 모르겠지만요. 그래도 뭐 같은 사람인데 여기도 비슷한 분별법으로 나눴겠죠. 항원이야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허, 말마따나 난 늙어서 그런가, 뭐가 뭔지 모르겠구먼. 보고는 해야 할 것 같은데….”

가프가 인상을 찡그렸다.

윗놈들은 분명히 ‘다른 세계’에 꽂혀서 이놈을 그냥 두진 않을 거다. 뭘 얼마나 알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기본적인 상식이나 지식이 거의 다른 건 알겠다. 대놓고 덤벼드는 걸 막아주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그놈들이 비겁하게까지 나온다면 가프 혼자 막을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여러모로 즐겁진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윤이 미지의 존재인 이상 보고는 해야겠지.’

그가 보기에 윤은 어떻게 말 몇 마디로 컨트롤을 할 수 있는 사내처럼 보이진 않았다. 제 의견이 더 중요하고 제 뜻이 더 옳다면 자신에게 올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그걸 밀고 나갈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보통 현실을 보게 되면 단단하고 꼿꼿했던 만큼 쉽게 부러지고 무너지고 망가진다. 철저한 선이 철저한 악이 되는 것도 한순간의 일이었다.

그러니 차후에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해서 보고할 필요성은 분명히 있다.

“그래, 이건 일단 됐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그보다 너 몸은 괜찮은 거 맞냐? 군의관이 말하길 상태가 좀 심각하던데. 그러니까 그… 뭐랬더라?”

“약물중독이라고 했습니다.”

복잡한 일은 대충 던져버린 가프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묻자 보가드가 묵묵하게 대답했다.

“어, 맞다. 그거. 너 약물중독이라던데 진짜 괜찮은 거 맞냐? 아니면 그쪽 세계는 원래 피검사를 하면 전부 약물중독으로 나오냐?”

“넹.”

별로 자세히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윤이 건성으로 대답하며 육포를 씹었다. 슬슬 나가줬으면 하는 표정으로 가프를 보았지만, 둔한 건지 모른 척하는 건지 팔짱을 낀 가프는 아예 의자까지 끌어와 앉더니 입을 열었다.

“…원래 다들 이런 거라고? 무슨 결과지가 온통 시뻘겠는데. 내성 같은 게 있는 거냐?”

“넹.”

이제 대놓고 술을 홀짝거리기 시작한 윤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무척이나 건성으로 대답했다. 윤이 야금야금 쉬지 않고 음식을 주워 먹은 덕에 넷이 먹으려고 가져온 음식의 반이 벌써 없어진 뒤였다.

이제는 더 무시할 수도 없을 정도로 건성이 된 윤의 모습에 가프가 팔짱을 끼곤 인상을 찡그렸다.

“어이, 윤. 이 망할 애송이. 너 지금 나랑 대화하기 싫냐?”

“넵.”

“…허, 진짜 뭐 이런 게 떨어졌지.”

늘 센고쿠가 자신을 볼 때마다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내리치는 기분을 처음으로 느낀 거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튼…, 우리 기준으로 네 몸이 정상은 아니라고 하니 돌아가면 제대로 정부 산하 병원에 가서 검진받아 봐라. 네가 정말 다른 세계에서 왔든 아니든 다쳤을 땐 어쨌든…….”

“싫습니다.”

말없이 음식만 먹던 윤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며 싱그럽게 웃었다. 해사한 웃음과 함께 윤의 금안이 반짝 빛났다. 가프가 멈칫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가프 중장님.”

“…….”

“별달리 문제가 있는 곳도 없고 사고도 쳤으니 최소 퇴소 조치일 텐데 더 신경 쓰실 이유도 없고요. 그렇죠?”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상대를 달래려는 듯 부드럽게 물어왔다. 휘어진 눈동자에선 불쾌감이 엿보이지 않았고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꼬리는 어디까지나 호의적이었으나 가프는 미묘하게 그 이상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처럼 들렸다.

“떼잉, 퇴소는 무슨. 정신 차려라, 이놈아. 제파 그놈이 널 놔줄 성싶더냐?”

“…에이, 이렇게까지 사고 쳤는데 놔주겠죠. 약을 먹었다고요! 심지어 시키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해적단 선장의 불알을 으깨뒀고!”

“…….”

가프가 해적선 선장의 처참한 꼴을 떠올리곤 저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많은 해적을 잡아봤지만 그렇게 비참하고 처절한 꼴이었던 놈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천하의 가프 역시 동정…을 하진 않지만, 그런 마음이 들뻔할 정도였다. 군의관의 말에 따르면 꺾여버린 걸 고칠 수가 없어서 자르거나 아니면 앞으로 흥분할 때마다 꺾인 채로 커져서 아플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그뿐입니까! 약도 마셨지! 피웠지! 하극상에 강제로 급성 중독에 걸리게 했고! 세상에, 저 같으면 절 신고해서 쫓아내고 감방에 몇 달 처박아둘 겁니다!”

가프가 무심한 낯으로 귀를 후비더니 그대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귀찮다는 듯 입을 쩍 벌리며 보란 듯이 하품한 씩 웃으며 윤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말은 다 했냐?”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적나라한 표정이었다.

“네가 지금 나한테 하는 이건 하극상 아니고?”

“에이, 우리 가프 중장님께서 사람 속상하게 서운한 말씀을 하시네. 이게 다 애정이고 사랑이고 대충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가프의 지극히 타당한 질문을 웃는 얼굴로 되받아친 윤을 본 그가 얄밉도록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애초에 해군사관학교의 생도 및 커리큘럼과 관련된 권한은 전부 제파한테 있다. 나한테 호소해도 소용없다, 이 바보야. 으하하하!!”

“……아?”

한 대만 때릴까?

윤은 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을 때 생길 수 있는 몇 가지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으로 돌려보곤 깔끔하게 포기했다. 어느 결말이든 윤이 보는 손해가 더 클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윤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인 게 다행이지.’

적어도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스스로에게 무슨 일이 있든 3초 이상 생각할 시간을 준 건 대단히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가프가 말없는 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적당히 있었던 일 보고야 해주는데 뭐, 그걸로 잘리든 신고당해서 감방에 가게 하든 그냥 묻고 품든 제파 녀석 맘이지. 그래도 이번 일은 좀 선 넘었다. 윤.”

심드렁하게 말하던 가프의 표정이 마지막에 결국 진지해졌다. 윤은 말없이 가프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겁게 가라앉은 눈동자엔 가벼운 태도나 행색과는 다르게 무거운 질책이 느껴졌다. 눈을 가늘게 뜬 윤이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예예, 제가 노력도 안 하면서 열등감에는 흠뻑 절어있는 멍청한 놈들을 별로 안 좋아해서 욱했습니다. 그것도 지보다 열 살은 더 어릴 게 뻔한 놈들한테.”

윤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늘 열등감에 젖어있던 재수 없는 동갑 조카 새끼를 떠올린 윤은 아까 그 해병들의 짓거리가 다시 떠올라 혀를 찼다. 그가 한심하다는 듯 비죽 웃으며 술을 벌컥벌컥 마셔 한 잔을 전부 비웠다.

상관 앞에서 하는 그 뻔뻔한 모습에 보가드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움찔했으나 다행히 상관과의 대화에 끼어들진 않았다.

“너 네가 그놈한테 먹인 게 뭔지는 알고 있냐?”

“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도 했느냐.”

“네.”

가프의 질문에 윤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팔짱을 낀 가프가 그야말로 후퇴라고는 없는 윤의 불도저 같은 성격에 고개를 내둘렀다.

“윤, 조금만 잘못됐어도 치사량이었다. 죽었을 수도 있었어.”

“그랬습니까. 앞으론 주의하겠습니다.”

가프의 경고에 윤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애초에 윤도 알고 있었다. 대충 인간에게 어느 정도가 치사량인지도 알았고 나름대로 계산하기는 했다. 그래서 다 먹이진 않았고.

“그러냐? 으하하하! 알겠다, 앞으론 하지 마라! 약속이다, 알겠냐?”

“네.”

무심히 대답하던 윤을 본 가프가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옷 안쪽에서 전병을 꺼내 들더니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서?”

“뭐가요.”

“다른 세계라는 건 뭐 하는 데냐? 재밌는 거 있냐?”

가프가 유쾌한 얼굴로 물었다.

가프가 대화가 끝나고도 떠날 기미라곤 조금도 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텐세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술을 마시긴 글렀다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꼴깍꼴깍 잘도 마시는 윤을 보던 보르살리노가 슬쩍 잔에 술을 따르더니 느긋하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맛있네~….”

작게 중얼거린 보르살리노도 식사에 참여했다. 그에 연이어 눈치를 보던 텐세이도 슬쩍 먹기 시작했다. 생도가 셋이나 앞에서 술을 기울이는데도 가프가 별다른 말이 없자 사카즈키도 슬쩍 잔을 들고 조용히 술자리에 참여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윤이 입을 열었다.

“뭐 하는 세계냐고 물어도…. 해적은 거의 없고 과학은 발전한 세곈데요. 전화는 기계로 하고 저 징그러운 벌레도 없고. 여기보다야 평화로운가. 전쟁도 칼 들고 주먹으로 싸우는 정도가 아니라 한 번 벌어지면 뭐…”

윤의 성격처럼 느긋하게 이어지는 윤의 말을 안주 삼아 세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고 가프는 전병을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다만, 윤의 말이 이어질수록 가프의 표정은 굳었고 곁에 있던 보가드의 낯빛도 썩 좋지 않아졌다.

윤은 그들이 해군이라서 무기나 전쟁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세계에 존재하는 무기에 관한 얘기를 쭉 해주다가 자신이 살던 세계의 전쟁 역사에 대해서 말해주었는데, 그게 그야말로 말문이 막힐 정도였던 탓이다.

철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하늘도 아니고 그 너머엔 우주라는 공간이 있는데 그 우주에 직접 나가서 달에 발자국을 찍는다는 이야기까지 진행되자 이제 망상이 아닐까 싶은 정도였다.

세계 어디에 있든지 일이 벌어지고 10분 안에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까지 전해 들을 수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믿기질 않았다. 윤이 이야기하는 것은 잘 짜인 망상 같았고 반대로 말하자면, 너무 잘 짜여서 진짜일 것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최소 수천 킬로미터에서 만 킬로미터보다 더 떨어진 곳에서 오로지 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 위대한 항로에 있는 섬 하나둘쯤은 하루 이틀 만에 없어질 거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라며 덧붙였으나 도통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마치, 그들은 쉬쉬하는… 지금은 거의 잊혀 아는 이도 흔히 존재하지 않는 고대 병기라도 운운하는 것 같지 않은가.

“흠…….”

가프는 무척 드물게도 굳은 얼굴로 윤을 보며 마지막 남은 전병을 와그작 씹었다. 처음에는 흥미진진하게 듣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가프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윤이 가지고 있는 상식이 무섭다는 것이었다.

가프는 어디까지나 제멋대로 굴며 원하는 대로 살지만, 그럼에도 최소한의 선은 있었다. 해군인 이상 어느 정도의 타협을 하고 살아간다는 뜻이었다. 그나마 반항이 대장직을 쥐지 않은 것이었고.

타인의 위에 서기보다는 그저 적당한 직위에 머무르고 싶은 사람이었다. 원하는 만큼의 권력을 휘두르며 지켜야 할 자를 지키고 평화를 위협하는 것을 내치고 싶은 존재.

“……진짜라면 무섭네에~….”

“엥, 그래? 난 니들 능력이 더 무서운데. 사람이 분자 단위로 쪼개지는 게 아니라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나 요소가 아예 전혀 다른 물질로 바뀌었다가 돌아온다는 거잖아? 우린 그런 기술은 없거든.”

보르살리노의 말에 윤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윤이야 별거 아닌 듯 키득키득 웃고 있지만, 가프가 보기엔 대단히 큰 문제였다. 뭣보다 윤은 머리가 좋았다. 단순히 그런 것들을 알고 마는 게 아니라 어느정도 원리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쁜 쪽으로 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군.’

그의 말만으로도 충분히 다양한 것을 유추해서 실제로 제작을 할 수 있는 천재들은 세상에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 천재들이 전부 정의의 편인 것은 아니다.

보고해야겠다는 생각엔 더욱 확신이 섰다. 그는 한 사람의 안위보다 세계의 평화를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윤은 지금 당장은 그리 위험하지 않지만, 그의 사상은 위험할 수 있었다.

모두가 평등한 세계, 모두가 평화 조약을 맺고 많은 나라가 고대 병기만큼의 위력을 가졌을 무기를 보유한 나라. 법전에 적힌 글씨가 그들을 지켜주는 세계. 그래서 윤은 누구에게도 쉽게 굽히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다. 윤의 위에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윤은 저보다 강한 사람에게든 누구에게든 기분이 나쁘거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저돌적으로 돌진한다. 마치 투우 같았다.

같은 편이 되면 든든할 테고 적이 된다면 골치가 아프겠지.

다만….

‘……보고하면 위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겠는데.’

그리고 보고하는 순간 윤의 위험성은 높아질 거다.

‘모르겠군.’

그가 보기에 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가프가 저 성격에도 무난하게 동기들과 잘 어울리는 윤을 물끄러미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슬슬 가 봐야겠군.”

가프의 말에 윤이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가느냐는 초롱초롱한 시선에 가프가 헛웃음을 흘렸다. 감정이 드러나도 너무 나잖냐.

“일단, 네 상태에 대해서 제파랑 윗선에 보고는 해둘 거다. 일단은 너희 맡은 입장에서 보고 할 의무도 있고. 네 건강 상태도 신경 쓰이고.”

가프의 말에 윤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튼, 호기심들이 많아서 과학반이나 윗놈들이 좀 귀찮게 할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일단 싫으면 안 해도 되니까 말이다.”

가프가 적당히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당연하지만, 위쪽에도 센고쿠에게도 콩 원수에게도 잘 말해둘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을 피해서 접촉해올 수도 있으니 미리 말해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돌아가면 제대로 검진받아! 아무리 봐도 너 그 수치는 정상이 아니야. 제파에게도 전해둘 거다.”

“싫습니다.”

가프의 윽박에도 해사하게 웃은 윤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에 가프가 멈칫했다.

“그럼 최소한 내일 피라도 뽑아서 의무반에 전해줘라.”

“싫어요.”

“어이, 윤.”

“넹, 싫은데요.”

가프의 말에 윤이 기계처럼 같은 말만 읊조렸다. 그에 보다 못한 보가드가 입을 열었다.

“굳이 약물 검사 때문이 아니더라도 네 혈액형이 특이하기 때문에…….”

“넹.”

“피에 그런 수치가 나온다는 건 아무리 세계가 달라도 최소한 정상치가 아니라고…….”

“싫.”

“…….”

점점 성의 없어지는 윤의 말에 보가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나중에는 아예 들은 체도 하지 않기까지 하니 가프가 한 차례 헛웃음을 흘리곤 주먹으로 윤의 머리를 쿵- 내리쳤다.

“아악!”

“이 고얀 놈! 내일 잠깐 보급 때문에 섬에 들를 거니까 그렇게 알고 일찍 자라!”

윤이 비명을 내지르자 가프가 끌끌 혀를 차며 윽박을 지르더니 골머리가 아프다며 그대로 전보 벌레를 꺼내 들곤 방을 나갔다. 윤이 바닥에 널브러져 늘어진 채 한숨을 내쉬었다.

“아파, 씨발….”

선실 바닥에 엎어진 채 윤은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얻어맞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혹이 났는지 머리 한쪽이 불룩했다. 텐세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괜찮아?”

“야, 네 눈엔 내가 괜찮아 보이냐?”

“아니.”

텐세이는 윤의 말에 순순히 공감해주었다. 실제로도 윤은 여러모로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다. 바닥에 널브러진 윤이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다 돌연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어른을 공경하는 예의 바른 놈만 아니었어도 한 대 때려주는 건데.”

“유운~ 내가 보기엔… 네 손이 부러질 것 같은데~….”

개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여대는 윤을 보던 보르살리노가 샐쭉 웃으며 얄밉게 말했다. 얄밉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윤이 그보다 훨씬 더 화사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씨벌, 말 참 곱게 하는 이쁜 새끼.”

“윤은 칭찬을 참 자주 한단 말이지이~”

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벌떡 일어나 술잔을 연달아 세잔이나 마시더니 발갛게 물든 얼굴로 천진난만하게 미소를 띠었다.

“내가 우리 보르 형아를 너무 좋아하잖아!”

보르살리노의 미소가 짙어지고 윤의 ‘보르 형아’를 직관한 사카즈키의 얼굴이 굳고 텐세이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도통 끔찍한 걸 봤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이 윤과 보르살리노를 번갈아 보았다.

“그래, 우리 윤이… 형아랑 대련하고 싶구나~?”

“……으악!!”

보르살리노의 말에 텐세이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팔로 제 온몸을 비벼대고 사카즈키가 쥐고 있던 술잔은 쨍그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나서 깨져버렸다.

“……미안하군.”

그가 당황한 얼굴로 급히 술잔을 내려놓으려다, 손에 남은 잔해를 보곤 인상을 찡그렸다. 그에 보르살리노도 당황한 듯 도르륵 눈동자를 굴리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윤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윤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 넓지도 않은 선실, 침대 옆 바닥에 넷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선 창백한 얼굴들을 하고 있는데 웃기지 않을 리가 있겠나.

한참을 웃음을 터뜨리며 구르던 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딸린 욕실에서 젖은 수건과 휴지를 가지고 나와 끅끅, 웃음을 흘리곤 사카즈키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아, 씨발. 미친, 존나 웃기네. 너희.”

쪼그려 앉아서도 간헐적으로 어깨를 떨던 윤이 사카즈키의 빈손에 수건을 내밀었다. 사카즈키가 묵묵히 그걸 받아서 제 손을 닦는 동안 윤은 깨진 파편을 주워 휴지에 하나하나 올렸다.

“야, 피 나냐?”

“날 리가 있겠나.”

“지랄, 보통은 나거든?”

사납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린 윤이 작은 파편까지 주워 모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카즈키가 사용한 수건을 치우기 위해 일어나기에 윤이 가볍게 손을 젓곤 그걸 가져가 안쪽에 버리고 나와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우리 그렇게 별로였냐? 유리컵 깨고 비명 지를 정도로?”

“어, 좀.”

텐세이가 드물게도 단호하게 말했다. 사카즈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르살리노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자 윤이 다시 어깨를 떨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름 우애 좋은 형제로 해적들을 속였는데 말이야.”

“왜 컨셉을 굳이 우애 좋은 형제 따위로 잡은 거냐.”

사카즈키가 질린 얼굴로 물었다. 침대에 등을 기댄 윤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보르살리노는 참 잘도 웃고 잘도 화내고 잘도 뚱한 표정을 한다 싶었다. 저렇게 다채로운 표정을 하는 인간을 보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그럼, 망망대해에 뜬금없이 표류해 있는 사지 멀쩡한 남자 놈들을 의심 안 하게 뭐라고 말하겠어? 그리고 딱 동정 사기 좋잖아?”

“동정?”

“아무것도 모르고 생각도 없는 것 같은 천진한 동생과 그런 생각 없는 동생 데리고 움직이는 깨나 고생 했을 것 같은 어른스러운 형.”

윤이 제법 괜찮은 컨셉 아니었냐며 엄지를 척 내밀었다. 보르살리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의 말에 긍정했다.

보르살리노도 윤의 컨셉과 수완이 옳았음을 알았다. 그는 분위기를 잘 읽고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주도할 수 있는 남자였으며, 확실히 타인에게 사랑받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의 마음에 들 수 있을지를 윤은 잘 알고 있었다. 상대가 원하는 말을 해주고 상대가 원하는 태도를 하고 상대가 바라는 방향의 도움을 준다. 윤이 해적단의 경계를 풀게 하는 데 걸린 시간이 무척 짧았던 것을 떠올리면 그건 가히 재능의 영역이었다.

“윤, 나 궁금했는데 물어봐도 돼?”

“뭐?”

“나 너랑 대화할 때마다 조금 묘한 느낌을 받았거든. 너 혹시 몇 살이야?”

윤의 눈이 한 차례 끔뻑였다. 그가 고개를 설핏 기울이더니 입을 열었다.

“말 안 했냐?”

“그렇지, 우리 통성명 외엔 아무것도 안 했잖아.”

텐세이의 말에 무려 반년 가까이 서로의 나이도 모르고 있었음을 깨달은 윤이 아, 하고 작은 탄식을 뱉었다.

“나 19살. 아니다, 이건 우리나라 기준이니까 중세… 아니 여기 기준으로 하면 18살? 생일 지나고 안 지나고는 제외하고.”

“……뭐?”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텐세이가 입을 떡 벌렸다. 보르살리노와 사카즈키도 놀란 듯 눈이 커졌다. 특히 보르살리노의 머릿속에는 순간 태연하게 약이 든 술과 담배를 하던 윤이 떠올랐다.

윤이 닭튀김을 입에 쏙 밀어 넣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이가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어서였다.

“너넨 몇 살인데?”

“나는 스물다섯인데….”

“스물여섯~”

“스물셋.”

세 사람의 말에 윤이 한 차례 눈을 끔뻑이더니 하나 남은 육포를 냉큼 입에 넣으며 해사하게 웃었다.

“너희 늙었구나.”

“……열받네에~….”

산뜻한 얼굴로 내뱉는 말에 보르살리노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에 윤이 키득키득 웃었다.

“생각보다… 어려서 놀랐네.”

텐세이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왜, 형이라고 불러줄까?”

“…이정도 나이차이가 나면 그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진심으로 고민하는 듯한 텐세이의 발언에 윤이 활짝 웃었다. 그에 텐세이가 멈칫했다. 새하얗게 질린 그가 급히 괜찮다고 하기 위해서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윤이 과일과 과일칼을 텐세이에게 내밀며 씩 웃었다.

“텐세이 형아! 나 이거 까줘.”

“……야. 미안한데, 혹시 나 토해도 되냐?”

“미쳤냐, 씨발아?”

텐세이의 진지한 말에 윤이 화사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제야 텐세이가 속이 뻥 뚫린 사람처럼 얼굴이 편안해졌다. 그에 윤이 어깨를 으쓱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잠깐 바람 쐬러.”

윤이 가볍게 손을 휘젓고 갑판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보급을 위해서 군함이 잠시 섬에 멈춘 사이 윤이 사라졌다.

윤의 열여섯 번째 탈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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