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이 길을 넘어온 지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정수리 위로 하오의 빛이 내리쬐었다. 말없이 언덕을 걸어 오르던 강림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닌 걸 알면서도 해가 따라오는 기분이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감시 좀 하지 말아주지? 차라리 비나 좀 시원하게 내려주면 좀 좋냐고. 혼잣말을 중얼거려 보지만 신들이 말을 들을 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강림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아니, 이 동네는 언덕이 왜 이렇게 많아? 부자 동네 맞아?

꽉 묶은 갓끈을 타고 맺혔던 땀방울이 주룩 흘렀다. 아 되다. 얼른 데리고 올라가야지.

 

 

 

 


re-birth day

 

 

 

 

 
시간은 본디 잡을 수 없이 휘발되며 힘이 없다. 그러나 그 속에서 수많은 생명은 숨을 틔우고 또 멈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숨이 멈추는 이가 있고 또 누군가는 태어난다. 물론 더러는 이미 망자가 되어 사자들의 뒤를 따라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냄새가 사라진. 오로지 혼으로 존재하는 이들을 끌고 올라가 삼도천을 건너고 여러 대왕들 앞에 세우는 것. 그것이 강림의 직업이었다. 정말 지긋지긋하게 재미없는 일이었으나 그에게는 영겁의 업이었다.

「내가 같이 내려가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형도 가던가.」
「나도 그러고 싶다. 근데… 난 명부를 관리하는 일도 바빠 죽겠어서 말이지….」
「그럼 아예 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 마.」
「네가 또 사고 칠까 봐 그런다!」

명부를 담당하는 내명이 강림의 앞에 주먹을 들이밀며 말했다. 절대로. 절대로 망자와 접촉해서는 안 돼. 그러자 강림이 피식 웃었다. 나를 뭐로 보는 거지? 7살 먹은 어린 차사도 그 정도는 알아. 말 같지도 않은 농담에 내명의 얼굴이 싹 굳었다. 7살은 차사를 못 한단다. 700살이면 모를까. 그리고 누가 그것을 모를까 봐 너에게 이렇게 잔소리를 하는 것 같아? 이게 다…!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내명에게서 강림이 등을 돌렸다. 하, 이번엔 또 어떤 혼을 데려와야 하는가. 이승으로 나서기 위해 간단히 짐을 꾸리는 강림을 내명이 졸졸 쫓아다니며 기어코 대답을 받아내려 했다. 네가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어? 빨리 대답해. 절대로 딴 길로 빠지면 안 된다! 어!? 강림은 휴― 하고 긴 한숨을 내쉬고는 내명 앞에 마주 섰다. 소리를 질러대 얼굴이 아주 벌겋게 올랐다. 거참, 지겹지도 않을까. 잔소리를 골백번을 하고 또 해댔다. 나라면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지겨울 것 같은데.

「망자가 마음에 들어도 절대로 넘보지 않겠습니다.」
「따라 해, 절.대.로.」
「하아…… 절대로.」
「자.지.않.는.다.」

그래, 결국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게다. 보다 못한 강림이 결국 하지 않으려고 참고 또 참았던 버럭질을 하고 말았다. 아, 진짜 안 잔다니까!? 나 반성 많이 하고 있다니까!? 내명은 그런 대답을 할 줄 알았단 듯이 미간을 찡그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 그 난리를 잊지 마라. 네가 마음에 든다고 다짜고짜 색사(色事)를 나눴던 그 망자는 명부가 불에 타 인간으로 환생하지 못했어.」
「…….」
「…물론 네 혼이 소멸할 뻔했던 것도.」
「…….」
「형님 하나 잘 둔 덕분에 간신히 다시 구실 할 수 있게 저승에 붙어 있게 되었으니, 이젠 얌전히 네 할 일에 집중해라.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고 경고야. 알겠어?」

나 참… 반성은 할 만큼 했고, 시간도 흐를 만큼 흘렀거늘. 다 지나간 일을 또 꺼내는 건 반칙 아닌가. 빈정이 조금 상했지만 따지고 보면 내명의 말이 아예 틀린 것도 아니었다. 겁도 없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일삼았다. 죄는 차곡차곡 쌓였고 결국 소멸의 문턱까지 발이 닿았다. 저승에서의 소멸은 갈가리 찢어진 혼의 조각들이 영원히 구천을 떠도는 것을 뜻했다. 가진 기억을 그대로 안고 끝이 없이 떠도는 것. 그것이야말로 저승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형벌이었으니.

이러나저러나 강림이 소멸하지 않은 것은 내명의 공이 컸다. 강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전혀 하지 않을 동생의 행동에 마음이 풀린 그는 한층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도 또 그런 짓을 벌이면 그때는 정말 소멸행이야.」

강림은 내명의 마지막 목소리를 떠올리며 연신 언덕을 걸어 올랐다. 소멸이라. 이 지리멸렬한 차사 일을 하는 것보다 때로는 그게 좀 나을 것도 같은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했다가는 꼬장꼬장한 내명에게 뺨을 얻어맞을지도 모른다. 그래, 사고 치지 말아야지. 혹여 제가 소멸이 될까 고군분투하는 그를 위해서라도. 망자는 건들지 말아야지. 유례없는 다짐을 하는 강림의 입에서 슬슬 단내가 나기 시작했다.

“여기가 맞는데.”

커다랗고 육중한 대문에 시선을 고정한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했다. 그래, 여기로구나. 죽음의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혼백이 나올 것이다. 들어가서 데리고 나오기에는 가택신들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좀 까다롭게 굴어야 말이지. 망자는 아직 자신의 목숨이 다한 줄도 모를 것이다. 좀처럼 기민한 망자가 아니면 자기 죽음을 잘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생(生)과 사(死)가 한끝이라 그랬다.

“누구세요?”
“…….”
“누구신데 우리 집 앞에 계세요?”
“…….”

뒷짐을 쥔 채로 가만히 서 있던 강림의 등 뒤에서 웬 목소리가 터졌다. 한없이 공손한 물음에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교복을 입은 앳된 소년이 서 있다. 모습이 눈에 보인다는 것은, 그것은 곧.

“너구나.”
“…….”
“여기 우리 집인데 누구세요?”
“이름이 김가(家)의 태형이지?”

내명에게 건네받은 명부를 확인하며 묻는 강림의 목소리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김태형인데요. 이 집 막내아들이요. 소년은 걸음을 뒤로 주춤 물러나며 검은 도포와 갓을 쓴 강림을 이상한 눈으로 관찰했다. 뭐지, 할아버지 아는 사람인가? 그러기엔 좀 젊은데. 진짜 뭐지? 저렇게 쓰고 돌아다닐 사람은 할아버지 지인밖에 없는데.

이른 하굣길이었다.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조퇴를 하기 위해서 등교할 때부터 얼마나 아픈 척을 했는지 모른다. 오디션 때문이었다. 아니, 왜 평일 낮에 오디션을 보고 그러냐.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오면… 암만 계산을 해봐도 시간이 간당간당했다. 태형은 자전거 페달을 미친 듯이 돌렸다. 물론 너무 빨리 돌려 날아오다 그만 언덕이 시작되는 사거리에서 자동차와 살짝 부딪쳤지만. 날렵하게 피한 덕분에 크게 다치진 않았다. 근데 이 이상한 남자는 누구야? 누군데 내 이름을 알고 있지?

태형이 강림을 지나쳐 자전거를 손에 끌고 대문 안으로 들어서려던 바로 그때였다. 별안간 심장으로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쑤시고 들어왔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강한 통증이다. 태형이 입을 쩍 벌린 채로 그대로 쓰러졌다. 조금 전, 자전거 바퀴가 닿은 대리석 위로 머리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부딪쳤다. 허억. 허억… 허…억…. 깔딱깔딱 넘어가는 숨에 벌어진 입속 혓바닥이 금세 마른다. 아, 너무 아파. 심장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만 같아!

“아주 잠깐이야.”
“…사, 살…ㄹ...ㅕ...주....ㅅ....허억…허으……읏…!”

사지가 바들바들 떨릴 정도의 고통. 얼마나 강렬한지 태형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렀다.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 눈물이었다. 왜 이런 고통이 나에게 왔을까? 나 왜 이렇게 아프지? 난… 나는 그냥….

대(大)자로 쓰러진 태형의 얼굴 위로 그늘이 진다. 가까이 다가온 강림이 태형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괜찮아. 지금은 말도 할 수가 없을 만큼 괴롭겠지만, 결국 한순간이야. 이 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이제는 눈꺼풀도 깜빡일 수 없는 태형에게 허리를 굽히고 더 가까이 다가온 그가 입을 다시 열었다.

조금 전에 내가 누구냐고 물었지? 내가 누구냐면 말이야.

“널 데리고 올라 갈.”
“…….”
“사자(使者)야”

  


 

 

*





숨이 멎을 것만 같던 고통이 점차 가신다. 꽉 막혔던 시야가 차츰 가시며 태형의 몸이 가벼워진다. 고통에 헐떡이느라 한 번 깜빡이지도 못했던 눈꺼풀의 힘이 스르르 풀리며 스르륵 눈이 감겼다. 감긴 눈꼬리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전신을 태울 것 같던 고통은 대체 뭐였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이제 좀 괜찮으면 일어나지 그래. 낮은 목소리에 태형이 마지못해 천천히 숨을 내쉬며 슬그머니 눈을 뜨자 조금 전, 저를 내려다보며 입을 떼던 그 남자는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다. 이 남자가 뭐랬더라. 사자라고 했던가? 사자? 그게 뭔데?

“그 정도 누워 있었으면 됐어. 얼른 일어나. 갈 길이 멀어.”
“누구신데요….”
“말했잖아. 사자라고.”

아, 원래는 차사라고 해야하지만, 인간들은 우리를 뭉뚱그려 사자라고들 하니. 뭐 같은 뜻이니 상관은 없다. 강림이 갓끈을 고쳐 매며 아직까지도 쓰러져서는 눈만 뜨고 있는 태형을 채근했다. 어서 일어나라니까. 이제는 아프지도 않고 몸도 전보다 가벼워졌을걸? 그의 말이 맞았다. 더는 고통도 없었고 오히려 몸이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태형은 손바닥으로 땅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만요, 제가 지금 헷갈려서 그러는데.

“사자라면… 제가 아는 사자는 어흥 하는 사자랑 또…”
“어흥은 호랑이가 하지.”
“…앗.”
“동물원에 있는 사자는 아니야. 난 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잖아? 그럼 뭐겠어. 남은 다른 하나지.”
“……!”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오뚝한 콧날에 잘 그려진 눈매, 젖어있는 눈망울과 기다란 속눈썹. 너는 아마도 삼신(三神)노인 아랫수가 네 이름을 부를 때. 노인이 딴짓을 하고 있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내아이가 이리 고울 수 있을까. 가만히 태형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강림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생각하는 또 다른 사자.

“그게 바로 나야.”
“그, 그렇다면 그 말은 즉….”
“그래, 넌 죽었어. 육신과 떨어진 혼이라 더는 이승에서 살지 못하지.”

태형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죽음과 저승사자. 그런 건 티비와 영화에서 많이 봤다. 그런데 문제는 티비와 영화에서만 봤다는 것이다. 혹시 이건 꿈인가. 아니다. 꿈이라면 아까 쓰러졌을 때 깼어야 했다. 아, 내가 정말 죽은 건가. 그런 건가. 그러고 보니 남자의 복장도 제가 알고 있는 사자의 이미지와 다르지 않았다.

“설마 이거 몰카예요?”
“몰카? 나 그런 거 할 시간 없어.”
“…나 안 죽었는데.”
“저 아래 사거리.”

자동차랑 충돌했지?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별로 안 다쳤고, 저는 다시 자전거를 타고 올라왔는데요. 꽁알거리는 목소리에 강림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혼이 자전거를 타고 올라온 거지. 죽은 줄도 모르고는. 지금쯤, 네 육신은 인근 병원에 있을걸? 정 궁금하면 함께 병원에 가볼래? 근데 미리 말해두겠는데 정말 시간이 별로 없거든. 그냥 날 따라오면 안 될까? 강림은 태형의 코앞까지 다가와 거의 애원을 하다시피 했고, 태형은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흐윽….”
“어? 야, 왜 울어. 어?”
“흐으, 왜 우냐고요? 그게 지금 할 말이에요? 내가 죽었는데… 허엉… 내가 왜 죽냐고요! 왜!”

스무 살도 안 된 내가 왜 죽어요? 나 아이돌 해야 되는데. 왜 죽냐고요! 이거 다 뻥이죠? 구라치지 마세요. 아저씨 연기자죠? 막 머야 오늘 오디션 보러 가기로 했는데 거기 회사에서 나온 배우죠? 그쵸? 꺼이꺼이 울며 해대는 말이 도통 무슨 말인지. 강림은 영문을 몰랐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시간에 맞춰 저승으로 가긴 글러 먹은 것 같다. 고개를 숙인 채로 어깨를 떨며 오열하는 태형의 얼굴을 들어 올리기 위해 강림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다가 돌연 멈췄다. 

절대로 망자와 접촉해서는 안 돼. 

단단히 일러두던 내명의 목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졌다가 또 가지고 싶어지면 어떻게 해? 이번에는 잘나신 내명도 구제 못 해준다고 했다. 그러나 갈등은 찰나였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을 차사에게도 쓸 수 있다면, 아마도 강림에게 가장 어울리는 옛말일 테다. 강림은 더 고민하지 않고 손을 뻗어 태형의 얼굴을 잡아 들어 올렸다. 홀딱 젖은 채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건만.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자기 죽음을 슬퍼하는 아이를 가만히 보며 강림은 큰일났네…. 하고 작게 읊조렸다. 정말 큰 일이었다.

우는 얼굴도 이리 예뻐 보이니.

“…죽은 너를 다시 살릴 수는 없잖아.”

오늘이 마지막이라 적혀 있는 네 명부를 고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니, 명부 관리자 내명이라면 명부를 고치는 것은 물론 몰래 새 명부를 만들 수도 있지만 그 까칠이 내명이 그 짓을 쉽게 해줄 리가 없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올라가서 대왕들에게 심판받고 새 인간이 되자. 응? 죽는 건 별 게 아니야. 다독이듯 뱉는 말에도 태형은 여전히 울기만 했다. 

이상했다. 죽음이 뭐 별건가. 어차피 죽고 저승에 올라가 왕들을 만나고 나면 인간은 대부분 다시 태어난다. 끝없는 윤회를 거듭하는 인간이 강림의 눈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차사의 일 만큼이나 지리멸렬한 생과 사를 거듭하면서도 인간은 지난 생의 기억은 전부 지우기 때문에 매번 같은 순간에 매번 슬퍼하고 매번 고통스러워했다. 그런데도 또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고자 하는 그 지나친 생의 집착이 강림은 가장 이해되지 않았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고작해야 백 년도 안 되는 짧은 생인데. 그 생 속에서 다른 누군가를 만나 정을 주고 슬픔을 나누고 또 사랑을 한다. 그래봤자 마지막은 결국 이별일 뿐인데. 미련한 것들. 

“…흐으, 어엉, 흐어어어엉….”
“내가 어찌하면 울지 않을래?”
“…흐으, 어엉….”

강림이 젖은 볼을 손바닥으로 꼼꼼하게 훔치며 아이를 어르듯이 말을 건넸다. 좋은 것을 보여주면 뚝 그칠래? 좋은 것이라. 태형이 눈물을 멈추고 코앞에 서 있는 강림의 얼굴을 봤다. 어울리지 않는 갓과 도포 자락. 정말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 조화롭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잘 어울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꽤 귀여워 강림이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것이 뭔데요? 하고 묻는 태형의 물기 서린 목소리를 들은 강림이 태형의 손을 제 팔 위에 살포시 얹었다. 내 팔 놓으면 안 돼. 알았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형의 눈앞에 번쩍, 아주 진한 섬광이 일었고 아주 짧은 사이에 둘은 사라졌다.






*


 

 

 

이승을 떠난 혼은 장소를 옮길 때마다 과거의 기억을 잃는다. 맨 처음 강림과 함께 도착한 화진호(華珍湖) 입구 앞에서 태형은 여섯 살 이전의 기억을 전부 잃었다. 빛나고 보배 같은 호수라 불리는 이곳은 대왕들이 휴양을 즐기는 곳으로 망자를 비롯 차사들도 함부로 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강림은 400년 전 화진호의 한 문지기의 패옥(佩玉)을 몰래 도둑질했다. 패옥만 몸에 지니면 화진호를 들락거릴 수 있었다. 물론 몰래 들어오거나 패옥을 훔친 것을 걸리는 날에는 강림의 직도 내려놓고 1 겁의 시간 동안 인간의 회고록이 담긴 서고를 정리하는 벌을 받을 수 있었다. 해서 강림 역시 패옥을 훔치긴 했으나 이렇게 화진호를 찾는 건 거의 200년 만이었다.

“여기에 발을 넣으면 아름다운 기억만 간직할 수 있어.”
“…….”
“뭐든 네가 좋아했던 것만 떠오를 거야.”

정말 그럴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태형은 제 발을 화진호에 넣었다. 머릿속에 있던 갖가지 기억 중 몇 가지가 발끝으로 쑥 빠져나가는 기분이 아주 잠깐. 남는 것은 강림의 말대로 정말 태형이 좋아하는 기억 뿐이었다. 비록 스무 살을 채 살지 않았지만 그 짧았던 생 속에서 겪은 녹록지 않았던 기억, 슬프고 분노만이 남은 기억. 아프고 외로운 기억. 그런 것들이 모두 발 밑으로 빠져나가고 태형에게는 이제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예쁘고 소중한 기억만이 머릿속에 남게 됐다.

태형이 고개를 돌려 먼발치에 앉아 있는 강림을 봤다. 좋은 것이라 하기에 뭘까 했더니. 결국 태형 안에 있는 것들이었다. 어차피 지워질 것을 알면서도. 그는 태형의 좋은 기억을 짧게나마 곱씹게 만들어 주고 싶던 것이다. 태형이 강림에게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저는 다시 태어나나요? 강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태어나면 지금 가진 기억들은 다 없어지겠죠?”
“기억해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

마냥 그렇지만은 않은 것도 같은데. 태형은 문득 엉엉 울던 저를 달래던 강림을 기억하고 싶어졌다. 뺨을 어루만져주던 손길과 가만히 눈을 맞춰오는 따뜻한 시선 같은 것들. 티비 속에서 수도 없이 봤던 저승사자들은 차가운 냉혈한이며 입술마저 시커멓던데. 이 사자는 그렇지 않았다. 검은 도포 자락에 어울리지 않는 갓을 쓰고는 있지만 입술 만큼은 자신 못지않게 생의 빛깔을 내고 있으며 가진 마음 또한 그랬다. 당신 같은 저승사자만 있다면 망자들이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다고. 태형은 말없이 화진호를 바라보는 강림의 옆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자, 이제 다른 곳에 가볼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강림의 목소리를 들으며 태형은 제게로 뻗어온 오른팔에 팔짱을 꼈다. 팔을 잡을 줄만 알았지 팔짱을 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강림이 흠칫 몸을 떨며 아이의 얼굴을 봤다. 참으로 예쁘다. 너라면…. 너라면은…. 어쩌면 소멸도 달게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강림은 왼팔로 제게 가까이 붙어 있는 태형의 턱을 쥐고 입을 맞췄다. 본능이었다. 고작 입술을 맞댄 것뿐인데. 색의 달큰함이 강림의 몸 안으로 퍼진다. 조금만…. 조금만 더 너를 취해도 될까. 욕심을 내도 될까. 강림은 태형의 팔짱을 풀고 허리를 끌어당겼다. 아이가 도망치지 않는다.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는다.

흐아. 터지는 숨 사이로 입술을 벌리고 자신의 혀를 밀어 넣었다.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려는 따뜻한 혓바닥을 감쳐물고 진득하게 빨아올리며 강림은 태형의 첫사랑을 생각했다. 누가 있을까. 여자였을까. 입은 맞춰보았으려나.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혀로 쓸어 올리자 태형의 어깨가 덜덜 떨린다. 그 반응을 보며 강림은 생각을 멈췄다. 알 것 같다. 누구도 지금 자신만큼이나 태형을 가진 인간이 존재치 않다는 것을. 

“흡, 하!”
“…….”

입술을 떼자 태형이 고개를 들고 막혔던 숨을 터뜨렸다. 풀어진 팔짱 대신 강림은 태형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붉게 달아오른 태형의 눈두덩이에 쪽, 입을 맞추고 말했다. 나와 함께 가자. 대왕들에게 보내지 않을래. 가자, 나 지내는 곳으로.

그러자, 태형아. 






*






강림은 색(色)을 좇는다. 골칫덩어리. 직함이 아닌 이름을 뱉으면 그를 모르는 사자들이 없을만큼 유명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그렇게 입에 오르내리는 사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강림은 색이라면 다 좋아했다. 만 가지 붉은색을 뽐내는 태양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깊은 밤 속에서 노랗게 떠 있는 달마저도. 계절의 색도 좋아했다. 봄이면 만국에 피어나는 형형색색의 꽃, 여름이면 크기를 키우는 나무의 열매, 초록의 내음. 가을이면 한폭의 그림처럼 세상을 뒤덮는 단풍, 겨울이면 소리 없이 내리는 하얀 눈까지. 소리의 색이라면 더 환장했다. 미풍에 잎들이 부딪치는 소리, 꽝꽝 얼었다가 녹아서 흐르는 냇가에 흐르는 물소리, 타닥타닥 마른 나뭇가지가 불에 타는 소리….

그랬던 강림이 저승의 골칫덩이가 된 것은 인간이 가진 황홀한 색을 알아버린 순간이었다.

망자들의 잊은 기억을 비춘다는 망영로(忘瑛路)는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가장 큰 거리였다. 망영로 안쪽에는 내명이 지내는 명부처(命簿 處)가 있다. 강림은 태형이 망자라는 것을 들킬까 봐 태형에게 제가 쓰고 있던 갓을 씌우고 도포를 입혔다. 나는 이런 거 싫은데. 작게 인상을 쓰는 태형을 보며 강림은 더 좋은 옷을 입혀주겠다고 약속했다. 모두 다 나처럼 입고 다니는 건 아니야. 저승도 이승과 다르지 않게 다양한 옷이 많았다. 내명만 하더라도 잘 맞춘 서양식 복장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코트를 입고 다녔다. 강림 또한 그럴 수 있으나 그는 그저 귀찮아서 100년째 복장을 바꾸지 않는 것뿐이었다.

섬광을 타고 공간을 넘어온 순간 태형은 열두 살 때까지의 기억을 잃었다. 좋은 기억만 남아 있었던지라 아쉬웠지만, 부지불식간에 잊히는 것이라 어쩔 수 없었다. 바삐 걸음을 옮기던 태형은 망영로의 사자들을 구경하며 문득 궁금함이 일었다.

“사자님, 사자님도 이름이 있나요?”
“그럼. 있지. 강림.”
“그게 이름이에요?”
“아니. 이름은 아니고 직함.”

직함이라면, 또 다른 강림이 있다는 것이에요? 태형의 물음에 강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좁은 골목 사이로 태형을 밀어 넣었다. 건물과 건물 틈 사이로 얼마나 걸었을까. 오른쪽으로 끝도 없이 이어진 담벼락이 나타났다. 명부처의 담벼락이었다. 담을 따라 걷는 강림의 걸음이 그제야 느려졌다. 

휴, 여기까지 들키지 않고 무사히 왔다. 아마 지금쯤 난리가 나도 한참 났을 텐데. 그러나 강림은 이왕 태형을 이리 데려왔으니 더는 앞일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봤자 잡히면 자신은 소멸이다. 잡혀서 소멸당하기 전에 태형과 함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강림은 답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답을 마련해줄 이는 딱 한 명. 강림은 지금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내명이라 불리는 명부차사. 

강림의 옆에 바짝 붙은 채로 같이 걷는 속도를 맞추던 태형이 다시 입을 뗐다. 직함 말고요, 이름. 이름 알려주면 안 돼요? 그 간절한 청에 대문 앞을 지척에 두고 걸음을 멈췄다. 내 진짜 이름이 알고 싶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입도 맞췄는데.”
“…….”
“그냥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어차피 제가 다시 인간이 되면 기억도 못 할 거잖아요.”

흐음. 강림이 미간을 찡그렸다. 어쩐지 알려주고 싶지 않아졌다. 기억도 못 할 건데 알아서 뭐 해? 가느다란 눈매로 태형을 흘깃거리기까지 했다. 아씨, 이게 아닌데. 이런 말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단단히 토라졌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태형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입 한 번 또 맞추면 이름 알려 주실래요? 아니면 그보다 더 한것을 해도…. 아 근데 아직 성인이 아닌데 괜찮을까요? 뭐 저승에서는 상관이 없…나?

혼자 북치고 장구까지 치는 걸 보며 강림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려던 바로 그때였다. 큰 대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급하게 튀어나왔다. 무릎까지 오는 코트를 입은 내명이었다. 대문 앞을 두리번거리던 내명이 강림을 발견하고는 화가 난 얼굴로 다가왔다. 그 엄청난 기세에 한껏 쫄아버린 태형은 강림의 뒤로 제 몸을 숨겼다. 

“…너!”
“형, 나 일 쳤어.”

그것도 형이 가장 걱정하던 그 미친 짓. 그걸 내가 또 해버렸어. 숨길 것도 없이 제가 한 짓을 줄줄 늘어놓는 강림의 목소리에 내명은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내보내자.”
“그랬으면 여기까지 데려오지도 않았어.”
“…….”

미간이 움푹 팬 내명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대체 난 이승에서 무엇을 그리 잘못하였기에 이곳에서 저 못된 녀석의 뒤치다꺼리나 해주고 있는 것일까. 내명은 말없이 홀로 끙끙거렸고 강림은 다과가 담긴 그릇을 태형에게 밀어주었다. 진짜 먹어도 돼요? 이상한 거 아니죠? 의심이 많은 성격까지 예뻐 보이니 강림은 이제 제가 정말 갈 때까지 갔다고 느껴졌다. 

“…나 정말 큰일났구나.”
“네?”
“아냐, 먹어. 다 먹어. 많이 먹어.”

괜찮으니까 먹어, 모자라면 더 가져다줄게. 제 것도 아니면서 생색을 내는 꼴을 보며 분통이 터진 내명이 주먹으로 탁상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곧장 앞으로 다가간 내명이 다과 그릇을 쥐고 있는 태형의 손목을 잡아 눌렀다. 아이가 까무룩 눈을 까뒤집으며 정신을 잃었다.

“으휴, 성질머리하고는.”

잠들어 버린 태형을 품 안에 안은 강림이 내명을 올려다보며 쯧쯧 혀를 찼다. 그 뻔뻔한 낯에 내명이 빽 고함을 질렀다. 너는 지금 그게 할 소리야?!

“너 정말 이렇게 큰 죄를 짓고도 무사할 것 같아?!”
“그니까 형한테 온 거잖아.”
“야!”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한 번만 도와줘. 알잖아. 이것만 도와주면 형도 내게서 자유라는 것을.”

강림은 태형이 입고 있는 도포 자락을 들추고 명부를 꺼내 내명에게 내밀었다. 태형의 것이었다. 도와달라는 것이 무엇인지 내명은 모르지 않는다. 아니,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더 화를 내게 되는 것이다. 망자를 인도하지 않고 몰래 빼돌렸다. 그것도 모자라 탐했다. 그 죄를 물으면 태형을 이곳에 둔다고 해도 강림은 여기에 있지 못한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하나. 태형을 다시 인간으로 윤회시킨 뒤….

“네가 감히 대왕들을 속이고 인간이 되려고 해?”
“형이 만들어 주면 되잖아, 내 명부.”
“아서라, 왕들이 그것을 모를까.”
“알아도 돼. 가서 잘 얘기하면 되니까.”
“가당치도 않은 소리.”

내명이 콧방귀를 뀌었으나 강림은 자신 있었다. 갈 데가 없이 헤매는 망자를 구원하는 지장대왕을 만나 심판을 받고 좌도대왕에게 심사를 받으면 된다. 물론 지은 죄가 커 저를 호시탐탐 주시하고 있는 염라대왕을 만나게 된다면 필시 소멸행이겠지만. 강림은 평소 운이 좋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제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색을 탐해왔지만 한 번도 소멸까지 가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분명 그럴 것이다. 

“형, 나는 수없이 인간의 색을 탐했지만 단 한 번도 그 망자를 따라 인간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
“…….”
“근데 이 아이는… 달라. 느낌이 그래.”
“…….”

아주 긴 시간 동안 내가 이 아이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는 느낌이 들어. 수없이 오래 차사 일을 해오면서도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왜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에 이 아이를 만나게 된 걸까. 색사도 아니고 고작 입맞춤 한 번뿐이었어. 근데 이 아이의 입안으로 혓바닥을 밀어 넣던 바로 그 순간에 차사직을 모두 내놓고 소멸도 불사할 생각까지 드는 건 왜 그런 걸까. 강림이 잠이 든 태형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느릿하게 물었다. 이런 걸 뭐라고 하는지 형은 알아? 

“…….”
“나는 알아.”
“…….”
“인간들이 자신의 생을 다 해서 하는 그 ‘사랑’.”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인간의 단어를 말한다. 사랑. 강림은 가장 아름답지만 불완전하며 절대로 영원할 수 없는 인간의 진짜 색에 빠져 바리고 만 것이다. 그것만큼은 절대 모르기를 바랐건만. 내명이 깊은 한숨을 터뜨렸다. 어쩐지 끝이 보인다. 네 차사직의 결(結). 그리고 나와 너의 끝 말이다. 

이제 정말 강림을 보내주어야 할 때였다. 







*






강림의 짓을 염라가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파랗게 질린 내명이 강림과 태형이 있는 방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다. 지금 염라의 판관들이 너와 이 아이를 데리러 오고 있어. 그러니 어서 여기를 떠나야 한다. 다급한 내명의 말에 강림이 태형의 귓불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꼭 감겨 있던 태형의 눈이 뜨였다.

“태형아, 이제 가야 해.”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태형을 일으킨 강림이 벗어두고 있던 제 도포를 다시 입혔다. 태형에게 새 옷을 입혀주겠다고 했는데. 지키지 못했다. 이렇게 될 거였으면 진작 깨울 것을 그랬다. 깨워서 입이라도 한 번 더 맞출 것을 그랬다. 아쉬운 마음으로 이번엔 갓을 씌우려고 하자 내명이 그 손을 치워내고는 강림의 품에 명부 하나를 던졌다. 강림의 이름으로 된 것이었다.

“아이는 여기에 두고 너 혼자 가.”
“…….”
“네 명부를 만든 것이 나라는 것을 대왕이 알면 난 기름지옥에 가겠지.”
“…….”
“그러니 절대로 들키지 마. ”
“…….”
“얼른 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명부를 손에 쥔 강림이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이나 걸어갔을까, 난데없이 멈춰서더니 곧장 몸을 돌려 태형의 앞으로 다시 다가와 무릎을 꿇어앉았다. 잠에 취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태형을 올려다보던 강림은 손에 쥐고 있던 명부를 눈앞으로 내밀며 다급하게 말했다.

“잘 들어, 이건 내 이름이야.”
“…….”
“내 이름은 윤기야. 민윤기.”

이게 내 진짜 이름이야. 강림이기 이전에 나는 줄곧 민윤기였고 앞으로는 쭉 태형이 네게 민윤기가 될 거야. 다음 생에도, 그 생을 넘어선 또 다른 생에서도. 나는 너한테 민윤기야. 그의 말에 태형은 한자로 적혀 있는 閔玧基 세 글자를 눈에 담고 머릿속에 담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새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 잠에 들었다가 깨어난 태형은 열여섯 살까지의 기억을 모두 잃었다. 잘 외워지지 않는 한자를 보며 태형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나 한자 잘 모르는데. 다시 태어나도 사자님의 이름을 내가 기억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게 지워져서 몰라 보면 어떻게 해요? 나는 사자님이 좋은데. 사자님과 입 맞춘 기억도 사라지면 어떻게 해요? 그 말에 참을 수 없다는 듯 윤기가 태형을 와락 끌어안았다. 

“기억 안 해도 돼.”
“…….”
“내가 널 기억 할 거니까. 기억해서 반드시 네 옆에 있을 테니까.”
“…….”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 꼭.”

울먹이느라 떨리는 태형의 입술에 윤기가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이내 밖으로 사라졌다. 입술에 닿았던 따뜻한 온도를 느끼며 태형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제 명부를 든 내명만이 눈앞에 있었으나 태형은 이제 죽음이 슬프거나 아프지 않았다. 그가 없는 저승 또한 두렵지 않았다. 완전히 기억을 잊는 것도 초조하지 않았다. 이생에서 다 하지 못한 사랑이 다음 생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민윤기.
그가 다음 생에 옆에 있을 거니까. 







*








지금 숙소에 새 연습생 오고 있어. 멀리서 오는 거니까 다들 잘 대해 줘라. 호범의 말에 티비를 보고 있던 정국만이 네, 하고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준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고 호석은 가족과 통화 중이었다. 이번엔 오래 버텨야 할 텐데. 통화를 마친 호석이 혼잣말을 했다. 이 좁은 숙소에 거쳐간 사람이 대체 몇 명인지 모른다. 누구나 다 부푼 꿈을 안고 숙소에 들어오지만 언제 데뷔를 할 수 있을지 미지수인 상황 속에서 버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누가 새로 들어오면 있던 연습생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러기를 몇 번. 이제 이들에게 첫인사는 잘 지내보자가 아니라 잘 버텨보자가 됐다. 과연 새로 들어오는 아이는 잘 버틸 수 있을까.

남자아이들만 살아서 그런지 난장판이 된 거실을 대충 치우는 매니저에게 남준이 물었다. 근데 어디서 오는 거래요? 듣기는 했으나 지역명이 헷갈리는지 호범은 어디더라, 대구였나. 거창이었나. 부산은 아니었는데. 어렴풋이 들은 지역명을 모두 뱉어냈다. 오, 경상도. 좋지. 정국이도 경상도잖아? 허리를 세우고 정국이의 어깨를 쥐며 말을 뱉을 때였다. 띵동. 숙소의 벨이 울렸다. 

“어, 왔나 보다!”

거실에 있는 아이들이 벌떡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갔다. 낯가림이 심한 정국은 호석의 등 뒤에 섰고 남준이 문을 열었다. 열린 문밖으로는 남준보다 작은 키의 아이가 경직된 얼굴로 서 있었다. 얼굴은 까맣고 눈은 땡그랗다. 똘망똘망한 얼굴을 한 아이가 세 명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연다. 저, 여기가…. 빅히트 숙소… 맞나요? 경상도 사투리에 호석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맞아, 맞아. 들어와! 여기야! 

잘 대해 주라는 매니저의 말대로 둘은 제법 거창하게 환영 인사를 했다. 정국은 여전히 호석의 등 뒤에 서 있기만 했다. 얘가 낯을 좀 가려. 그것도 많이. 우리한테 아직도 가려. 그래도 셋의 인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소년은 방싯방싯 웃으며 들고 온 캐리어를 현관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름이? 김태형이요. 나이가 어떻게 돼? 아 저 95년생이요. 오, 정국이보다 두 살 형이네. 어디서 왔어? 저 대구…. 대구였어? 거창 아니고? 아 거창도 맞아요. 중학교 때까지 거창에서 살았거든요. 근데 왜 이제 왔어? 아… 버스가 막혀가지고 조금 늦었어요…. 그런데 숙소에서 지내는 분들은 세 분이 다인가요?

궁금한 건 다 물어보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남준이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아니, 한 명 더 있는데. 올 때 다 됐어. 하고 말을 끝마치던 바로 그때였다. 삐, 삐. 삐빅. 삑. 삑. 현관의 비밀번호가 찍히고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교복을 입은 소년이 들어온다. 

“여기 왔네, 형. 인사해요. 새 연습생 왔어요.”
“안녕하세요.”
“어, 안녕.”

신발을 벗는 소년은 서 있는 사람을 보지 않고 대충 손을 흔들었다. 저 형이 여기서 나이 제일 많아. 호석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데 그제야 고개를 든 소년이 캐리어를 만지작거리며 인사를 할 타이밍을 보는 태형과 눈을 마주쳤다.

“…….”
“…….”

얼마나 말없이 시선을 나눴을까. 먼저 성큼 다가온 소년이 태형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름이 뭐야?”
“저는 태형이요. 김태형.”

지리멸렬했던 여름이 가고 바람이 시원해지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나는….”
“…….”

벽지도 화장실도 베란다도. 온통 파랗기만 하던 그 작은 집에서. 

“나는 민윤기야.”

둘은 다시 만났다. 


 

 









난데없는 생각 하나로 시작된 이야기로 고증이나 참고 문헌은 1도 없는 얼렁뚱땅 저승 로맨스입니다. 강림은 강림차사에서 따왔고 내명은 명부차사에서 따왔습니다. 더 자세한 설명은 생랴..ㄱ..할게요... 왜냐면 걍 지어서 썼거든요... 그냥 쓱 읽어주시고 귀엽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않으면 게티가 쫌 부끄러울 것 같으니깐...! 아무튼요, 여러분들 오늘 하루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오늘 하루는 반드시 행복할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올해도 이렇게 글로 네 생일을 축하해본다.
태어나줘서 고맙다. 민윤기.
너를 사랑하는 나의 진심이자,
너를 사랑하기 위해 어쩌면 차사를 포기하고 정말 인간이 되었을 그 누군가를 대신하여.

 

세렝게티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