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행을 하신 이유가 뭐죠? 상대방은 전치 14주가 나왔습니다. 타당한 이유가 없다면 합의하시지 않는 이상 소송이 걸릴 텐데-”


“호시 씨! 호시 씨, 잠깐 여기 좀..!”

 

웅- , 웅- , 소리가 울린다. 분명 많은 말들이 오가는 것 같은데.

 

“...윽.”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아.

 

“누나.”

 

헉..혼란을 비집고 들어온 차분한 목소리에 잠에서 깬 듯 맑아졌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결심을 굳힌 듯 단단한 얼굴이 보였다.

 

“괜찮아. 조사 받고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여행 못 가게 돼서 미안해.”

“....너는..?”

“내 걱정 말고. 기자들 피해서 조심해서 나가. 매니저 형한테 부탁해놨어.”

 

그 단단한 얼굴이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지켜낼 거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조금은 안심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권순영 씨!”

“네. 얼른 가. 이따 보자.”

“..응.”

 

멀어지는 등이 어쩐지 너무나도 크고 든든해보여서, 그래서 얌전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지켜지는 입장이 된 것이 뼈가 저릴 정도로 잘 느껴져서.

 

“권순영!! 너 이 빌어먹을 새끼가!!!”

“니가, 니가 감히 우리 아들을 이 꼴로 만들어놔?!?!”

“..! 수, 순영-”

“얼른 가, 누나.”

“.....”

“빨리. 굳이 험한 꼴 볼 필요 없잖아.”

 

그래서..

 

“야, 너 잘 만났다. 니가 이렇게 만든 거지? 니 년이 시킨 거잖아!”

 

짜악-!

 

그래서 더더욱 도망치기 싫었다.

 

“..그만해요. 제발.”

 

..비록 비로소 마주한 그리움이 저를 갈기갈기 찢어먹을 아픔을 안겨준다고 해도.

 

家族になってください

가조쿠니 낫테쿠다사이

 

09화. 우리는 행복을 찾고 말 거야.

 

“..형수님네 가족은 어쩌다 그렇게 된 거냐.”

 

그날 저녁. 지혁이 일을 수습하러 돌아가고, 지훈은 그 집에 남았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 밤이 될 때까지 입술만 달싹이더니 잠시 깨어났던 여주가 잠에 들자(순영과 지혁, 지훈 세 사람은 잠에서 깨자마자 울먹이는 여주를 달래서 밥을 먹이고 다시 재웠다.)조심스레 물어온 것이다.

 

화목한 집안의 막내로 자란 그에겐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끔찍한 일이고, 다른 세계의 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가족 아니야.”

“..! 알았다, 알았어. 그럼..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된 건데. 형수님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냐.”

“궁금해?”

“어.”

 

그렇지만, 그렇기에 이번 일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는 것일 테다. 순영은 불타는 듯이 보이는 지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어 대답했다.

 

“뻔하지, 뭐. 원래 그렇게 되먹은 인간들이었어. 누나 잘못 같은 건 없었고, 누나를 품기엔 너무 작은 그릇이었을 뿐이야.”

“..그러냐. 하긴, 그런 것 같다.”

 

지훈과 순영의 시선이 동시에 여주가 잠들어있는 그 방으로 향했다. 폭신한 이불에 파묻혀서 곤히 자고 있을 사람. 그 사람의 뺨은 붉은 자국이 남아있었고, 잔뜩 부어올라 있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알아서..

 

“그 인간들이 사람이냐.”

“단 한 번도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


순영과 지훈의 소속사, JJ컴퍼니는 그 다음날인 1월 2일에 곧바로 정정기사를 냈다. 사실 조금 더 빠르게 대응을 했다면 좋았겠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그게 최선의 최선이었다면서 지혁은 우울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유명 연예인의 논란, 더구나 폭행 사건은 그리 쉽게 뒤집을 수 없는 것이라(매니저는 무얼 하고 있었냐, 그렇다고는 해도 폭력은 좀 아니지 않냐, 너 같으면 스토커가 다가와서 매니저까지 건드리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냐, 같은 여론이 계속 엎치락 뒤치락했다.)순영은 1월 중순까지 온갖 악플과 억측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정작 순영을 괴롭게 한 것은 무분별한 악플이 아니라, 여주의 존재를 알아내려는 기자들과 소수의 사생들이었다.(지혁과 지훈은 업보라며 놀리려다가 퀭한 얼굴을 보고 바로 그만두었다. 자기가 판 무덤이라지만 좀 짠해서.)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전혀 다른 것이었고.

 

“어, 형.”

 

1월 2일 밤. 정확히는 새벽이었던 시간에 순영에게 전화를 건 지혁은 마지막으로 확인을 하겠다고 했다.

 

[정말 괜찮겠어? 네가 이렇게 하겠다고 했으니까, 네 뜻에 따를 뿐이긴 하지만 제수씨에 대한 건 최대한 숨기는 게 좋지 않을까? 너 아직 데뷔한지 1년도 안 됐고, 또..일반인이잖아, 제수씨는.]

 

지혁은 걱정이 가득한 소리로 재차 물었다. 순영의 뜻은 존중하지만 연예인이, 그것도 데뷔한지 1년도 안 된 20대의 연예인에게 배우자가 있다는 소식을 밝히는 건..너무 큰 도박이었으니까. 심지어 순영은 아직 여론이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도박을 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순영의 뜻은 확고했다. 아마도 얼굴을 보고 있었다면 눈도 깜빡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아. 하지만 이게 최선이야. 누나랑은 전부 이야기했고, 그리고...그 인간들이 쓰레기라는 거. 그래서 내가 그런 거라는 거. 알리고 싶거든. 난 잘못한 거 없다고 이야기하고 싶어.”

[정정기사 냈잖아. 네 스토커고, 가정폭력범이라서 제수씨..아니 매니저한테까지 음담패설하고 손대려 해서 그런 거라고. 이거로 충분하다고 보는데, 나는.]

“음..솔직히 말하자면, 형.”

[어.]

 

아마도 이 상황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순영은 한숨을 한번 쉬더니,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했다.

 

“더는 숨기고 싶지 않아.”

[..뭐를?]

“모든 걸.”

[야..]

“물론 가수는 내 오랜 꿈이었고, 내 팬들도 너무 사랑하고 고마워. 하지만 그 전에 권순영이라는 사람의 삶에는 누나가 있어. 내 꿈의 시작도 누나였고, 가수 이전에 내 꿈은..여주 누나랑 결혼하는 거였으니까.”

 

지혁은 그 순간만큼은 순영이 27살의 가수가 아닌, 그저 사랑하고 있을 뿐인 27살의 청년으로 보였다. 가수 이전의 삶. 자신의 꿈에 최선의 최선을 다하는 순영의 입에서 나온 한 인간으로서의 말은, 그만큼 특별한 것이었다.

 

[알았어, 그럼. 대신 책임은 제대로 져야 해. 알았지, 권순영?]

 

..응. 고마워, 형.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애정 섞인 걱정의 말. 그게 너무 좋아서, 순영은 그날 처음으로 지혁에게 동생처럼 굴었다. 애교도 잔뜩 부려가면서.

 

[야, 오글거려! 하지 마, 인마!]

“에이, 좋으면서~ 아, 혀엉~”

[야! 나참..못 말려, 진짜. 으이그.]

“히히.”

 

낯선 목소리와 태도가 참 어색했지만 그래도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지혁도 실없이 웃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월 3일. 오전 9시. 순영은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온갖 질문이 쏟아졌지만 순영은 딱 하나의 질문에만 대답했다.

 

“이번 폭행 사건에 대해 호시 씨의 구체적인 입장을 듣고 싶습니다! 연예인의 신분으로 그런 무모한 짓을 하신 이유가 뭐죠?”

 

다소 무례한 질문이었으나 순영에게 꼭 필요한 질문이었기에 퍽 만족스러웠다.

 

“그 사람이 제 소중한 사람을 괴롭히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사람..? 그 누가 들어도 오해할 수밖에 없는 단어 선택에 기자들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순영은 저 멀리서 긴장한 얼굴로 서있는 지혁과 지훈을 한번 바라보고, 심호흡을 했다.

 

“저에게는 결혼한지 5년된 아내가 있습니다. 이번 사건은 아내를 괴롭게하는 사람들에 대한 복수였을 뿐입니다.”

 

웅성웅성..소란스러움이 더 커졌지만, 순영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자리서 일어난 순영이 단정한 차림의 수트를 탁탁, 털어 정리하고는 꾸벅, 하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자세한 내막은 소속사를 통해 정리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번 기자회견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뚜벅뚜벅, 온갖 소란스러운 말을 뒤로 하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순영은 ‘연예인’ 그 자체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빛을 잃지 않는 별. 호시 말이다.

 

**


“아, 누나. 다 됐어. 멍 거의 다 빠졌네. 다행이다.”

“응.”

 

1월 중순. 여론도 잠잠해지고, 순영과 여주의 반강제 칩거(?)생활도 끝나갈 쯤이었다. 2주일 이상 연고를 발랐더니 여주의 뺨에 있던 붉은 자국과 멍은 거의 사라졌다. 여주는 다행이라며 웃는 순영을 바라보며 같이 미소 짓다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순영아.”

“응?”

“미안해.”

 

..어? 연고통을 정리하던 순영이 우뚝, 멈춰섰다.


삐걱삐걱,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굳어버린 순영이 연고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여주를 와락 끌어안았다.

 

“왜, 왜 그런 말을 해? 누나 어디 아파?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그냥 나 때문에 순영이 네가 괜한 일을 겪은 것 같아서. 사과를..하고 싶었어.”

“.....”

 

순영이 고개를 들어 여주를 바라보았다. 많은 것을 생각한 듯 고요한 눈을 하고 여주는 순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영은 괜히 불안해졌다. 아직 전하지 못한 마음이 있는데. 아직 하지 못한 말도 있는데.

 

“누나..”

 

이미 전부 공표된 사이라지만..그럼에도 순영은 불안했다. 여주는 언제든지 자신을 버리고 휙 떠나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누나가..꼭 떠날 것 같은 눈으로 보잖아..”

“아..”

 

찔린 것처럼 입술을 문 여주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고이기 시작한 눈물에 여주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순영의 눈가를 훔쳐냈다. 내가 가긴 어딜 가. 이제 너밖에 없는데.

 

“으응..하지만, 누나는..아직 나를 가족으로 생각 안 하잖아..”

“뭐..?”

“그렇잖아..그러니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그건..여주가 뭐라고 말을 더 잇기 전에 다시 그녀를 와락 끌어안은 순영이 바들바들 떨리는 팔을 하고서 흐느끼는 소리로 말했다.

 

“가족끼리는 미안하다는 말 안 해. 아니, 한다 해도 그런 표정으로는 절대 안 해.”

“..순영아.”

“난..누나가 나랑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미안해 보다는 고맙다는 말이 좋아. 가족이니까 당연히 도운 것뿐이야. 그런 일에는 미안해 할 필요 없다고. 가족이잖아.”

“그건..”

“가족은 떨어져있지 않아. 아니, 적어도 누나만큼은 그랬으면 좋겠어. 누나는 언제든지 날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무서워.”

 

늘 당당하던 순영이, 어린아이 같지만 그 누구보다 든든한 순영이 제 품에서 아이처럼 흐느끼고 있었다. 여주는 새삼스럽게 순영이 아직 어리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존재가 생각보다 더 그에게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끄럽고, 좋았다.

 

“순영아.”

“.....”

“순영아, 고개 들어봐.”

 

이름을 두어번 부르니 울망거리는 찐빵 같은 얼굴이 보인다. 풋, 하고 웃어버릴 뻔한 여주가 겨우 웃음을 참고 순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불안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하지만 난 널 떠나려는 게 아니야.”

“..그럼?”

 

훌쩍..킁. 있는 힘껏 콧물을 들이마시는 게 왜 이리 귀여워보이는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좀 보기 싫었을 텐데. 그 생각에 여주는 순영의 두 뺨을 쓰다듬었다. 어느새 얼굴엔 미소가 걸려있다. 눈앞의 상대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잠시만 혼자 있고 싶어.”

“그럼 내가-”

“아니. 집에 있는 게 아니라 여행하고 싶다고.”

“...혼자?”

“응.”

 

허리를 끌어안은 팔이 서서히 풀어졌다. 순영은 한참 동안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여주의 미소에 울며 겨자먹기로 수긍했다.

 

“딱 일주일. 혼자 가보고 싶었던 곳 다녀올게. 연락도 계속 할게.”

“응..알겠어. 누나도 좀 쉬어야지..”

“그래. 딱 일주일만 기다려?”

“으응..잘 다녀와, 누나. 그리고 다녀오면 내가 선물 줄게.”

 

그리고 다녀오면 선물을 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더는 그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여주는 어린 남편이(돈 많은 연예인이기까지 한.)뭘 준비하는지 궁금했지만, 자신을 위해 여행을 떠났다. 순영이 한국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혼자 보내는 시간이었다.


끝.


+ 순영의 편지.

 

안녕하십니까, 가수 호시입니다.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많이 놀라셨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처음 좋아한 연예인에게 아내가 있다고 화내실 수도 있고,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실 수도 있고, 그럴 줄 알았다고 하실 수도 있겠죠. 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아내를 통해 가수의 꿈을 꾸었습니다. 어릴 적 그 사람의 말 한마디로 가수를 꿈꿨고, 그 사람이 해준 응원 덕에 5년의 유학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 5년만에 만난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이요.

그래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 아내의 가정은 가족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고통만 가득했으니까요. 

그렇기에, 제 아내는 도망치듯 저와 결혼을 했고 가족에 대한 의미를 잊어버린 채로 살았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어리고 부족하기만한 저를 응원하고,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만든 음악을 들으면 행복해진다고 하셨죠. 제게도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연예인의 신분으로 경솔하게 군 절 비난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가수 호시가 아닌 인간 권순영은 꿈도 사랑도 전부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꿈은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기에 저에게 꿈을, 여러분을 만나게 해준 그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제 사랑을 응원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저와 제 아내의 삶에 가타부타 말을 얹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지는 말아주십시오. 비난은 제가 전부 받을 겁니다. 그 사람은 행복하기만 해야 하니까요.

가수 호시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더욱 자주 여러분을 만나고, 좋은 음악을 하겠습니다. 여자친구, 와이프 자리만 그 사람에게 양보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부족한 가수 호시 올림.

꿈꾸는 일은 즐겁다. 얼렁뚱땅 굴러가는 글방 주인장 & 초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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