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흑. 적흑ts. 키세키흑ts

* 동양풍 제국 AU. 

* GS(TS) 소재: 쿠로코 테츠야 여체화. 

* 주의:
    - 원작 파괴: 완전히 다른 세계관입니다. 인물 이름 및 성격, 관계성 등만 빌려옵니다.
    - 캐붕 요소 포함: 성격적으로는 원작 인물 설정을 최대한 따르지만 뇌피셜+마음대로 원작 설정을 수정했습니다. 특히 키세가 꽤 똑똑합니다. 아카시가 중2병이 아닙니다. 아오미네가 꽤 영민할 수도 있습니다. (...)
    - 인물 관계 날조: 이야기의 흐름에 맞춰 관계가 날조됩니다.
    - 오리지널 캐릭터 多: 이야기에 맞게 오리지널 인물이 다수 등장합니다. 원작에서 본 적 없는 이름은 모두 오리지널 캐릭터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 커플링: 적흑ts, 약 청도
    - 논커플링 흑ts우(쿠로코른):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테츠나입니다.
    - 클리셰 多: 들이부었습니다.
    - 개인 취향만 한가득입니다. 


본 글의 인물과 기본 설정 등은 모두 만화 <쿠로코의 농구>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고로, 해당하는 요소들에 대한 권리는 원작자에게 있습니다. 저는 스토리 및 세계관만!



赤月影 적월영


一章. 揚月雲靑風之香 양월운청풍지향

달구름을 걷는 푸른 바람의 향기 (2)



Written by 시나래


  총 이레 가까이 걸린 여정이었다. 비교적 늦은 오후에 출발을 한 탓도 있었겠지만 낙산을 완전히 벗어나는 데에만 꼬박 만 하루 가까이가 걸렸다. 그 뒤로 양천성을 거쳐 동황성을 지나기까지 각각 사흘과 이틀 가량이 걸리고 나서 그 날 아침에야 겨우 성름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효율적인 경로라고 할 수는 없었다. 무기성을 지나는 것보다는 두 배 이상이나 길어질 뿐만 아니라 양천성 역시 위치적으로는 성름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기에 동황성을 꼭 지나야만 하는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좁고 험한 산길이 대부분인 무기의 지형은 실질적으로 마차가 성하게 버틸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고 양천성에서 성름성으로 넘어가는 길목 또한 산길이 대부분이어서 언제라도 습격이나 사고를 당하기 쉽다는 이유에서 한참을 돌아가도 평지와 사람들의 통행이 잦은 길목을 지나도록 계획한 것이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마마. 이제 한 시진 정도만 더 가시면 된다고 합니다.”

  최종적인 목적지에 이르기 전 마지막으로 거쳐가게 된 성름성 북성동 역참 내 잠시 휴식을 위해 마련된 방을 나서던 때 궁녀 야마베 유우코(山部 優子)가 세이쥬로를 향해 말했다. 궁에서부터 세이쥬로를 모시던 나인으로서 어린 황자의 기운을 북돋아준답시고 애써 밝게 끌어올린 목소리였다.

  세이쥬로는 옅은 미소를 짧게 지어 보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봐야 그보다 넉 살 많은, 아직 어리다고 한다면 어린 소녀였는데. 아마 어린 나이에 입궁한 나인들이 으레 그렇듯 그녀 역시 궁에서의 비교적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꿈꾸며 황궁에 들어왔을 터였다. 그리고 선택의 여지없이 세이쥬로의 처소에 배정되어 아무런 힘도 없는 대군을 모시다가 상전의 운명에 따라 외진 변방으로 쫓겨나다시피 하기까지의 과정 중 그녀의 죄라고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험한 운명이나 세이쥬로를 원망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이 오히려 철저하게 대군의 기분을 그 무엇보다 우선으로 두고 살피는 그 어른스러운 모습에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조금이라도 더 괜찮은 척을 해 보이는 것뿐이었다.

  세이쥬로가 먼저 마차에 오르고 이어서 그의 배동으로 동행하는 미도리마 신타로가(綠問 眞太郞)가 탄 뒤 마차의 문이 닫혔다. 신차로 역시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세이쥬로를 따라 이 고된 여정에 오르게 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동행할 이유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배동이라고는 해도 황족과 함께 교육을 받기 위해서 입궁하여 궁에 머무를 뿐 원한다면 언제든 나가서 제 삶을 찾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궁인과는 그 결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 역시도 가문에게 등을 떠밀리지만 않았다면 여전히 황성에, 제 가족의 품에 있었으리라. 낙산 내에서 높은 명망을 지닌 수덕(秀德)파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미도리마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태생적인 운명만 아니었다면.

  하지만 그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 애초부터 세이쥬로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결국 그 모든 것이,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의 가혹한 운명은 그의 책임이었다. 시기를 잘못 타고 태어나 힘없는 황자로서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업보.

  그의 작은 어깨를 짓누르는 그 죄의 무게처럼 잔뜩 가라앉은 마차 내부는 바퀴의 움직임을 타고 이따금 덜컹거리는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성름으로 오는 그 며칠간의 일정 내내 두 아이들 사이에 오간 말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자신의 일에 말려들게 했다는 책임감과 죄책감 때문에, 그리고 험한 앞날을 향해 나아가는 고결한 이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게 위해서.

  그 고요가 깨진 것은 역참을 출발해 반 시진 즈음 움직였을 때였다. 마차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음이 한바탕 일었다. 흥분했는지 말이 날뛰는 소리와 함께 당황한 중랑장의 목소리, 그리고 고함과 비명 같은 것들이 뒤섞여 들렸다. 그와 동시에 잘 나아가던 마차 역시 급작스럽게 멈춰 섰다.

  “괜찮으십니까, 마마?”

  신타로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이쥬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괜찮다.”

  처음부터 마차는 그다지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갑자기 멈췄다고 해도 몸에 충격이 갈 만큼 강한 힘이 느껴진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마차의 움직임이 아닌 바깥의 소란이었다.

  “네 이놈!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중랑장이 호통을 쳤다.

  “소, 소, 소, 소, 송구합니다!”

  어린 아이인 듯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잔뜩 떨리는 그 목소리만으로도 그 아이가 겁에 잔뜩 질려 있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세이쥬로가 슬쩍 창문을 열었다. 마차의 오른편으로 걷고 있던 상궁 키모토 하루카(木本 春花)와 유우코, 그리고 호위무사인 시로가네 에이타(白金 英太)의 모습이 겨우 보일 정도의 틈 사이로 그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키모토가 창문 가까이 대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것이…. 마을의 아이 하나가 갑자기 말 앞으로 뛰어든 모양입니다.”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은 얼핏 보면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세이쥬로는 그녀의 언짢음을 알아차렸다.

  “네가 지금 감히 누구의 앞길을 막은 것인지는 아느냐!”

  중랑장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창문을 열어서인지 더욱 선명하고 분명했다.

  세이쥬로는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리고 키모토를 향해 말했다.

  “큰일이 아니거든 그만―”

  짜악―!

  날카로운 소리에 세이쥬로와 키모토의 시선이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동시에 움직였다. 주변의 군중 가운데 여럿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유우코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에이타는 최대한 표정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일그러진 미간을 숨기지 못했다.

  세이쥬로의 시야에서는 말에 가려서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손찌검을 하는 소리였고 상황을 고려했을 때 가학을 한 이와 당한 이가 각각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세상에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런 어린애를….”

  행인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잡것이 감히!”

  백성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인지, 그저 무시를 하는 것인지 중랑장의 거친 목소리가 이어졌다. 분이 풀리지 않은 것이 아무래도 아이에게 더욱 난폭한 행동을 할 것 같았다.

  세이쥬로는 창문을 다시 창문을 닫았다.

  “마마?”

  호기심과 긴장이 공존하는 얼굴로 신타로가 그를 보며 말했다. 세이쥬로의 얼굴에서 어떠한 결심의 흔적을 본 것이었다.

  그러나 세이쥬로가 제대로 움직이기 전 새로운 목소리가 마차 밖에서 들렸다.

  “멈추십시오!”

  또 한 명의 아이의 목소리. 그러나 이번 것은 조금 더 높은 것이 여자아이의 느낌을 주었다.

  “넌 또 뭐야!”

  중랑장이 소리쳐 대꾸했다.

  “멈추십시오!”

  같은 목소리가 같은 대답을 했다. 겁을 먹은 흔적은 찾을 수 없이 차분하고 분명한 어조여다.

  “너는 무엇이냐 물었다!”

  아이는 중랑장이 바라는 대답을 할 생각이 없다는 듯 자신의 뜻을 곧장 요구했다.

  “그 아이를 놓아 주십시오.”

  “이 천것이 감히 누구에게 명령을 하는 것이냐! 너도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세이쥬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설마 계집아이에게도 손을 대려는 것일까. 아무리 분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설마 그렇게까지 지나친 행동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왠지 중랑장이라면 충분히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고도 남을 것만 같았다.

  “마마? 무얼 어쩌시려는―”

  신타로가 물었다. 그러나 세이쥬로는 대답을 하지 않고 마차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섰다. 그 주변에 서 있던 몇몇 이들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대부분은 소동을 지켜보느라 바쁜 것 같았다.

  “아니, 설마 아가씨한테도 그 짓을 하려는 거야?”

  구경꾼 중 어딘가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중랑장 앞에 나선 아이를 칭하는 말이었을까. 저자의 백성들이 아가씨라고 칭한다면 아마 어느 귀족 가문이나 부유한 상인 정도 되는 이의 여식이었을 것이다.

  세이쥬로는 천천히 행렬의 앞쪽을 향해 걸어갔다. 

  “이 계집년이 어딜 눈을 똑바로 뜨고―”

  “무슨 일입니까?”

  세이쥬로는 침착하게, 그러나 그의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담은 목소리를 높여 중랑장의 말을 끊었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중에는 당연하게도 중랑장과 그에게 저고리 깃이 붙잡힌 여자아이도 있었다. 유일하게 그를 돌아보지 않은 것은 땅바닥과 혼연일체를 이루는 바위처럼 몸을 굽은 채 웅크리고 있는 한 사내아이 뿐이었다.

  그가 중랑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정말로 무슨 상황인지를 알고 싶어 던지는 질문이 아니었다. 이미 그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정황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을 뿐더러 그의 가혹한 행위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명이나 이유도 듣고 싶지 않았다.

  중랑장은 자신이 붙잡은 그 여자아이를 내보이려는 듯 쥐고 있는 아이의 옷깃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연약한 어린아이가 아닌 어떠한 물건이나 짐승을 취급하는 듯한 그의 몸짓에 세이쥬로의 불쾌함은 더욱 강렬해질 뿐이었다.

  “이 천한 것들이 감히 마마의 행차를 방해했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높으신 분의 행차에 결례를 범한 것은 송구합니다.”

  여자아이가 말했다. 딱 봐도 작고 가녀린 체구에 옴짝달싹도 못하도록 중랑장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중랑장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세이쥬로 역시 그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여자아이는 중랑장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을 이어갔다.

  “하오나 그것은 어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고로 덕이 있는 사람은 모든 만물의 생명을 귀히 여긴다 하였습니다. 저희가 비록 예에 어긋났다고는 하나 사람이 만든 예보다는 당장 눈앞의 생명 하나가 귀하지 않겠습니까.”

  조목조목, 마치 처음부터 준비가 되었던 것처럼 막힘도 망설임도 없었다. 

  “닥쳐라! 네가 지금 누구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야! 누가 널 더러 변명을 늘어놓으라 했느냐! 어린 것이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영감!”

  세이쥬로가 외쳤다. 중랑장은 다소 불만스러운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울 일은 아닌 듯합니다만.”

  “아닙니다, 마마.”

  중랑장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이런 변방의 작은 마을의 뭣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하나 금위대의 앞을 가로막고 황제 폐하의 군을 욕보인 아이입니다. 일벌백계를 하여 그 누구도 군을 욕보이지 못하도록 기강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듣기에는 그럴싸하게 들리도록 만들어낸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반대로 말하면 대군의 명령을 들을 생각이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오히려 그를 가르치려는 듯한 어조가 얼마나 그를 멸시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세이쥬로의 온몸 구석구석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이 아이가 나으리의 행보에 방해가 된 것은 사실이오나 그것이 군의 기강을 욕보였다 하시는 말씀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 아이에게는 그러한 의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여자아이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금위대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이 나라 백성을 지키는 군사라 들었습니다. 하온데 스스로 금위대라 칭하시면서 어찌 백성에게 손찌검을 하신단 말입니까?”

  중랑장이 잔뜩 분에 찬 얼굴로 여자아이를 노려보았지만 그의 움직임에 주춤 제동이 걸렸다. 스스로도 무언가 걸린 것이었다. 그 빈틈을 노리는 것처럼, 그러나 동시에 별다른 노림수가 없는 것처럼 곧은 생각을 이어 쏟아냈다.

  “지인수걸출 불능등천(地人雖傑出 不能登天), 땅 위 사람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스스로 하늘 위로 오를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그 존재가 동등합니다.”

  여자아이는 말하는 내내 단 한순간도 여유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그 안정감이 그녀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은 중랑장과 그의 부하보다도 훨씬 더 어른스럽고 성숙한 면모를 자아냈다.

  “신분의 높고 낮음이 사람의 존재 가치를 판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바로 그 사실을 알고 도리와 가치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사람은 사람을 짓밟을수록 사람이 아니게 되는 법입니다.”

  세이쥬로는 그 아이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낙산은 물론이고 동황과 양천을 지나면서도 얼핏 보았던 길거리의 일반적인 평민 아이들의 모습과 비교하면 훨씬 깨끗하고 단정한 차림새를 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아가씨라는 호칭이 붙을 만큼의 신분적인 타당성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외양에서 귀족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높은 값을 매길 수 있는 부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입고 있는 옷도 비단이 아니라 무명천인 듯 보였고 값비싼 장신구 하나 없이, 그나마 장신구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유일한 물건인 붉은색 댕기마저 저자에서 쉽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한 생활규모라면 분명 일개 지방 관리나 부유하지 못한 지방의 소귀족 집안일 것이었다.

  그런 아이가 나라의 중앙군, 그것도 황궁과 황성의 안전을 담당하는 금위대의 지휘관 급의 성인에게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 당장 그녀 자신은 물론이고 그녀의 집안까지도 완전하게 짓밟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충분히 가진 자에게.

  물론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잘못을 범한 것은 분명 중랑장 쪽이었다. 그 아이가 한 말 속에 옳지 않거나 정상적인 사고로 납득하지 못할 내용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의 이치에 맞게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은 그것을 판별하는 것만큼이나 쉽게도 구부러지는 법이었다. 그러한 이상적이고 고고한 가치 같은 것도 당장 육체의 생존이 걸린 상황에서는 뒷전이 되어 버리니까. 다른 이에게, 그것도 당장 스스로에게 직접적이고 강도 높은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에게 그 행동을 지적하는 행위는 곧 둘 중 하나의 경우를 의미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스로와 가문의 존폐까지도 내걸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용기가 있거나 그런 일의 결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거나.

  “뭐라? 네가 지금 날 더러 짐승이라 하는 게냐!”

  역시나 더욱 자극을 받고 만 중랑장이 한층 더 언성을 높였다. 그럼에도 여자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았다. 잘 보이지도 않는 그녀의 얼굴과 눈빛, 아니 그녀의 몸집 전체에서 오기에 가까운 강인한 의지마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절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비록 한낱 보잘 것 없는 마을의 어린아이라 하나 자신을 던져 더 작은 자를 보호하려 하는 높은 뜻을 가진 아이입니다. 헌데 그 아이를 단순히 신분이 천하다는 이유로 멸시하고 손을 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중랑장의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비어 있던 그의 반대쪽 손이 꽈악 오므라들어 주먹을 쥐었다.

  “무엇이 어째? 네가 감히―”

  천천히 손을 당기며 들어올리는 것에서 무언가 위험한 기운이 풍겨 나와 세이쥬로의 살갗에 닿았다.

  “영감!”

  그가 다시 한 번 중랑장의 말을 잘라 버렸다.

  “이만하면 충분히 소란을 피우지 않았습니까. 이만 아이들을 보내주고 갈 길을 서두르도록 하시지요.”

  그는 그러한 자신의 뜻을 분명히 내비치려는 듯이 마차에 오르기 위해 돌아섰다.

  “하오나 마마―”

  “지금 이러한 행동이 오히려 폐하의 군을 욕보인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세이쥬로가 그를 노려보듯 곁눈을 흘겼다.

  “황제 폐하를 모신다는 군인이 되어 힘없는 아이에게 분풀이나 하는 것이 정말로 금위대의 군관으로서 백성들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이란 말입니까.”

  특별히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으나 그의 분위기에 짓눌린 것인지 길 위에 있던 그 어느 누구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완벽한 고요 속에 중랑장은 부끄러움과 분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손에서 여자아이의 옷깃이 스르륵 풀려 나왔다.

  무리 진 사람들 틈에서 유우코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소녀 한 명이 달려 나와 여자아이의 얼굴과 매무새를 살폈다. 그리고 무언가 말을 하는 듯하더니 급히 그녀를 이끌고 사람들 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 뒤에 여자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 셋이 쭈뼛쭈뼛 걸어 나와 바닥에 엎드려 있던 아이를 부축해 일으키더니 여자아이가 사라진 방향으로 군중 틈에 섞여들었다.

  세이쥬로는 길 한복판에 서 있는 중랑장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한 번 던진 뒤 다시 마차의 입구를 향해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 마음을 정확히 읽어낼 수는 없어도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은 분명 분노와 수치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었다.

  마차의 문 앞에는 신타로가 서 있었다. 세이쥬로를 따라 내려 놓고는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그곳에서 눈치만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마.”

  무언가 말을 잇지 못하는 신타로를 향해 세이쥬로는 가벼운 눈길만 한 차례 던져 주고는 그를 지나쳐 먼저 마차에 다시 올라탔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신타로 역시 재빨리 마차에 오르며 문을 닫았다.

  잠시 생각을 하던 세이쥬로가 마차의 창문을 다시 한 번 열었다.

  “에이타.”

  그의 부름에 그의 호위무관이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열 여섯의 나이인 그는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걸쳐 있는 듯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예, 마마.”

  그가 대답했다.

  “아까 그 아이, 누구인지 좀 알아봐 줘.”

  세이쥬로가 명령했다. 구체성이 떨어지는 지시에도 에이타는 단번에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그 역시도 세이쥬로가 의미한 것이 그 여자아이였음을 눈치 챈 것이었다.

  세이쥬로는 다시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조금 전 보았던 그 여자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밝은 하늘빛의 머리카락은 그 빛깔 때문인지 더욱 부드럽고 여린 분위기를 주었다. 그리고 하얀 피부에 작은 체구. 정확한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어도 또래 아이들보다 크지 않은 몸집을 가진 것은 분명했다. 그녀 정도라면 중랑장이 팔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그대로 날려 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겁이 없이 그에게 정면으로 맞서다니.

  황성에서는 거리가 먼 지방에서 평생을 살아 조정 관리의 관복을 본 적이 없어 그가 어느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순수한 무지에서 오는 자신감.

  하지만 왠지… 왠지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저 멀리서 얼핏 본 것 뿐, 실제로 그 아이를 대면한 것도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것도 아니었지만 왠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무지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면….

  신타로가 세이쥬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세이쥬로는 깊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혹시라도 중랑장이 분을 참지 못하고 이후 따로 그 아이를 찾기라도 한다면 분명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만 같았다.

  “무얼 그리 보고 있는 것이야!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그의 우려에 무게를 더하듯 때를 맞춘 것처럼 중랑장이 거칠게 소리치는 것이 마차의 외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 후로도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어도 무언가 불만을 표출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의 감정 상태 때문인지 행렬은 길 한복판에 멈춰선 채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본래 규율과 관례를 고려하면 생각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개 군관이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 우발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은.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공식적인 행사에서는, 그것도 황실의 일원을 모시는 종류의 일정에서는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어떠한 돌발 상황이 일어나도 정해진 시간과 일정에 지체나 오차가 최소한으로 발생하도록 유연하고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본분이요 능력이었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중랑장의 행동은 그것과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어린 황자라고 무시를 하는 것이었으리라. 아니, 정확하게는 그가 힘이 없는 사람이기에, 황족이라고는 해도 실질적으로 아무런 권위도 가지고 이지 못하기에 그렇게나 대놓고 무시를 하는 것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또 우스운 만큼 비참한 일이기도 했다.

  세이쥬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때의 그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뿐이었기 때문에.

  일각(一刻: 약 15분)쯤 지났을 때 슬슬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흔들림에 세이쥬로가 살며시 눈을 떴다. 물론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삐걱삐걱 탁탁, 부품끼리 부딪치고 맞물리며 나는 마차의 소음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작음 움직임에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 작은 안도감이 피어났다.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그 기나긴 여정에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불편한 사람과 동행을 해야 하는 시간에도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드디어.”

  세이쥬로의 입에서 중얼중얼 흘러나왔다. 의도하지 않고 그저 멋대로, 마치 매듭이 스르륵 풀려나듯 흘러나온 말이었다.

  “마마?”

  신타로가 그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세이쥬로는 흠칫 놀라며 기대 있던 벽에서 몸을 떼고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세이쥬로가 말했다.

  신타로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있는 얼굴이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세이쥬로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고 다시 허리를 꼿꼿하게 펴 자세를 다잡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마차가 마지막으로 멈춰 섰다.

  “마마, 당도하였나이다.”

  창밖으로 키모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뒤 마차의 문이 열렸다.

  세이쥬로는 짧은 숨을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으로 그의 종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이쥬로는 허리와 어깨를 곧게 펴고 땅에 발을 디뎠다.

  눈앞으로 대문이 보였다. 2층 정도 규모의 커다란 문으로 그 지붕 아래 처마에 걸린 문패에는 성름청(誠凜廳)이라 적혀 있었다. 마차와 성름 관청의 문 사이 양쪽으로 한쪽에는 금군이, 다른 쪽에는 중랑장과 그의 부하를 시작으로 키모토, 유우코, 에이타가 늘어서서 고개를 숙인 채 짤막한 길목을 만들었다.

  세이쥬로는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뒤로 함께 내린 신타로가 따랐다. 활짝 열린 문 앞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와 열을 맞추고 서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관복을 입은 남성인 것으로 보아 성관청에서 일을 하는 종사(從士)들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들 앞으로는 짙은 색의 머리카락을 등 뒤로 묶어 늘어뜨린 중년이 남성이 서 있었다. 그가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살며시 지으며 세이쥬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가 이야기로만 듣던 성름의 성관인 듯했다.

  그가 세이쥬로를 맞이하듯 걸어 나왔다. 너무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윗사람을 반기는 듯 적절한 힘을 담은 보폭으로 세이쥬로와 동시에 길목의 중앙에 닿았다. 단 몇 걸음의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보았을 때 그가 세이쥬로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대군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차분하지만 강단과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신, 성름의 성관 쿠로코 가의 아사히로라 하옵니다.”

  그와 함께 먼발치에 서 있던 무리 역시 동시에 예를 갖추었다.

  세이쥬로는 그에 답하듯 허리를 숙였다. 신분적으로는 그가 상전이라 해도 앞으로 그의 스승을 맡은 이에게 마음을 다해 예를 갖추는 것은 당연한 법도였다.

  “스승님께 인사 올립니다. 회연(悔憐)입니다.”

  세이쥬로가 대답했다.

  “이리 먼 길을 오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미천한 소신이 뫼시러 가지는 못하고 이리 직접 걸음을 하게 하시어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세이쥬로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자가 되어 어찌 스승께 예를 받겠습니까.”

  아사히로 역시 다시 몸을 일으키더니 빙긋 웃었다.

  “벌써부터 스승으로서 대우해 주시다니, 소신 마마의 은덕에 감복하였나이다.”

  세이쥬로는 입가에 힘을 주어 미소를 유지했지만 그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갔다. 그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라면 이미 익숙할 만큼 많이 보았다. 하지만 그들 중 정말로 그를 진심으로 높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저 신분의 높낮이만을 의식한 말뿐인 인사치레. 그것이 아니라면 그를 이용해, 황자라는 그의 신분을 기회로 삼아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의도.

  그런 것이라면 이미 익숙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새삼스레 손가락질을 하고 판단을 할 생각도 없었다. 그것이 정치고 그것이 인간 사회의 생활 방식이라는 것은 황궁에서 지겹도록 습득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선 그 남자 역시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세이쥬로로서도 그에게 특별히 진심을 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 역시도 상대에게 취할 수 있는 부분만 취하고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이용하면 될 일이었다.

  “이리 이곳까지 불러 주셨는데 그에 맞는 예를 갖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세이쥬로가 말했다.

  부드럽게 웃어 보인 아사히로가 중랑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영감께서도 고된 여정에 심신이 지쳤을 테지요. 수고가 많으셨소.”

  “맡은 바 소임을 다했을 뿐입니다.”

  중랑장은 고개를 숙이며 잔뜩 딱딱하게 굳은 어조로 대답했다. 직급 상으로는 훨씬 더 높은 성관에게 자신의 분을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면서도 기분을 완전히 숨기는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듣자 하니 저자에서 잠시 소란이 있었다지요.”

  아사히로의 말에 중랑장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영문을 모르는 그의 속내를 간파한 듯 아사히로가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늦어져 잠시 걱정을 했소이다.”

  중랑장은 짜증을 삼키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어느 천한 아이가 갑자기 길목에 뛰어드는 바람에 잠시 차질이 생겼습니다.”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세이쥬로가 흘긋 아사히로를 살폈다. 그의 어조에서 설명할 수 없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큰일이 날 뻔 한 것 같습니다만, 아무도 다치지 않아 얼마나 다행입니까.”

  아사히로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 제자 중 하나가 폐를 끼친 모양입니다만, 본디는 심성이 곧고 순한 아이라 나쁜 뜻을 품었을 리는 없으니 그저 아이의 순수한 실수라 여기시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지요.”

  가만히 듣던 중랑장이 흘긋 고개를 들었다.

  “…… 예?”

  세이쥬로 역시 한순간 그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었다. 제자? 설마 그 길에 웅크리고 있던 그 사내아이가?

  아니, 그쪽보다는 그 여자아이의 쪽이었을 것이다. 성관이나 되는 자가 직접 제자라 부를 정도라면 신분적으로 귀족이나 관리의 자제 정도는 되어야 할 터였으니.

  혼란스러움과 의문에 빠진 중랑장의 어조에도 아사히로는 답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웃음을 지었다.

  “자자, 먼 길을 오셨으니 오늘 하루는 잘 쉬시지요. 영감을 위해 내 든든한 식사를 잘 준비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대감.”

  중랑장은 잔뜩 찌푸린 얼굴을 얼른 숨기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세이쥬로는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은 그의 기운을 놓치지 않았다.

  아사히로가 다시 세이쥬로를 향해 돌아섰다.

  “그러고 보니 아직 소신의 일가의 인사를 받지 못하셨군요.”

  그가 말하며 몸을 돌려 대문 앞에 서 있는 무리 중 한쪽을 향해 눈짓을 했다. 한쪽 구석에 서 있던 여인이 세이쥬로의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아사히로를 향해 다가왔다. 여인은 마른 체형에 옅은 하늘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수수한 장신구를 사용해 우아한 기운을 풍겼다.

  세이쥬로는 그녀를, 정확하게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늘색 머리카락. 마치 저자에서 보았던 그 아이의 것과 같은….

  “제 내자입니다.”

  아사히로의 소개에 맞추어 여인이 세이쥬로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렌카라 하옵니다. 대군마마를 모시게 되어 광영이옵니다.”

  세이쥬로는 자동으로, 다소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던 그의 눈에 그녀의 곁에 선 여자아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여인과 같은 부드러운 하늘빛의 머리카락, 그리고 수수한 옷차림. 

  “그리고 이 아이는 제 여식입니다.”

  아사히로의 말에 여자아이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제 어미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하듯 한 차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고개를 아래로 향한 채 차분하게 말했다.

  “소녀, 쿠로코 가 테츠나라 하옵니다. 대군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옥체만안하신지요?”

  차분한 목소리도, 조금은 주름이 진 듯한 옷도, 바람과 한 몸이 된 듯 흔들리는 머리카락도 모두 저자에서 중랑장에게지지 않던 그 아이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 부당한 군관에 맞서 대장부 못지 않은 꼿꼿한 의지를 보여주었던 것과는 달리 겨울 벌판에 핀 한 송이 들꽃처럼 언제라도 바람에 흩날릴 것 같이 작고 가녀린 모습이었다.

  세이쥬로가 눈을 슬쩍 돌려 중랑장의 기색을 살폈다. 그 얼굴에 당혹감과 공포가 서린 것으로 보아 그 역시 그 여자아이를 알아본 듯했다. 정말로 그 저자의 아이가 현재 세이쥬로의 눈앞에 있는 성관의 여식과 동일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응답으로 인사를 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세이쥬로는 눈앞의 그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성관의 여식. 쿠로코… 테츠나. 내지 못한 목소리가 세이쥬로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신타로가 슬쩍 고개를 돌려 세이쥬로를 흘긋 쳐다보았다. 가만히 굳어 버린 듯한 황자의 반응에 무언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으면서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옅은 옥빛처럼 푸른 테츠나의 머리카락이 겨울바람에 흩날렸다. 겨울의 얼음을 떠올릴 법한 색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는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을 아이를 지키기 위해 보여 주었던 그 의지의 뜨거움과 차분함이 뒤섞여 봄날 하늘의 투명함처럼 그들 주위로 스쳐가는 매서운 12월의 공기에 온기를 불어 넣는 것 같았다.

  세이쥬로가 슬쩍 시선을 돌려 아사히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저 조용히 웃으며 황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는 성관도 그의 부인도 여자아이와 같이 비단이 아닌 수수하고 소박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순간 그의 코끝으로 짙은 향기가 어렸다. 그 어떤 거짓이나 탐욕, 또는 비웃음도 없는 무취(無臭)라는 향기가.


각 장의 제목을 포함해 본 이야기에 등장하는 한문 단어 및 구절 일부는 제가 임의로 만든 것입니다(ㅋㅋ). 한문 문법 같은 것은 알지 못하므로 오류가 많을 수 있습니다 😂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쿠로코의 '농구'인 만큼 최대한 농구적인 요소를.... 섞어 보았습니다... 🤣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 좋아요와 댓글, 응원 메시지 등으로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

+) 이번 화는 전개 상 흐름이 어색하다고 판단해 많은 부분이 수정되었습니다. 따라서 미리보기로 올라오는 다음화에 수정되기 전 내용이 일부 겹치는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ㅠㅠ (미리 구매해 주신 분들은 참고해 주세요. 앞으로는 최대한 이런 식으로 사후 수정하는 일은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ㅠㅠ)

FF.net : lisa-sinarae AO3: lisa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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