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소설은 2006년 초고완성된 단편을 재수정, 편집, 추가하여 단편분량으로 완성한 비엘물입니다.

-소재로 사용한 '뱀'에 대한 키워드는 실제 '뱀'의 습성과는 다른 창작성이 가미된 판타지입니다.



#0

 

뱀에게 물리다

 

 

 

 “할 수 없군요. 이 편지를 드리겠습니다. 읽던가, 버리던가. 그건 당신 자유지만 아마 읽게 되겠죠. 그럼 훗날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어느 날’이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었다.

 

 

 



#1

이상한 편지


 

 

똑같은 고등학교 생활을 하고 있으며 똑같이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잡담에 열중하는 청소년이었으나, 또래와 비교하면 질풍노도의 시기 같은 걱정은 없었던.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하지 않았던 다만, 그 점 하나가 남들보다 조금 특이한 성격으로 보일 만한, 세상에 무관심하며 아주 평범한 학생.

“세상에 무관심하고 조용히 죽고 싶다 하지만 사실, 너무 관심이 많고 생각이 많아서 그게 고민이지? 응? 그런 거 아니야? 진짜 무관심하고 평범한 삶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비참하다는 생각은 안 할걸. 아! 인생이란 그런 건가 보다. 내 인생도 저런 범인들 속에서 알게 모르게 희로애락이 다 들어있는 거구나. 하지만 넌 아니지. 관심 없는 척하면서 비참해하고, 모르는 척하면서 관심을 원하지. 넌 그게 지나쳐서 반대로 스스로 무관심하다고 합리화시키는 거야. 너무 생각이 많고 잔정도 많아서 이런, 저런 일들을 보면 못 참는 거지. 왜 저럴까. 저럴 수밖에 없을까, 사람은 왜 사는가, 인생과 운명이란 무엇인가를 너어어어어무 심하게 고민하다 보니 한계를 초과해서 결국 난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 나 혼자만의 테두리 안에서 평범을 가장한 삶을 살아보겠어 하는 거야. 그럼 나아질 거로 생각하는 거지. 안 그래? 근데 그거 아냐? 그런 걸 쓸데없는 고민, 헛짓거리라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우울하다는 소리를 듣지.”

결국, 결론은 그거냐.

진영이는 모든 수사를 마친 형사처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응?”

“몰랐냐. 언제나 어둡잖아. 세상 짐을 다 짊어진 것처럼. 네 얼굴. 무뚝뚝해 보이는 건 둘째치고 동굴 속에서 헤매는 듯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등 뒤로 커다란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데. 세상에 관심 없어~라고 하는데 어딜 봐도 ‘나 우울해요~’라고 말하는 거지. 뭐, 이게 다 너에게 나름 정이 많은 죽마고우로서 내가 열심히 설명하고 다니니 행여나 왕따 걱정은 말게나. 하긴 네 성격에 그런 건 또 신경 안 쓰겠지만.”

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결국, 남의 비참함도 세상의 걱정거리도 모두 내 안에 가두어 무관심이란 부적을 붙여 놓은 건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난 평범하지 않은 거냐?”

“아니. 넌 평범해. 그런데 그 기준에서, 약간 벗어났을 뿐이야.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란 거겠지. 다른 사람은 네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여길지 모르지만 중요한 건 너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살든 모든 기준은 자신이니까. 다들 혼자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어.”

진영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다행이었다. 언제까지 녀석의 개소리를 듣고 있어야 할지 슬슬 짜증이 밀려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시선을 약간 아래로 내려야 진영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진지하게 꾹 다문 입술이 다부져 보였다. 하굣길에서 친우가 나눌 이야기치곤 심각한 것이 정말 열여덟의 분위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구질구질한 이거야말로 우울한 분위기다.

“관두자. 뭐, 네 말대로 모든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녀석이 의아하게 쳐다본다.

왜? 라고 하니 너답지 않게 낙관적인 대답이라 놀랐단다.

도대체 어디가?

그런데 또 녀석이 그렇게 얘기해주니 갑자기 모든 고민이 해결된 것 같아 두 팔을 쭈욱 펴고 기지개를 켜며 걸음을 빨리하자, 진영이 소매를 붙잡고 걸음을 멈춰 세웠다.

“갑자기 낙관적으로 변하지 마라. 그것도 무섭다. 다른 사람이면 밝아서 좋다고 하겠지만 너라면 그 반대지. 차라리 무관심하고 툭툭 싸대는 말투가 너한테는 안전하다는 의미인 것 같거든. 그렇게 금방 바뀌면 넌 꼭 뭔 일을 내잖아. 안 그래?”

도로를 벗어나 바둑판 모양처럼 모여있는 주택가에 이르자 사람도 한산해졌다. 우르르 몰려있던 하굣길 학생들도 어느새 뿔뿔이 흩어져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다들 어디로 그렇게 가는 거야, 갈 곳이 그렇게 많나?

“혹시라도 고민 있으면 수다나 떨자고. 괜히 혼자만의 세계에 너무 틀어박혀 있지 말고.”

“글쎄다. 봐서.”

빈정거리듯 대답했지만 사실 진영의 권유가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네가 우울한 일이나, 세상에 빈정대는 거 듣고 있으면 재미있거든. 아무튼, 내일 보자.”

그러고는 낄낄대며 손을 한 번 흔들고 저만치 사라진다. 쟤는 또 어디로 가는 걸까. 하긴, 저런 성격이니 나랑 친구가 됐겠지. 괜히 웃음이 나왔지만 보는 사람도 없는데 올라가는 입꼬리를 꾹 눌러 잡았다. 특별한 일도 아니건만. 기분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친구를 만드는 걸까.

 

“친구라니. 멋진 단어네요. 저도 있긴 하지만 그 사람은 저를 친구라고 생각 안 할 거예요.”


걸음을 멈추고 사위를 둘러봤다. 사방이 빨간 벽돌로 지어진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다 똑같아 보이는 연식이 오래된 건물들뿐이었다. 한적한 오후의 주택가 골목길엔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기다린다고 진짜로 걸려들 줄은 몰랐습니다.”


그때 다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혹시 근처 집에서 누가 창밖으로 말을 거는 걸까, 아니면 크게 틀어놓은 TV 소리가 새어 나오는 걸까.

“이제 그만 두리번거리시고 발 좀 떼주세요. 아까부터 밝혀 있었더니 슬슬 아픔이 올라와서 화가 납니다.”

그 말에 얼른 아래를 내려다보니 커다란 하얀 뱀 한 마리가 내 발아래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뱀의 덩치로 보아 구렁이와 같은 것이 밟혔다기보다, 내 발이 살포시 얹혀 있었다는 게 옳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친다는 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뭐지?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정말 전혀 느낌이 없었다.

뱀은 스르르 움직이며 큰 원을 그리며 똬리를 틀었다. 내 눈앞에서!

그리고는 코브라처럼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날 바라본다.

아. 다행히 코브라는 아니다. 맹독은 없겠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독이 아니라 그냥 사람을 삼킬 수 있을 만한 크기인데? 잠깐,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거야? 나만 있는 거야? 그럼 저 뱀이 날 삼키면 난 아무도 모르게 실종되는 건가?

짧은 순간 별의별 생각을 다 하는 사이, 뱀이 고개를 들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사실, 어디가 허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랬다. 그러니 내 키를 훌쩍 넘어 내려다보는 위치가 되었다. 고2인 내 키는 그래도 175 정도는 됐다. 그걸 똬리를 튼 채로 훌쩍 넘겨버린 것이다.

하얀 뱃가죽 피부와 마찬가지로 붉은색 눈이 번들거렸다. 두려웠다.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뱀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거였다. 도시에서 뱀 꼬리조차 볼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오로지 교과서와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뱀에 대한 지식만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막상 실전에서는 하등 도움 되는 지식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눈앞이 깜깜했다.

하. 혼자 실컷 인생에 쓴맛을 안다는 듯 허세를 부리며 살던 내 십팔 년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구나. 이렇게 히스토리 채널에 나올만한 외계인 납치설처럼.

그렇게 결론짓는 순간, 날 유심히 내려다보던 뱀이 다시 스르르 움직이면서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스윽 흡수되나 싶더니 갑자기 뭉게뭉게 연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눈앞에 대한민국 여성의 평균 키보다 살짝 작아 보이는 여자가 새초롬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절 밟게 된 것도 운명이자 인연이겠죠. 어쩔 수 없습니다. 절 밟은 사람이 누구든 간에.”

아까 들었던 목소리다. 그러니까 그 뱀이 이 여자였다.

“할 수 없군요. 이 편지를 드리겠습니다. 읽던가, 버리던가. 그건 당신 자유지만 아마 읽게 되겠죠? 그럼 훗날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뾰로롱 하고 사라졌다. 조금 전 일들이 현실이라는 사실은 손에 들린 편지 봉투를 바라보고서야 깨달았다. 내가 본 건 뱀인가, 사람인가. 모르겠다. 둘 중 어느 거라도 기분 나쁜 건 매한가지였고 현실성 없는 것도 똑같았다.

한동안 뱀이 있던 자리를 응시했다. 놀라움을 진정시키며 주위를 둘러보니 여전히 한적하고 평화로운 주택가 골목길의 모습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충격의 도가니는 점점 저 깊은 심연의 우주 속으로 사라지고 대신 호기심과 알 수 없는 설렘이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


그 난리를 겪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니 아무도 없었다.

아. 이 소름 끼칠 정도로 냉정한 현실성이라니. 뭐, 인기척 없는 집안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데, 매번 쓸쓸하다고 생각하는 나도 징글징글하다. 그런데 그건 아무래도 저 노을 때문이 아닐까. 하교 후 매일 노을이지는 하늘을 배경 삼아 집의 문을 열고 들어오면 그 풍경이 아련히 거실의 통유리창을 통해 쏟아진다. 아무도 없는 빈 곳을 아름다운 색들이 섞여 빛을 발하고 있지만 내 감정만은 섞이지 못한다.

편지는 아직 읽지 않았다. 솔직히 좀 망설여지기는 한다. 사람이 건네줘도 의심이 가는 마당에 뱀 같은 요물인지 사람 같은 요물인지가 건네주는 물건은 더욱 위험하지 않을까. 요물이란 증거는 없지만, 옛날이야기에 보면 범상치 않은 동물로 묘사되니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면, 설마! 그 전통과 역사가 깃든 행운의 편지?! 이런 게 아직도 존재하나? 아니, 행운의 편지 하나 주겠다고 뱀이 나타나는 것도 어이가 없지. 뱀도 할 일이 참 없구나.

정신 차리고 봉투를 살펴봤다. 봉투는 아주 얇았다. 불빛에 비추면 안의 내용물이 들여다보일 것 같았다. 책상의 스탠드를 켜고 비춰보니 작은 글씨로 빽빽이 쓰여 있는 내용물이 보인다. 진짜 편지다!

 

볼까, 말까, 볼까, 말까. 띠리리링.

 

화들짝 놀라며 나쁜 일을 하다 들킨 듯 뒤를 돌아보았다. 집안은 고요했고 전화벨 소리만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 시대에 아직도 집 전화를 쓰고 있는 우리 집 고물단지의 소리였다.

나는 아무도 없는 집안에 전화가 울리는 걸 싫어한다. 아니, 내가 있긴 하지만 나만 있을 때. 왠지 두렵다. 혹시 불길한 소식을 전하는 연락이 아닐까.

“여보세요?”

“엄만데!”


사나래=사도화 쓰고 싶은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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