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돌아와 현상한 사진에 찍힌 2006이라는 숫자만이 그 해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려주는 전부일만큼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그것은 내 인생 최초의 해외여행이었다. 그 때 한국은 쌀쌀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엄마는 나와 언니를 데리고 여행을 가고 싶다고 고집있게 말했다. 엄마는 젊은 날의 마지막을 예감했던 것일까. 그때의 엄마의 나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자주 몸이 떨리고 후드득 소름이 돋는다. 그 나이의 나는 엄마가 그린 궤적과 겹쳐져 있을지, 다른 곳에서 다른 처지에 감싸여 있을지를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아무튼 우리는 황량한 계절에 덩그러니 공항에 내렸다. 패키지 여행이었고, 그 여행사 특유의 자줏빛 깃발이 어색하게 우리를 반겼다. 가이드를 맡은 분은 태국여행 가이드로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었다. 온몸이 둥글둥글하고 항시 빙그레 웃는, 40대 후반의 남자. 자세한 것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으나, 결론적으로 그사람이 매우 훌륭한 가이드였다는 것만은 기억난다. 나 역시 가리는 것 없는 둥글둥글한 아이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시 나는 밥도 잘먹고 어디서나 잘 잤으며, 툭하면 화장실에 가고싶다고 보채지도 않았고 음식과 물, 공기에 예민함이라고는 없었다. 엄마는 전담마크해야할 사람이 한사람으로 줄어든 것에 대해 심히 안도하는 눈치였다. 분명 기내에 있음에도 어깨와 목덜미까지 시려오게 높은 구름위에서 본 엄마의 머리카락은 붉은색, 좀더 자세히 표현하면 서양말로 ginger hair라고 표현하는 바로 그 색이었다. 중단발이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파마 한 번 하지 않아 찰랑찰랑했던 중단발. 나는 앞머리를 내리지 않은 엄마를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사진으로도 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엄마는 성미가 몹시 급해서 머리가 차분히 귓가와 뺨으로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줄 수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항상 그랬다. 바쁜 세상에서 엄마는 가진 시간을 모조리 남에게 쓰느라 자기에게 쏟을 시간이 한 톨도 남지 않는 사람처럼 살았다. 그래서 엄마는 자신과 남을 모두 즐겁게 할 수 있는 여행의 힘을 믿었다. 나는 언제나 내생각이 다 맞고 세상사람들도 나와 같은생각을 하고있을 것이라 굳게 믿었던 사람이라, 박씨 성을 가진 그 여자는 엄마라는 맡은 바 도리를 다 하고 있을 뿐 항상 혼자가 되기를 원할 줄 알았다. 그래서 꿋꿋이 계속 우리를 데리고 세상을 돌아다니려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인생에서 가장 가족을 미워하고 불쌍히 여기던 시기에, 나는 엄마가 제발 이제그만 우리를 좀 버리고 떠나기를 바랐다. 분명 2006년의 나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왜 엄마는 여기서까지 가족과 함께 있으려 할까? 생각하면서 그녀의 손을 잡았으리라. 그럼에도 나는 누가뭐래도 엄마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을 망치지 않을 의무가 있었다. 

한국은 황량했고, 태국은 뜨겁고 황량했다. 달구어진 프라이팬같은 나라였다. 엄마는 양손에 언니와 나의 손을 잡고 연신 두리번댔다. 약 15년 전의 태국은 세 개의 단어로 간추릴 수 있는 곳이었다. 과일과 은, 그리고 코끼리. 우리는 작은 상아까지 달려있는 정교한 코끼리 조각 한 쌍을 샀다. 언니는 물과 음식이 맞지 않아 계속 투정을 부렸고, 불행히도 엄마 역시 입이 짧았다. 모르는 사람과 숟가락을 주고받기를 싫어하는 것, 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은 낯선 나라와 낯선 한국인들 사이에서 치명적이었다. 나만이 그 여행을 좋은 추억으로 살려낼 가망이 있었다. 태국에 있는 한식집을 갔을 때, 그 때 나왔던 음식은 돼지고기김치찌개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북적이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가만한 여자 둘을 옆에 끼고 홀로 열심히 먹어댔다. 그나마 우리 셋이 공통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수끼였다. 샤브샤브같은 음식. 나는 바지런히 엄마 쪽으로 모락모락 김이 나는 새우를 건져서 밀어줬고, 칼국수같은 초록색 면을 국물 안으로 연거푸 밀어넣었다. 엄마는 내가 말을 알아듣는 순간부터 꽤 자주, 자신이 해준 밥을 꾸역꾸역 밀어넣는 나에게 말해왔다. "음식은 왜 자기가 만들면 먹기 싫을까?" 비록 그 수끼가 내가 만들어 내온 음식은 아니었지만, 나는 다른 사람의 식사소리와 냄새를 듬뿍 뒤집어쓰는 것은 입맛을 돋우기는 커녕 몸에서 허기를 몰아낸다는 그 감각을 비로소 체감했다. 나는 그 때 새싹처럼 어렸고, 인생 첫 경험으로 남길 것이 많이 남아있었다. 내가 그걸 알았다면. 그 모든 처음들을 무던하게 흘려보내지 않았을텐데. 
    식사를 마치고 사람들이 나오기 전, 자갈이 깔려있는 이층짜리 식당에서 나는 먼저 내려가 발장난이나 했다. 그 때 내 앞에는 과일트럭이 있었다. 그 트럭이 너무나 익숙한 모양새를 하고 있어서, 나는 깜빡 내가 있는 곳이 태국 치앙마이가 아닌 경기도 안양쯤이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만 다른 것은 그 안에는 사과나 귤 대신 주먹만한 블루베리처럼 생긴 이국의 과일이 트럭 가득 쌓여있었다는 것이다. 트럭에서 풍겨오는 따뜻한 단내로, 나는 그것이 아주아주 달고 부드러울 것임을 직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과일 더미 위로 개미들이 가느다란 띠처럼 줄지어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태국 여행 내내 그 과일을 먹어보지 못했다. 그것이 망고스틴이라는, 생긴것만큼이나 둥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좀 더 나중 일이다. 또한 태국에서, 나는 파인애플은 나무에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상추처럼 밭에 뿌리를 내리고 땅위로 솟아오르는 식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길가에서 생경한 파인애플 밭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음날에는 코끼리를 보러 갔다. 코끼리를 만져보았고, 그 위에 올라탔으며, 코끼리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하루가 다 지나갔다. 말등에 올라탔을때도 발에 땅이 닿지 않는다는것은 상당한 공포였는데, 코끼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코끼리는 말보다 훨씬 커다래서, 우리 셋이 전부 올라타기에는 충분했다.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깔고 앉았는지, 안장은 돗자리처럼 까슬거리고 뻣뻣했으며 두드려 펼친 고기처럼 납작했다. 가까이에서 본 코끼리의 피부는 아빠의 발뒤꿈치만큼 건조해보였다.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침이라도 발라주고 싶을 만큼. 그 건조한 피부 너머에 커다란 눈이 있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코끼리는 등 뒤에 탄 우리를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코끼리는 사육사의 허락 없이는 뒤를 돌아보기는커녕 좌우로 고개조차 돌리지 못했다. 파인애플만큼이나 자그마해보이는 사육사의 손에는 낫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용도만큼 예리해보이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분명히 낫이었다. 코끼리가 가야할 길로 가려 하지 않으면 사육사는 낫을 들어 머리 언저리를 내리찍었다. 나는 공포에 휩싸여 그러지 말라는 뜻으로 손사래를 쳤으나, 그는 그저 웃으며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 뿐이었다. 그러나 어린 눈에도 코끼리가 마냥 괜찮지 않을 거라는 것은 느껴졌다. 코끼리가 맞고 있는 것은 솔직히 코끼리를 타러 온 우리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내 그 위에서 쭈뼛대었고 멋쩍은 기분에 휩싸였다. 이름도 모르는 태국인 사육사가 미워지려 할때쯤 코끼리 체험은 끝났다. 갑자기 그가 땅에서 바싹 마른 커다란 이파리를 주웠다. 그는 순식간에 그것을 요리조리 접어, 누렇고 시들한 연두색을 한 메뚜기를 만들어냈다. 그는 맨 앞에 앉은 나에게 그것을 건네고는 수줍게 웃어보였다. 나는 그가 나쁜사람인지 착한사람인지를 알수가 없어서 끝내 고개숙여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지 못했다.

코끼리에서 내리자 가이드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둥그런 원형경기장이었다. 초등학교 운동회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모래바닥에서 구름을 일으키며 재롱을 부리는 쪽이 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코끼리들은 여러마리였고 제각기 다른 것을 하고 있었다. 누구는 공 위에 서있고, 누구는 춤을 추었으며 누구는 코로 붓을 잡고 팔레트에 그림을 그렸다. 나의 기억속에서 스탠드에 앉아있는 누구도 눈앞의 묘기에 별로 즐거워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게 다 누구를 즐겁게하려고 벌어진 일일까 생각했다. 그때 나는 스탠드의 가장 바깥쪽, 경기장의 출입구쪽에 앉아있었는데 아주 작고 어린 아이들이 바구니를 들고 서성이는 것을 보았다. 바구니에는 엄마 손가락만한 바나나가 있었다. 나와 엄마는 남자아이를 불러 그것을 몇개 사먹었다. 아직까지도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먹었던 것 중 가장 가장 달고 맛있는 바나나다. 한국에서 파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의, 아예 다른 과일이라고 봐도 무방한 맛. 충격적으로 맛있었다고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숙소로 돌아와 이불을 가슴까지 올리면서, 엄마는 나에게 관광이고 나발이고 사방에 떨어져있는 바나나나 주우러 다닐까? 하고 진지하게 물었기 때문이다. 

둥글둥글한 가이드가 했던 모든 말 중 기억나는 것은 딱 하나다. 그는 태국이 은의 나라라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가이드는 한국에 들고 갈 유명 특산품들과 선물용 기념품(지금 이순간 내 머리에는 '오미아게'라는 단어만 떠오르는데, 이것을 도무지 적당한 우리말 단어로 번역할 수가 없다.)들을 파는 곳들을 쭉 돌게 했다. 그 때 우리가 들렀던 곳은 매트리스와 침구를 파는 거대한 창고, 각종 말린 과일칩을 판매하는 가게, 그리고 은 세공품을 파는 곳이었다. 그곳은 온통 은색이었다. 코스트코에 가만히 서서 천장부터 바닥까지 은으로 가득차있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은빛은 얼음처럼 차가웠기 때문에 나는 용의 보물더미에 침입한 기분에 압도당해 그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엄연히 훔쳐가려는 것이 아닌 돈을 주고(그 가격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는 지금까지도 의문이 들지만)물건을 사갈 소비자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적대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어보였다. 하지만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고 우리를 쳐다보던 그 표정들은 무엇이었을까?
    엄마는 하나에 3불을 주고 은으로 도금된 찻잔같은 컵을 4개 샀다. 당시 나는 그 섬세하고 독특한 디테일을 보고서는 그것이 정말로 은으로 된 컵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은 도금이었을 것이다. 진짜 은으로 만들어진 컵이 그렇게 싸고, 종이컵만큼 가벼웠을 리가 없다. 한국에서 나는 그것을 소꿉놀이 그릇으로 사용했다. 그것이 진짜 은이었다면, 부모님이 은컵에 한낱 모래와 물에 불린 풀잎을 담도록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전부이다. 모든 기억이 마른 바나나잎처럼 버석버석하다. 태국은 너무 건조하고 황량한 나라였다. 태국에 있던 모든 것이 우리가 태국을 구경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내 기억 속 태국은 이방인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지금 태국은 길거리음식으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곳, 자유여행자의 천국이 된 것 같다. 나는 추운 나라는 추울 때, 더운 나라는 더울 때에 가야 한다는 철칙이 있는 사람이다. 아주 덥고 비가 많이 오는 계절에, 습기를 타고 나 하나쯤 섞여들어가도 될 즈음에 태국을 꼭 다시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래야 이 목구멍까지 버석거리는 기억이 좀 물렁하게 씻겨내려갈 것 같다. 그 때 내가 보았던 알 수 없는 눈들이 아직 그 자리에 뜨겁게 울렁이며 피어오르고 있을지 알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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