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록수는 고개를 들었다. 피로 얼룩진 얼굴이 무너질 듯 흐린 표정을 한다.



한 번, 열 번, 백 번, 천 번, 만 번.




같은 장면을 무력하게 지켜본다. 모래처럼 흘러내린 생명들을 눈 안에 아로새긴다. 지울 수 없는 기억들이 상흔처럼 남는다. 해일이 밀려온다.




케일은 몸을 일으켰다. 주변은 아직 어스름했다. 시린 공기에 이불을 추스르며 몸을 작게 웅크렸다. 지난 일인데 여기까지 따라와 사라지지 않고 그림자를 밟는다. 벌벌 떠는 몸을 애써 무시한 채 침대를 박찼다. 두른 이불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흔적을 남기며 창문 앞에 서자, 여러 겹 덧댄 얇은 커튼 사이로 달빛이 스몄다. 흉터 없는 하얀 손이 보였다.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 안도를 내쉬며 창틀에 몸을 기댔다.




김록수의 세계는 마침표를 찍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완결을 맞았다. 끝. 김록수는 거기서 시작을 보았다. 죽음보다 더 한 고통이었다. 「죽음은 안식」이란 말에 욕지거리를 붙였다. 의식이 희미해질 쯤, 추위가 밀려들었고 소음이 쏟아졌다. 둔탁한 망막 위로 희뿌연 빛이 들었다. 아, 김록수는 깨달았다. 다시 태어났음을.




뿌리 없이 태어난 김록수는 살고자 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강했다. 악착같이 살았다. 이유는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멸망이 찾아왔다. 설명키 어려운 재앙들이 연달아 닥쳤다. 지독한 생존본능으로 몇 번의 고비를 넘겼지만, 주먹구구식 생존은 구멍이 있었다. 머리 위로 쏟아진 고층 건물 잔해에 마지막을 그릴 쯤. 능력이 생겼다. 지울 수 없는 영원한 기록. 10초를 돌릴 수 있는 능력. 몇 번의 죽음을 맛보며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빛을 만났다.




김록수는 김록수와 최정수가 되었고, 이수혁 팀장의 부하가 되었다. 팀이라는 이름이 가족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밖에 모르던 삶에 남이 스며들며 꽃처럼 피어올랐다.




영원할 줄 알았다.




그래, 영원할 줄 알았다. 케일은 쓰게 웃었다. 이미 지난 일인데 불현 듯 찾아와 새벽을 까먹었다. 창틀에서 내려와 침대에 누웠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으로 괴로워하는 건 어리석다. 상념을 다독이며 잠에 들었다.




햇살이 비췄다.




선잠을 자서 그런지 옷차림을 정돈 받으면서 연신 하품을 했다. 여름이 가까워져 그런지 햇살이 따갑다. 눈을 문질렀다가 사용인의 잔소리를 듣는다. 론이 그림처럼 웃는다. 남들은 론을 보며 사람이 좋다. 괜찮다. 하는데 케일은 이상하게 무서워서 시선을 피했다. 창밖은 많은 사용인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의 생일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일이라면 깜빡 죽는 공처가라, 이번 생일도 저번처럼 호화롭게 보낼 모양이었다.




“선물은 고르셨습니까?”




론이 넥타이를 내밀었다. 케일은 순순히 목에 걸어 매듭을 짓는다.




“가 봐야지.”

“바센 도련님과 릴리 아가씨는 이미 고르셨답니다.”




집엔 부모님 말고 식구가 더 있었다.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던 자작 가문이었다. 자작이 마차 사고로 죽어 오갈 곳 없던 부인, 바이올란과 두 아이. 자작가의 식솔들까지 식구로 들였다. 표면상 후처였으나 대부분 ‘자작 가문을 지키기 위해 백작가가 힘을 썼다.’ 이렇게 보았고 그게 크게 틀린 것도 아니었다. 서류로 문제가 될 것들은 싹 정리했고.




“작은 어머니랑 함께 나가더니 골라 온 모양이네.”

“네.”




넥타이를 다 매니 론이 한 번 손본다. 거울을 보니 크게 흠 잡을 곳 없이 말끔한 차림이었다.




“나도 나가야지.”

“마차를 대기시켰습니다.”




시계를 보자 시간이 꽤 길었다. 케일은 혀를 찼다.




“날씨도 더운데.”

“마부는 시원한 곳에 있으니 걱정하시 마시지요.”




아무렴 알아서할까. 시선을 흘린 케일이 방을 나왔다. 바쁜 사용인들을 지나 마차에 오르니 마부가 눈인사했다. 케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생각해보니 선물이 겹치면 안 될 텐데 물어보고 올 걸 그랬군. 턱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마부가 말했다.




“작은 도련님과 아가씨께선 장신구 가게에 가셨던데 큰 도련님도 그쪽에 가시겠습니까?”




고민을 읽었는지 넌지시 권유했다. 케일은 작게 웃었다.




“괜찮은 곳 없어?”

“요즘 많은 여성들이 아름다운 모자를 많이 쓰고 계시더군요.”




생화나 조화. 보석과 열매. 꽁지깃으로 장식한 모자가 한창 유행이었다. 집안사람들이 화려한 쪽보다 검소한 걸 추구하다보니 본 적은 적어도 알고 있었다.




“바이올란님께선 우아한 드레스를 주문하셨다 하니 모자는 어떠신지요.”




케일은 소리 내 웃었다.




“그래. 그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결정이 나자 느릿느릿 움직였던 말발굽이 경쾌하게 움직였다. 케일은 창문을 열었다. 봄과 여름 사이, 바람에선 풋풋한 풀 냄새가 났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살랑거렸다. 일 하던 주민들이 마차를 보고 손을 흔든다. 케일도 손을 흔들었다. 짧은 새 마차는 시내 입구에 접어들었다. 저택뿐만 아니라 마을도 축제 분위기로 인산인해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천천히 몰아 도착한 가게는 모자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문을 당기자 달려있던 종이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 내부는 꽃이며 비즈가 흩어져 어수선했지만 사람들은 다들 밝고 활기찼다. 사장은 케일을 보자마자 알아보고 단번에 선물용 모자를 골라 권유했다. 머리색이 비슷하니 대신 써 보는 게 좋겠다는 수완도 부렸다. 덕분에 여성용 모자를 잔뜩 썼다.




모자를 썼다가 벗었다가 반복하자 머리가 엉망이 됐다. 직원은 서비스라며 케일의 머리를 손봐주었다. 모습은 멀쩡한데 정신이 넝마가 됐다. 한숨을 푹 쉬며 가게를 나서는데 주민들이 숨죽여 웃는다. 뭔가 했더니 매어 준 리본에 꽃이 달렸다. 풀기도 뭐해서 그대로 마차에 올랐다.




“바로 돌아가겠습니까?”

“아니, 찻집에라도 가지.”

“알겠습니다.”




케일이 자주 찾는 찻집은 여기서 멀지 않았다. 곧 도착했고 얼굴을 알아본 직원이 자리를 안내했다. 위층 창가자리는 케일 전용석이었다. 마부에게 동전을 쥐어주며 심부름 아닌 심부름을 시킨 뒤 의자에 앉았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달짝지근한 꽃차를 내어준다. 연분홍색 봄꽃이 살랑거렸다. 케일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 풍경을 보았다. 사람들은 건강했고 공기는 평온했다.




김록수의 기억은 현실이었다. 있었던 일은 사라지지 않아. 덕분에 많이 괴로웠다. 모두가 마침표를 찍고 세상을 떠났는데 왜. 왜 자신만 쉼표가 찍혀 또 다시 살아가야 했는지,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이토록 괴롭게 만드는 것인지, 지금 겪는 모든 안식이 전부 꿈은 아닌지. 혼란 속에 눈물을 쏟았다. 아기가 되자 눈물이 그리 잘 나왔다. 아니,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토록 울었다.




괜찮다는 말의 위로를 알았다. 지켜준다는 말의 온도를 알았다. 좋아한다는 말의 마음을 알았다. 사랑한다는 말의 무게를 알았다.




넘어져도 아프지 않은 세상 속에 김록수는, 케일은 조금씩 괜찮아졌다. 소중한 것을 만들면 그만큼 두려워졌지만, 지금을 소중하게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 풍경이 아름다운 줄 모를 테니까.




케일은 차를 한 모금 마시다 옆 테이블에 작은 아이가 어정어정 돌아다니는 걸 보았다. 이제 막 걸음마를 하는지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는 모양새가 퍽 귀여워서 쳐다보았다. 그러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이가 쥔 테이블보가 확 당겨지면서 테이블 위에 있던 찻주전자가 쏟아져서 그랬다. 새된 비명이 들렸다.




붉게 물든 눈동자로 아이를 보았다. 보호자의 비명에 놀란 아이가 울먹울먹 거렸다. 케일은 들고 있던 뜨거운 찻주전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두고 아이 머리를 푹 눌렀다. 보호자가 안절부절 못했지만 손사래 치며 자리로 돌아왔다. 직원이 차가운 물수건을 가져왔다. 케일은 새빨갛게 변한 손바닥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김록수 일 땐 더 한 일도 봐서 그렇다.




신경 써서 가져다 준 물수건을 돌려보낼 수 없어 받았다. 손에 쥔 채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능력을 사용한 부작용인지 곧잘 코피가 흘렀다. 옷깃에 묻지 않도록 꾹 누른 채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어질어질해서 눈을 감고 있으니 옷깃을 당기는 손길이 있었다. 시선을 주자, 아까 다칠뻔한 아이가 있었다. 손에는 꽃다발이 있었다. 그것을 내밀며 어설픈 발음으로 미안하다 하는데 화낼 거리도 못됐다. 케일은 꽃다발을 받아 한 송이를 아이에게 돌려주었다.




“고마워.”




슬쩍 웃자 아이가 헤헤 하고 배시시 웃었다. 쫑쫑 뛰어나간다. 넘어질까 뒤를 따라가니 케일 말고도 몇몇이 그리 쳐다본다. 결국 웃었다. 남은 차를 다 마신 뒤 마차로 돌아오자 마부가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말하지 마.”

“제가 말하지 않아도 소문 다 돌겠습니다.”




케일은 혀를 차며 대고 있던 손수건을 내려두었다. 코로 킁킁 소리를 냈다. 코피가 멎었다. 론이 웃으며 무서운 잔소리를 하겠지만 어릴 적부터 곧잘 피를 쏟았던 만큼 짐작하고 손수건을 챙겨줬겠지. 부모님은 많이 걱정하시지만 몸이 약하거나 아파서 피를 보는 게 아닌, 능력의 반작용이니 걱정할 필요 없었다. 노파심에 신관을 불러 검사했을 때도 건강하게 나왔고.




오후의 볕을 친구 삼아 저택에 도착하니 한스가 문 앞에 나와 있었다.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그 위엔 차갑게 얼린 수건이 있었다.




“뭐야.”

“손이 다치셨다면서요.”




한스가 냉큼 손을 잡아 수건을 쥐어주었다. 미간을 찌푸린 케일이




“그건 어디서 들었어.”




퉁명스레 답하자 한스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다 알아요. 외근하던 애들까지 다 들어와서 난리가 났었다고요.”




안 봐도 상황이 보인다. 케일이 이마를 짚자 벌컥 열린 문에 릴리가 숨을 가쁘게 들이켰다.




“오라버니!”




귀를 틀어막은 케일이 모르는 척 시선을 피하자 다시 오라버니! 소리 친 릴리는 케일의 손목을 잡았다. 아직 어린데 힘이 넘친다. 검사가 되겠다며 검술훈련을 하더니 못 이기겠다. 케일은 한숨을 삼키며 릴리를 보았다. 발갛게 물든 손바닥을 보더니 한참 말이 없었다. 케일이 무릎을 구부려 릴리를 보았다. 입술을 꾹 깨문 것에 그대로 번쩍 안아들었다. 무겁다. 팔이 파들파들 떨렸지만 애써 무시한 채 등을 토닥토닥 두들기자 목덜미를 꼭 끌어안는다.




“오라버니 대신 제가 곱절로 나빠질 거예요.”




뭔 소리래. 케일이 미간을 찌푸렸다.




“난 나쁜 사람이니까 넌 착하게 살아.”




릴리가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쉰 케일이 릴리를 안고 들어가려는데 문 앞에 바센이 있다. 얘는 또 왜 이래. 케일은 남은 한 팔을 펼쳤다. 푹 안긴다. 못살겠다. 케일은 식사를 끝내고 방에 돌아갈 때까지 식구들에게 신나게 잔소리를 들었다. 지쳤다. 케일이 소파에 앉자 뒤따라 온 론이 웃는 얼굴이었다. 그것도 아주 무섭게 웃고 있었다. 케일은 모르는 척 했다. 필사적이었다.




“다음에는 사람을 붙여 보내야겠군요.”

“됐어. 내가 자처한 거야.”

“그럼 제가 따라가지요.”




싫… 여기까지 말한 케일은 론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럼 알아서 잘하라는 얼굴 때문이었다. 졌다. 졌어. 미리 받아 둔 물에 들어가 씻고 나왔다. 방에 어머니가 보낸 약이 있었다. 붕대는 너무 과한 게 아닌 가 싶은데 약을 여기저기 묻히는 것보단 이 쪽이 나아서 순순히 감았다.




“꽃은 꽃병에 꽂아두고 가겠습니다.”




리본에 달려있던 꽃도, 아이가 건네준 꽃도 전부 생화라 그리 했나보다. 케일은 푹 드러누워 탁자를 보았다. 하얗게 빛나는 꽃이 참 예쁘다.




“뭔 꽃이야.”




사용인은 살짝 웃었다.




“이건 궁궁이입니다. 약초로 많이 쓰이는 들풀이에요.”




하얀 꽃이 자잘하게 듬뿍 피었다. 그 옆에 좀 더 꽃이 큰 가지를 들었다.




“이건 마가목이에요. 장식용으로도 많이 쓰여요.”




직원이 달아 준 주홍색 꽃을 들었다.




“안개꽃은 아실 테고, 이건 능소화입니다. 정원에 심어두면 참 예뻐요.”




사용인은 귀찮을 법 한데도 상냥하게 답했다. 케일은 사용인이 떠날 쯤 조용히 잠들었다. 론은 등불을 끄고 이불을 정리한 뒤 방을 나섰다. 내일은 금방 왔다. 케일은 어제보다 개운하게 일어나 아침부터 시중을 받았다. 오늘은 대망의 생일파티였다. 다른 귀족 가문들은 여러 사람들을 초대해 호화롭게 했지만, 헤니투스 가문은 생일만큼은 가족들과 함께! 라는 주의라 초대객은 없었다.




대신 사용인들이 신났다. 생일파티가 끝나면 이후는 사용인들의 파티였다. 준비한 노고를 치하해 하는 파티였다. 그래서 그런지 사용인들 표정이 밝다.




케일은 선물상자를 들고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하는 목소리와 함께 문을 열자 어머니가 바이올란과 함께 있었다.




“생신 축하드려요.”

“오자마자 멋없게 그런 인사니?”

“어릴 때도 그랬지.”

“맞아. 조그만 애가 무슨 어머니, 어머니 하는데 깜짝 놀랐다니까.”




죽이 착착 맞는 두 어머니 사이 케일은 앓는 소리를 삼켰다. 목적만 달성하고 빨리 탈출하자는 마음에 상자를 탁자 위에 내려두었다. 바이올란이 물었다.




“이거 모자 맞지?”

“네. 이번에 유행이라고 하셔서요.”

“어머, 네가 웬일이야.”




그동안 선물했던 선물 내역은 책이나 만년필. 양피지 같은 실용성 위주였다. 바이올란은 웃었다.




“브라운이 조언했나 봐요.”

“그럼 그렇지.”




어머니는 허리를 숙여 케일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슬쩍 손을 올리자 뭔가 묻어난다. 알면서 한 행동에 뭐라 할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바이올란이 고른 드레스와 케일이 선물한 모자는 착 어울렸다. 다행이네. 케일이 안도하자 둘은 웃었다. 그럼 점심 때 뵙자며 서둘러 빠져나와 고개를 푹 숙였다. 론의 잔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파티는 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서 벌였다. 복도에서 본 정원은 어느 때보다 화려했다. 케일은 창틀에 기댔다.




“도련님, 여기 계시지 말고 내려가시는 건 어떠세요.”




한참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한스가 말을 붙였다. 케일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




“안 그래도 바쁜데 내가 있으면 불편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아니면 차라도 한 잔 하실래요?”

“곧 점심이잖아. 조금 더 구경하다 갈게.”




앓는 소리를 한 한스는 기어이 케일의 팔을 잡았다.




“예비 집사로서 주인님을 복도에 세워둔 걸 들키면 혼나요. 방에라도 갑시다.”




케일은 못이기는 척 방으로 돌아왔다. 한스는 사용인에게 눈짓하며 차를 주문했고 꽃병을 테이블 가운데 두었다. 호들갑 아닌 호들갑에 케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모르는 척 할 테니까 억지로 시선 돌리지 마.”

“들켰습니까?”




헤헤. 웃는 한스가 사용인이 가져다 준 다기를 착착 세팅했다.




“사모님께 도움 받은 아이들이 몰래 서프라이즈를 준비한다고 해서요.”




마멀레이드를 듬뿍 넣어 달짝지근했다. 케일이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사이, 한스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 계획을 말했다. 이야기만 들었을 땐 한두 푼 든 게 아닌 것 같은데 괜찮은 건가 싶어 눈짓하니 이를 드러내고 웃은 한스였다.




“십시일반 돈을 모았습니다.”

“그래도”

“다른 저택보다 벌이가 좋은걸요. 주인님도 좋은 분이고요. 모두 백작가를 사랑하고 있어요. 자부심도 있습니다.”




부드러운 표정이다. 케일은 찻잔을 든 채 한스를 보다 입 꼬리를 씰룩거렸다. 한스는 머쓱한지 뒤통수를 긁다가 문 앞에서 손짓하는 사용인이 있어 고개를 푹 숙였다가 자리를 비웠다. 케일은 잔을 내려두고 시계를 보았다. 점심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케일은 대기 중이던 사용인을 흘깃 보았고 사용인은 눈치껏 다기를 치웠다. 거울을 보고 매무새를 정돈한 케일이 방을 나섰다.




햇살이 따사롭다. 먼저 나온 식구들은 밝은 표정으로 케일을 맞이했다. 그리고 파티의 주인공이 나왔다. 케일이 준 모자를 쓰고 바이올란이 선물한 드레스를 입고 바센이 고른 목걸이와 릴리가 준 팔찌를 찬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따듯한 분위기였다.




“저희 사용인들이 드리는 선물입니다.”




사용인 대표로 걸어 나온 한스는 화려하게 장식 된 3단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어머니는 몹시 기뻐하며 칼을 들었다. 그리고 케이크를 잘랐다.




그래, 별 일 없었다면 반드시 보았을 결과였다.




케일은 눈앞을 하얗게 비춘 빛에 시간을 돌렸다.




10초를 돌렸다.

폭발이 일었다.

20초를 돌렸다.

세상이 무너졌다.

30초를 돌렸다.

행복이 사라졌다.

40초를 돌렸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50초를 돌렸다.

케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다.

60초를 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계속 돌렸다. 돌려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순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또 다시 무기력하게 세상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설령 자신이 죽더라도 이번에는 이 순간을 지키고 싶었다.




시계가 같은 10초를 쉼 없이 반복한다.



3500초를 돌렸다.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가 흘렀다.

3510초를 돌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3520초를 돌렸다.

무너진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3530초를 돌렸다.

팔을 뻗었다.

3540초를 돌렸다.

웃고 있는 얼굴을 눈 안에 아로새겼다.

3550초를 돌렸다.

머리는 포기하라 말하고 있었다.

3560초를 돌렸다.

마음은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순간을 평생의 마지막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

3570초를 돌렸다.

누구라도

3580초를 돌렸다.

누구라도

3590초를 돌렸다.

제발

3600초를 돌렸다.

도와줘.




무너지듯 쓰러진 케일의 세상이 백금빛으로 물들었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사람들의 경외를 본다. 케일은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이 빛 만큼이나 환상처럼 느껴질 얼굴이었다. 떨린 손을 들자 그 손을 꼭 잡아주었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눈가에 입을 맞춘다.




“괜찮은…”




잔기침에 피가 한 움큼 흘렀다. 남자는 몹시 소중한 것을 보듬듯 케일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괜찮다. 안심해도 돼.”




누구나 하는 말인데, 이상하게 안심이 돼. 케일은 움켜쥐고 있던 정신을 놓았다. 잘 기억나지 않던 꿈속에서 웃고 있었다. 아이처럼 깔깔 웃다가 입을 맞췄다. 너른 품에 안겨 눈을 감았고 팔에 기대 잠들었다.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매번 찾아오는 풍경인데 그게 이상하게 아름다워서, 새로워서. 아카시아 꽃향기가 눈시울을 데워서 케일은 울고 말았다.




“왜”




어스름한 방 안에 흔들리는 촛불이 보였다. 그리고 침대 맡에 앉아있는 남자도 보았다. 케일의 뜻 모를 말에 다정한 시선으로 흐른 눈물을 훔쳐 주었다.




“당신의 꿈을 꾸었을까.”




꿈속의 남자는 지금 케일의 옆에 있는 남자였다. 남자는 한참동안 웃는 얼굴로 케일을 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내 꿈을 꾸었는지도 모르겠구나.”

“당신의 꿈?”

“그래. 내가 계속 바라마지 않았던 꿈 말이다.”




눈물을 훔친 손으로 뺨을 짚어주었다. 따듯하다. 케일은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다시 태어나도 지워지지 않았던, 마음 속 깊숙한 곳의 감정이 천천히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계속 기다려왔던 너를 상상해보았지.”




햇살보다 더 밝을 금발이 뺨을 간질였다. 이마가 닿았다. 속눈썹이 부딪쳐 기분 좋은 감촉을 주었다.




“너는 천년을 기다려 만난 내 반려니까.”




천천히 떨어져 남은 손으로 케일의 손을 쥐었다. 손등을 조심스레 쓸었다. 케일은 간질간질한 기분에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누구지.”




적갈색 눈동자 위로 유채꽃이 피었다. 화려한 색채로 꾸민 세계가 흐드러진 아카시아 꽃나무 군집처럼 보였다.




“에르하벤. 용이란다.”




용이라 함은 설화에서나 나올 존재였다. 허무맹랑한 소리에도 케일은 의심하지 않았다. 한참동안 말을 아끼던 케일은 손을 뻗어 에르하벤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조금 더 올라 뺨을 짚는다. 손바닥에 가볍게 입 맞추며 기댄 얼굴은 한 점의 거짓 없을 사랑만 비췄다.




“저는 케일입니다. 케일 헤니투스.”




쉼표를 그리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




“가족들은… 사람들은 무사합니까.”

“그래. 네가 쓰러져 놀랐지만 다들 괜찮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케일을 보고 가족들은 대경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뒤늦게 쓰러진 케일을 안고 있던 에르하벤을 보았고, 아버지 데트르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놀랍도록 침착한 반응이었다.




“한참 걱정하다 밤이 늦어 자러 갔지.”




바센은 갑자기 등장한 에르하벤을 수상한 자가 아닌지 물었다. 데르트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하며 에르하벤을 보았다.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눈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러며 ‘제 아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했지.




“에르하벤… 당신은요.”

“나는 용이란다. 달리 잠이 필요하지도, 꼭 잘 필요도 없지.”

“그래도요.”




케일은 몸을 뒤척이며 뒤쪽으로 이동했다. 비어있는 자리를 가리키며 누우란 듯 쳐다보기에 에르하벤은 무척 곤란한 얼굴을 했다.




“케일 헤니투스.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다 믿고 있는 거냐. 정말 나쁜 존재면 어쩌려고 이러는 것이냐.”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린 케일은 푸핫! 소리 내 웃었다.




“다 믿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런 얼굴을 하고 나쁜 존재가 아니면 어떡하나 물어본다면 할 말이 없어요.”




다시 한 번 빈자리를 톡톡 두들겼다. 에르하벤은 한숨을 쉬며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에 누웠다. 이불까지 추슬러 덮은 케일이 에르하벤의 품에 파고들었다. 아카시아 꽃향기가 난다. 에르하벤은 조심스레 케일의 등을 감쌌다. 꿈속에서도 그랬다. 너무 상냥해서 눈물이 났다. 케일은 한참동안 아이처럼 울었다. 김록수일땐 울지 않아 문제였는데 케일일 땐 자주 울어서 문제였다. 나이가 들어서 괜찮아 진 줄 알았는데, 오늘이 너무나 악몽 같아서. 너무 힘들어서 그랬다. 소리도 삼킨 채 우는 케일을 에르하벤은 그저 아이를 어르듯 다독였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래.”

“얼마나 먼 곳에서 오셨습니까?”




붉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다른 세계에서 왔지.”




잠시 침묵이 있었다.




“천 년이나 저를 기다렸습니까.”

“글쎄.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다.”




젖은 얼굴을 들어 에르하벤을 보았다. 알 수 없는 얼굴. 케일은 에르하벤의 옷깃을 쥐었다.




“용에게 반려란 영혼의 절반이라 볼 수 있지만 모두 반려와 함께 사는 삶을 선택하진 않았다.”




옷깃을 쥐는 손에 작게 웃은 에르하벤이 케일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나 또한 나타날지 말지 모르는 반려를 기다리기보다 나의 삶을 살아가길 바랐지.”




그러며 이마에 얼굴을 기댔다.




“허나 아쉽더구나. 이리 오래 살았는데도 내게 반려가 없다는 것이.”




얇게 덧댄 커튼 너머 달빛이 조용히 기울어졌다.




“오로지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




바람에 여름의 향기가 났다.




“세계를 떠돌아 너를 찾았다. 그리고 상상했다. 너를 찾으면 어떤 삶을 살지, 어떤 것을 볼지, 어떤 행동을 할지.”




나뭇잎이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그런데 없었지.”




에르하벤은 침묵을 지켰다.




“세계수가 그러길 네 반려는 너무나 먼 곳에 있어서 만날 수 없다고 하였다.”




꾹꾹 눌러 쓴 글자처럼 빠듯하게 꺼낸 말은 무겁게 느껴졌다.




“만나고 싶다면 모든 걸 내버리고 가야한다고 말했다.”



많이 고민했다. 에르하벤의 수명은 용으로서 거의 막바지에 달했다. 그만큼 쌓아올린 시간이, 인연이 너무나 많아서 떠나보내기 쉽지 않았다. 진짜로 사랑할지 말지 모르는 존재 하나만 보고 알 수 없는 세계에 뛰어들 수 없었다. 머리로는 계산을 끝냈는데 마음이 자꾸만 망설였다. 이대로 끝나게 되면 영원히 후회할 거라고 말했다.




“망설였지만… 네 목소리가 들리자 나도 모르게 네게 달려가게 되더구나.”




도와달라는 말. 필사의 시간. 3600초. 60분. 1시간. 고인 시간 속에 처절하게 움직이던 너를 보며 망설임은 눈 녹듯 사라졌다. 에르하벤은 모든 걸 버렸다. 하나를 바라며 죽을지도 모르는 마법을 썼다. 세계를 건넜다. 그리고 케일을 보았다. 상상했던 것보다 사랑스러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름다웠다. 비어있던 영혼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뺨을 따라 흐르는 눈물은 어떤 감정도 비추지 않았다. 케일은 한참동안 에르하벤의 눈을 보았다. 사람의 것이 아닌, 갈라진 홍채를 보았다.




“제가 돌아가라고 하시면 돌아가실 건가요?”




눈물을 짚어 하는 소리에 에르하벤은 그저 웃었다.




“네가 바란다면.”




케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목숨을 바쳐 건너왔는데 미련도 없이 말입니까?”




자신도 모르게 분에 찬 목소리가 났다.




“용이 죽는 때가 언제인 줄 아느냐.”




에르하벤은 소리 내 웃었다.




“반려가 죽을 때 죽는단다.”




모진 질문에 엉뚱한 답을, 그것도 가장 끔찍할 소릴 하기에 벌떡 몸을 일으킨 케일이었다. 에르하벤은 웃음을 지우지 않고 천천히 일어나 케일을 보았다.




“나는 너를 보았지. 그걸로 족하다.”




손등을 조심스레 감쌌다.




“나는 너를 알게 되었고 사랑을 알게 되었다. 내 죽음이란 네 마지막이오, 그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영광이란다.”




그 손등에 이마를 기댔다.




“그러니 네가 돌아가라 한다면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단다.”




원하지 않던 침묵이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케일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달아오른 눈시울에 떨어진 눈물은 시트를 적셨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들었다. 에르하벤의 뺨을 잡았고 얼굴을 마주했다. 케일은 억지로 웃었다.




“가지 마세요.”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마주했다.




“가지 말고, 제가 또 도와달라고 하면.”




젖은 목소리는 쉬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곁에서 계속 사랑해달라고 하면.”




가을 햇살 같은 시선 아래 어린 김록수가 있었다. 뒤 돌아 그 자취를 따라가면 홀로 어른이 된 김록수가 있었다. 바람이 불자 혼자가 아닌 김록수가 있었다. 젖은 바람에 무너진 김록수가 있었다. 종결된 세상 끝에 시작을 맞이한 어린 케일이 있었다. 사랑 속에 평온을 알던 케일을 지나 에르하벤의 곁에 편하게 웃는 케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가지 마요.”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 두고 어디도 가지 마.”




에르하벤은 그런 케일을 조용히 안아주었다.




“어디에도 못 가게 됐으니 너 또한 나를 사랑해 주거라.”




이런 말을 하며 힘을 더해 끌어안았다.




“나는 이미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




이후의 이야기




“예언이 있었습니다.”




데르트의 침착한 행동에 에르하벤이 이유를 묻자 저런 답변을 주었다. 케일이 이상한 표정을 했다. 데르트는 곤란한 듯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다 한숨을 푹 쉬었다.




“케일, 네가 태어나던 날. 네 미래에 대한 예언이 나왔다.”




이 세계, 마법은 없어도 예언은 있었다. 신관의 입을 빌어 나온 신어는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 없었기에 한참 논란이 되기도 했다. 콕 찍어 케일 헤니투스를 향한 예언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기에 금방 마무리 되었지만.




“세계를 건너온 존재가 널 사랑하게 됨을. 너 또한 그를 사랑하게 됨을.”

“정말 믿을 수 없는 소리군요.”




찻잔을 내려둔 케일이 에르하벤을 보았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제로 일어났으니 부정할 수 없겠지.”




데르트는 미간을 꾹 누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케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두 팔을 깍지 낀 채 어린 케일의 모습을 떠올렸다. 너무 작아서 안기도 두려웠던 아이. 눈물에 잠겨 죽을 것 마냥 울던 아이. 아이답지 않아도 사랑을 주면 배시시 웃을 줄 아는 아이. 자신과 아내를 반반씩 닮은 아이. 너무도 사랑스러운 아이.




“네가 무슨 선택을 하던 난 존중한단다. 그게 설령 신의 뜻에 반하더라도.”




데르트는 케일이 운명에 휩쓸려 자신의 선택을 박탈당하지 않길 바랐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감내할 의사가 있었다. 케일은 데르트를 보았다.




“신의 뜻이 아닙니다. 제 선택이에요.”




반려라는 건, 잘 모른다. 사랑이라는 것도 잘 모른다.

그렇지만 케일은 에르하벤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 마음에 어떤 외압도 박탈도 없었다. 빠르게 선택했다고 하여 그 선택의 무게가 가벼운 게 아니었다.

케일은 이제야 진짜로 행복해 질 수 있는 입구에 선 기분이었다.




에르하벤은 그런 케일의 손을 천천히 잡았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태어나 처음 보는 미소였기에 데르트는 졌다는 듯 마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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