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드 인.

W. 수미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아늑한 방, 이불에 폭 쌓인 채 눈을 뜬 백현이 고른 숨을 내쉬며 잠이 든 경수를 두 눈 가득 담았다. 얌전하게 자네. 내리깔린 속눈썹에 지긋한 시선을 맞추다 이마에 한 번, 콧잔등에 한 번 다정한 입맞춤을 내리 찍어 누른다. 조금 더 품 안에 가둔 채 경수의 등을 토닥이면 뒤척이는 듯 가슴팍으로 볼을 더 맞대며 안겨와 쿡쿡- 낮게 웃음 지었다. 쪽- 아쉬운 듯 콧잔등에 다시 한 번 입맞춤을 남기니 꼼지락 거리던 경수가 이내 번뜩 눈을 떴다.



“헉.”

“잘 잤어요?”



두어번 눈을 깜박이다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헉 하며 이불을 뒤집어 쓴 경수를 귀엽다는 듯 이불 채로 감싸 안으며 웃던 백현이 바닥에 널부러진 티를 하나 주워 입었다. 이불 사이로 눈만 쏙 꺼내 바라보던 경수가 이내 푸핫.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ㅁㅇ동 반상회. 남들 눈에 저게 저런 느낌이구나. 내가 입고 있을 땐 몰랐는데. 어깨마저 들썩거리며 웃으니 백현이 밉지 않게 흘겨보며 경수에게 지난 밤 제가 입고 있었을 티를 입혀 주었다. 귓가는 잔뜩 빨개져선 입혀주는 대로 가만히 있는 경수가 백현의 눈에 너무도 사랑스럽다. 어쩌지, 너무 좋아.



“다 웃었어요?”

“백현씨가 절 왜 놀렸는지 잘 알 것 같습니다. 신선한... 비주얼이네요.”

“....잘못했습니다.. 함부로 놀리지 않겠습니다..”



침대에 앉아 마주보며 조금 더 웃다가 배고프다 이야기를 꺼낸 경수가 몸을 일으키니 백현이 경수의 허리께를 붙잡고 침대에 엎어지며 몸을 늘렸다.



“좀만 더 누워 있으면 안 될까요.”

“...”

“쪼끔만...”

“자아, 변백현 어린이. 밥 먹자.”



눈을 찡긋 거리며 필살 애교를 시전하였으나 배고픈 경수에게 기각당한 백현은 가자- 하고 경수가 내민 손을 꼭 붙잡고 부엌으로 향했다. 경수의 뒤를 쫄랑쫄랑 따라가는 모습이 참 강아지 같아서 돌아 본 경수의 남은 한 손이 백현의 머리를 쓸어 줄까 말까 잠시간 고민하게 만들었다. 



“아침, 밥으로 괜찮죠?”

“네- 다 잘 먹어요.”

“전엔..”

“그땐 한창 조절 중이었죠. 제가 먹는 대로 살이 잘 붙어서.”

“참 고된 직업이네요.”

“그만큼 벌이가 좋죠.”

“..자랑?”

“네. 자랑. 모르셨죠? 이제 다 경수씨 꺼.”

“저도 잘 벌어요.”

“....제가 애인을 잘 둔 것 같습니다.”



냉장고를 둘러보며 재료를 꺼낸 경수가 야채들을 씻고 도마 위에 올려 통통 써는 동안 백현은 뽀득뽀득 쌀을 씻었다. 옆에서 경수가 대접 하나를 내밀면 그 안에 쌀뜨물을 담아주고 씻은 쌀은 전기밥솥 안으로 쏙. 나란히 서서 식사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꼭 부부라도 된 것만 같아서 백현의 기분이 한껏 들떴다. 끓는 냄비 안으로 재료들을 넣고 마지막으로 넣을 두부를 썰며 간을 맞추는 경수를 지긋하게 바라보니 경수가 간보던 숟가락을 들어 백현에게 내밀었다.



“간, 볼래요?”

“딱 좋아요.”

“다행이네요. 입맛 다를까봐 걱정했어요.”

“다, 잘 먹어요. 근데 경수씨 그거 알아요?”

“뭐가요?”



백현의 눈이 반짝거리며 다가오자 경수가 냄비 안으로 두부를 퐁당 집어넣으며 물었다. 



“지난번에도 같은 포크로 저 먹여 주셨었는데. 이제 저는 간접 말고 직접이 더 좋..”

“백현씨, 굶고 싶어요? 집에 갈래요?”



새빨갛게 붉어진 얼굴로 국자를 든 채 백현에게 말하자 백현이 이내 양 손을 위로 들어 올리며 잘못했다 미안하다 얘기하며 식탁으로 식기들을 날랐다. 찌개를 중간에 놓아두고 포슬포슬 잘 된 밥까지 잔뜩 퍼 담아 내니 그것이 신호라는 듯 두 사람은 말도 없이 먹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며 밥 한 공기 뚝딱 비워냈다. 어젯밤 체력 소실에 허기진 것이려니, 앞으로 잘 챙겨 먹어야겠다. 알게 모르게 다짐하는 두 사람이었다.



“설거지 제가 할게요.”

“그냥 놔두시면 제가 해도..”

“제가 하고 싶어서 그래요.”



백현이 설거지 하는 뒷모습을 식탁에 앉아 턱을 괴고 바라보던 경수가 이내 울리는 전화 벨 소리에 조용히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몰아치는 일감의 시작을 알리는 벨소리였다. 주중 새로이 추가 된 신작 시사회 일정들이나 감독들의 GV 일정초대, 정기적으로 투고해야 하는 칼럼 마감일 등을 세세하게 읊어주던 통화가 끝나니 백현 또한 설거지를 마치고 매니저에게 전화가 온 듯 조금 피곤한 얼굴로 통화를 마쳤다.



“...월요일도 아닌데 월요일인 기분입니다.”

“저도,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기분이네요.”



가라앉은 한숨소리와 함께 동시에 ‘백수 하고 싶다.’ 같은 소망이 터져 나와 마주서서 거실이 떠나가라 웃어버리고야 말았다.



*



“어제, 제대로 못 본 DVD는 다음에 꼭 다시 같이 봐요.”

“네, 그래요. 간만에 휴식인데 제대로 못 쉰 것 같아서 어쩌죠.”

“저는 경수씨 얼굴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한 휴식이에요.”

“그렇게 생각해주면 다행이구요.”

“다음엔 또 언제 보려나요. 한동안 경수씨도 또 바쁘실 것 같은데.”

“금방, 곧 보게 될 거에요.”

“그럼 그 날만 기다리며 열심히 일 할게요.”



마냥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서로의 배웅은 한참을 그렇게 현관 앞에서 길어지고- 매니저의 전화가 세 번은 더 걸려 와서야 백현은 경수의 두 볼에 입맞춤을 남기고 떠났다. 기지개를 켜며 거실로 돌아 온 경수도 잠시간 여운을 느끼는 듯 하더니 이내 작업용 안경을 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연애 할 시간도, 휴식 할 시간도 만들어 내려면 눈앞에 쌓인 일들을 어서 처리하는 수밖에 없지. 스케줄을 진행하는 백현과 칼럼과 메일 인터뷰를 작성해가는 경수의 각오가 남달랐다.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온전한 여유, 온전한 휴식. 그리고 서로를 위해 할애하는 시간이었다.



*



“......영화들이 왜 다 이 모양이야,”

“날이 덥잖아. 시원한 영화들 쏟아질 때 된 거지 뭐.”

“시..원? 뭐 잔인한 거 몰아넣고 귀신 쏟아지면 시원한건가. 도대체 어디가..”

“여름은 공포영화가 쏟아지는 계절 아니겠냐. 그나저나 조절 좀 해야겠더라. 계속 이런 것만 보면 괜찮겠냐. 정신 사나워서.”

“중간 중간 네가 어린이 애니메이션도 넣어 줬잖아.”

“아, 그거 꽤 오랜만에 후속작이 나왔더라고. 거의 10년도 더 지난 작품이잖아.”

“그래서 이건 나한테도 번역가가 비밀이야?”

“...뭐 제작사 배급사 지시사항이니까 나도 몰라. 한번 크게 터진 논란이 잠잠 해져야 괜찮아 지겠지 뭐.”

“논란이 된 사람은 아니지만 누군지 알려 줄 수는 없다. 라는 게 누구 발상인지.”

“뭐, 한 자리 차지하고 계시는 어르신들?”

“박찬열 월급 주시는 양반들 말이지?”

“그렇죠, 도경수 원고료 주시는 양반들이요.”



경수에게 표를 내밀며 어깨를 토닥인 찬열이 곧 입장할 셀럽들의 인터뷰를 위해 프레스 라인으로 떠났다. [한 여름 밤의 꿈.] 표에 쓰인 제목은 동명의 책이 떠오를 정도로 청량하고 몽환적인 한 여름 푸른 밤의 감성을 물씬 담아 낸 듯 보이나 누가 알았겠는가. 한 여름 밤의 꿈같은 귀신이 한 무더기 나온다는 영화라는 걸. 짐짓 오한이 드는 듯 어깨를 작게 던 경수가 시원한 듯 서늘함까지 느껴지는 시사회 관으로 향했다. 



“무서우려나.”



주위를 둘러보니 군데군데 아직 인터뷰를 마치지 못해 입장 전인 공석들이 보이고 복도 쪽에 앉은 제 왼쪽 자리 또한 비어 있어 경수는 그제야 손에 들린 영화 팜플렛을 뒤적거렸다. 늘 그렇듯 공포영화의 법칙 아닌 법칙이랄지. 귀신이 나오는 영화들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면서도 꼭 마지막에 귀신도 나름의 사연이 있어 등장한 것이라는 듯 과거사를 풀어내고, 관객들의 눈시울을 붉히다가 통쾌한 복수와 함께 끝매듭 짓는 서사. 영화의 짤막한 줄거리를 보며 내용을 가늠해 본 경수가 어느 새 제 옆에 자리한 사람을 힐끔 쳐다보다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이 꺼지고 광고가 시작되니 옆 사람이 경수에게 속삭였다.



“....아는 체도 안 해 줍니까?”

“백현씨였어요?”

“안 본 새 사랑이 조금 식었군요..”

“...누구든 얼굴의 반을 가리면 알아보기 쉽지 않을 겁니다.”



코 중턱까지 내려 쓴 벙거지 모자를 슬쩍 위로 올린 백현이 경수와 시선을 마주치며 웃었다. 광고가 끝나고 완전히 암전되자 모자를 벗어 무릎위에 올려둔다.



“곧 보자는 말 이런 뜻이면 더 열심히 일해야겠어요.”

“뜻밖이네요. 이런 건 저도 몰랐는데.”

“실은 이 자리 다른 기자 분 자리라, 제 자리랑 바꿨어요.”

“그래도 돼요? 기자 분이면..”

“제 옆자리가 그 기자분이 특집 기사 준비하고 있는 작가분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인터뷰 따 내고 싶으셨는지 흔쾌히 바꿔주시지 뭡니까.”

“아아. 그런데, 백현씨 이 영화 괜찮으세요?”

“저야 뭐. 공포영화.. 즐겨보진 않지만 무서워하진 않죠. 경수씨는요?”

“저도 뭐. 같은 의견입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됨에 따라 두 사람의 허세 아닌 허세 같은 포부는 와르르 무너지고야 말았다. 깜짝 놀라게 만드는 효과음이 나올 때마다 눈에 띄게 어깨를 흠칫하고 벗어 둔 백현의 모자 아래로 맞잡은 손은 귀신이 등장 할 때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더욱 힘이 실렸다. 깜짝 놀라 ‘아.’ 탄성이라도 나오면 멋쩍은 듯 서로 시선을 마주하다 놀라지 않았던 양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니, 이 영화 뭐가 이렇게 무서운 게 사실적이야?



데이트 아닌 데이트는 영화가 끝난 뒤, 바로 이어져야 하는 경수의 인터뷰와 무리해 자리한 시사회로, 급히 다음 스케줄 장소로 이동해야 하는 백현의 일정으로 인해 짧게 끝이 났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잡고 있었던 손의 온기가 여전히 남은 듯 해 경수는 인터뷰를 하면서도 내내 손에 간간히 시선을 두었고, 백현은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제 손을 맞잡은 채 경수를 떠 올렸다.



*



[예년보다 더운 요즘, 밖을 나가면 숨이 턱 막힌다는 표현 참 누가 지었는지 딱 어울리는 날씨입니다. 예상하셨겠지만 무더위 늘 그렇듯 쏟아지는 영화들이 있죠. 뒷골을 서늘하게 만들어 등골이 시리다는 공포영화의 계절. 공포영화의 홍수 속에서 하반기 스타트를 끊을 개봉 예정작 시사회에 초대되었습니다. ‘한 여름 밤의 꿈.’ 말 그대로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아주 잠시 들었습니다. 시각적인 공포감 보다는 청각적인 공포감을 부각한 듯 극의 도입부에는 별다른 전개 없이 주 목적인 ‘공포감’을 전달하는 데에 포커스를 기울인 작품이었습니다. 최근 동향이 ‘인형’ 혹은 ‘잔혹’성에 치중된 공포들을 소비하는 추세였다면 이 영화는 아. ‘사다코’를 생각나게 하는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공포물을 보면서 향수에 젖어드는 것도 독특한 경험이긴 했지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지는 한 방 한 방이 어개를 들썩이는 놀람으로 돌아오긴 했었습니다. 참, 팝콘은 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엔 여기저기서 날아오진 않을테니까요. 별 세 개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평소와 같이 블로그에 간단한 리뷰를 적어 올린 경수는 당분간 공포영화는 조금 무리이려나 생각했다. 영화가 생각보다 조악한 면이 없잖아 있었던 건지. 줄거리에 집중 하려하면 왁왁 하고 인위적인 놀라움을 선사할 때 마다 산통깨진다는 기분이 이런 것인가 작게 느끼긴 했지만. 뭐, 취향의 문제인지라 이것 또한 즐겨 하는 마니아들은 즐길 수 있는 요소이겠거니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빛506 님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이런 거 이렇게 공개적으로 적어도 돼?”



제 블로그를 알림 신청 해 둔 게 틀림없다. 이제는 익숙한 백현의 글을 읽어내려가던 경수의 낯이 홧홧하게 붉어져 에어컨 빵빵히 틀어 놓은 서재가 괜히 더운 것 같아 한 참 손부채질에 여념 없었다. 덥네, 마음이.



[보고 오셨군요. 저도 마침 좋은 기회가 있어 해당 영화의 시사회를 보고 왔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청각적인 효과에 초점을 매우 많이 둔 것인지 예상치 못한 엉뚱한 곳에서도 깜짝 놀라게 하는 포인트들이 있더군요.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전개 없이 그저 ‘놀라게’ 하는 것에만 심혈을 기울인 듯 해 보인다는 게 말이죠. 다만 어쩐지 중간부터 영 집중이 안 되더라고요. 실은 많이 좋아하고 있는 사람과 같이 본 영화인데- 제가 좀 심약한 편인지 깜짝 깜짝 놀라서... 그 분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에 온 신경이 가서 뒷부분이 기억이 잘 나는데- 영화에 대해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입술을 비죽거리다 이내 핸드폰을 들어 백현에게 메시지를 써 내려갔다. 매일 매일이 고백을 듣는 기분이라 연애란 거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지 경수는 조금 어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상대방이 보여주는 충만한 애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연애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받는 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어 고맙다는 이야기를 꼭 전하고 싶었다.



[저도, 많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촬영 잘 해요.]



금세 읽었는지 표시가 사라지고 경수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왔다. ‘여보세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한 가득 묻어 나왔다. 



특별한 이야기가 없어도, 매일 매일 얼굴을 맞대고 있지 않아도, 평범하고 소소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그런 따뜻한 사랑 이야기가 있다면 저희들 이야기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잠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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