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 근처의 약국을 발견한 것은 이사 직후였다. 집에서 역으로 가는 길 중간쯤에 있는 약국은 이면도로 안쪽으로 들어와 있어서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위치였다. 두통약과 진통제를 달고 사는 탓에 나는 약국의 위치를 눈여겨보았고,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에드빌하고 타이레놀 있나요?] 약국에는 곱상하게 생긴 젊은 약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안경을 낀 채 책을 읽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자 책표지를 덮으며 못 들었다는 제스처를 했다. 종이책을 좋아하는 사람? 동질감에 관대해진 나는 기꺼이 약 이름을 다시 큰 소리로 말해주었다. 그는 그제야 알겠다는 투로 약을 찾으러 갔다. 그 사이, 나는 문학도다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목을 쭉 빼서 그의 책 표지를 확인했다. 아는 소설이었다. 필립 로스의 『에브리 맨』. 삶에 초연하지 못한 노년의 화자가 주인공인 이야기다. 약사는 무척이나 차분해 보이는 인상이었고 몹시 젊어 보이기도 했으므로 의외였다. 안 어울리는 걸 읽고 있네.


[좋은 책 읽으시네요] 계산한 카드를 돌려받으며 괜히 아는 척을 했다. 약사는 나를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응? 아아. 갑자기 그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당황해서 그냥 쭈뼛거리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너무 달아난 것처럼 보였을 것 같아서 후회했다. 이게 올해 초의 일. 이후로는 내가 장애에 편견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줘야겠다는 의무감에 가득차서, 오히려 태연한 척 자주 약국에 드나들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속으로는 예쁘고 차분한, 그 듣지 못하는 젊은 약사를 몹시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곧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고 약국은 어디 할 것 없이 붐비기 시작했다. 지나다니면서 본 그의 약국 창문에는 한동안 <마스크 없음>이라는 정갈한 손글씨가 붙어 있었다. 코로나는 노인을 많이 죽이는 병이었다. 나는 약국을 지날 때마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같은 『에브리 맨』의 문장을 되뇌며 필립 로스를 읽는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두통은 여전했고, 들리지 않는 나의 약사님은 이제 내가 방문하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약을 내밀었다. 이부프로펜과 아세트아미노펜이야말로 화이자나 모더나보다 더한 나의 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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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을 챙겨 지하철역으로 향하다가 문득 바깥바람이 시원하다고 느꼈다. 겨울이니까 당연히 찬 바람이 불겠지만 유독 서늘하고 청명한 공기였다. 계절을 감각하는 능력이 좋아지기라도 한 걸까,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걷다가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마스크를 빼먹은 거였다. 나는 길을 걸어오면서 평소보다 더 쳐다보던 사람들의 눈길이 무엇을 의미했는지ㅡ오늘은 유독 내가 잘생겼나? 싶었지만 아니었던 것이다ㅡ뒤늦게 깨달았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단골 약국 가까이였다. <마스크 없음>이라는 손글씨도 지금은 붙어있지 않았다. 나는 소매로 입을 가리고 약국으로 뛰어 들어갔다. 조용히 앉아있던 지민이ㅡ그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명찰을 달고 있었으니까ㅡ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떼자, 금세 알아듣고는 마스크를 꺼내주었다. 참으로 예쁘고 차분하고. 약사라서 똑똑한 건 당연하겠지만 센스 있기까지.


계산하려고 했으나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휴대전화도 마찬가지였다. 가방에 들어 있는 책이며 노트들을 약국 매대 위에 급하게 올리며 찾았지만 역시 없었다. 그제야 식탁 위에 가지런히 3단으로 쌓아두었던 지갑-휴대전화-마스크가 생각났다. 마스크도 마스크지만 지하철도 타야 하는데. 수업 시간에 맞추려면 빠듯한데.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 설명하기 시작한 나에게 지민은 자신의 귀를 가리키며 엑스 자를 그어 보였다. 그러더니 빈 종이와 볼펜을 내밀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썼다. ‘죄송한데 마스크랑 3,000원만 빌려 주세요 ㅠㅠ 저녁에 갚을게요’ 지민은 내 글씨를 쳐다보더니 뭐가 잔뜩 들어 있는 가운 주머니를 뒤적여 5,000원짜리를 한 장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가방을 터느라 매대 위에 올려놓았던 내 수업교재를ㅡ폴 오스터의 책이었다ㅡ인질로 잡듯 집어 들곤, 이로써 거래가 성사되었다는 것처럼 나를 보며 고개를 까닥,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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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이번 학기의 마지막 텍스트였다. 작가인 화자가 들려주는 말 그대로 오기 렌이라는 사람의 크리스마스 에피소드다. 어린 소매치기가 떨어뜨린 지갑을 주운 오기는 그것을 돌려주기 위해 찾아간다. 그런데 소매치기 소년의 집에는 마침 앞을 보지 못하는 할머니만 있었다. 할머니는 처음에 오기를 손자로 착각하지만, 나중엔 다른 사람ㅡ소매치기ㅡ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할머니와 손자인 척 연극을 계속하며 행복한 크리스마스 저녁식사를 한다. 오기는 그 집에서 나오기 전, 소매치기 소년이 훔친 카메라들을 모아둔 박스를 발견하고 그 중에서 하나를 조용히 가져온다. 나중에는 그것을 돌려주려고 했으나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다. 이후로 오기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거리를 자신이 훔쳐버린 카메라로 찍는다...


나는 같이 강의를 들은 동기에게 만원을 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물론 약국에 들러 만원을 건넸다. 지민이 오천원을 거슬러 줄 때는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려고 받지 않겠다는 시늉을 했다. 대신 ‘책이요’ 하고 휴대폰에 글자를 쳐서 내밀었다. 지민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매대 아래쪽에서 묵직한 검은 비닐봉지를 꺼내 내밀었다. 나는 밝게 고개를 꾸벅하고 약국을 빠져나왔다. 어두워진 거리를 걷고 있자니 자꾸 손에 든 봉지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로등 밑에 서서 봉지를 열자, 거기엔 아까 맡겨둔 소설책만 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늘 사는 애드빌, 타이레놀, 그리고 KF94 마스크 여러 장이 들어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배경인 소설 속에서 오기 렌은 장님 할머니에게 예기치 못한 저녁 식사를 대접받았다. 그리고 코로나가 한창인 세상 속에서 들리지 않는 약사 선생님으로부터ㅡ그가 무척 예쁘고, 차분하며, 책을 좋아하는 내 취향의 사람이라는 것을 포함하자면 더욱ㅡ예기치 못한 감동을 선사받은 나는... 그에게서 훔쳐내고 싶은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마음이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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