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요? 그렇구나. 부적을 쓰면 되는구나….”

아직 심장이 벌렁벌렁했던 사니와는 후다닥 몸을 돌려 종이 뭉치 앞으로 뛰어갔다. 제가 사용하는 식신보다는 약간 크고 길쭉했다. 여기에 영력을 불어넣으면 되는 걸까.

‘다행이다. 가슴을 안 만져도 돼서….’

만지는 게 아니라 그냥 손을 대고 영력을 불어넣는 거지만, 사니와 입장에서는 그 정도의 접촉조차도 어려웠다. 위험수위가 너무 높았으니까. 부적이 있어서 다행이다. 역시 인간은 도구를 사용해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하며 영력을 불어넣고 있는데 갑자기 연구원이 비명을 질렀다.

“사니와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네?”
“코피가 나잖아요!”

코피?
사니와가 코를 훌쩍거리자, 콧물인 줄 알았던 것이 입술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려 손등에 떨어졌다.

빨간색.
진짜로 코피였다.

“어? 어?”
“세상에… 이 많은 부적에 다 불어넣으신 거예요? 한 장이면 되는데!”
“아, 죄송해요. 깜박하고….”

어림잡아 500장은 되는 것 같은데, 머릿속으로 딴생각을 하면서 무작정 영력을 불어넣었더니 가감하는 걸 잊은 모양이다.
영력을 너무 많이 쏟아낸 탓인지 시야가 아찔했다. 순간적으로 비틀거린 사니와는 책상을 짚고 제대로 서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빠져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주인!”
“어, 거기! 나오면 안 돼요!”

빠지직. 검사기가 아직 작동하는 중이었는지 검은 옷의 히자마루 주위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붉게 빛나는 실 같은 것이 사니와를 향해 뻗은 그의 팔을 휘감았다.

‘저거 결계 아닌가?’

결계의 강제력이 검은 옷의 히자마루를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니와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히자마루 씨! 얌전히 있어!”

코피 때문인지 한쪽 귀가 멍멍하고 시야의 가장자리가 거뭇거뭇한데, 저를 바라보는 히자마루의 얼굴만은 꼭 확대한 것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이놈의 눈동자는 이럴 때까지 보고 싶은 것만 보네.’

사니와는 손가락으로 콧대를 잡은 뒤 고개를 위로 들었다. 피가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기분이 찝찝했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사니와님. 괜찮으세요? 이걸 어째. 영력을 너무 쏟으셨나 보네.”
“괜찮아요. 괜찮아. 영력 쓰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래요….”

부적의 양이 좀 많긴 했지만 예전에는 이 정도로 코피를 흘리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오랫동안 쉬면서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많이 나약해진 모양이다.
겨우 영력 불어넣는 일로 코피를 흘리다니. 잠수 타는 동안에도 훈련은 꾸준히 할걸. 사니와는 조금 반성했다.
연구원에게 받은 티슈로 코를 막은 사니와는 창백한 얼굴의 히자마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 괜찮으니까, 히자마루 씨는 검사나 해. 검사 끝나야 집에 갈 수 있잖아.”
“…….”

연련장에서 실컷 얻어터지던 때도 표정에 변화가 없었는데, 주인도 아닌 사니와의 코피 정도에 저렇게 당황할 건 또 뭔가.
검은 옷의 히자마루가 꼭 대신 당황해주는 것 같아서, 사니와는 조금 빨리 진정할 수 있었다. 과도하게 영력을 쏟아내느라 열려있던 신경이 안정을 되찾았는지, 다행히 코피는 금방 멎었다.

“부적에 코피 안 묻었죠? 쓸 수 있어요?”
“500장도 넘게 있는데 뭐라도 쓸 수 있죠.”
“…비품 낭비해서 죄송합니다….”

민망해져서 사과하자, 연구원은 어차피 정부 돈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는 부적을 가지고 검은 옷의 히자마루에게 건너갔다. 그는 여전히 사니와의 상태가 신경 쓰이는 듯했으나, 사니와가 똑바로 서라는 듯 손짓하자 순순히 명령을 따랐다.
뚜뚜뚜. 검사기가 작동하면서 모니터에 결과가 뜨기 시작했다.
반은 한자고 반은 영어라서 알아먹을 수가 없었으나 대충 올 그린이라는 것은 알겠다.
연구원은 빠르게 올라가는 화면을 보면서 그걸 다 한눈에 읽어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동조율은 최상이네요. 거부반응도 없고, 맥박은 조금 빠른데, 육신 안정성이… 아하, 이래서 부끄러워하셨구나.”
“네? 뭐가요?”
“괜찮아요. 다 이해합니다. 많이 봤거든요.”

뭘?
뭘 이해하는데?
보기는 또 뭘 봤고?

사니와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자 연구원은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편안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사니와는 불안해졌다. 뭘 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오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문제는 오해라고 말하는 순간, 저 입에서 더 오해를 살 발언이 나올 것 같다는 이유 없는 확신이 들었다는 거다.

‘뭔데? 말을 해! 그런데 지금 말하면 히자마루 씨가 들을 거 같으니까 나한테만 속삭여!’

눈빛으로 그렇게 역정을 내봐야 전해질 리가 없었으므로 연구원은 차분하게 검사지를 출력했다. 꽤 여러 장이 뽑혀 나왔는데 결론은 전부 정상이라기에 사니와는 안심했다.

“결과표를 단말기로 확인하실 수 있도록 전송해 드릴게요. 서류는 외부 반출이 금지되어 있어서.”
“네….”
“예. 그럼 다 끝났습니다.”

서류를 철해서 책상 위에 올려놓은 연구원이 화면을 조작하자 검은 옷의 히자마루를 가두고 있던 검사용 결계가 거두어졌다. 그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내려와 사니와 쪽으로 다가왔다.

“괜찮은가? 일어설 수 있나?”
“괜찮아, 괜찮아. 히자마루 씨는? 아까 경고등 울리면서 팔에 불꽃 튀던데, 화상 안 입었어?”
“나는 멀쩡하다.”
“그래… 다행이네.”

볼썽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지만 그래도 안정이 된 탓에 가물가물했던 시야도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사니와가 일어나려고 몸을 일으키자, 검은 옷의 히자마루가 얼른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아라.”
“아냐, 괜찮아. 안 잡아도 돼. 밖에 의자 있으니까 잠깐 앉아있다가 가지 뭐.”

코피는 멎었지만 갑자기 영력을 과도하게 사용하느라 아직 조금 어지러운 느낌이 남아있긴 했다.
마음 같아서는 손을 붙잡는 게 아니라 업어달라고 하고 싶은데, 차마 남의 집 남사한테 그런 부탁을 할 용기는 없었다.
사니와는 벽을 짚고 일어나 제 발로 검사실을 나왔다. 대기실 의자까지 걸어가는 그 몇 걸음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의자에 앉은 사니와는 엎드리듯이 몸을 앞으로 숙이고 이마를 짚었다. 등받이에 기대고 싶었으나 몸을 뒤로 제끼니까 현기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아 편한 자세를 포기하고 반쯤 엎어진 자세로 있었다. 두통은 없는데 어쩐지 목 뒤가 당기는 느낌이라 불편했다.

“후우우우….”
“속은 괜찮은가?”

검은 옷의 히자마루는 사니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거부하는 기색 때문에 차마 건드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응. 괜찮아. 그냥 좀 어지러워서 그래.”
“너야말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곳에도 병원이 있을 텐데.”
“이런 일로 뭘 병원을 가. 그럴 시간 없어. 돌아가서 일해야 한단 말이야.”

연련이 너무 금방 끝나서 간단하게 검사만 하고 돌아갈 셈이었는데, 엉뚱한 짓을 하는 바람에 시간을 지체했다. 오늘은 비품목록도 정리해야 하고 어제 못다 한 결계 상태도 점검해야 하는데. 게다가 야전도 보내야 하고. 할 일이 산더미였다.

‘아… 일할 생각 하니까 더 괴롭다….’

밀린 일거리가 너무 많아서 짜증이 나는데, 그 원흉이 자신이 잠수를 탄 때문이라 누굴 원망할 수도 없었다. 밀려오는 자기혐오에 사니와는 그냥 땅굴을 파고 들어가고 싶어졌다. 남사들에게 그동안 너무 의지해온 탓일까, 혼자서 바른생활을 유지하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그렇게 힘들게 일할 필요는 없지 않나.”
“…응?”
“힘들면 쉬는 편이 좋아. 무리를 거듭하면 체력뿐만 아니라 정신력도 고갈되고 만다. 혼마루 안에서는 다른 검들이 눈에 밟혀 네가 제대로 쉬지 못하니 피로가 쌓이는 거겠지. 휴식할 때 정도는 현세에 머무는 편이 낫지 않겠나.”
“복귀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뭘 또 현세에 있어? 네 일 아니라고 너무 막 말하는데?”

자기 혼마루 아니라고 무책임한 조언을 하는 사니와는 많이 봤지만, 도검남사가 이러는 건 또 처음 본다.
사니와는 조금 기가 막혀서 주먹을 쥐고 상체를 일으켰다. 사니와는 의자에 앉아있고, 검은 옷의 히자마루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상태였기에 사니와 쪽이 약간 더 눈높이가 높았다.
감정이 상한 것을 숨기지 않는 사니와와는 달리, 히자마루는 차분하게 그녀를 설득했다.

“네가 자리를 비우면 혼마루의 운영이 중단될 뿐 달라지는 것은 없어. 방치한다고 손상되는 것이 아니니까, 네가 충분히 회복하고 돌아올 때까지, 네 검들은 언제까지든 기다릴 거다.”
“이보세요, 히자마루 씨? 자랑이 아니라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내가 잠수 경력이 1년 반이야. 솔직히 지금 복귀한 것도 엄청 양심에 찔리거든? 두 번 잠수탔다간 우리 애들 얼굴 어떻게 보라고?”

아무리 자기 주인도 아니고 자기 혼마루도 아니라지만 이건 경우가 아니지 않은가. 히자마루가 이렇게 무책임한 검이었나? 자기 주인이 아니라서?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도 나오지 않았다. 사니와가 기운 없는 팔로 주먹을 내리쳐 의자 시트를 퍽퍽 두드리자, 히자마루가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그래서 피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뭐를?”
“정부의 실패한… 아니, 역행군이 혼마루를 습격한 사건 말이다.”
“어?”

그러고 보니 담당자가 그랬지. 경력 사니와들의 혼마루 쪽에 피해가 컸다고.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그녀에게 급하게 연락이 온 것으로 보아 적어도 최근 한두 달 내에 일어난 사건인 건 분명한 듯했다.
그렇게 큰 사건이 있었는데도 담당자에게 듣기 전까지는 전혀 모를 만큼 방구석 폐인으로 살고 있었다는 게 가슴 아프지만.

“네가 평범하게 사니와 일을 하고 있었더라면 분명 네 혼마루도 습격을 받았을 거다. 예고도 없이 잠적하는 것을 직무태만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네가 현세에서 쉬는 동안 그곳을 방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너도, 너의 검들도 무사할 수 있었던 거야.”
“…….”

맞는 말이긴 했다. 그전까지 역행군이 게이트를 넘어오는 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가능성의 여부를 묻는다면 완전 불가능이라고 말하진 않겠지만, 수십 년간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으니 누구라도 『그럴 리 없다』고 방심했을 것이다.
성격이 치밀하지 못한 자신은 더욱 말할 것이 없고.

“성실하게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야. 때로는 실수하는 편이 더 나은 결과를 얻기도 하고, 이기심에서 시작한 행동이 누군가를 구할 수도 있어.”
“…그래서 히자마루 씨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네가 원하는 대로… 너 자신을 가장 먼저 생각했으면 한다. 의무니 명분이니 하는 것은 그다음이지 않나.”

말은 분명히 힘들어하는 사니와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인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그렇게 들리지를 않았다. 위로라기보다는 꼭, 염원이 담긴 말 같았다.

“네가 힘들어하지 않기를 바란다.”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 멍한 것 같기도 하고, 먹먹한 것 같기도 하고. 보통 남사가 자기 주인이 아닌 사람에게도 이렇게 진심을 담은 이야기를 하나? 사니와는 혼란스러워졌다.

“히자마루 씨. 원래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줘?”
“…음?”

제 히자마루는 주인에게는 다정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상당히 고압적인 편이었다. 물론 일부러 상처 입히는 말을 하거나 강제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신은 타인에게 친절하게 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실제로 그런 면이 있기는 하지만, 특유의 고압적인 자세가 문제라고 할까. 의도가 어쨌건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무섭게 느껴질 법한 말투였다.

그런데 검은 옷의 하자마루에게서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도검남사는 어쨌거나 검이고, 호전적인 츠쿠모가미고, 오로지 주인만을 다른 인간과는 달리 예외적인 존재로 둔다고 하던데. 왜 이렇게 친절한 걸까.
이것도 개체 차이인가?

“다른 혼마루 남사한테 이렇게 배려를 받은 적이 없어서, 조금….”
“내가 너를 배려하는 것이 불편한가?”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어색하고 민망하고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인데, 그게 히자마루 씨의 잘못인가 하면 그런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고마워하면 모를까.

“그게, 내가 좀….”

오해할 것 같아서.
자신의 남사라면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친절에 과한 의미 부여를 하게 될 것 같아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면 기분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경험에 집착하게 될 것 같아서.

“미안. 코피를 흘려서 그런가,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가 봐. 자꾸 횡설수설하네.”
“역시 병원에 가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냐. 혼마루로 돌아갈래. 약이니 주사니 하는 것보다 우리 애들 얼굴 보는 게 더 좋거든!”

일부러 뒷문장에 힘을 주어 말하자, 히자마루 씨의 표정이 약간 이상해졌다.
살짝 일그러진 표정인데, 그게 싫어하거나 불쾌해하는 게 아니라… 그래. 방금 사니와가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먹먹한 감동을 받은 표정에 가까웠다.
그것을 자각하자 또다시 가슴이 간질거렸다. 이번에는 손끝이 닿은 것도 아닌데 얼굴의 솜털이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시선이 닿아서 그런가?
앉아서 쉬어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던 현기증이 어느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위로하는 말 좀 들었다고 이렇게 금방 괜찮아지는 것을 보면 사실 자신은 상당히 단순한 사람이 아닌가.

“얼른 돌아가서 점심 먹자. 흘린 피를 보충하려면 잘 먹어야지.”
“피를 흘린 건 너뿐이야.”
“너도 연련에서 다쳤잖아?”
“다 나았다.”
“그럼 다 나은 기념으로 먹든가. 원래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 거야.”

사니와는 뒷머리를 고정하던 실핀을 뽑아내고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꽉 묶어 올리는 바람에 두통이 온 건지도 모른다. 왁스까지 발라서 있는 대로 잡아당겼더니 모근이 당겨 아프기도 했고.
연련도 끝났으니 단정해 보이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히자마루 씨의 말처럼 원하는 대로 있으면 되리라.

“돌아가자. 나 배고파.”
“…그래.”

사니와는 검은 옷의 히자마루를 향해 씩 웃어 보이고, 돌아가는 게이트를 작동시켰다.



***



“어서 오렴. 느긋하게 연련을 즐기고 온 모양이네.”

귀환이 늦어진 건 연련 때문이 아니고, 사실 연련은 즐기지도 못했지만 설명하기는 귀찮았기에 사니와는 대충 히게키리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히게키리. 오전 출진부대 애들은 돌아왔어?”
“응. 네가 제일 마지막이야. 점심은 먹고 왔니?”
“아니. 이제 먹어야지.”

연련은 금방 끝날 테니 돌아오면 오전 업무를 재개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연구실에서 너무 시간을 지체한 탓인지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렇다는 건, 수행지에서 히자마루가 보낸 편지도 도착할 때가 되었다는 뜻인데.

“히게키리. 콘노스케가 수행편지 가져오지 않았어?”
“마침 정부에서 공문이 와서 그것과 함께 네 책상에 놔뒀단다. 지금 읽어볼 거니?”
“아니, 급한 거 아니니까 밥부터 먹지 뭐. 히게키리. 점심 메뉴는 뭐야?”
“으음. 아마 소고기 요리였던 것 같은데.”
“고기? 고기 좋지.”

사니와는 검은 옷의 히자마루를 돌아보며 물었다.

“히자마루 씨도 같이 점심 먹을래?”
“나는 괜찮다.”
“같이 먹어도 괜찮다는 뜻이지?”

히자마루의 ‘괜찮다’는 식사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니와는 조금 억지를 부리기로 했다.
그와 조금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었으니까, 붙잡을 명분이 필요했다.

“히자마루 씨, 얼른 따라와.”

검은 옷의 히자마루는 조금 당황하는 듯했으나, 거절하지 않고 사니와의 뒤를 따라갔다.



***



집무실 책상 위에는 고이 접힌 편지가 놓여 있었다. 히자마루가 보낸 거겠지.
사니와는 서류를 한쪽으로 치워놓고, 히자마루의 편지를 그 위에 고이 올려놓았다.
그리고 정부에서 보낸 공문을 펼쳐놓고 그 위에 그릇들을 올렸다.
정부에서 보낸 공문은 쓸데없이 크기만 크고 종이도 두꺼운데 코팅이 되어 있어 재활용도 할 수 없는 쓰레기였으니, 식탁 깔개로라도 써야 한다.
대충 보아하니 절분 캠페인이 끝나자마자 비보의 마을로 출진을 하라는 소리인 것 같았으나 뭔가 글씨가 많아서 읽기 귀찮았다.
어차피 출진해서 닥돌하면 알게 되니 굳이 설명서를 읽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내가 전에 악기를 얼마나 모아뒀더라… 이따가 장부 찾아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근시용의 책상을 끌고 와 맞은편에 붙여놓자 훌륭한 식탁이 완성됐다.
이렇게 하니까 꼭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모여 급식을 먹던 생각이 난다.

“소고기무국에 장조림이네. 아침을 굶었다 먹는 거라 담백한 게 좋긴 하겠다. 아, 히자마루 씨. 그거 짜니까 한꺼번에 많이 집어먹지 않도록 조심해.”
“으음.”

아침 일찍 일어나서 화장하고 연련장에 갔다가 코피까지 쏟은 탓인가, 밥상을 마주하니 갑자기 모든 피로가 풀리면서 식욕이 마구 샘솟기 시작했다.
사니와가 전투적으로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며 히게키리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고, 검은 옷의 히자마루는 제 몫의 반찬을 사니와에게 양보했다.

빈속에 따뜻한 국물이 들어가니까 좋긴 한데, 국물을 너무 마셨는지 밥을 얼마 먹지도 못했는데 배가 불러왔다. 남은 걸 어쩌나 하고 보고 있는데, 언제 먹었는지도 모르게 제 몫을 다 먹어 치운 히게키리가 사니와의 밥그릇을 가리켰다.

“주인. 남기는 거면 내가 먹어도 되겠니?”
“이거 그냥 맨밥인데? 배고프면 공기밥 더 시켜줄게. 아직 점심시간이라 주방 식신 가동 중일 거야.”
“딱히 배가 고프지는 않아. 네가 먹던 걸 먹고 싶을 뿐이지.”
“응?”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남이 남긴 밥을 왜 노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사니와가 되묻자, 히게키리는 히자마루를 흘긋 보더니 다시 사니와를 향해 생긋 웃었다.

“먹어도 되니?”
“어… 그래, 먹어도 돼. 그런데 밥 다 식었는데, 괜찮아?”
“물론이야. 네가 먹던 게 제일 맛있거든.”
“너도 정말 취향 별나다….”

히게키리가 아무거나 잘 먹는 건 익히 알고 있고, 그가 비위가 좋은 편인 것도 알지만, 사니와가 남긴 음식을 집착적으로 노리는 이유는 솔직히 모르겠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 같은 거려나?’

어쨌거나 히게키리는 겐지의 보검이고 귀한 칼인데, 잔반 처리를 시키는 게 못내 미안했다.
본인이 좋다니까 말리지는 않겠지만.

“히자마루 씨는… 와. 다 먹었네? 입에 맞아?”
“음. 잘 먹었다.”

히자마루도 크게 음식을 가리는 편은 아니라서 뭐든지 잘 먹기는 하지만, 저쪽은 사니와의 검이 아니니 이런 음식을 먹는 게 처음일 텐데. 낯설어하거나 깨작이지도 않고 깨끗하게 그릇을 비운 게 신기했다.

‘히자마루 씨도 히자마루랑 식성이 비슷한가 보구나… 하긴, 쟤들은 귀한 칼이기도 하지만 전쟁 무장의 칼이기도 하니까. 전쟁터에서 반찬 투정 같은 건 못할 테니 뭐든지 잘 먹는 것도 당연하지.’

그렇게 따지면 히게키리의 비위가 좋은 것도 이해가 간다. 납득한 사니와는 빈 그릇을 쌓아 올려 책상을 정리했다.

“그럼 밥 다 먹었으니까 일하자. 히게키리, 비보의 마을 돌기 전에 악기 보유량 확인해야 하는데, 예전 장부 어디에 있는지 알아?”
“몰라.”

모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저렇게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히게키리 앞에서는 전투력을 상실하게 되는 사니와는 의자의 등받이에 뒤로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창고에 가서 하나하나 재고를 파악해서 새로 장부를 만들어야 하는 걸까.
정말로 귀찮은데.

“아, 어쩌지… 장부를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안 나. 장부가 없으면 악기 보유량을 파악할 수가 없는데.”
“창고에 보관하고 있을 테니 새로 세어보고 기록하면 되지 않겠니?”
“그거 막 쌓아둬서 꺼내기도 힘든데 어느 세월에….”

사니와는 히자마루를 수행 보낸 것을 잠시 후회했다. 장부 위치 정도는 미리 확인해둘걸. 아니, 아예 수행비둘기를 히자마루한테 썼어야 했다.
복잡한 일처리를 전부 히자마루한테 맡겨뒀더니, 그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업무 처리 속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이래서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는 건가. 사니와는 자신의 안일함을 한탄했다.

‘미치겠네. 다시 세야 하나? 꽤 많이 모았었는데, 그걸 다?’

악기 보유량을 적어둔 장부가 없다는 건 다른 비품목록을 정리한 장부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혼마루 내의 창고를 전부 개방하여 물건을 세야 한다는 뜻일까.
단도들의 손이 빠르긴 하지만 죄다 정리하려면 하루는 걸릴 것이다. 그럼 야전도 못 보내고, 다음날 출진 스케줄에도 지장을 준다는 소린데.

‘정부 캠페인에 큰 미련은 없지만… 코테기리와 부젠에게 같은 도파 동료들을 만나게 해줄 기회인데, 그냥 날리기는 미안하지?’

사니와는 국물이 튄 정부 공문을 주섬주섬 그러모아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쉬는 동안 비보의 마을도 진행방식이 바뀐 것인지 뭔가 방법이 복잡해졌다.
단순 업무가 아니면 곧바로 렉이 걸려버리는 사니와를 위해 복잡한 공문은 늘 근시인 히자마루가 읽고 간단하게 3줄 요약을 해주었는데, 혼자서 읽어보려니 분명 아는 글자인데도 머리가 이해를 거부하고 있었다.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요, 알록달록한 그림은 화투패로다….’

사니와는 깨알 같은 글씨로 적힌 진행설명을 두 번 정도 읽어보고자 시도했다가, 그것을 반으로 접어버렸다.
억지로 머리를 굴려서 이해하느니, 그냥 극단도 부대로 밀어버리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역할을 나누자. 나는 히자마루 씨랑 창고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히게키리 너는 극단도들 데리고 비보의 마을로 출진 다녀와.”
“어라. 내가 아이들을 이끄는 거니?”
“너는 하치만대보살의 가호가 있으니까, 패를 좀 잘 뒤집을 수 있지 않을까?”
“으음….”

전장의 가호도 아니고, 화투패 뒤집는 데 신불의 가호가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뭐라도 있는 게 낫지 않겠나.
게다가 어차피 히게키리의 숙련도도 올려야 했다.
사니와가 자기도 이해하지 못하는 정부 공문을 들어 보이며 열심히 설명을 하려 하자, 히게키리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만 마음만은 고맙다’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일어섰다.

“좋아. 이번야말로 후배들을 이끌고 출진이네.”
“위험해지면 돌아와.”
“위험한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네 가호라면 감사히 받을게.”

히게키리를 부대장으로, 극단도 부대를 출진시킨 사니와는 단말기를 켜서 진행 상황을 바로 보고받을 수 있도록 화면을 고정해놓고, 그걸 재킷의 안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진행 보고는 단말기로 받으면 되고, 히자마루 씨. 나랑 같이 창고 가서 악기 세는 것 좀 도와줘. 장부가 사라져서 다시 세야 하거든.”
“…장부가 사라졌다고?”
“정확히는 어디에다 두었는지 기억이 안 나. 벌써 1년 반이나 지난 일인걸.”

히자마루 씨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뭔가 한심하게 보는 듯한….
아니다. 저건 한심하게 보는 게 아니라 측은하게 보는 거다.
사니와는 괜히 울컥했다. 1년 반이나 지났는데, 장부를 어디에다 뒀는지 기억 못 할 수도 있지!

“네게 필요한 장부를 버렸을 리도 없고, 당연히 찾을 수 있는 곳에 보관하고 있을 게 아닌가. 우선은 비품 장부를 찾아보는 게 먼저가 아닐까.”
“그거 아마 히자마루가 정리했을 텐데, 어디에 있는지 몰라. 우리 집 히자마루가 정리한 건 이상하게 내가 찾을 수가 없더라고.”
“스스로 정리하면 찾을 수 있나?”
“아니요….”

사니와는 물건을 잘 찾지 못하는 편이었다. 정리 정돈은 하려면 할 수는 있는데, 이상하게 정돈을 하고 나면 물건의 위치정보가 리셋된다고 할까. 기껏 잘 정리해놓고 찾을 수가 없어서 방안을 온통 헤집는 수순을 밟고는 했다.
그래서 항상 히자마루가 대신 정리해주었다. 사니와가 찾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똑같았으나 적어도 히자마루를 부르면 대신 와서 찾아주었으니까.

“그거 얇아서 어디 틈에 끼어있으면 못 보고 지나칠 텐데. 나 물건 찾는 거 잘 못 하거든.”
“…물건을 찾을 때는 용도를 기억해두면 위치를 파악하기 좋아.”
“용도?”
“네가 비품 장부를 확인해야 할 때가 언제지?”

바로 지금?
그렇게 대답하려다가, 사니와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방금 대답을 입 밖에 낸다면 완전히 한심한 사니와 취급을 받을 것 같았다.

‘비품 장부를 확인해야 할 때… 오늘 같은 상황이지? 악기 보유량 확인해야 하니까. 그리고 투서함에 뭐 떨어졌다고 들어오면 그거 주문하고….’

사니와의 별로 좋지 않은 머리가 오랜만에 돌아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는 꼭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는데, 히자마루 씨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비품 장부를 주기적으로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 분명히 있었다.

“투서함에 들어온 건 곧바로 처리를 했는데, 딱히 주문이 없을 때는 매월 말에 재고 확인을 해서 월초에 주문했어.”
“달에 한 번 확인해야 하는 자료라면 아마 책장에 두었겠지? 책상 위는 매일 확인해야 하는 서류가 올라올 테니까.”
“어… 맞아. 그럼 책장 어딘가에 있나?”

사니와는 일어나서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걸어온 건 좋았는데 5단 책장에 꽉 들어찬 서류를 보니 갑자기 일하기 싫어졌다. 차라리 책이면 책등에 제목이 쓰여 있어서 찾기 쉬운데. 서류는 일일이 꺼내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문제다.
게다가 아래쪽 두 칸은 도어가 달려있어서 잠가두었는데, 열쇠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낭패였다.

“위쪽에 있는 건 하나씩 빼보면 될 거 같은데, 아래 칸은 잠겨있어. 열쇠부터 찾아야 하나?”
“잠글 수 있는 문이 달린 칸에 넣어두는 건 보안을 유지해야 하는 서류들일 거야. 보통은 바로 꺼낼 수 있게 세워서 꽂아두었겠지.”
“그럼 도어가 있는 아래쪽 두 칸은 아니고, 위쪽 세 칸 중에 있을 가능성이 높겠네.”
“맨 위는 손이 닿지 않지? 보기 편한 위치를 먼저 확인해 봐라.”

사니와는 키가 작은 편이라, 까치발을 떠도 맨 위 칸에 있는 서류를 뽑으려면 손가락 끝에 온 힘을 끌어모아 고군분투를 해야 했다.
찾기 쉬운 곳이라면 눈높이에 있는 두 번째 칸일까. 왼쪽부터 손가락 끝으로 서류를 훑던 사니와는, 익숙한 색상의 라벨이 붙어 있는 파일을 발견하고 그것을 뽑아냈다.
비품 장부다.

“헐. 찾았어! 히자마루 씨, 진짜 관심법 쓰는 거 아니야? 아니면 물건 찾는 초능력이라도 있어?”
“…찾기 쉬운 곳에 두었다고 했잖아.”
“진짜 대단하다. 우리 집 히자마루랑 만난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걔가 어디에다 뒀을지를 알지? 매일 보는 히게키리도 모르던데.”
“…….”
“아무튼 고마워. 덕분에 창고 뒤엎지 않아도 되겠네.”

창고를 뒤질 생각에 의욕이 바닥이었는데, 비품 장부를 찾아냈으니 일이 훨씬 쉬워졌다. 장부를 펼쳐보니 꽤 최근 일자까지 재고 확인을 했는지 날짜와 목록이 적혀 있었다. 그녀가 없는 동안에도 히자마루가 꾸준히 창고 관리를 해왔던 모양이다.
역시 그녀의 고정 근시. 히자마루의 성실함에 감동한 사니와는 코끝을 문지르며 책상 앞으로 걸어와 앉았다.

“악기는 거의 세자리 수로 모아놔서 걱정 없겠다. 그럼 남은 건 구슬인가….”

캠페인 기간 내에 필요한 구슬을 확보하려면 하루에 얼마나 모아야 하는가를 가늠하고 있는데, 단말기가 삐리릭 울렸다. 히게키리다.

“히게키리. 무슨 일이야?”
『패를 완성해서 이대로 회군도 가능한데, 계속 가볼지 어떨지 네 의견을 들으려고.』
“위험해지면 돌아오라니까.”
『내가 위험해지기를 바라니?』
“뭐?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끝까지 돌파할게. 보물로 불리려면 그 정도는 해 보여야겠지.』

밝은 목소리로 대답한 히게키리는 연결을 끊었다. 진행 상태를 체크해보니 아직 길의 중간인 모양이다. 현재까지 획득한 구슬의 수는 594개. 많은 건지 적은 건지, 너무 오랜만이라 가늠이 안 되었다.

‘뭐… 잘하고 있는 거겠지?’

목소리에 지친 기색도 없고, 부상자도 없는 듯했다. 위험한 게 아니라면 후퇴보다는 전진을 택하는 게 사니와의 주의였으니 그들도 그녀의 의중을 헤아려서 전진하는 것일 터. 제 검들을 믿고 기다리면 될 것이다.

“히게키리가 요즘 나한테 말을 많이 거는 것 같아.”
“…그런가?”
“응. 예전에는 같이 있어도 좀 혼잣말을 하는 느낌이었거든. 헤이안 검들은 원래 그렇다고 듣기도 했고, 어쨌든 태도는 상냥하니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잠수를 타다가 돌아와서 그런가? 수행을 다녀와서 그런가? 아니면 둘 다일지도.”

원래도 잘 놀아주긴 했지만, 그때는 좀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기색이 사라졌다. 주인에게 완전히 집중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고 할까. 고맙기는 한데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기에 저렇게 변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 맞다. 편지를 읽었어야 했는데.’

또 잊어버렸다. 사니와는 침실에 놔둔 히게키리의 편지를 떠올렸다가, 서류 더미 위에 놓아둔 히자마루의 편지를 먼저 집어 들었다. 가까이에 있는 것부터 확인하는 습관 탓이다.

“우선 히자마루 것부터… 아, 역시.”

사니와는 앞에 서 있는 검은 옷의 히자마루를 흘긋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저쪽은 아직 수행을 안 다녀왔는데, 함부로 검생 스포일러를 해서는 안 되겠지. 그녀는 혼잣말을 하지 않도록 엄지로 입술을 꾹 누르고는 눈으로 빠르게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무사히 쿄우에 도착해서 전주인을 만난 모양이다. 혹시라도 이마노츠루기처럼 충격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담담하게 써 내려간 필체를 보니 크게 동요하지는 않은 듯하여 안심이 되었다.

‘수행은 순조로운 모양이네. 그럼 내일모레쯤에는 돌아오는 거겠지?’

사니와는 다 읽은 편지를 원래 모양대로 접었다. 검은 옷의 히자마루는 여전히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히자마루 씨, 혹시 편지 내용이 궁금해?”
“아니.”
“왜? 궁금하면 보여줄게. 그쪽은 아직 수행 안 다녀왔잖아. 미래를 알고 싶지 않아?”

사니와가 생글생글 웃으며 편지를 흔들어 보이자, 검은 옷의 히자마루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너에게 쓴 편지가 아닌가. 너 외의 다른 이가 읽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다.”
“어… 그런가? 그럴지도.”

역시 동소체라 그런가, 히자마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대충 짐작을 하는가 보구나.

“그러고 보니 히자마루 씨는 왜 수행을 가지 않은 거야? 숙련도도 높고, 업무에도 익숙하잖아. 그쪽 사니와도 경력이 짧지는 않은 것 같은데? 몇 년 차야?”
“경력이라면 15년… 아니, 16년 정도 되었겠군.”
“뭐? 나보다 10년이나 선배잖아?”

이건 놀랐다.
히자마루 씨의 업무수행 능력이 상당한 것으로 보아 그 주인도 초보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자신보다는 경력이 짧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니와명도 같고, 혼마루 코드도 같으니 자신이 잠수 탄 후에 동일 코드를 중복으로 발급받은 거라고 생각해서.
게다가 저쪽 히자마루는 아직 수행도 다녀오지 않았잖은가.
장비도 전부 특상인 것을 보면 주인이 아끼는 검인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아직도 수행을 안 다녀왔어?”
“나는… 수행을 갈 수 없는 사정이 있다.”
“무슨 사정?”

검은 옷의 히자마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순간 가라앉은 분위기에, 사니와는 자신이 너무 민감한 질문을 던졌나 싶어 뜨끔했다.

‘수행을 갈 수 없는 사정이 뭐가 있지? 경력 16년차 사니와면 수행도구가 없어서 안 보내는 건 아닐 텐데.’

아니면 혹시 저쪽 혼마루에는 이미 수행을 다녀온 히자마루가 있나?
그렇다면 히자마루 씨는 그쪽 혼마루의 중복도일까?
중복도를 여럿 키우는 혼마루 이야기는 들었다.
콜렉션을 만들듯 극 수행을 다녀온 남사와 통상 남사를 같이 두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가.
어쩌면 히자마루 씨의 주인이 동소체를 버전별로 모으는 사람이라 수행을 보내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긴. 정복이 멋지긴 하지… 게다가 올블랙이라니 엄청 독특하기도 하고.’

재액에 물든 것도 아닌데 도검남사의 정복 색이 달라지는 건 드문 일이다.
그렇다면 저 검은 옷은 히자마루 씨 주인의 취향일까?
아니면 히자마루 씨만의 확고한 패션철학일까?
내번복으로 갈아입는 걸 거절했으니 후자 쪽에 더 가깝지 않을까?

“히자마루 씨는 검은색 좋아해?”
“음?”

수행을 갈 수 없는 사정을 캐묻는 건 어쩐지 실례일 것 같아, 사니와는 화제를 옷 이야기로 바꾸었다.

“히자마루씨 옷, 안감에 장식까지 온통 검은색이잖아? 보통은 셔츠 부분이랑 어깨에 맨 게 흰색이던데. 장식도 금색이고.”

처음 봤을 때는 정말 특이해서, 따로 맞춰 입은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시스템이 인식 오류를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저쪽이 히자마루 씨의 정복인 건 확실하다. 도검남사의 외모와 의상에는 해당 남사를 구성하는 설화나 전주인의 취향 등이 반영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당사자의 취향도 반영이 되는 것일까.

“검은색 좋아해서 그렇게 통일해서 입은 건가 했지. 취향 독특하네.”
“…….”

화제를 돌리려고 한 이야기인데, 어째서인지 히자마루 씨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설마 저 옷이 수행을 가지 못하는 이유랑 관련이 있나?
올블랙 정복 같은 레어 의상을 놓칠 수 없다며 수행금지령을 내린 건가?
사실 본인은 수행을 가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가?

사니와가 그의 표정을 살피려 몸을 더 앞으로 기울이자, 검은 옷의 히자마루가 한 걸음 물러났다. 검은 옷깃을 매만지던 그는 아주 잠깐 사니와의 얼굴을 보더니, 금방 시선을 돌렸다.

“이것은, 상복(喪服)이라서.”

@ReikaTk 검사니 글을 쓰는 사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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