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에스프레소. 칠흑같이 어둡고 쓰디쓴 향을 뿜는 음료를 나는 그저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사왕 에디션(화이트 모카 프라푸치노 벤티 쿼드라 자바칩 반반 초코칩 드리즐 추가)을 맞은 편에 놓고선 자리에 풀썩 앉는 이단심문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만을 표하기가 쉽지 않았다. 천진하게 웃는, 어린애같이 순수해보이는 낯짝에 어찌 침을 뱉을까.

  "아핫, 사치스러울 정도로 달군요!"

  "중화라도 해라. 속 다 상하잖냐. "

  "문제 없습니다! 주인님도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십니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5대 길드장 다섯 명 중 두 사람의 회동에 관심을 가지는 탓일까, 만신전주의 입에서 주인님이라는 단어가 나온 탓일까. 부러 헛기침을 했다. 이 앞의 인형보다 예쁜 남자애가 내 것이 아니라는 선언을 하지는 못했다. 언론인으로 보이는 사람도 없었으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독사를 주인님이라 칭하지 않습니다. "

  "그럼. 우리는 그저 돈독한 친구 사이로 남는 거지."

  "네! 그저 돈독한 친구 사이입니다! "

  지나치게 솔직한 이단심문관 덕택에 속으로 미간을 짚었다. 동요하지 않은 척,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주인님이라 불리고 싶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은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되고 싶었다. 네게 나는 어울리지 않으려나.

  "언론에 제보하는 새끼는 천무문에서 가만두지 않을거다."

  가게 안이 잠잠해졌다. 한숨을 내쉬며 앞의 잔에 입을 댔다. 한 번에 잔을 비울 수 있을 정도로 식었다. 앞선 대화가 길었던 탓일까. 꿀떡꿀떡 잘 넘어가긴 개뿔. 혀를 덮는 쓴 맛에 하마터면 뱉을 뻔했다. 이단심문관을 노려보았다. 13세 소년의 외형을 하고서 달달하기 그지없는 음료를 잘도 먹었다.


  "천무문주. "

  "어, 만신전주. "

  "칼쟁이. "

  "왜, 종교쟁이. "

  "독사. "

  "…할 말 있냐?"

  "둘이 처음으로 합을 맞췄던 비오던 달밤이 떠올랐습니다. 어째서인지 가슴이 요동칩니다. 이게 추억…이라는 걸까요. 흔히들 말하는 '몽글몽글해진다' 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표정 또한 해석할 수 없었다. 하나 한 가지 확실히 짐작 가능한 건 그 때가 떠오른 이유였다. 100층에 도달한 인간으로 인해 초창기를 연상시킬 정도로 등천도시가 어수선해졌기 때문이다. 종족전쟁 당시 아수라들의 신이었던 백사자가 극점에 도달했으니 자연히 신이니 신의 자식이니 하는 등의 사이비 종교들이 생겨났다. 정리의 필요가 있다는 사왕의 판단 하에 이단심문관과 만신전에 맡겨진 임무였다. 포교 활동을 멈추게 하는 것.

  "처음에는 주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이단심문관은 입을 열었다. 근래에도 수십 명의 피를 묻혔을 손에 사왕 에디션이 담긴 잔을 들고 호록 소리를 내더니 하얀 수염 피운 얼굴이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전설의 영웅이라도 목격한 사람처럼 눈을 빛내면서.

  "뭐라 말했는지도 기억합니다. '사왕교나 명천교, 혹은 유교라는 이름의 종교가 생길지도 모른다. 나는 신이 되고 싶어 100층을 정복한 것이 아니다. 만신전이 관련된 통제를 맡아주면 좋겠다'…."

  이단심문관은 입꼬리 올려 웃었다.

  "주인은 재밌는 사람입니다. 자신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과연 아수라들의 백사자 케케륵케르. 아니, 시발한 아버지, 친구, 명천마 그 무엇이든. 어느 누구에게도 신으로 칭송받거나 추앙받고 싶지 않은 마음…. "

  에스프레소를 귀로 먹고 있는 것 같았다. 식은 줄로만 알았던 것이 달팽이관에서 데워져 뇌를 익히는 것 같았다. 목이 타들어갔다. 당장에 해결할 방법이 목구멍까지 치닫은 울음 뿐이었다. 마천신공을 배웠다면 나의 목마름은 에스프레소일 것이리라, 그리 생각했다.

  "천무문주. 우는 겁니까?"

  울기는 누가. 외눈의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말하는 제 꼴이 우스웠다. 말하기 싫었다. 쪽팔렸다. 씨벌. 말해도 웃기만 할 거잖아. 언제나처럼 아하핫, 하고 웃어넘기고 끝날 거잖아.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내밀어진 거울 안의 나는 추해보였다. 본래도 추하게 생겼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슬픔이 묻은 눈을 하고서 울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내가 있어 보기 싫었다. 이단심문관의 손길이 눈가를 쓸었다. 시야가 캄캄해졌다.

  "슬픔인가요? 아니면 원망? 음, 모르겠습니다. 독사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의 의미도 불명확합니다! "

  "뭐, 씨발. 안 운다니까. 슬픈 것도 아니다. "

  "…아핫. "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있고 카페에도 정적이 깔려서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에스프레소가 쓰던가. 지금은 달기만 하다. 하고 있는 생각을 말해봤자 평상시의 둘 사이 공기마저 얼리겠지. 생각을 껐다.


  "그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았겠지. 사왕 녀석이 살인을 부탁했을리도 없고. "

  정적을 깼다. 역시 일 얘기가 제일이다. 어색함을 달래는 데에는 각자 사는 얘기 사이에서 공감포인트를 찾는 것이 제일이다. 다행히, 지금은 그 공감정의 역할을 사왕이 해주고 있었다. 땡스 투 김공자.

  "죽이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것이 주인의 명령이었으니까요. "

  "……죽였겠지. "

  "네!"

  눈앞이 아찔해졌다. 죽이지 말라고 당부했을 사왕이 머리에 그려졌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단심문관이 주머니에서 꺼낸 수십 장의 찌라시를 보기 전까지는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말에 어느정도 수긍하게 됐다.

  '충격 사왕님 진짜 계심'

  '사왕 믿으라'

  '사왕 믿고 백층 가자'

  아주 죽은 뒤 하루만에 깨어났다는 교리까지 있겠어.

  "놀랍게도 있습니다. "

  어이 진짜냐고. 하루 뒤에 깨어난다니 그거 헛소문이잖아. 그렇다고 사실로 정정해서 알리면 사왕에게 곤란해지는 거 아닌가. 안 그래도 스킬차이때문에 힘들다는 여론이 아직까지 남아있는데.

  "그래서 그냥 죽여버렸습니다! 아하핫! "

  사왕 관련 종교를 정리하러 다닌 것이 제일 교주같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속에서 썩혔다. 마른 침과 함께 삼켰다. 괜히 심란해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들이켰다. 빈 잔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이단심문관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언제 또 모습을 바꾼 것일까. 20대 중반의 미청년이 눈을 감고 가만히 웃고 있었다.


  "천무문주! 아까부터 이상합니다!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는 듯 보이는군요! "

  "응? 아니, 아니. 그럴리가 없잖냐. 평소와 똑같다고, 젠장. "

  "확실히 이상합니다. 그래서 평소랑 똑같습니다. "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볼을 긁적였다. 이단심문관의 눈이 내 쪽을 향하는 것이 보여 괜히 식은 땀이 흐르는 느낌마저 났다. 화제를 돌려야겠다. 다른 길드장들을 앉힐까. 아니, 아니다. 이단심문관의 솔직함으로 내 쪽이 궁지에 몰릴 것이 분명했다. 흑룡주가 포문을 열고, 성기사가 꼬리를 물고서….

  "역시 오늘은 이상합니다! 평소보다 더 이상해서 오히려 더 수상합니다. 천무문주. 독사. 아니 랴오판. "

  정신이 혼미했다. 세 번이나 불리는 동안 대답 한 마디 못하는 것도 없었던 일이니까. 왜 이러지. 오늘따라 심장이 뛴다. 사왕이 자신의 자살을 이반시아 공작에게 해명해야 한다며 끌고갔을 때보다 더욱 빠르게 쿵쾅거렸다. 이단심문관이 '혹시…'로 운을 띄운다면 그냥 자백해버려야지. 주화입마인지 죽겠다임마인지 차라리 와버렸음 좋겠다. 지금 미쳐버리겠다고 어이….


  "혹시…."

  "……난 너 좋아하면 안 되냐."

  "저한테 뭐 잘못하신 거 있습니까?"

  이단심문관이 가만히 눈을 깜박이다가 푸슬 웃음을 터뜨렸다. 자백한 셈이었다. 이단심문관은 손으로 입을 막고 가만 미소짓다가 소년의 모습으로 외양을 바꾼 뒤 배를 부여잡고 깔깔 웃었다. 카페 안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였다. 얼굴이 타들어갈 것 같았다. 으아아아 따위의 바보같은 소리나 내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무문주가 만신전주에게 민망한 개그를 했다' 정도로 여겨지면 좋겠다.

  빈 잔을 쟁반에 놓고 카운터로 갔다. 천무문의 이름으로 가게를 빌려도 되겠냐고 물었다. 2분도 채 되기 전에 손님들이 빠졌다. 눈물을 닦는 이단심문관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자리로 돌아와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고개를 들 때마다 눈이 마주쳤다.


  "손님들을 전부 내쫓은 건 과잉반응 아니었나요?"

  "여기부터는 오프 더 레코드다. 일반 헌터들의 귀에는 들어가선 안 되는…. "

  "음, 알겠습니다! 독사의 프로포즈 타임이군요! 행여 나중에 흑룡주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곤란하게 될 것도 같습니다! "

  아니. 굳이 내가 네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는 말이 흑룡주의 귀에 들어가지 않아도 충분히 곤란해지지 않을까. 상위 랭커, 5대 길드의 길드장 두 명이 밀회를 했다는 것부터가 빅 이슈이니까. 어떻게 봐도 무뚝뚝해보이는 한 쪽이 분위기 잡고 앉아있는 것부터가 미스였다. 듣는 귀도 많이 없으니 그냥 말해버릴까.

  어느 누구처럼 폼나는 고백을 나는 할 수 없다. 그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고백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평생 밖을 꾸며온 나였지만 지금은 스스로를 제단할 여유따위 없었다. 크게 숨 들이쉬고, 내쉬었다. 10초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검성과의 비무에서 2합 즈음 나눌 정도의 시간이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

  "제 대답은 거절입니다, 천무문주. "

  말을 끊기는 건 예상 외이지만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었다. 이유를 묻고 싶었다. 하나 그리 하지 않았다. 추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자존심이기라도 한 모양이지. 다행히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아핫, 하는 특유의 웃음소리와 함께 이단심문관이 말했다.

  "친구 정도의 신뢰관계여도 좋습니다. 이제 와서 사랑을 논하기에는 늦은 것 같습니다. 당장 고백하는 데에도 이렇게 이상해지는데, 연애를 하게 된다면 얼마나 이상해질까 안 봐도 눈에 선합니다. "

  "이제 와서 사랑을 논한다는 말이 어색하게 들린다. 사왕에게 공감하는 방법이라도 배운 것마냥. "

  "십 년입니다. 십 년간 천무문주와 호흡을 맞췄습니다. 감정은 불필요합니다. 협업에 있어서 가장 불필요하고 어쩌면 효율을 떨어뜨릴수도 있습니다. 하여 지금 정도의, 친구라 부르는 정도의 신뢰 관계가 천무문주와 저 사이를 정의하는 데 가장 안성맞춤입니다! "


  속이 시원했다. 적어도 얼굴 붉히면서 어색해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이단심문관은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한 모금 정도 남아있던 잔을 비웠다. 창문 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이단심문관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궁금하구나. 둘이 오붓하게 어떤 대화를 했을지. 나중에 알려주렴. "

  "저는 왜 끌고 온 겁니까, 흑룡주. "

  "우리 탑 최고의 로맨티스트 분을 모셔오고 싶었어서. "

  "…이해할 수 없습니다. 블랙 드래ㄱ, 으읍."


  창 밖에 있던 흑룡주와 사왕이 어느새 가게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만담꾼인가 싶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주인님. 그리고 흑룡주! 아하핫, 정말이지 기가막힌 타이밍이군요!"


 이단심문관의 혓바닥이 춤추기 시작했다. 흑룡주의 거울들이 몸을 둘러쌌다. 이단심문관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구해달라는 눈으로 사왕을 올려다봤다. 미소지어보이는 사왕을 올려다보자니 금방이라도 주화입마가 올 것 같았다.


  "이 역시 독사가 타개해나갈 시련이라 생각하십시오. "


 ……씨버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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