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디밀어진 것은 황색 서류봉투였다. 눈에 익은 크기에 납작한 모양, 그리고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표면까지 실로 전형적인 모양이었다. 모르긴 해도 20년 전에도 저 모양이었을 걸. 물론 토니는 황색 서류봉투의 역사를 연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 봉투와 봉투를 든 손, 그리고 그 손을 그에게 내밀고 있는 사람의 하나뿐인 눈을 차례로 빤히 바라보았다. 전설적인 스파이는 표정을 감추는 데도 전설적인 능력을 가진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왜 아니시겠어.

 

결국 토니가 먼저 시선을 틀었다. 물론 이건 닉 퓨리의 얼굴 따위를 오래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 절대 눈싸움에서 져서가 아니다. 맹세코. 

 

"...뭘 어쩌라고?"
"받게."
"그게 뭐길래? 난 건네받는 건 질색이라고."
"걱정하지 않아도 자네 것이 아니야. 로저스에게 전해주게."
"셔틀도 싫거든요? 요즘 세상에 고리타분한 서류봉투라니, 맙소사. 메일이라는 좋은 수단도 있다는 걸 꼭 내가 일깨워줘야만..."
"그가 메일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야."
"...그럼 직접 전하라고. 어차피 한가한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나 스토킹할 때만 해도..."

 

닉은 토니가 말을 끝맺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토니의 손을 끌어다 서류봉투를 쥐어 주고는 반 발쯤 뒤로 물러났다. 엉겁결에 봉투를 받아든 채 기막힌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에 대고 한 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전해주는 걸로 알지. 어차피 같은 집 아닌가."

 

닉 퓨리의 눈은 벌써 오래 전부터 하나뿐이었지만, 그는 토니의 표정이 한순간 벌레 씹은 얼굴로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분명히 밝혀 두자면 토니는 딱히 스티브와 함께 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건 어쩔 수 없는 희생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천하의 토니 스타크가 '희생'이라니,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농담거리도 못 될 조합이지만 어쨌든 그랬다.

 

모든 일의 발단은 토니가 어벤저스 멤버들에게 집과 차, 생활비를 지원하기로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토르가 로키와 큐브와 그 자신을 모두 지구에서 백만 광년은 떨어진 곳으로 보내 버렸다고는 해도 - 아스가르드가 정말 지구에서 백만 광년 떨어져 있는지는 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넘어가도록 하고 - 위협이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쨌든 로키만이 지구에 위협적인 존재는 아닌 것이다. 닉은 그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 결성한 어벤저스를 해체하는 것이 그다지 현명한 생각이 아니라고 보았고, 토니 역시 그 생각에 동의했다. 그들은 유사시에 곧바로 대처할 수 있도록 어벤저스의 멤버 모두를 뉴욕에 정착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데까지 의견 일치를 보았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실드의 요원인 바튼이나 나타샤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다른 두 사람은 얘기가 다르다. 그들은 직장을 가질 수가 없었다.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헐크를 상상해 보라! 설혹 그런 사소한 - 일단 그렇다고 해두자 - 문제는 넘어간다 치더라도 생업에 종사하는 상황에서는 위협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결국 토니는 둘을 먹여살리기로 마음먹고 우선 배너 박사에게 앞서 열거한 세 가지와 특수 제작된 휴대전화를 주었다. 하루아침에 마련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최신식 설비로 가득한 집을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던 배너 박사의 첫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그런데 스티브가 이런 집에서... 그, 괜찮을까요?"

 

괜찮을 리가. 토니는 곧장 그렇게 생각했고, 실제로 입 밖에도 냈다. 일단 문도 창문도 열지 못할 거고, 전화는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휴대전화 디자인의 통일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토니는 긴급연락을 받지 않는 스티브의 모습부터 문을 열지 못해 방 안에서 아사한 캡틴 아메리카의 시체를 그가 발견하는 장면까지 딱 2초만에 떠올린 뒤 스티브에게 집을 얻어주겠다는 계획을 깨끗하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데리고 살아야지 뭐. 배너 박사는 오히려 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다시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열받아도 초록 친구로 변신 안 하니까 좀 시시하긴 하겠지만, 일단 나도 그 친구도 사람 고기는 안 먹으니까 상관없겠지. 아니, 왜 그런 표정이지? 괜찮을 거라니까?"

 

정말로 괜찮을지 아닐지는 두고 볼 일이다. 어쨌든 토니는 두 사람이 함께 살 집을 바닷가 저택으로 정했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싫은 곳에 살게 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그는 아직도 스티브가 스타크 타워를 흉물스럽다고 말한 것을 잊지 않았다)? 게다가 스타크 타워는 로키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에 청소와 보수공사를 거치지 않으면 사람이 살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이래저래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셈이지만, 바닷가 저택만 해도 두 사람이 살기엔 차고 넘치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정정, 이십 명이 산다 해도 차고 넘칠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토니는 투덜거리며 차 쪽으로 걸어갔다. 조수석에는 이미 스티브가 타고 있었다. 그는 함께 살아야 한다는 토니의 일방적인 통보를 예상외로 담담히 받아들였다. 갈 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을지도. 토니는 그렇게만 생각하고 그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토니가 다가오자 스티브는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의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힐끗 시선을 돌리니, 뒷좌석에는 옆으로 메는 큰 가방 한 개만 달랑 놓여 있었다. 

 

"이게 전부야?"
"샌드백은 놓고 오라며."
"보통은 그것 말고도 뭔가가 더 있을 텐데. 뭐, 70년 전에도 이미 구식이었을 옷으로 가득 찬 옷가방이 다섯 개쯤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스티브의 시선이 손에 들린 황색 봉투에 잠깐 머물다 떨어져 나갔다. 곧장 그에게 넘겨 버릴 수도 있었을 테지만 토니는 그러지 않았다. 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거는 일련의 동작이 새삼스럽게 조금 낯설었다. 최근에는 계속 수트만 입고 다녀서 그런가. 토니는 잠깐 넝마에 가까운 꼴로 스타크 타워에서 수리를 기다리고 있을 마크 6과 7을 떠올렸다. 뭐, 어쩔 수 없지. 그 순간 한결 더 낯선 감각이 찾아왔다. 아무런 예고도 전조도 없이. 

 

"......!"

 

심장 부근이 뜨끔했다.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각이었다. 고통은 크지 않았으나 잘 벼려진 칼처럼 날카로웠고, 짧은 여운만을 남긴 채 왔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뭐였지?

 

"토니? 왜 그래?"
"...아, 별 거 아냐."

 

토니는 짧게 대답하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별 거 아니었어. 그는 스스로도 한 번 더 그렇게 중얼거린 뒤, 곧바로 그 일을 잊어버렸다. 

 

 

 

 

 

 


스티브 로저스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아마도 그는 어벤저스 팀원 중에서도 가장 가난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이제 그 작고 낡고 허름했던 집조차 가지고 있지 않으니 어떻게 보면 그 시절보다 한층 더 가난해진 셈이다. 그는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는 않았으나 부끄럽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옆에 팀원 중에서도 가장 부유할 것이 틀림없는 토니 스타크가 앉아 있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토니가 함께 살자고 말했을 때 스티브는 솔직히 다소 안심했다. 그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있을 곳을 얻기 위해 어딘가에서 일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70년이나 세상과 유리되어 있었으니까. 심지어 그는 '그' 토니 스타크가 자신을 배려해 주었다는 것이 기쁘기까지 했다. 빈말로라도 토니와 그의 성격이 찰떡궁합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 배려에 보답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맞춰보겠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론가 계속해서 달리기만 하는 차는 스티브를 다소 불안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것일까? 내심 토니의 집이 거기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고급 주택가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쳤다. 그리고는 인적도 드문 도로를 끝없이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속도가 느린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토니는 평범한 - 물론 가격은 절대 평범하지 않겠지만 - 승용차를 스포츠카처럼 몰고 있었다. 차창 밖의 세계가 와락 덮쳐왔다 시야 밖으로 빠르게 멀어져 갔다. 멀미를 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거의 다 왔어. 왜, 화장실 가고 싶어? 미리 말해두지만 내 차 안에선 절대 안 돼."

 

스티브가 뭔가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순간 길은 커브를 그리며 구부러졌다. 그는 한순간 차가 절벽으로 돌진하진 않을까 오금이 저리는 감각을 맛보았으나 토니는 무심하게 완벽한 곡선을 그리며 길을 따라 차를 몰아갔다. 구부러진 도로를 완전히 빠져나온 후, 그제야 스티브는 창 밖으로 하얀 건물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절벽 위에, 바닷가에 바로 면한 땅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아직은 조금 거리가 있다. 하지만 그 크기는 -

 

"...토니, 혹시..."
"대답은 Yes 그리고 Yes. 저기가 우리 목적지고, 내 집이지."

 

토니는 그 뒤에 환영이 어쩌고 하며 몇 마디를 덧붙였지만 잘 들리지도 않았다. 스티브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 건물을 바라보았다. 실드의 본부 건물이라 해도 믿을 법한 크기의 저 건축물이 '집'이라고? 스티브는 토니가 독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딱히 저 집에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지 않다는 것도 전해 들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저 큰 집에서 단둘이 살게 될 것이다. 평범하게 살아온 스티브에게는 가히 공간의 낭비로 여겨졌다.

 

이건 말도 안 돼. 있을 수가 없어. 스티브는 새삼스레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는 물론 토니가 부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쯤 되니 그것은 그냥 '부'라는 한 마디보다는 좀 더 다른 뭔가로 느껴졌다. 아마도 분명 그의 생활은 스티브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것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 그는 다시 한 번 저택을 바라보았다. 저기에, 단둘이. 가족은? 친구는? 연인은? 그 순간 스티브는 토니에 대해 희미한 연민을 느꼈고, 자신의 감정에 오히려 더 놀라 그 생각을 곧장 머릿속에서 털어 버렸다.

 

차는 저택을 반 바퀴쯤 돌더니 열린 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스티브는 자신들이 차고로 들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완만한 경사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그 공간은 도무지 차고 같지는 않았다. 자동차가 몇 대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계들도 여기저기 서 있다. 이건 대체 무슨 공간일까.

 

스티브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리문 근처에 앞에 금발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젊은 남자가 서 있다가 두 사람이 탄 차가 멈춰서자 그 쪽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인 후 토니가 귀찮다는 투로 던져 준 스티브의 가방을 받아들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들 외의 다른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 터라 스티브는 당혹감에 사로잡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토니는 스티브 쪽을 가리키며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스티븐 로저스, 캡틴 아메리카."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환영합니다, 로저스 씨."
"아, 나도 만나서 반갑..."
"방으로 안내해 주고, 난 나갔다가 저녁때쯤 올 테니 식사 준비해 놔."
"뭐? 잠깐...!"

 

하지만 스티브가 미처 뭔가 더 말하기도 전에 토니는 다른 차에 올라타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발하고 말았다. 손님 - 이제부터 이 집에 살 테니 엄밀히 말하면 손님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 을 내버려두고 혼자 나간다고? 물론 언제고 토니 스타크가 스티브 로저스에게 이해하기 쉬운 사람이었던 적은 없으나 이번에도 스티브는 거대한 벽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 이 남자와 잘해 나갈 수 있을까. 이미 차의 흔적조차 없는 공간을 바라보며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내 한 손에 그의 짐을 든 금발 남자가 다가와 미소띤 얼굴로 말을 걸었다.

 

"로저스 씨. 저는 자비스입니다. 방으로 안내해 드리지요."
"아, 아... 고마워."
"별 말씀을. 이 집의 관리는 제가 맡고 있으니 불편하신 점이 있으면 언제든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토니가 이 집에 있어도 된다고 허락해준 불편한 점 같은 게 있어?"

 

스티브는 무심코 그렇게 대답했다. 토니는 첨단 과학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불편한 점이 있고 그것을 시정할 방법이 있을 때 돈을 아낄 필요도 생각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 집 역시 스티브는 잘 모르는 각종 편의시설들로 가득 차 있지 않을까? 자비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평이하게 말했다.

 

"주인님 기준으로는 거의 없다고 봅니다만, 불편한 부분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요."

 

그렇게 들으면 그것도 그렇다.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비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완전히 압도되었으나, 막상 안으로 들어오고보니 그리 이상한 건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저기 구획이 되어 있어서인지 밖에서 본 것만큼 큰 건물은 아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놓여 있는 물건이며 장식들이 도통 모를 것들이라 눈을 끌었다. 혹시 놓칠세라 곁눈질로 자비스를 살피면서도 스티브는 분주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기색을 느낀 것인지 자비스는 살짝 걸음을 늦추어 주었다. 좋은(토니와는 다르게) 사람이다.

 

"이 방입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티브는 여전히 다른 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자비스가 문을 여는 순간을 놓치고 말았으나, 열린 문 너머로 펼쳐진 방의 풍경을 보고는 다시 기가 질리고 말았다. 조금 전의 감상을 정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 집은 역시 밖에서 보았던 것만큼 크다. 스티브 자신이 예전에 살았던 집 전체보다도 이 방이 더 클 것 같았다. 방의 한쪽 면은 투명한 유리였다. 통유리는 아니고, 네모반듯한 유리조각들을 모자이크처럼 맞춰 놓았다는 느낌이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스티브가 세 명은 올라가도 될 듯한 커다란 침대가 있었으나 방이 너무 넓은 나머지 장난감 침대가 놓인 마냥 작아 보였다.

 

"로저스 씨? 방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스티브는 한참 얼을 놓고 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자비스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를 바라보는 자비스의 표정에 의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스티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티브는 문득 떠오르는 의문을 조심스레 입에 담았다.

 

"...이 방을 내가 써도 되는 건가? 혹시 토니의..."
"주인님께서 준비하도록 지시하신 방은 이 방입니다만,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다른 방을 쓰셔도 됩니다. 주인님의 방은 다른 층입니다. 좀 더 그 방에 가까운 방을 드릴까요?"
"아, 아니. 토니 방을 내가 뺏은 게 아니라면 됐어. 방은 아주 좋아. 좀 분에 넘칠 정도로."
"마음에 드신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그럼 아무쪼록 편히 쉬십시오. 저녁식사 시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고마워, 자비스."
"별 말씀을. 언제든 필요하신 것이 있거나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부르십시오."

 

스티브는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방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방 한가운데에 침대가 있었다.(물론 그게 이동했어도 곤란하긴 하다) 침대를 가운데에 두다니. 스티브는 그런 생각을 감히 떠올릴 수도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좁은 방에서 한가운데에 침대를 놓으면 그 방 전체가 죽은 공간이 되고 만다. 사람 한 명이 지나기도 어렵도록 좁은 공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둘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방은 침대라도 중간에 없다면 남는 공간을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방의 다른 쪽에는 옷장이 있었다. 옷장 역시 스티브가 본 옷장 중 가장 거대한 옷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방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가 가진 모든 옷을 - 속옷까지 포함해서 - 전부 옷걸이에 걸어둔다 해도 저 옷장의 반의 반도 채우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옷장을 가득 채울 만큼 옷을 가질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토니라면 옷가게 하나분의 옷을 통째로 사들이고도 태연한 얼굴을 하겠지만 스티브는 그럴 수 없었다. 설령 그가 준다 해도 받을 수 없었다. 토니가 아무리 돈이 많든, 아무리 돈에 초연하든 그 돈은 토니의 돈이지 스티브의 돈이 아니니까.

 

유리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그러고 보면 이 건물은 바다에 면한 절벽 위에 세워져 있었다. 이제부터 매일 방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것일까? 스티브는 다시 한 번 창 밖으로 바다는 고사하고 하수구라도 보이면 다행이었던 자신의 옛 집을 떠올리며 유리 쪽으로 다가갔다. 유리창은 완만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바깥으로 다소 튀어나가 있었다. 밖에서 보기에 원통형으로 보였으니 이해할 만 했다. 유리 바로 앞에 서서 스티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틀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커튼도 없고 잠금 장치도 없다. 열 수 없는 건가. 그는 별 생각없이 한 손을 유리 위에 얹었다. 그리고.

 

그 부분의 유리 한 조각이 사라져 버렸다.

 

"...어?"

 

스티브는 당황하며 정말로 유리가 사라진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팔이 아무 저항도 없이 유리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열린 창 너머로 짠내가 섞인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즉 유리가 없어진 것은 맞았다. 그 직전 손에 닿은 감각이 있었으니 원래는 있었던 것도 맞다. 그렇다면 유리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는 유리가 있었던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창 밖과 안쪽과 심지어 천장이며 바닥까지 돌아보았다. 유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스타크 타워는 전치 2주의 타격을 입었다. 온통 박살이 난 유리창과 엉망이 된 바닥을 바라보며 토니는 머리가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청소와 유지와 보수라니.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작업임이 틀림없었다. 그 시간에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든다면 적어도 재미라도 있을 텐데. 토니는 입을 쭉 내민 채 용케 무사히 남아 있던 술병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고서야 이 꼴을 어떻게 보겠어, 해 가면서.

 

엄밀히 말하자면 스타크 타워를 청소하고 보수하는 것은 토니가 아니다. 그가 개발한 기계이거나 고용한 인부들이라면 모를까. 진정으로 토니의 짜증을 유발한 것은 그 작업 자체가 아니라 그가 야심차게 만들어낸 것이 다른 이의 손에 망가졌다는 점이었다. 멍청한 순록 같으니. 어느 정도 제 얼굴에 침 뱉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토니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건 내 기념비지 네 기념비가 아니란 말이다. 물론 아무리 욕해 봐야 로키는 듣지도 못할 것이고, 건물 보수에 바늘 끝만한 도움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돕지 않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다. 공연히 도와주겠다며 다시 지구로 온다면 그런 민폐가 없을 테니까.

 

"자비스, 거기 있나?"
- 예, 주인님.
"일단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바닥부터 좀 쓸어."
- 알겠습니다.

 

자비스가 청소기를 작동시키는 것을 곁눈으로 보면서 토니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층 더 엉망이 된 맨해튼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 피해액이 얼마라고 했더라? 아침에 페퍼에게 받은 보고 중에는 분명 그런 내용도 끼어 있었다. 내 이름으로 후원금 좀 내, 라는 말에 이미 보냈어요, 하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오늘 저녁쯤에는 아마 뉴스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변함없이 일처리가 빠른 여자였다.

 

그러고 보니 - 

 

"캡은 어쩌고 있어?"
- 로저스 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달리 누가 있어. 옷장에 박아둔 모자 안부 물을까 봐?"
- 방에 계십니다. 주인님이 시키신 대로 말씀드렸는데 아직까진 부르지 않으시는군요. 바다를 보고 계신 듯합니다만, 연결해 드릴까요?
"어, 아니. 어차피 집에 가면 얼굴 볼 거고, 그 노친네 허공에서 내 목소리 들리면 기절할걸. 90 넘은 노인 놀라게 하는 게 아니지. 심장에 안 좋다고."
- 주인님, 죄송합니다만 로저스 씨의 심장이 주인님보다 훨씬 튼튼...
"자비스, 닥쳐."

 

인공지능은 곧바로 조용해졌다. 토니는 손끝으로 가슴에 연결된 아크 원자로를 만지작거렸다. 내 심장이 개판 5분 전이라는 건 나도 안다고. 이게 없으면 살아갈 수도 없지. 그래서 어쩌라고. 손가락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애당초 스티브와 비교한다는 것이 무리다. 그는 캡틴 아메리카가 아닌가. 슈퍼솔져 프로젝트로 태어난 초인, 최초의 슈퍼히어로. 그래도 수트 입으면 내가 이겨. 토니는 억지를 부리는 어린아이들처럼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한 번 가라앉은 기분은 돌아오지 않았다.

 

"자비스, 술 좀 줘. 그리고 음악 아무거나 좀 틀어봐. 신나는 걸로."
- 주인님이 계신 이 층의 오디오 기능은 87% 이상 손상되어 재생이 불가능합니다.
"...거 참 끝내주는구만."

 

 

 

 

 

 


결국 그 날 해가 질 때까지 한 일이라고는 청소와 청소와 청소 정도였다. 애초에 타워 공사를 할 때도 힘쓰는 일의 상당 부분을 아이언맨 수트에 의존했던 데다가 - 그 수트는 지금 넝마가 되어 있었고, 그게 아니라도 한동안은 입지 말라고 페퍼에게 귀가 따갑도록 잔소리를 들은 바 있었다 - 인부를 구하려 해도 맨해튼 사태 때문에 건설 인력은 초품귀상태였다. 웃돈을 얹어 준다면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맨해튼 재건에 모처럼 돈을 기부해 놓고 인부를 빼돌려서야 모양이 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굳이 스티브를 방치하고 나올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토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물론 처음부터 타워가 그렇게나 걱정되어 나왔던 것도 아니긴 했다. 집에 있으면 스티브의 질문 공세에 시달릴 것이고 일일이 대답해 주기가 귀찮았을 뿐이다. 아마도 그 편이 양쪽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었다. 만약 그가 집에 있었다면? 스티브는 궁금한 것을 물었을 것이고 토니는 제 성질대로 빈정거렸을 것이고 짜증이 난 스티브는 너랑 같이 못살겠다며 집을 나갔을 것이고 한참 연락이 되지 않다가 어느 집 안에서 아사한 시체를 발견하고 - 아니, 왜 끝이 항상 이 모양이지?

 

토니는 머리를 한 번 젓고는 다시 상상하기 시작했다. 집을 나가는 것까지는 맞다. 그 다음에 연락이 안 되는 것도 맞고. 그 다음엔 - 다른 어벤저스 멤버들이라든가 실드의 요원들이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갈 데도 없는 사람이 집을 나갔는가'부터 '틀림없이 네 잘못일 테니 일단 백배사죄하고 다시 돌아오게 하라'까지. 토니는 잔소리를 듣는다고 풀이 죽을 성격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귀찮긴 하다. 시끄럽기도 할 것이고. 그게 여러 사람이라면 더욱 더. 

 

역시 집을 나온 건 탁월한 선택이었지. 아무렴. 토니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집은 이제 손에 잡힐 듯 가까워져 있었다. 그리고 - 그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바닷가 쪽 창문쯤에 어쩐지 무엇인가가 희뜩이고 있었다. 설마 그 티셔츠 같은 걸 창가에 널어둔 건 아닐 텐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 토니는 차라리 하얀 티셔츠를 널어놓은 쪽이 서로에게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 깃발이 창가에 펄럭이는 것보다는. 

 

저 노친네 지금 뭘 하는 거야?

 

 

 

 

 

 


물론 스티브는 그 질문을 들을 수 없었지만, 들었다 해도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단지 처음 사라진 유리가 어디로 간 것인지 찾고 싶었을 뿐인데 어느 샌가 일곱 개의 유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더 이상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쥐가 파먹은 빵마냥 군데군데 뻥 뚫린 창문에 거의 매달린 채 스티브는 난감하게 한숨을 쉬었다. 하늘에 맹세코 그렇게 세게 밀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를 창 밖으로 내밀어 보기까지 했어도 유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밖으로 열린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내게 생긴 슈퍼솔져의 힘이라는 게 손가락으로 가볍게 미는 것만으로 유리를 떼어내서 바닷속에 처박을 만큼 큰 거였던가? 하지만 그랬으면 저번 전투 때 내 주먹에 맞은 사람들은 다 가루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어쩐지 몹시 엉거주춤한 자세로 스티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작스레 방문이 열렸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 - 물론 토니 스타크 - 이 서 있었다. 스티브가 순간적으로 유리 일곱 장의 가격을 계산하는 동안 토니는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는 것을 본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도대체..."

 

그는 그 달변의 토니 스타크로서는 드물게도 그 뒤에 한 마디도 덧붙이지 않은 채 손을 뻗어 스티브를 휙 잡아당겼다. 두어 발짝쯤 끌려나온 스티브가 얼떨떨해 있는 동안 토니는 창문 닫아, 하고 말했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할 수 있었다면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그걸 하려고 창문에 붙어있던 건데 - 하지만 변명할 필요도 없었다. 스티브는 눈을 크게 떴다. - 유리가, 다시 생겼다?

 

"...캡."

 

토니가 스티브의 팔을 두어 번 두드렸다. 아까 그게 닫고. 그는 손가락 끝으로 창문을 툭 건드렸다. 이게 열고. 그는 마치 연주하듯 몇 개의 유리들을 두드렸다. 참고로 사람이 빠져나가서 떨어질 정도로는 안 열려, 인접한 건 고작 네 개 정도까지. 스티브는 멍한 얼굴로 그 동작을 보고 있었다. 토니는 우뚝 손을 멈추더니, 휙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자비스, 창문 닫고 이 방 전체 다 수동으로 돌려!"
"알겠습니다."
"...뭐? 잠깐, 나한테 그걸 알려주고 수동으로 다시 바꾼다고?"
"오, 난 내 집 창가에 인간 깃발 더는 보고 싶지 않아서. 매스컴에서도 아주 난리가 날 거라고. 내가 널 구박해서 캡틴 아메리카가 자기 방 창문을 통해 자살을 시도했다든가? 귀찮아서 사양이야. 완전히 이 집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면 그 때 가서 도로 바꾸든가."

 

거기까지 숨돌릴 틈도 없이 말하고 토니는 몸을 홱 돌렸다. 답지 않게 목덜미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스티브는 잠깐 생각했다. 이 방은 - 정확히 이 집은 - 덥지 않다. 딱히 토니가 원래 땀을 잘 흘리는 체질도 아닌 것 같다. 뛰어왔을까. 창가에서 허우적거리는 걸 보고, 이 창문은 사람이 빠져나갈 정도로는 열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토니."
"난 지금 대화할 기분이 아니야, 캡. 굶어죽을 지경인데 누구 씨 덕분에 밥도 못 먹고 여기서 시간을 버렸다고."

 

스티브는 그냥 쓴웃음을 지었다. 한두 발짝 더 말없이 떼던 토니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부탁하는데, 앞으로는 모르는 게 있으면 제발, 제발, 부탁이니 자비스에게 물어봐 주었으면 좋겠군. 미모 감상하라고 붙여준 게 아니니까."
"난 그냥 그의 시간을 너무 뺏는 것도 미안하다고 생각해서..."

 

토니는 코웃음을 치더니 자비스를 손짓으로 제지했다. 정확히는 그랬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과장된 동작으로 팔을 허공에 저어 보이고는 문을 가리켰다. 

 

"남의 시간씩이나 신경쓰실 정도니까, 우리 캡틴은 '당연히' 자기 방 문쯤은 열 수 있으실 테지."

 

스티브는 움찔 놀라며 방문을 바라보았다. 문은 단단해 보였고 손잡이도 보이지 않았다. 손잡이가 없으니 당겨서 여는 문은 아닐 터. 그는 토니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것을 시야 구석으로 보면서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문에 손을 대고 가볍게 밀었다. 열리지 않았다. 그는 조금 더 힘을 주었으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토니가 과장되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서서히 찾아들었다.

 

"로저스 씨, 그 문은 미닫이입니다."

 

결국 자비스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가 문에 손을 올리자 문은 덜컹 소리조차 없이 옆으로 밀려났다. 아, 그래서 아까 문 여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거군. 깨달음은 지나치게 뒤늦은 감이 있었다. 토니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스티브의 옆을 지나쳐 갔다.

 

"음성으로 열게끔 해. 그 방 보안 수준 낮춰도 되니까."
"지문, 홍채, 장문은 사용하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제 발로 그 방에 들어가겠다는 불운한 놈들까지 신경써줄 필요는 없지. 어차피 누가 오건 우리 캡틴한텐 한 방이라고."

 

이제까지 스티브의 삶에서는 평범한 사람이건 아니건 적을 한 방에 쓰러뜨리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어쨌든 토니가 그를 조금은 인정해주는 것 같아 조금 기쁘기도 했다. 자비스가 개폐 방식을 변경했다고 알려 주었으므로 - 언제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 스티브는 시험삼아 문을 닫아 보았다. 문은 그의 명령에 따라 다시 소리도 없이 닫혔다. 열고, 닫고. 열고, 닫고. 한참 그러고 있을 때 이번에는 짜증이 담뿍 담긴 목소리가 건너편에서 날아들었다. 

 

"캡, 노친네 흉내 그만 내고 빨리 오라고!"

 

조금 더 기다리면 토니 스타크가 자기 집에서 굶어죽는 기적을 목격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굶주린 토니의 독설을 뒤집어쓰고 정신붕괴를 일으킬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다. 그 자신도 새삼 허기가 느껴져 스티브는 서둘러 토니의 뒤를 따라갔다. 

 

어쨌든 그는 식당으로 가는 길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분명 배가 고프다고 한 것 같은데 정작 식당에 앉은 토니는 식사에 의욕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스티브는 그가 샐러드와 빵을 가루로 만드는 작업에 골몰하는 것을 곁눈질로 살피고 있었다. 마치 인간 녹즙기 같다. 접시 위에 놓인 샐러드는 이제 음식이라기보다는 음식물 쓰레기에 가까워 보였고, 무엇보다 도저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뭐가 문제일까.

 

자비스는 그들의 뒤에서 식사 시중을 들고 있었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주인의 잘못된 식사 예절을 바로잡을 수는 없다 해도 - 나라면 웃고만 있지는 못할 것 같은데. 스티브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토니는 거의 고뇌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이번에는 버터를 휘젓고 있었다. 한 마디 할까말까 스티브가 고민하고 있을 때 기계 하나가 쟁반을 받쳐들고 나왔다. 오늘의 메인 요리다. 접시가 앞에 놓이자 토니는 일단 포크를 들었다. 하지만 선뜻 손대지는 않은 채 포크를 들었다 놨다 하다가,

 

"캡, 한 접시 더?"

 

스티브는 당황하며 토니를 바라보았다. 손도 대지 않은 접시이니 먹으라면 못 먹을 것이야 없다. 나란히 식탁에 앉은 이래 토니가 먹은 양을 전부 댈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문제일 뿐이지. 그가 대답하지 않는 것을 부정의 의미로 여겼는지 토니가 접시를 자비스 쪽으로 밀어 놓았다. 버려. 자비스가 막 접시에 손을 대려는 찰나였다. 

 

"잠깐만, 자비스가 먹으면 어때?"

 

스티브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것이 설령 80년 전의 옛 일이 되었다 해도. 그의 집에 버릴 음식이란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설령 있다 해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스티브 로저스의 머릿속에서 음식을 버린다는 것은 말 그대로 죄악이었으니까. 다시 지금의 상황을 보면, 그 자신은 아무래도 선뜻 토니의 접시에 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토니는 정말로 먹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버리느니 자비스가 먹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거의 완벽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토니와 자비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당황한 듯한 눈길로 스티브 쪽을 본 뒤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뭐야, 너 얘기 안 했어? 주인님이야말로 언급하지 않으신 겁니까? 서로 탓을 돌리는 듯한 대화가 짧게 오갔다. 도무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스티브만 멀뚱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내 자비스가 - 그 여전한 웃는 얼굴로 - 말했다. 

 

"로저스 씨, 저는 먹을 수 없습니다."
"왜?"
"사람이 아니니까, 캡. 자비스는 컴퓨터 인공지능 프로그램이야."
"...뭐? 잠깐, 그럼 이 사람은 누군데?"
"물론 그것도 자비스지."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토니는 지겨워진 것이 분명했다. 그는 대충 자비스 쪽에 손짓하고는 - 알아서 해결해, 정도의 의미일 것이 틀림없었다 - 일어나 버렸다. 스티브와 자비스, 두 개의 접시만이 덜렁 남겨졌다. 잠시 후 드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조금 전의 기계가 후식을 들고 다가왔다. 하지만 자비스가 그 쪽에 눈길을 한 번 주자 그것은 곧 도로 들어가 버렸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로저스 씨. 제 이름은 자비스. 이 집을 총괄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입니다. 사실은 아이언맨 수트 쪽도 조금 관리하고 있고요."
"...그럼 그 모습은?"
"이것은 주인님이 만드신 가짜 몸입니다. 생긴 지 21시간 47분 18초가 막 지났군요."
"그럼 그 전에는 몸이 없었던 건가?"
"그렇습니다. 주인님은 로저스 씨가 이 집에 적응하시는 데는 제가 몸을 갖고 있는 쪽이 더 나으리라고 판단하셨습니다."
"몸이 없으면 어떤데?"
"이 집은 제 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안에 계시는 한 저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서든 들을 수 있고,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습니다. 목소리만이긴 합니다만."

 

스티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방에 있는데 머리 위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어떨까. '로저스 씨, 방은 편안하십니까?' 샤워를 하는데 끼어들지도 모른다. '수온은 어떠십니까.' 잠자리에 들었을 때 들려올 수도 있다. '자장가를 불러 드릴까요?' 아, 지금 그건 좀 심한 상상이었을지도. 어쨌든 결론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적응 못할 것 같다. 이틀 정도 지난 후엔 이 집에서 나가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을지도. 

 

"모처럼 신경써준 건데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군. 토니는..."
"작업실에 계십니다만 로저스 씨는 아직 그곳에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주인님께 출입을 허가하실 것인지 여쭤볼까요?"
"음. 한참 작업중이라면 방해하고 싶진 않은데..."
"알겠습니다. 그럼 여쭤보지요."

 

엥? 스티브는 순간 당황했으나 자비스는 태연해 보였다. 심지어 웃는 얼굴이다. 자세히 보면 표정이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이 인조인간이 맞는 것 같기는 했다. 어쩐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여서 그렇지.

 

"주인님이 출입을 허가하셨습니다. 작업실은 지하에 있습니다. 원래는 암호를 입력해야 하는 문입니다만, 그냥 가까이 가셔서 이름을 대시면 그냥 열릴 겁니다."
"고마워, 자비스."
"별 말씀을."

 

자비스는 토니의 접시를 들어올렸다.

 

"자비스?"
"예, 로저스 씨."
"그거 버리는 거면 그냥 거기 놔둬. 내가 먹을 테니까."

 

 

 

 

 

 


작업실로 통하는 문은 유리문이었다. 벽도 유리로 되어 있어 스티브는 안에서 움직이는 토니를 볼 수 있었다. 토니는 거의 자기 머리 크기만한 커다란 잔을 들고,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소리인지는 들리지 않는다. 그가 허공에 손을 휘저을 때마다 빛으로 이루어진 영상들이 떠오르고, 커지고, 작아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실드의 공중전함에서도 비슷한 것을 보았지만 이쪽이 한결 더 놀라워 보였다. 스티브 자신은 꿈에서조차 상상해본 적이 없는 풍경. 이것이 지금의 세계인가.

 

"왜 거기 서 있는 거야? 자비스가 말 안 해줬을 리는 없고, 내 뒷태가 그렇게 끝내주나?"

 

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토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쪽에 등을 돌린 채 농담조로 중얼거렸다. 한참 멍하니 서 있던 것을 들킨 것 같아 조금 멋쩍었다. 한 발 안으로 들어서니 커피향이 훅 끼쳐왔다. 아무래도 토니가 든 커다란 잔의 내용물은 커피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진한.

 

"...원래는 암호를 입력하는 문이라고 하던데. 나한테 이렇게 막 열어줘도 괜찮나?"
"봐도 이해 못할 테니까 상관없어. 가령 이게 무엇인가, 라든가?"

 

토니가 영상 중 하나를 쭉 끌어왔다. 장담컨대 손에 잡히진 않겠지만, 그렇게 보였다는 뜻이다. 그가 몇 번 손을 움직이자 영상은 한껏 확대되었다. 거의 두 사람 모두가 영상 속에 파묻힐 기세였다. 스티브는 눈을 들어 그 거대한 영상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그것은 마치 별처럼 보였다. 하늘을 가득히 수놓은 무수한 수의 별. 

 

"...별?"
"우리 캡틴은 참 똑똑하다니까. 뭐 별처럼 빛나는 건 사실이지만."

 

토니는 스티브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자신의 가슴을 톡톡 두드려 보였다. 검은 셔츠를 통과해서 파랗게 빛나는 것. 아크 원자로였다. 스티브는 토니의 가슴을 한 번 보고, 다시 머리 위에 펼쳐진 영상으로 눈을 돌렸다. 정체를 알고 봐도 모를 일이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스티브는 자신이 '봐도 이해 못할 것'을 인정했다. 토니는 커피를 홀짝이며 몸을 돌렸다.

 

"이번 마크 7은 6보다 에너지 소비는 괜찮지만 화력은 좀 떨어지더군. 자비스, 영상 띄워 봐."
- 예, 주인님. 

 

스티브가 아는 '자비스'는 그곳에 없었으나 목소리는 분명히 들렸고, 곧장 영상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토니가 설명하지 않아도 그것이 아이언맨 수트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토니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그 영상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다가 그것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혹은 그런 것처럼 보였다.

 

"이 부분의 장갑을 강화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모양을 좀 더 이렇게 해서 - "
- 장갑의 두께를 유지한 상태에서 그런 변형을 가하면 무게가 너무 무거워집니다.
"이쪽을 빼서 줄이지 뭐. 아니면 이쪽만 다른 소재를 쓰는 건 어때?"

 

스티브는 꽤 한심스러운 기분이 되어 토니를 바라보았다. 토니는 아이언맨 기술을 철저히 비밀에 붙이고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고 들었다. 물론 그래야 할 것 같긴 했다. 악용된다면 그만큼 위험한 기술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신기종 개발의 현장에 있다. 보고 들어도 어차피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이유로. 가장 한심한 것은 그게 사실이라는 것이다. 

 

토니와 자비스의 대화는 점차 그들이 영어를 구사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영역으로 접어들었고 스티브는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대신 그는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이제 보니 이곳은 처음 그가 이 집에 왔을 때 도대체 뭐하는 곳인지 의심했던 그곳이었다. 차 몇 대가 있고, 지금 봐도 모를 기계들과 벽에 나란히 진열된 아이언맨 수트(아마도 구형 기종일 것이다), 그리고 - '토니 스타크에게 심장이 있다는 증거'.

 

스티브의 시선이 멎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상패처럼 보였다. 하얀 받침대 위에 아직도 흐릿한 빛을 뿌리는 아크 원자로 - 추정 - 가 대강 끼워져 있었다. 아마도 원래는 유리상자 안에 있었던 것 같지만, 이제 유리는 받침대에 붙은 몇 개의 파편 외에는 흔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 글자는 아크 원자로를 둘러싼 받침대 위에 둥글게 새겨져 있다. 스티브는 토니 쪽을 흘끗 보고 다시 그 '증거'로 눈을 돌렸다. 이것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 왜 토니가 부서진 그것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지 스티브는 모른다. 묻는다면 대답해 줄까. 스티브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곳에 온 이유를 생각해 냈다.

 

"토니, 고마워."
"이 상태에서 추진력을 강화시키면 균형이... 뭐?"
"날 배려해줘서 고마워, 토니."

 

한순간 토니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는 것 같은 표정을 했다. 그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고, 이어 기막힌 표정으로 변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와서 꿔다논 보릿자루 놀이를 했다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나한테 노친네 소리나 듣는 거야, 스티브."

 

뭐, 이 정도쯤은 예상했던 반응 범주 안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그 토니 스타크가 수줍게 '알아주다니 기뻐' 같은 대답을 해올 리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스티브는 그리 실망하지도 않았고, 화가 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자비스가 인조인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남자로 만든 거지? 난 너라면 여자를 만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굳이 여자를 만들어야 하는데? 어차피 날 원하는 여자는 차고 넘친다고."

 

아, 그러세요. 스티브는 굳이 논쟁을 벌이고 싶진 않았다.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자리를 떴다. 아니, 뜨려고 했다.

 

"이봐, 캡. 혹시..."
"음?"
"밤이 외로운 거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생각해 보니 더 늙기 전에 동정도 떼야겠고, 언제든 여자로 바꿔줄 수 있다고."

 

토니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는 속담을 모르거나,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는 것이 틀림없다. 어쨌든 그는 똑똑한 편이니 아마 세 번째일 것이고. 조금 전까지 마음속에 남아있던 고마운 마음이 싹 사라지고, 스티브는 아이언맨 수트의 머리 부분을 토니한테 던져서 맞추면 어떤 소리가 날지 실험하고 싶어지기 전에 작업실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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