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타입으로부터 성인물 전환 권고를 받고 한동안 비공개 처리되었었으나 오류로 판명되어 현재는 정상 열람/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드려요! (12/8 씀)


이전 편들에서 하던 대로 계속하는 셜록. 메리와 은은한 경쟁구도. 인기쟁이 존입니다.

등장인물: 셜존메, 303의 해커 크렉, 마이크로프트, 허드슨 부인. 언급만 되는: 토비. 메이저 숄토. 301 잠복고환남.

장소: 221b. 해커의 집. 공무용 차. 누군가의 주방.



 

선한 셜록 홈즈로 거듭나는 나를 방해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존이다. 존에 머릿속에서 사는 ‘대단하고 멋진 셜록 홈즈’에게 선한 존재로 가장하는 숙제를 전부 떠넘길 수 있다면 이 길고 지루한 마라톤을 훌륭한 성적으로 완주할 것이다. 그러나 존은 굳이 현실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나를 꼬박꼬박 찾아와 셜록 홈즈란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재수 없는지 확인했다. 계속 베이커 가로 돌아와 제 의자에 앉은 후 내게 새로운 과제를 던지길 반복했다. 둥지에서 잠을 깨고 클리닉으로 출근한 후 베이커 가로 오는 동안 존의 머릿속에 사는 ‘대단하고 멋진 셜록 홈즈’가 어떤 마법을 부리며 나의 실패를 상쇄하는지 알 길은 없으나 매우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짐작된다. 녀석의 노고에 감사하는 나에 반해, 정작 녀석은 우리가 죽어있었던 2년 동안의 제 입지를 그리워하며 나를 욕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존은 죽은 셜록 홈즈를 가장 사랑했을 테니까.

"네게 질문을 하나 할 거야, 셜록."

진지하게 내리깐 목소리. 존은 두 무릎에 두 팔꿈치를 대고 몸을 숙인 후 이마에 진지한 주름까지 잡아 보였다. 설득을 시작하는 몸짓으로 유추하면, 하고자 하는 질문이 나의 행실과 관련 있어서 방어적 태도가 아닌 진지한 협조를 요구하고 있다.

"솔직하게 답해야 해, 알았지."

또 시작이군.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른 나의 정직. 아직 죽을 준비가 되지 않았단 말이야, 라고 퍼덕이는 모양새를 보면 나의 정직은 완숙, 미숙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지. 미꾸라지처럼 존의 손아귀를 빠져나간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음번에 붙잡힐 때까지 모래 속에 몸을 숨기는 게 능사다. 존이 아무리 맛있는 먹잇감을 눈앞에 휘둘러대도 말이다.

"……잔꾀 부릴 궁리 말고."

잔꾀라니. 생존 여부를 가를 중대한 판단력을 잔꾀로 치부하는 이기적인 낚시꾼 같으니. 그따위의 공감 능력으로 잘도 짝을 찾았군. 그러니 현재 아래층에서 허드슨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새로운 짝도 공감 능력 떨어지긴 마찬가지이리라. 이전의 짝처럼.

"셜록. 내 말 듣고 있냐."

"전주가 길어."

"솔직하게 답해줄 거냐고?"

매끄러운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당장 물지 않으면 이 매력적인 미끼를 거두어가겠다고 으름을 놓는 것이다. 미끼에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어떤 재주라도 부리지 않으면 정말 미끼를 거두고 내 연못을 떠나버릴 거다. 그래서 물었다.

"긍정, 부정으로 답하면 되는 거야?"

"응."

"그렇다면 존, 맞아. 내가 그랬어."

감정을 추스르려고 낼름, 나온 혀가 잠깐 거기에 머물렀다. 깜빡이는 두 눈은 비협조적인 태도의 내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다투기도 싫다는 뜻이다. 그리고 의심. 내 대답이 그의 의심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에게 이상적인 셜록 홈즈가 솔직한 셜록 홈즈임을 고려하면, 오늘 존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고, 행위의 용의자로 나를 의심하고 있지만, 내가 아니길 바라기에 질문하는 거다. 아니라는 답을 들어서 나의 무결함을 확인받으려고. 이제 존은 당연한 사실을 지목함으로써 나의 대답의 비합리성을 꼬집으며 아니라는 대답의 가능성을 붙들고 늘어지는 동시에 내가 질문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했는지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하려 들 것이다.

"내 질문이 뭔지 듣지도 않았잖아."

나는 폐에 숨을 담았다.

"내가 거짓말을 할 거라는 의심이 질문의 바탕이라면 내 대답이 정말로 중요한가? 자백하든 잡아떼든 어쨌든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렇게 당부하는 거잖아? 표면적이든 진심이든 내가 결백을 맹세하는 게 네 의심을 해소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면 네 신뢰 문제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테지, 하지만 여전하잖아. 네 의심은 고질병이라고 이미 말한 바 있지. 나는 물론 너조차도 그 악성 고질병을 고칠 수 없으니 이제 불치병으로 승격할 때인 것 같군.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잘 알고 있고,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서 가능하다고 떠들어대고 싶지 않아. 질문을 듣지 않은 상태에서의 대답이 너를 혼란스럽게 하더라도, 질문을 듣고서 답했을 때의 네가 어쨌거나 품을 의심과 마찬가지로 내 능력 밖이고, 고로 내 알 바 아니라고. 사실관계를 떠나 그냥 아니라는 착한 대답을 듣고 싶은 거라고 말한다면 기꺼이 아니라고 해줄게. ‘아니, 네게 그 짓을 한 건 내가 아니야. 오늘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났든, 범인은 내가 아니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만족해?"

사과해. 당장. 미친 물고기 같으니. 이렇게 재수 없는 물고기를 누가 들여다보고 싶어 하겠어? 이제 가버릴걸. 기분이 상해서 이틀간은 베이커 가에 얼씬도 하지 않을 거라고. 그럼 후회할 거잖아. 한 시간 간격으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면서. 그 짜증 나는 일을 반복할 셈이야?

하지만 상대는 존 왓슨이었다. 단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내 지랄을 차분히 목격한 그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잘하고 있네."

"뭘."

"금연."

코카인도, 라고는 눈빛으로만 전하는 존. 화끈 더운 명치를 설명할 과학적 정보를 찾지 않는다면 나는 가까운 시일 내에 존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정신 차려. 그가 앉은 의자 밑으로 몸을 던져 작은 두 다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미친 짓을 하더라도 나를 받아줄 거라는 환상을 실험하고 싶은 나를 막을 사람은 나뿐이라고. 이게 다 소시오패스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존의 탓이다. 목말라.

"너를 달래줄 사건을 가져왔으니 다행인 줄 알아."

나는 얼굴에 달린 마음의 창 두 개로 존의 갈색 구두를 보면서 적절하고 불규칙한 속도로 깜빡거렸다. 사과로 받아들이라고.

"……그래?"

"그래.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라고. 문 걸어 잠그지 말고."

"내가 언제 문을 걸어 잠갔다고 그래?"

"음유시인이 은유도 다 잊어버리고 말이야. 일주일 더 줄게. 그동안 잘 참으면 사건보다 더 좋은 걸 주지."

멋대로 마감을 정하고 멋대로 의욕을 심어버리다니. 따져야겠다.

"마카롱인가?"

"아니, 마카롱 싫다며? 뭐라도 줄 테니까, 어쨌든."

작게 주먹 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흐흠, 하고 목을 가다듬은 존은 고작 아주 작은 인간미를 투덜댔다.

"이상한 일이 생기면 너부터 의심하는 게 내 탓은 아니거든."

동의한다. 속으로만. 나는 미끼를 물었다.

"무슨 일인데?"

"오늘 클리닉에서 일하다가 블로그 메일함을 확인했는데, 의뢰인으로부터 메일 한 통이 와 있었어."

시작하는군. 다리를 반듯하게 꼬고 앉음으로써 집중과 관심을 드러내자. 존은 내 기대감을 한껏 즐기며 느긋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의뢰인의 딸이 여행을 갔다가 죽었대. 작년에 런던의 클럽 한 군데가 테러를 당한 일이 있었잖아. 폭탄테러 사건, 기억나? 불운하게도 그때 발생한 희생자 중 한 명이 자기 딸이라더군. 끔찍하겠지. 시간이 지나도 말이야."

나는 이야기의 진전을 기대하며 고개를 끄덕 숙였다. 등받이에 등을 기댄 존은 나를 안달하게 하려고 검지를 세우는 불필요한 동작을 취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의뢰인이 이사하려고 물건을 정리하던 중에 이상한 걸 발견했대."

"이상한 것?"

"응. 딸이 소유했었던…… ‘것’. 딸이 살아있을 때 의뢰인의 서랍장 깊숙한 곳에 넣어놓았대. 그걸 발견해서 내게 메일을 쓴 거야."

나는 손가락을 모았다. 런던 시내의 클럽이 폭발물로 테러를 당했던 유명한 사건의 희생자라면 금전적 보상이 충분했을 테니 의뢰목적이 돈에 있지는 않다. 심리적인 문제다. 이상한 ‘것’의 발견으로 인해 딸의 죽음에 뒤늦게 의문점이 생긴 것이다. 아무튼, 그게 무엇인지는 메일에 쓰여있으며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 맞혀보시오, 가 의뢰 내용은 아님에도, 존은 내게 퀴즈를 내고자 일부러 정보를 감추고 있다.

"뭔지 알겠어?"

이렇게 적은 정보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맞히길 바라다니. 나를 과대평가하는군. 그러나 실망하게 할 순 없지.

"후보는 있어. 제거 작업으로, 네가 한 이상한 짓부터 지적하고 싶군."

존은 거의 반사적으로 턱을 당기며 잡아뗐다.

"내가? 내가 뭘 어쨌다고?"

"메일의 제목. 그리고 의뢰인의 이름. 생략했잖아. 네가 나에게 사건을 물어다 줄 때는 늘 이 두 가지 정보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번엔 둘 다 생략했다는 점이 이색적인 정보로 수집되는군. 거기에 이 일과 관련해 나를 의심했었던 네 태도 또한 단서로 더해야겠지. 테러의 희생자, 누구에게나 알려진 죽음, 심리적인 이유로 메일을 보낸 부모. 네가 메일 제목과 의뢰인의 이름을 생략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지만, 네 입으로 털어놓을 기회를 주지. 너도 나에게 관대했으니까."

나를 외면한 존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미세하게 잡히는 눈주름이 그게 웃음임을 증명했다. 옳지. 그래야지. 시선이 내게 돌아왔을 때는 약간의 만족감이 담겨 있었다.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나서 그래."

"메일을 한 번밖에 볼 수 없었던 사유가 발생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사건을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전할 리 없으니까."

"그래. 지워졌어. ‘누군가’가 지웠든가."

"소시오패스라 틀릴 수도 있지만, 사과가 순서인 것 같아."

길게 늘어나는 입꼬리. 옳지. 그 얼굴이면 됐어. 존은 내 구두를 보며 따지듯이 말했다.

"미안한데, 내 의심병이 악화한 건 전적으로 네 책임이야."

그걸 사과랍시고 하는 것 같았다. 한결 더 인간적이군.

"나 말고 네 판단력에 사과하라는 뜻이었는데. 내가 네 메일함에 들어가서 의뢰인에게서 온 메일을 지웠다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왜 그렇게 쓸데없는 짓을 할 것 같아?"

"전과가 있으니까?"

내가 언제? 라고 발뺌할 수 없게 눈과 눈썹에 힘을 주고 나를 흘겨보는 존. 볼만한 광경이군. 시시각각 짙은 감정이 오롯이 드러나는 눈망울에 나만 담겨 있어서 황송해진다.

"네가 실수로 지워버렸고 어처구니없게도 휴지통을 비워버렸다는 가능성도 있잖아."

"내가 무슨? 그런 실수 안 해."

"클리닉이 너무 지루해서 환상을 보았다는 가능성은?"

그러자 일자로 굳은 눈썹이 더 아래로 내려갔다.

"잘못 본 거 아니야, 분명히 내 메일함에 있었다고.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메일 제목은 확실히 기억해. 엄청 짜증 났거든."

"뭐였는데?"

"‘셜록 홈즈 씨에게.’ 존 왓슨의 블로그 메일 주소로 그렇게 보냈다고."

실없는 웃음이 샜다. 존과의 시간은 유쾌하다. 함께 유쾌하면 좋으련만. 내게 보내는 불만 가득한 눈빛에 성의를 보였다.

"그럼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

"그렇다니까. 받은 지 삼십 분 안에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말이야."

"삼십 분이라. 구체적으로 기억하는데."

"그럼."

그것을 마지막으로 부연하지 않고 입을 닫은 존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했다. 삼십 분마다 블로그 메일함을 확인하는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태도도, 미안하지만, 정보가 된다. 심심해서 나를 찾아온 늑대에게 빈손을 내밀 순 없지. 존을 위해 주제를 돌려주었다.

"의뢰인이 발견했다는 그 ‘이상한 것’이 도대체 뭐기에 새로울 것 없는 자식의 죽음을 들먹거리는 거야? 그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나에게 물어보는 건 아니길 바라."

"내가 물어보면 답할 수는 있고?"

"내가 답하면 메일 내용을 기억해낼 수는 있는 사람이 하는 질문인가?"

"기억하지. 메일을 읽자마자 네 생각도 했어. 뭐, 메일이 사라져서 너를 의심하기도 했지만."

그러지 않아도 내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최대 삼십 분마다. 그렇다면 그의 머릿속의 대단하고 멋진 셜록 홈즈를 위해서라도 퀴즈에 답해야겠지.

나는 집중한답시고 모은 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존을 구경했다. 오늘은 감색 셔츠와 회색 카디건의 깔끔한 조합이로군. 면도도 매일 하고. 반듯한 사회인으로서 모자람이 없다. 클리닉이 지루하지 않냐고 괜히 놀렸지만, 우리가 처음 만났던 순간의 황폐하던 존 왓슨과 비교하면 얼굴색이 다르다. 심지어 메리에게 청혼하던 날에도 저렇게 건강해 보이진 않았는데. 그때는 노쇠해 보이는 수염 탓도 있었겠지만. 내가 돌아온 효과 덕을 보면서 저렇게 혼자 이기적으로 생기있어도 되는 건가. 금단현상으로 발목을 떨어대는 나를 눈빛만으로 가만히 나무라며 바로잡는 우아한 단호함이라니. 성실하고 건강하게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존의 활력에 심기가 뒤틀린다. 존이 찾아만 와도 좋다고 꼬리를 흔들던 나는 머지않아 도무지 만족이라곤 모르는 배은망덕한 인간으로 돌아왔는데. 담배 말려.

"3일."

내 말에 존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3일?"

"일주일 말고 3일로 해. 몸에 니코틴을 제공하지 않은 지 이제 31시간이 지났어. 24시간이 더 지나면 내 몸에서 니코틴이 다 빠져나갈 거야. 거기에 48시간을 더 참으면 안정기에 접어들어. 그때가 되면 네가 말한 그거 줘…… 좋은 거."

존은 검지로 귓가를 긁적였다.

"그냥 말한 거지, 딱히 뭔가를 생각해둔 건 아닌데."

"상관없어."

가벼이 고개를 끄덕이는 존에게 나는 대가를 지불했다.

"그 ‘이상한 것’은 자신의 딸이 테러 사건에 희생된 게 불운이 아니라 예정된 사건이었음을 알리거나, 일단락된 테러 사건 자체를 재조명할 증거와 같겠어. 유서의 성격을 갖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 암시의 수준이라고 봐. 테러단체와의 연관을 나타내는 단서라든가. 의뢰인과 딸이 특별한 기억을 공유하는 소중한 물건이어서 의뢰인만이 알아볼 수 있는 뜻이 담겨 있다든가. 그 경우엔 무엇이든 될 수 있지. 인간은 어떤 물건에도 애착을 두잖아."

그러자 존이 고개를 갸웃 들며 나를 시험했다.

"애착? 예를 들어?"

내가 애착이란 단어를 사용해 감정적인 부분으로 접근했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었다. 기대에 부응해야겠지.

"나를 과소평가하는군, 존. 네가 쓰던 지팡이를 옷장에 보관했었던 걸 알아. 더는 쓸모가 없는 물건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는 이유도 알지. 누군가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랍시고 멋진 새 지팡이를 사다가 바꿔치기하고 낡은 지팡이는 버려버렸다고 말하면 네가 그 사람을 죽이려고 들 것도. 그리고 나는 지팡이 때문에 살인하려는 네 동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모든 사람이 하나쯤은 그런 물체를 가지고…… 있잖아……?"

존은 웃었다. 정확히는, 내 말을 듣는 동안 내 눈을 바라보면서 점점 퍼지는 웃음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었다. 나는 부끄러워졌다. 눈빛이 달콤해지고 부드러워지는 과정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까닭에, 목적을 알 수 없는 타인의 감정에 내 개인적인 욕심을 투영한 탓이다. 즐거워하는 건가, 하고. 다만 나는 영문 모르고도 꼬리를 흔들며 만족하는 개가 아니라 내게 유리한 상황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자 개수작을 부릴 줄 아는 인간으로 진화했다.

"왜 그렇게 웃어?"

존은 다문 입술을 길게 늘인 채 답하지 않았고, 그윽한 눈빛 덕에 나는 정말로 혼란스러워졌다. 나를 착각하게 만드는 거라면 응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벼르는 내가 마음먹기 직전에 바로잡아주는 교묘한 기술을 부렸다.

"지팡이를 옷장에 보관하는 건 어떻게 알았담."

"……너를 염탐하려고 네 옷장을 뒤진 건 아니야. 당시 나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고 네 옷장에 그게 들어있을지도 모른……."

"됐어. 나한테 의미 있는 물건이 뭔지 알아본 게 놀라워서 그랬어. 훌륭하다고. 네가 뭘 아는지 자랑하는 데에 써먹는 용도긴 해도 말이야. 잘하고 있어."

라고, 애착을 두는 물건을 파악할 정도로 관심 있는 유일한 타인이 본인이라는 점도 모르면서 존은 계속 나불댔다.

"어쨌든, 힌트를 주자면, 유서의 성격을 가지며 암시하는 수준의 물건은 맞아. 그치만 딱히 사연이 있거나 애착을 가지는 물건은 아니야. 대부분은 가지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지만, 의뢰인의 딸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분명히 죽음을 염두에 뒀다는 증거가 돼. 물론, 소수의 사람 눈에는 말이야. 직업까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지."

나는 지적했다.

"그 소수의 사람이란? 의뢰인이야? 아니면 너야?"

"의뢰인은 이상하게만 여기고 이해하지 못했어. 그게 평범한 반응이야. 그래서 나에게 메일을 보냈고. 나는…… 확실히 알아. 의뢰인의 딸은 자신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걸 알고 있었어."

런던으로 여행을 떠날 사람이 클럽에서 테러에 휘말려 사망할 미래운명을 예상하였으며 군인이었던 존이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을 남겨 언젠가 부모가 발견하도록 숨겼다면, 분명 지팡이 따위는 아니겠군. 나는 존의 시선을 만끽하며 눈을 감았다. 검붉은 시야 너머로 존이 날름 혀끝을 뺀 채 기다리는 현실을 인식했다. 내게 수수께끼를 내고는 내가 얼마나 잘 재주를 넘을지 기대하는 존을 어떻게 만족시킬지 궁리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은근슬쩍 노릴 수 있는 작은 욕심들도.

"알았다."

눈을 뜨자마자 존과 눈이 마주쳤다.

"뭔데?"

"하드드라이브."

존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뭐?"

"하드드라이브. 네 랩탑을 빌리고 느꼈던바, 포맷되거나, 부서지거나, 소각되거나, 인터넷으로 무얼 보고 다녔는지 복구할 수 없게 처리하는 게 죽기 전에 해야 할 아주 중요한 작업이겠더라고. 유품을 정리할 사람들이 고인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랄까."

짧은 숨 같은 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리는 존의 옆얼굴이 보기 좋았다. 웃음을 참으려고 굳힌 입 때문에 한층 더 동그래진 얼굴. 그의 내면에 파동을 일으킨 스스로가 자랑스러웠지만, 티 내지 않고 점잔을 떨기로 했다. 존은 다소 이를 갈 듯 중얼거리며 맞장구쳤다.

"아주 실용적인 지혜라는 데 동의해."

"고마워. 가르쳐 줘서."

"죽을 계획도 없는데 매일매일 해야 했던 작업인 줄은 나도 몰랐지만 말이야."

"나도 새로운 볼거리가 매일 업데이트될 줄은 몰랐어."

내 구두를 노려보고 있던 존이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리깔린 시선에 감추지 못하는 민망함이 역력했다. 보기 드물게 당황한 존을 보고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공감은커녕 고집스레 외면하고 있는 존의 얼굴을 손으로 붙잡아 억지로 마주하고 싶은 충동이었다. 괴롭히고 싶어서……? 내 성격으로 익히 아는 우월감과 정복욕이 낯선 얼굴을 하고 눈앞에 나타난 듯했다. 이게 뭐지?

"네 어깨 위에 달린 하드드라이브를 잘 간직하고 싶으면 그 지혜는 앞으로 입에 담지 않는 게 좋을 듯해, 셜록. 그 또한 내가 전하는 지혜야."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나에게 존은 정색했다. 도대체 뭐였지. 입술을 한번 꼭 말고 답했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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