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화해의 밤


그날 밤. 공원 구석에서 키스하다가 베라가서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꽁냥거리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 추운줄도 모르고 또 키스하고. 둘이 아주 꽁꽁 얼어가지고 집에 들어왔는데 김석진네 아버지가 대뜸 김태형을 향해, 자네 술 좀 마실 줄 아나? 하셨다. 김태형은 어른이 묻는 말에 거절할 수도 없어서 술.. 네 쪼금 합니다. 했더니 엄청 반가워하시며 방에서 곱게 비단같은걸로 겹겹이 포장된 술을 꺼내오시는 것이다. 상해 출장갔을 때 사온건데 되게 귀한 술이라고. 나중에 석진이 크면 아들하고 둘이 나눠마시려고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것 같으시다나.. 


덕분에 예고도 없이 갑자기 거실에 앉아 술을 한잔씩 하게 되었다. 아버님이 따라주시는 술. 쪼로록 흘러나올 때부터 뭔가 묘한 빛깔이었는데 확실히 한잔 마셔보니 도수도 상당히 센 편이고 향도 독특했다. 포장 벗긴 유리병에 금박으로 화려한 뱀이 그려져있어서 이거 혹시 뱀이라거나 그런걸로 담근술인가 싶기도 한데, 그냥 모르고 먹는게 나을 것 같아서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김석진네 아버지는 김석진을 너무 귀하게 키워서 혼자서도 척척 잘해내는 김태형이 다른 의미로 마음에 들었다. 뜬금없이 태형이도 우리 아들 했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본지 하루도 안된 남의 자식보고 왜 자기자식을 하라는건지. 옆에서 술 말고 쥬스 마시던 김석진은 듣다가 어이가 없어가지고 (그렇게나 술을 좋아하는 김석진인데 집에서는 조신한척 술 안 좋아한다고 부모님한테 개뻥을 쳤다) 아빠 취했어? 아빠 아들 여기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발끈하니까 아이구 그럼. 우리 석진이가 최고지. 부둥부둥 끌어안고 달래주신다. 김태형은 그런 것들이 되게 자기네 집 분위기랑 달라서 묘했다. 그렇다고 김태형의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건 절대 아니지만 표현의 방식이나 교육관이 집집마다 다르다는 건 참 신기했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 다른 성격과 성향을 가지는게 부모님의 영향도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물론 김석진은 부모님의 성품을 닮았지만 체질만은 달랐는데, 술을 좋아하고 어느정도 잘 마시기까지 하는 김석진과 달리 김석진의 부모님은 술 두잔만에 얼굴이 발갛게 되셔가지고 자정까지 수다만 떨다가 졸리다고 들어가셨다. 그래서 남은 술은 전부 김태형의 몫. 김석진도 한잔 마셔볼까 싶어서 부모님 방에 들어가신 후에 한잔 맛을 봤는데 너무 쓰고 독해서 혀를 내둘렀다. 김태형은 잘만 마시던데 이거 뭐지. 으 써. 이거 어떻게 먹었어? 도저히 못 마시겠다고 도로 내미니까 김태형이 받아서 한잔을 쭈욱 들이켰다. 맛있어? 하도 잘 마셔서 맛있냐고 물어봤는데 김태형이 정색했다. 내 혀는 사람 혀 아니냐? 


나도 써


엉? 그럼 마시지마. 독한데 이거 


이거 뚜껑이 안닫히더라고. 비싼거라며. 아깝잖아 마셔야지.


그래두..


천천히 마시면 돼


김태형이 스스로 마신다니까 김석진은 더이상 마시지말라고 말리기도 뭐했다. 그래서 티비 틀어놓고 옆에 앉아 티비보다가 김태형 입에 안주 골라서 넣어주고. 원래 취할때까지 잘 안 마시는 김태형은 그 이름도 모를 술이 얼마나 독했는지. 김석진이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사이 취기가 오를대로 올라 소파에 널부러져 있었다. 아니, 널부러진 거 아니고 그냥 머리가 좀 무거워서 누운건데 김석진이 호들갑 떨었다. 뭐야? 설마 너 취했어? 김석진이 놀란 얼굴로 옆에 와서 앉는데 김태형은 눈도 약간 풀리고 눈가가 다 붉어졌어도 자기 취한걸 인정 안했다. 누구보고오 치했다는거아. 인상을 빡 쓰면서 자기 존나 멀쩡하다고 하는데.. 저기 태형아. 지금 니 혀가 멀쩡하지 않은것 같은데..? 


김석진은 맨날 자기가 취했지 김태형이 취한걸 처음봐서 만취한 김태형이 귀여워 미칠것 같았다. 태형아 취했구나? 우리 태형이 취했어요? 놀리면서 볼을 꼬집었더니 김태형은 빤히 이쪽을 쳐다보더니 한숨을 푸욱. 


지쨔.. 쓰떼업시 기여어가지구..


귀여워? 누가?


누구게써..


나? 나 귀여워?


눈 똥그랗게 뜨고 설마 지금 나 귀엽다고 한거냐고 물어봤더니 지가 더 인상을 쓴다. 다 알면서 뭘 물어봐.


짜응나.. 김섯지인..


그러고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보다가 으어 하늘이 돈다아.. 빙글빙글.. 이러고 있으니 김석진은 진짜 웃겨죽을것 같았다. 덥썩 김태형의 가슴팍 위로 안기니까 김태형은 숨막혀서 으헉컥 하면서도 두팔로 김석진을 보듬었다. 김석진은 전혀 취하지도 않았고 술도 한모금 밖에 안 마셨는데 그냥 기분이 뭉클했다. 솔직히 아까전에 김태형이 다른 여자랑 키스하고 왔다고 해서 그때 좀 많이 슬펐는데 그래도 태형이랑 같이 있어서 좋은게 더 큰 것 같았다. 미워하기보다 그냥 용서해주고 싶었다. 어쨋든 태형이도 나 용서해준거니까. 용서에도 큰 마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화해해서 너무 다행이었고... 이러고 있으니까 그냥 아무것도 안해도 기분이 좋고 행복했다. 


김태형은 취해서 깊은 숨을 내쉬었고 그럴때마다 가슴이 들썩거렸다. 무거울법도 한데 그래도 비키라고는 안 한다. 오히려 자기 가슴을 베고 누워있는 김석진을 더듬더듬 손으로 만지더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그건 김태형이 맨정신일때 하는 스킨십이랑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뭔가 더 부드럽고 몽글한 느낌이라 기분이 간지러웠다.


태형아


.. 응..


사랑해


........


그말에 김태형은 잠이 올것같은 졸릴 눈을 겨우 뜨고 김석진을 쳐다보더니, 나도.. 입속으로 웅얼거렸다. 응? 뭐라구? 김석진이 다가가서 귀를 대니까 쑥스러운지 조금전보다 더 조그맣게 이야기했다. 


나도라고..


나 사랑한다고?


우웅


얼만큼?


그건.. 계사니 안대지


.......


너무 크니까..


.......


잇자나.. 김섯지인



내가.. 아프로 지쨔 자랄게...


지쨔 지쨔 나때무네 우는 일 업게 하고오 말도오 이쁘게 하고.. 아무리 화나도 다른여자 안 마나고.. 아라찌? 그니까 지쨔 너느은 후우.. 지짜 나 버리먼 안댄다.. 아라찌? 응? 아라찌. 김태형은 꼬인 혀로 몇번이나 알았냐고 확인받는데 김석진은 푸흐 웃다가 김태형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나 사랑한다고 하면. 


사랑은.. 당연히 하는거자나아..


그래도 듣고싶어


....


빨리 니입으로


... 사란해애..


한번 더


.. 웅.. 사란해..


김석진은 말없이 웃더니 잘 했다고 김태형 입술에 쪽 뽀뽀를 해줬다. 부모님 올라가신 2층에 아무도 없는거 확인하고 다시 한번 쪽. 김태형이 엄청 취하지만 않았으면 그 상태로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김태형은 정신이 헤롱헤롱해서 키스할 기운도 없었다. 김석진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뽀뽀 두번받고 거의 그상태로 기절하듯 잠들었다.

 


 



107. 정화의 아침


취해서 지난밤 어떻게 방까지 왔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김태형은 기절하듯 잠들어있었는데 어느순간 멀리서 음악소리가 들린다. 지저귀는 새 소리랑. 졸졸졸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 솨아아 파도가 치기도 하고. 뭔가 이상한 기분에 눈을 뜨는데 옆에 누워 같이 잤던 것 같은 김석진은 간데없고 혼자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리고 이 정체불명의 소리. 꿈결인줄 알았는데 지금도 계속해서 들리고 있었다. 김태형은 정신이 덜깬채로 상체를 세우고 앉아있다가 머리 몇번 슥슥 쓸어넘기고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몸이 가뿐했다. 어제 마실때는 되게 독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취했던 거에 비하면 숙취가 없었다. 비싼 술이라 그런가. 아니면 그 뱀이 나랑 상성이 잘 맞는건가. (이미 그 술은 김태형 머릿속에 뱀술로 기정사실화 되었다)


태형은 소리에 이끌리듯 거실로 내려왔다.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뿐인데 보고도 살짝 제눈을 의심했다. 저게 지금 뭐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거실 가운데 스피커를 두고 가족들이 둘러앉아 명상.. 을 하고 있었다. 뜬금없는 청량한 음악소리와 지저귀는 새 소리는 서라운드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것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아 우두커니 서있다가 인기척에 눈을 살짝 뜬 김석진이랑 눈이 마주쳤다. 약간 황당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김태형이 웃겨서 입술 꾹 깨물고 웃었는데 김태형은 그 웃는 얼굴 쳐다보더니 홀린듯이 옆에 와 앉았다. 그냥 김석진 웃는 눈웃음에 이끌리듯 자석처럼 끌려와버렸다. 옆에 앉은 김태형은 엉겁결에 자기도 김석진 따라서 명상을 했다. 정좌한 무릎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고 스피커에서 하라는대로 따라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세요 하면 눈치보면서 후우우 내쉬고.


심신을 정화시키는 명상시간이 끝나고나니 그게 아침 6시반이었다. 이 가족은 무슨 일요일 아침을 새벽6시부터 시작하고 그러는걸까.. 엉겁결에 따라나와서 명상하고 부모님이 차려주신 아침을 먹고 아침 먹고난 후에 콩이 산책을 시켜야된다고 해서 김석진 따라나가서 김석진이 키우는 강아지 콩이와 함께 그 넓은 공원을 한바퀴 뛰었다. 졸지에 새벽부터 명상하고 아침 조깅까지 하고 들어와 샤워했더니 진짜 졸려죽겠다. 이게 대체 일요일 아침부터 무슨 일인걸까. 김태형은 노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는데 어째 옆에서 김석진이 눈치를 보고있는거다. 왜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아니 엄마가 우리 독서모임할건데 너도 같이 할거냐고 물어봐서..


.......그건 또 뭐야


김태형은 당장 눈이 막 감겼지만 그래도 김석진네 부모님에게 잘 보이고 싶은 입장으로 안 한다고 할수가 있나. 피곤해 뒤질것 같은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나와서 책을 읽고, 읽다가 좀 졸았는데 책 읽고난 다음엔 갑자기 책 내용에 대해 토론을 하시는 것이다..? 다행히 책에서 다루는 내용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 있던터라 그 순간을 겨우 모면했는데 그 후에도 계속해서 강행군이었다. 마치 초등학생마냥 강제로 부모님 옆에서 cnn을 시청당했고. 마치 영어듣기 평가를 하는 것 같았고 세계정세를 논하다가 그러고나니 또 점심시간이 됐고, 점심 먹고 나서는 콩이 영양식 만드는걸 옆에서 영혼 나간채로 돕다가 부모님들 주말농장에 잠깐 나가보신다고해서 또 그거 따라갔다 왔다. 거기서 잡초 뽑고 거름주고. 김태형은 힘들어 죽을것 같은데 김석진은 그냥 늘 하는 것마냥 아무렇지 않은 표정인게 포인트였다.


고작 이집에 하루밖에 안 있었는데 김태형은 김석진같은 아들이 그냥 나오는게 아니구나, 괜히 저렇게 순수하게 자란게 아니구나 뼈저리게 깨달았다. 진짜 막 집인데도 절 같고 여사님이 막 주지스님같고 그랬다니까.. 저렇게 곱게 키운 김석진을 감히 탐한 죗값을 치루라는 건가. 만질 수 없고 손댈 수 없는 상황이여서 그런지 김태형은 김석진이 어제부터 이상하게 더 예뻐보이고 눈만 마주쳐도 꼴려서 죽을 것 같았다. 어제 화해하고 고작 키스밖에 못했다. 지금도 당장 키스하고 싶고 그보다 더한 것도 하고싶은데 현실은 허벅지를 찌르며 감히 손도 못잡고 참아야되다니. 김태형은 서울로 돌아가고 싶어가지고 눈물나는 걸 참았다. 


그렇게 새벽 여섯시부터 자발적 바른생활을 강요당한 김태형은 오후 늦게서야 김석진과 잠깐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근처 카페 가서 커피 마시고 온다고 나온건데, 운동화신고 나올 때까지만해도 점잖았던 김태형은 집에서 조금씩 멀어질수록 빠르게 걸었고 김석진의 손을 갑자기 꽉 움켜잡았다. 


김석진


응?


여기 택시 어디서 타?


김태형은 진짜 죽을 것 같았다. 지금 당장 김석진이랑 키스든 뭐든 해야겠다. 물론 김태형에게 닿고싶은 마음은 김석진도 똑같았고. 그래서 둘은 대로로 나와서 택시부터 잡았다. 택시 타자마자 사회적 체면이고 뭐고 기사님에게 아무데나 가까운 모텔로 가달라고. 초저녁도 안된 오후 세시부터 모텔 운운하는 남자애들 얼굴을 잠시 의아하게 쳐다보던 기사님. 이내 눈치껏 알아들으시고 너무 가까우면 좀 그렇지 않냐며 알아서 집에서 10분 넘게 떨어진 모텔촌에 내려주셨다. 감사합니다. 카드로 결제하고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손 잡고 진짜 뭐 급한일 있는 사람처럼 뛰어가는데 멀리서 누가 어? 어? 석진이형! 부른다. 잘못 들었나 싶은데 다시 한번, 석진이형! 그말에 둘은 고장난 기계처럼 멈췄다. 일동 차렷. 


둘이 무슨 죄지은 사람들처럼 식겁한 얼굴로 돌아보는데 아는척해오는 건 김석진의 고등학교 동창들이었다. 모른척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잘 아는 사이었기에 석진은 식은땀을 훔치고 웃었다. 어 얘들아. 오랜만이다... 그들은 서로 반갑게 인사한 뒤 근황에 대해 물었다. 형 서울에 있는거 아니었어? 왔는데 왜 연락 안했어, 왤케 얼굴보기 힘들어 동창 누구 걔도 서울에 있다는데 둘이 연락해? 등등. 김석진은 약간 어색하게 이러저러했다고 옆에 있는 태형의 눈치를 보며 대답을 하는데 이윽고 친구들의 시선이 옆에 서있는 김태형에게 꽂힌다. 


근데 옆에는 누구? 


아 여기는 내.. 대학친구.. 김태형


갑자기 서로 통성명을 하고 인사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결코 이순간 듣고싶지 않은 질문까지 도달해버리는데. 근데 어디가는 길이었어? 동창중에 한명이 물으니 둘다 꿀먹은 것처럼 대답을 못했다. 


너, 너네는?


우리 저기서 고기먹었지


애들이 석진과 태형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모텔가는 안쪽 번화가와 맞닿아있어 한블록만 건너가도 상가들이 즐비했다. 그쪽에 저렴하고 맛있어서 석진도 중고등학생때 친구들과 자주 갔던 대패삼겹살 집도 있었고. 꼭 이 거리에 모텔만 있는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머릿속이 하얗고 양심에 찔린다. 석진은 겨우 말을 돌려서 대답을 모면했는가 싶었는데, 야속하게도 다시 같은 질문이 돌아온다. 


근데 형은? 


형은 어디 가는 중이였냐고 재차 물어오는 바람에 김석진은 마른침 꼴깍 삼켰다. 급히 눈알만 굴리며 주위를 눈으로 스캔해보는데 불온한 동기 탓인지 자꾸 눈에는 여기저기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모텔간판만 눈에 들어오고 머릿속이 암전이다. 등뒤로 식은땀만 고이던 그 순간.


아 여기 유명한 쌍화차 집이 있다고 해가지고


김태형이 구원투수로 등판한다. 사실 김태형도 진짜 모텔 간판 밖에 안 보였는데 그중에서 가까스로 오래된 낡은 간판에 커-피 쌍-홧차 쓰여진거 찾은 거였다.  


형이 저기가 쌍화차 맛집이라고 했잖아. 그치?


와중에 남들 앞이라고 김석진을 '형'이라고 처음 듣는 호칭으로 부르는데. 일단 김석진은 얼떨떨하면서도 맞장구를 쳤다. 아 그치. 저기가 울 엄마 단골집인데. 


.. 저기?


어 너네 몰라? 저기 쌍화차가 그렇게 유명해


맞아. 서울에서도 먹으러오고


어. 그래서 태형이 먹으러왔잖아


아 진짜??


순진한 김석진의 친구들. 그말을 액면가 그대로 믿었다. 무려 서울까지 소문났다는 쌍화차 맛집이 궁금해가지고 '쌍화차가 뭐지?' 하다가 '그러면 우리도 같이 가볼까?' 하기에 이른다. 김석진과 김태형의 가까스로 웃는 얼굴에 먹구름이라도 낀양 어두워지는 걸 미처 그 친구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108. 미자네 다방

 

주위에 신축모텔들이 들어서기 훨씬 전에 이 곳에 터잡고 있던 미자네 다방은 한때 수많은 연인들의 다정한 데이트 장소였고 만남의 장소였지만 흐르는 시간만큼이나 이곳도 나이를 먹어버렸다. 벌써 25년째. 아직도 잊지않고 이곳을 찾아주는 단골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서서히 기억속에 잊혀지는 중이었다. 미자 사장님의 쪼글해진 얼굴만큼이나 가게 소파도 낡았고. 간판도 불이 반은 꺼져있어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문이 열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오늘도 문을 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손님이 없을 모양이라고, 미자 사장님 멍하니 소파에 앉아 생각했다. 부쩍 손님이 줄며 요즘은 하루에 손님이 한팀도 없는 날도 있었다. 요즘 사람들은 다들 아메리카노 이런걸 마시니까. 당연히 손님이 없을거라 생각하면서도 아침에 출근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쌍화차 재료를 준비하고 테이블이랑 바닥을 박박 문질러 닦고 소파의 먼지를 터는 일이었다. 


혼자 원두를 내려 마시고 혹시 다방에서 반찬 냄새가 날까봐 오늘도 점심은 집에서 싸온 김밥 한줄로 떼운다. 적막한 가게에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가 유일한 친구였다. 겨울이라 해도 빨리 저문다. 창밖에 서서히 켜지기 시작하는 거리의 간판들을 쳐다보며 오늘도 일찍 문을 닫고 들어가야하나 생각하던 중에 갑자기 입구에 매달린 종이 흔들렸다. 어쩌면 손님이 아닐수도 있는데, 그냥 고지서를 가지고 온 집배원이라거나 수다를 떨러온 옆가게 사장님일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미자 사장님의 눈이 그쪽으로 호다닥 향했고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들이 젊은 남자애들이라는 걸 보고는 잠깐 눈에 비쳤던 기대가 실망으로 변했다. 당연히 잘못 들어온거라고 생각했다. 


어? 아무도 없는데?


휑한 가게 안을 쳐다보며 친구들이 하는 말에 석진은 어 지금이 막 브레이크 타임이 끝난 시간이라 그렇다고 했다. 글쎄 여기가 줄 서서 먹는 곳이라니까. 김석진의 말에 김태형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끄덕.


당연히 문닫고 도로 나갈 줄 알았던 여섯명의 남자애들이 창가쪽 자리에 앉으니까 미자 사장님은 아직도 약간 의아하다. 손님들에게 손님이냐고 물어보는 건 또 실례일 것 같아서 메뉴판을 가져다줄까요? 물어보니 그중에 외국사람마냥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 손님이 아니요, 저희 쌍화차 여섯개 주세요. 보지도 않고 메뉴를 시켜버렸다.


얼굴에 분내날 것 같은 남자애들이 무슨 쌍화차를.. 미자 사장님 역시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받은 주문이니까 신중하게 그리고 공들여서 제일 신선한 달걀 여섯개를 골랐다. 토종 참깨, 밥, 잣, 대추.. 들어가는 재료 전부 직접 시골에서 재배하거나 아니면 국산재료를 썼고 달걀도 미자 사장님의 부모님이 직접 키운 토종닭이 낳은 달걀이었다. 시중의 달걀하고는 맛부터가 달랐다. 


그렇게 미자 사장님이 25년 쌓아온 내공을 발휘해서 끝내주는 쌍화차를 만들어내는 동안 석진과 그의 친구들은 맛집을 인증하기 위해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내가 볼땐 여기가 포토스팟이라며 낡은 간판 앞에 청테이프로 표시된 자리를 가리켰다. 그거 그냥 소파가 터졌는데 어떻게 할 돈이 없어가지고 되는대로 청테이프로 대충 뗌질해둔거였는데 오해가 대단하다. 포토스팟 표시해둔거라며 각자 한명씩 돌아가며 그자리에서 폼 잡고 사진을 찍었고 그중에는 얼결에 떠밀린 김석진과 김태형도 있었다. 이들은 정말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친구들이 너네가 여기 맛집이라며, 개유명한 맛집이라며?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그치. 여기 존나 유명하다니까. 5060의 핫플.


그렇게 살아온 인생 이십년, 이십일년만에 쌍화차라는 것을 처음 접한 요즘 젊은이들. 비린맛과 느끼함을 잡은 구수한 미자 사장님 비기의 쌍화차가 나름대로 그들의 입맛에 맞았다고 한다. 오 생각보다 맛있네? 괜찮네? 먹을만 하네? 노른자가 동그랗게 살아있는 쌍화차 사진도 예쁘게 찍고 차 마시는 모습도 서로 찍어주고. 그날따라 김석진은 입을 옷이 없어서 중딩때 입던 꽃무늬 니트 입었는데 그게 마치 복고인양 컨셉이 잘 맞아떨어져가지고 혼자 70년대 사람인 듯 나왔다. 김석진의 유치찬란한 옷도 한몫 거들었지만 물론 제일 빛나는 건 얼굴이다. 유독 얼굴이 빛나는 두사람 때문에 인스타 올리자마자 저기 어디냐고 주목받게 된 미자네 다방. 컨셉사진 찍으러 왔다가 미자 사장님의 정성스런 쌍화차 맛에 반해가지고 두번 오고 세번 오고. 친구랑 왔다가 부모님 데려오고 부모님이 본인 친구들과 또 오고. 알음알음 입소문 타고 석진과 그의 친구들이 다녀간지 두달만에 정말로 그지역 쌍화차 맛집이 되었다고 하니 제2의 전성기였다.


미자 사장님에게 제2의 전성기를 선물해 주었지만 쌍화차를 맛보고 나오는 석진과 태형의 뒷맛은 씁쓸하기만 할 뿐이다. 그들이 진짜 맛보고 싶었던 건 쌍화차가 아니라 화끈한 떡이었다나.. 






109. 지금 시간 오후5시


냅다 모텔로 뛰어들 생각으로 신나게 집을 나섰건만 애꿎은 쌍화차만 먹고 집으로 귀가한 두사람. 모텔 대실은 커녕 건물 밖에서 외관 구경만 하고 스쳐갔을 뿐이다. 심지어 김석진의 친구들은 김석진 닮아 눈치도 존나게 없었다. 지들이 남자친구도 아닌데 오랜만에 봐서 반갑다며 두사람을 집앞까지 데려다주기까지 했다. 굳이 여기까지 안와도 된다는데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었다고.. 정말이지 눈물나는 우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친구들에게 등떠밀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채 힘없이 귀가한 두사람. 집안에는 뭔가 맛있는 냄새가 난다. 주방에는 김석진의 부모님 두분이 함께 저녁준비를 하며 알콩달콩한데 김태형에게는 이곳이 어째 창살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하룻밤은 어찌저찌 김석진의 집에서 잤지만 이틀은 도저히 안되겠다. 김태형은 김석진과 달라서 그 투명한 방문을 견딜수가 없었다. 섹스는 고사하고 김석진이랑 맘놓고 끌어안지도 못하고 뽀뽀도 못하니까 눈앞에 두고도 만지지 못하는 이 마음은 이거 무슨 신종 고문이냐고. 김태형은 도저히 안될것 같아서 나 일단 집에 가는 척 한다고 했다. 집에 가는척하고 나가서 어디 모텔에 들어가있을테니까 너 이따가 저녁먹고 산책나간다 뻥치고 그쪽으로 와. 알았지? 김석진을 설득하는 김태형의 눈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농담아니고 진심으로 절박했다. 김석진과의 스킨십이 너무나 간절하다.


김태형은 가방 들고 내려와 부모님께 인사를 했다. 진짜 이대로 하루라도 더 있다가는 피말라 죽을 것 같아가지고 서울가는 척을 하며. 저 이만 가볼게요.. 기차를 예약해놔가지고 어쩌고. 그말에 여사님 눈이 휘둥그레 해진다. 아니 나는 오늘도 자고 가는 줄 알았는데? 우리가 태형이랑 같이 먹으려고 이것도 준비하고 저것도 준비했는데.. 글썽글썽. 김석진이랑 빼닮은 동그란 눈동자에 김태형은 살짝 양심의 가책을 받았지만 죄송해요 여사님. 저 진짜 여기까진가봐요.. 


부모님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루만 자고갈 수 있냐며 서운해하셨지만 김태형은 사실 이근방에 볼일있어서 왔다가 김석진이 생각나서 잠깐 들린거고 원래 하룻밤만 자고갈 생각이었다고. 그런식으로 변명하니까 석진의 부모님도 더이상 붙잡을 순 없었다. 이제 인사하고 배웅받으며 나가기만 하면 끝나는건데 갑자기 여사님이 앞치마를 벗고 인덕션 불을 내렸다. 


그럼 태형아. 우리가 역까지 태워다줄게


..네?


역까지 멀잖아. 태워다줄게


....... 


갑자기 충격발언을 하신다. 


이 정많은 부모님. 갑자기 태형이 간다니까 아쉽기도 하고 역까지 가는길도 머니까 친히 차로 태워다준다고 하셔가지고 김태형은 졸지에 가지도 않을 기차표를 끊었다. 심지어 주차장에 주차하고 이제 그만 가보셔도 된다는데 우리 석진이 친구 가는것까지 봐야지 정없게 어떻게 바로 가냐고 하셔가지고 같이 플랫폼까지 왔다. 이제 진짜 가셔도 괜찮다는데 좀있으면 기차 오니까 그것까지 기다려주신다고 해서.. 정말로 시간맞춰 기차가 들어왔고 얼떨결에 김태형은 기차까지 탔다. 기차 밖에 서있는 김석진의 표정이 오묘하다. 부모님 옆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잘가... 태형아... 


손까지 흔들어주는 김석진. 김태형은 진짜 이게 뭔 고생인가 싶었다. 내가 너때문에 수명이 준다. 줄어.


기차 떠날때까지 손흔들며 지켜보는 부모님 때문에 김태형은 억지로 웃으며 손흔들다가 기차 출발하자마자 재빨리 다음역에서 다시 되돌아오는 기차표를 결제. 역 한개 지나서 내려서 다시 기차를 타고 내려왔다. 진심 김석진이랑 연애하기 눈물나게 힘들었다.


그렇게 고된 기차 뺑뺑이 끝에 이제 남은건 우리의 편안한 데이트.. 이자 떡이라고 생각하며 역 근처 카페에 부모님 먼저 집에 보내고 혼자 대기타고 있다는 김석진을 만나러 갔는데.. 갔는데.... 문제는 여기서 김태형의 고생길이 끝나지 않았다는 거다. 카페 들어가자마자 한눈에 들어오는 김석진과.. 김석진 앞에 앉아있는 어디서 많이 본 남자애. 


태형이형. 오랜만이에요.




와....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전정국.

 

김태형은 그자리에 그냥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이쪽을 향해 사르르 접히는 눈웃음은 일순 천진해보였지만 김태형은 이미 저놈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잘 알고있었다. 분명 저거 웃으면서 속으로 나 욕하고 있을걸. 죽여버린다고 이 갈고있거나. 김태형은 정말 너무 이 연애가 고되 죽을 것 같았다. 산넘어 산넘어 또 산이다. 이럴바엔 우리 서울에 있을때가 행복했구나. 진짜 빨리 이 곳을 뜨던가 해야지. 김석진의 고향은 방해꾼들이 너무 많았다. 





진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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