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같은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친구 하나 없는 학교에서 반나절을 보내는 것도 끔찍했지만 서태웅과 여자가 있는 집에 온종일 머무는 건 더욱 끔찍했다. 정확히 말하면 여자와 서태웅은 이른 아침부터 일터와 농구코트로 떠나 저녁 먹을 때에야 돌아왔기에 실제로 얼굴을 부딪치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들이 떠나도 이 장소가 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비록 내 신상 명세서에는 여기 거주한다고 기록되어 있을지언정, 내 기억 속에서는 태어나서 10년도 넘게 살아왔던 죽은 부모와 함께하던 집이 우리 집이다.

나는 여자와 서태웅의 집에 불편하게 들어앉은 객식구였다. 내가 모르는 시간이 들이찬 집에 찬밥처럼 덩그러니 앉아있노라면 사방에서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비웃는 것처럼 모자의 단란함을 보여주는 물건들이 계속 눈에 들어와서 속이 상했다.

문틀에 희미하게 표시한 아이의 키가 자라는 빗금. 냉장고에 자석으로 붙인 귀가가 늦으니 냉장고에 넣어놓은 뭘 챙겨 먹으라는 메모. 2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벽에 걸린 서태웅의 농구선수로서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상장과 사진들. 하다못해 어렸던 서태웅이 썼을 법한, 관엽식물 화분에 박아넣은 삐뚤삐뚤한 글씨체로 쓴 [매일 물주기] 팻말조차 화를 돋웠다. 정상 가정을 지키려 무던히도 애쓰던 우리 엄마를 비웃기라도 하듯, 아버지가 없더라도 그들은 빈틈없이 행복해 보였다. 나의 작은 훼방쯤은 마치 처음부터 없던 일 같았다.

지금은 여자의 방으로 치워졌지만, 도축장에 끌려온 가축의 심정으로 이 집에 온 첫날, 거실에는 장식 액자를 놓아두는 고급스러운 콘솔이 있었다. 아기자기한 사진액자들 속에는 이 모자가 아버지와 찍은 사진도 있었으므로 나는 발작하듯이 여자의 눈앞에서 사진을 찢고 집어던졌다.


이딴 거나 보여주려고 날 데려왔어?! 이게 당신이 말하는 어른 노릇이야?!


예쁜 피겨린 장식까지 붙어있는 고급액자들이 산산조각이 나고 갈기갈기 찢기는 추억을 목도한 여자는 창백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고 서태웅은 내게 달려들기에 앞서 끔찍이도 제 어미를 챙겼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나는, 나는... 상간녀 주제에 창백한 낯의 여자가 화내지 않는 게 마치 일방적으로 핍박받는 드라마속 여주인공처럼 구는 것 같아서 더욱 재수 없게 여겨졌다. 징그러운 모자를 흘겨보고 사전에 내가 쓰기로 정해진 2층 방으로 올라가 문을 잠근 채 그다음 날까지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 이 집에서의 첫 기억이다. 그러니 좋을 리가 있나. 

확실한 건 그렇게 패악을 부린 이후에는 거실의 콘솔도 사라지고 아버지의 흔적을 이 집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거다. 내 눈에 닿지 않는 곳(가령, 여자의 방)에는 있을지 몰라도 구태여 냄새나는 쓰레기통 뚜껑을 여는 이가 없듯 나는 당장 눈앞에 아버지의 흔적이 없음에 만족스러웠다. 

뭐랄까, 그건 폭풍처럼 나를 덮치는 주변 상황에 휘둘리기만 하는 어린아이인 내가 최초로 해낸 주도적인 반항으로 그간의 스트레스가 풀리는 쾌감을 주는 것과 동시에 이 뻔뻔한 여자가 받아야 마땅한 벌을 내리는 것과 같은, 엄마의 앙갚음을 대리하는 것과 같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을 한다는 자긍심까지 느껴졌다. 권선징악은 언제나 옳은 만큼 죄책감은 없었다. 아버지를 쏙 빼닮은 서태웅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고통이었으니까.



그러나 작은 승리에 도취한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고 나는 우울했다. 이번 여름방학은 어디에도 안 가고 누구와도 어울릴 예정이 없다. 나는 이 집에 붙어있기 싫어 방학 숙제에 몰두하기로 했다. 매일 이른 아침 도서관에 가서 폐관 시간까지 머무르는 게 내 소박한 스케줄이었다. 재미없는 도서관에 출석한 지 일주일째. 나는 거리에서 서태웅을 빌미로 시비를 건 그 여자애를 만났다. 나를 알아보고 풍선껌을 크게 분다. 요란한 사복 차림에 화려하고 어색한 화장을 한 주위 여자애들이 마음에 안 든다는 눈초리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여기서 밀리면 진다고 느껴져서 일부러 고개를 높이 쳐들고 가슴을 크게 젖힌 채 걷는데 저 쪽에서 느닷없이 말을 붙였다.


애! 넌 방학에도 혼자 다녀?

무슨 상관이야?


발끈해서 대꾸하면서도 같이 다닐 친구 하나 없는 내 모습이 초라했다. 너 반에서 겉돌지? 지랄. 누구 때문인데. 눈에 힘을 주고 그래서? 태연한 척 받는데 우리랑 놀래? 묻는 말에 귀를 의심했다. 남자애들이랑 인원 맞춰 놀기로 했는데 한 명이 모자라. 어때? 마스카라를 발라 한껏 올라간 속눈썹을 깜빡이는 모양이 인형처럼 앙증맞으면서도 어린 얼굴에는 어색하게만 보였다. 그 애는 나와는 다른 세계의 인물이었다. 여느 때였다면 거절했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해도 나는 정말로 너무 외로웠다. 생각하기에 앞서 나는 먼저 대답했다. 좋아.



늦은 밤, 집에 돌아가자 두 모자가 거실에 앉아있다 용수철이 튀듯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왔다. 이렇게 늦게 온 적이 없어서 걱정했다. 어딜 다녀왔니? 묻는 여자의 옆에서 서태웅이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여자와 서태웅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친구랑 놀았어요. 대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연락 안 해서 죄송해요. 저 들어가서 씻을게요.

공손한 말투로 설명하고 2층 계단을 올라가는 내 모습을 둘은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내가 여느 때처럼 적대적으로 굴지 않은 것은 이미 밖에서 너무 많은 자극을 받아들이느라 잔뜩 흥분한 걸 기분 좋게 해소한 후 돌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놀자고 제안한 여자애들과 합류한 이후 평소 할 수 없었던 온갖 경험을 하느라 별천지에 다녀온 사람처럼 그 기억을 곰씹으면서 기분 좋은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일탈의 시작은 좀 우습긴 하지만 공중화장실에서 머리 손질을 하는 거였다. 낄래? 좋아. 대답하자 약속 장소로 가자던 이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너는 너무 촌스럽다며 하다못해 머리모양이라도 세련되게 바꿔주겠다면서 다짜고짜 상가 공중화장실로 끌고 갔던 것이다. 어깨에 끼면 겨드랑이에 딱 붙을 만큼 조그만 핸드백에서 놀랍게도 허리가 접히는 미니고데기가 튀어나왔다. 애는 왜 이런 걸 밖에 들고 다니는 거지? 공공장소에서 이런 식으로 전기를 써도 되는 건가? 의문을 품기도 전에 어느새 질끈 묶었던 머리가 풀려서 구불구불하게 감겨 있었다. 여자애들은 머리만 요란하게 다듬은 나를 앞에 두고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었다. 


머리만 만져놓으니까 어색해. 너 화장품 안 가지고 다녀? 어? 없는데.. 뭐? 기본이잖아? 좀 가지고 다녀. 


화장품을 들고 다니는 게 당연한 기본상식이고 교양인 것처럼 한심스럽다는 말투였다. 열어 보이는 파우치에서는 내가 이름도 생소한 온갖 화장품이 들어차서 끝도 없이 나왔다. 그리고 내게 벽에 붙어서서 눈 감으라고 하더니 화장을 해준 것이다.


입술을 우- 내밀어봐. 이 파운데이션은 애랑 안 어울려. 이 펄새도우는 한정판인데 특별히 해줄게. 같이 다니는 애가 꿀리는 건 싫으니까. 뭐, 본판은 나쁘지 않네. 


나 왜 애들한테 평가당하고 있지? 화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워 눈만 감도 있었더니 어느새 다 됐다는 소리가 들려 눈떴을 때는 그들과 비슷한 인상의 여자애가 거울 속에 있었다. 나는 솔직히 예쁘다고 여기기 전에 요란한 화장을 한 내 모습이 너무 어색해서 당황했지만 다른 여자애들과 군집처럼 비슷하게 보이는 모습이 그들과 같다고 인정받은 것 같아서 조금은 안도감을 느꼈다. 예전처럼 또래들 사이에 섞일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재는 누군데? 땜빵~ 낯선 이의 출연에 수군거리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 정도는 너그럽게 흘릴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이 분위기가 굉장히 신선하다고 여겨져 기분 좋았다. 지하에 있는 어두컴컴한 노래방은 어쩐지 습하게 느껴졌고 머리 위에서 돌아가는 사이키델릭 조명 속에 앉아있는 남자애들에게는 담배 냄새와 땀 냄새가 났다.

전학생인 내 귀에도 들어올 정도로 날라리가 가는 학교라고 평판이 나쁜 옆 남학교 애들이었다. 방학인데도 교복 차림이라서 이상하게 여겼는데 보충수업을 받는다고 했다. 머리를 뒤로 반들하게 넘기고 바닥에 질질 끌리도록 바지 기장을 늘여 다니는 걸 멋으로 알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부류의 애들이었다. 솔직히 낯설어서 겁나기도 했지만, 돈은 그 애들이 다 낸다고 하고 내가 노래를 부르면 호응해주고 여자애들 사이서도 아직 어색하여 쉬이 섞이지 못하는 나에게 너 예쁘다. 말해주기도 했기 때문에 싫지는 않았다. 내 맨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의심스러우면서도 못생겼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부른 후에는 피자집에 가서 피자보다 무한 제공되는 샐러드바의 음식을 더 배불리 먹었고 으슥한 골목길에서 어른들의 눈을 피해 담배를 태웠다. 그 애들은 좁은 골목에서도 가장 음침하고 비밀스러운 장소를 찾는데 명수였다. 분명 아직 담배를 피울 수 없는 연령일텐데, 무슨 재주로 구했담?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아무렇지도 않게 나눠 피우는 무리를 보고 놀랐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나를 보고 남자애 중 하나가 담뱃갑을 내밀었다. 필래? 권유에 무리 중에서 오오.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돛대 주는 건 사귀자는 건데! 나는 모르는 그 애들의 룰이 있는지 여자애들은 내 어깨를 때리며 호들갑을 떨었고 남자애들은 흥미진진한 기색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웃기만 했다. 나만 이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꺼림칙했지만, 저거 받으면 사귀는 거라는 귀띔이 마음에 걸려 담배를 받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런 건 어른이 되어서야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안 피워. 필 줄 몰라.


모두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삽시간에 공기가 얼어붙는 걸 느끼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들의 세상에서 그들과 다른 방식을 고집하는 건 배제될 구실이 되고도 충분했다. 


재 범생이야? 나도 몰라. 인원 맞추려고 적당히 데려왔어. 야, 코드가 맞는 애를 데려와야지. 분위기 어쩔 거야? 어떡해? 우리랑 놀라면 필 줄 알아야 해. 


겨우 다시 무리에 섞이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차갑고 견고한 벽이 느껴졌다. 원색적인 욕설이 아니어도 그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게 느껴져서 겁을 먹고 마음이 급해지는 내 앞에 다시 담배를 권유했던 남자애가 한 개비 남은 것을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안 사귀어도 되니까 한 모금만 빨아봐.


나는 떨면서 입술에 담배를 물었고 남자애가 익숙하게 라이터를 튕겨 불을 붙여주었다. 아직 한 모금도 들이키지 않았는데 코끝에 매캐한 냄새가 느껴졌다. 어쩔 줄 모르는 내 옆에서 그들이 부추겼다. 깊이 빨아. 눈을 질끈 감고 나는 필터를 빨아들였고 다음 순간 놀라서 담배를 떨구고 말았다. 컥, 어헉, 웩... 식도까지 연기가 잘못 넘어간 건지 목구멍이 저릿하고 매운맛이 느껴졌다. 몸을 흔들며 쿨럭대는 나를 보고 일행이 크게 웃었다. 어지러운 와중에도 나는 그들의 세계에 끼기 위한 통과의례를 무사히 치렀다는 걸 느끼고 숙인 고개 아래로 슬며시 미소 지었다. 밀려나는 것은 싫었다.

잘했다면서 그 남자애는 오토바이를 태워주겠다고 제안했다. 다른 여자애들도 환호성을 지르며 자연스럽게 남자애들의 팔짱을 끼고 걸었다. 나는 오토바이에는 문외한이었지만, 그들이 조르륵 길가에 세워놓은 오토바이가 길에서 흔히 보는 퀵서비스나 중국집 배달부가 이용하는 것보다는 훨씬 크고 고급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이크 몰아? 면허도 못 따는 나이 아니야? 너 진짜 귀엽다. 킬킬대는 말에 그냥 입 다물고 있으면 반이나 간다는 걸 알았다.

그 남자애의 허리를 붙잡거나 등에 얼굴을 묻는 행위에는 아무 감흥 없었지만 요란하게 배기관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바이크의 동체가 움직이던 진동은 지금까지 없던 감각으로 나를 달아오르게 했다. 도로를 누비는 쏜살같은 질주에 바람이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올올이 빗겨주는 시원한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순수한 희열이었다. 즐거워! 나는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던 해방감에 악을 쓰듯 웃어젖혔다. 

속력을 올릴수록 오토바이 위에서 보는 주위 풍경은 형체가 어그러져 긴 선을 죽 그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오토바이가 빨라질수록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할퀴며 눈을 뜨기도 힘들어 주위를 제대로 보기도 어려웠지만, 간혹 인도를 걷던 사람들이 던지는 욕설은 귀청을 찢고 들어왔다. 경적을 사납게 울리는 자동차도 있었지만, 이 해방감을 느끼는 바에 비하면 욕을 먹는 것쯤은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는데 신기하게 겁도 안 났다. 나쁜 짓을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바람 속에 안겨 악을 쓴 것뿐인데 거기에 비행 청소년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게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차가 따라붙는 것도 무시하고 달려 따돌렸을 때는 남자애도 큰 소리로 웃었다. 40여 분 정도 이어진 폭주 동안 나는 내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오토바이에서 내렸을 때는 다리가 떨렸지만, 기분이 고조되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다른 이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런 색다른 경험을 시켜 준 일동에게 나는 고마움을 느끼고 그들과 더욱 친밀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음엔 언제 놀래? 서로 묻는 이들 사이에서 나는 냉큼 말을 받았다. 난 내일이라도 괜찮아. 그들은 너무 성급하다고 했지만, 그 웃음의 온도로 이제 나를 무리에 완전히 끼워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뻤다.



나는 씻고 침대에 누운 채 내 가슴 위로 손을 올려보았다. 아직도 두근거리는 고동이 평소보다 템포가 빨라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아마도, 이 집에 와서 처음으로 순수하게 즐거워서 웃음 지었다. 이거야말로 사는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사이에 더욱 녹아들고 싶은 욕심에 나는 미용실에 찾아가 밝은 갈색으로 염색하고 굵은 펌을 한 후 다음 모임에 찾아갔다. 저들과 비슷한 겉모습이 된 걸 보고 여자애들은 감격한 눈치였다. **아! 성을 뚝 떼고 부르는 친밀한 호칭이 반가웠다. 우리랑 세트네! 잘 어울려. 예쁘다. 또래 여자애한테 우호적인 시선을 받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뭉쳐 다닐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생활 습관을 바꿔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화장품과 옷과 패션잡지를 사들이는 모든 과정을 친구들과 함께했다. 팬티가 보이기 일보 직전으로 짧은 치마를 입는 건 민망했지만 모두 같은 옷차림이었으므로 부끄러움보다 또래 친구와의 유대감이 더 중요했기에 입었다. 그래도 어색해서 허리춤에 셔츠를 묶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애들은 촌스럽다고 까댔다. 그런 말을 들어도 진한 화장과 짧은 치마, 길이가 제각각인 스타킹이나 양말을 걸치고서 한데 모여 스티커 사진을 찍는 건 즐거웠다. 친구들끼리 맞춰 입은 뜻깊은 유니폼 같았다. 하지만 그 모습은 어른들이 말하는 단정한 학생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간혹 우리끼리 큰 소리로 떠들고 있으면 어른들이 불쾌하고 한심스럽게 여기는 눈빛을 보내는 게 느껴졌다. 대부분은 쪽수가 많은 우리 쪽이 뭘 봐요? 노려보기만 해도 허둥지둥 갈 길 갔지만 짜증 나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겉모습만으로 날라리, 행실 나쁜 애들이라고 단정 짓다니.

원래 청춘영화 같은걸 보면 주인공은 언제나 좀 하자가 있고 외양도 남다르고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뇌를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린 그럴만한 시기에 있을 뿐인데 우스운 노릇이었다. 스타일 좀 바꾸었다고 이렇게 집에서 내놓은 애 취급을 받는 게 우스워서 나는 일부러 더욱 반듯하게 굴려 노력했다. 쓰레기가 눈에 띄면 줍고 들어간 가게에서는 꼭 직원에게 인사하고 친구들의 목소리가 커지면 남이 쳐다보기 전에 조금만 목소리를 낮추자고 주의를 시키었다. 친구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처신을 잘하면 다른 애들도 좋은 이미지를 얻을 테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편견을 깨기 어려운 것 같다. 갑자기 서태웅이 내 삶에 적극적으로 끼어들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집에 늦게 들어간 지 2주째. 문을 열어주는 건 서태웅뿐이었다.

너무 늦게 다니면 위험해. 제가 늦게 오는 게 좋지 않나요? 피차 얼굴 보기 어려운 사이 아닌가요?

되물음에 아무 말도 못 하는 여자를 보고 서태웅은 들어가 주무시라고, 앞으로 제가 기다렸다 대문을 열 테니 염려 마시라고 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애가 바람 들었다고 걱정하는 착한 척 수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여자를 보는 것 못지않게 매서운 서태웅의 눈초리 역시 견디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굽 높은 구두, 가슴골이 드러나는 짧은 상의, 짧은 치마, 두꺼운 화장, 파우치만으로도 꽉 차는 사이즈의 핸드백, 향수 냄새까지 전부 책잡힐 요소인 것처럼 못마땅한 눈으로 훑어보는 서태웅을 나도 네까짓 게 뭘 아냐는 마음으로 쏘아보았다. 

다른 애들도 다 이래. 거기 섞이려면 나도 변해야 한단 말이야. 간신히 사귄 친구란 말이야. 네가 뭘 알아. 네가 친구 하나 없는 내 심정을 어떻게 아냐고. 

문을 가로막고 선 서태웅의 겨드랑이 아래로 몸을 숙여 지나가는데 그가 물었다.


어디 다녀왔어.


웃긴다. 제가 웬 참견이람. 어처구니없었다. 나는 대꾸도 안 하고 2층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자 서태웅이 뒤따랐다. 마치 주인을 쫓는 애완동물 같았다.


무시하지 마.


짜증 나서 흘겨보는데 또 엉뚱한 말을 한다.


치마가 너무 짧아.


이미 반 정도 계단을 오른 나를 올려다보는 서태웅의 시야에서는 속옷이 적나라하게 보였나 보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제가 눈을 깔면 그만일 것을 사사건건 내 행동을 걸고넘어지는 서태웅을 이해할 수 없어서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네 가족은 엄마랑 너뿐이잖아. 내가 밖에서 뭘 하건 너랑은 상관없잖아.


서태웅은 대꾸 대신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설마 행동거지 좀 바뀌었다고 아빠나 오빠처럼 잔소리할 셈인가? 정다운 피붙이 간에 할 수 있는 염려를 서태웅이 내게 한다고? 기도 안 차서 무시하고 다시 계단을 오른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후닥닥 발소리와 함께 계단을 순식간에 오른 서태웅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얘기 좀 해.

아, 진짜 뭐 하자는 거야. 나 피곤해. 비켜.

말하기 전에는 안 비킬 거야.


어쭈. 이거 봐라. 비키라고 손으로 밀치는데도 서태웅은 완강했다. 내 힘으로는 밀려 나오는 기색조차 없어서 자존심이 상했다. 허. 그래, 뭐가 궁금한데? 어? 두손 두발 다 드니까 꼬치꼬치 캐묻는 꼴이 가관이다. 우리는 복도에 마주 서서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요즘 어딜 쏘다니는 거야.

여기저기 가. 

누구랑?

친구랑.

친구 하지 마.

뭐?

옆에 두지 마. 나쁜 애들이야.

네가 뭘 안다고 그래?

화장도 담배도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는데 멍청하게 지금 욕먹으면서 할 필요 없잖아. 위험하게 오토바이 같은 거 타지마.

고작 그것 때문에 나쁜 애라는 거니?

아니야. 네 지인이니까 말을 아끼는 거야.

네가 얼마나 편견에 찬 모범생인지 잘 알겠다.

누나는 전학 와서 아무것도 모르잖아.

누나라고 부르지 마! 내 친구들 욕하지도 말고!


우리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흐르다가 서태웅이 이 문제는 더 들먹이면 지뢰라고 여긴 건지 다른 화제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스트리트 농구장에 온 걸 봤어.


무리 지어 어울릴 때 드물게 비어있는 코트에서 담배를 태운 적 있는데 그걸 서태웅이 본 모양이다. 다른 여자애들이 농구 골대를 보고 태웅이가 여기에도 올까? 괜히 가슴 설레하는 모습을 우습다고 생각하며 지켜보던 기억밖에 없다. 나는 서태웅 때문에 농구라는 스포츠 자체가 싫었기 때문에 아예 코트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입구에 서 있었다. 그래서? 흥, 고개를 치켜드는 나에게 서태웅이 물었다.


그 남자는 누구야?


서태웅은 슬그머니 흡연하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입구에 혼자 선 내 옆을 지키던 남자애를 말하는 것 같았다. 날라리만 다닌다는 옆 학교 남자애. 보충수업을 받아야 할 정도로 멍청한 애. 노래방에서 내 노래를 듣고 호응해주고 너 예쁘다고 칭찬해 준 애. 담배를 가르쳐주고 오토바이를 태워주는 애. 여자애들은 틀림없이 그 앤 널 좋아한다고 재미있는 일이라도 지켜보듯 쑥덕거렸지만 연애 감정은 느끼지 못해서 모른 척 호의만 받는 애매한 관계의 남자애였다. 그러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 대답하면 그만이었다. 그냥 아는 애라고, 오토바이 태워줘서 좀 친해진 것뿐이라고.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내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무표정한 서태웅의 홍채가 크게 떨리며 부푸는 걸 지켜보는 게 참을 수 없이 짜릿하게 느껴졌다.


남자친구.


남자친구? 멍청히 되뇌는 이에게 어쩌면. 재빨리 덧붙이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후보.


생길지도 몰라. 사실 얼굴은 취향 아닌데 돈을 잘 쓰더라. 애가 착해. 뭐, 아니어도 상관없어. 나한테는 친절하니까. 

사실은 남자친구 후보는커녕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다 여긴 적도 없는데 거짓말이 술술 잘도 나왔다. 서태웅은 숨을 들이키고 내쉴때마다 잘난 낯짝이 시허애졌다가 파리해졌다가 하여간 이상쩍어서 우스움과 동시에 나로 하여금 서태웅이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좋아서 내 말투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너 궁금한 건 다 알려줬어, 됐지? 그러니까-


비키라는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굉장히 말랑하고 부드러운 것이 입술에 눌린다 싶더니 숨이 막혀와서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깨를 내리누르는 묵직한 감각과 아랫입술을 깨물어 당기는 아픈 감촉에 으, 신음이 튀어나오는 순간 입 안에 가득 차게 들어오는 미끈한 덩어리가 서태웅의 손과 혀라는 걸 인지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내게 키스하고 있었다. 서태웅과 내가 키스를 하다니?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내 몸을 끌어안은 서태웅이 허리를 바짝 당겨 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꼴사납게 나뒹굴 일은 없었다. 

하지만- 비상사태에 머리에 적색경보가 울리면서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음에도, 여긴 밀폐된 방이 아니라는 걸 상기하자 공포가 엄습했다. 혹여라도 여자가 이 모습을 본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겁이 나서 놈의 등짝을 마구 때리는데도 그는 한 걸음도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여자에게 들킬까 봐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하지 말라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데 서태웅 역시 집요하게 고개를 꺾으며 혀뿌리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의 머리가 수면 위로 오르내리듯이 놈의 입에 가로막혀 나는 하고픈 말이 자꾸 끊어지고 산소가 모자라 호흡이 자꾸 빨라지고 있었다.


너, 미쳤, 으읍- 잠까안, 싫, 흡, 하지, 서태...

 

서태웅은 처음에는 그저 난폭하게 혀를 세워 내 입안에 찔러 넣었다가 혀를 섞고 부닥치는 뱀 같은 움직임으로 본능적으로 요령을 터득한 것처럼 점점 진하고 음란한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툭툭 건드리기도 하고 어금니와 맞닿은 잇몸까지 찌르듯 훑어내리는 혀의 움직임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감각세포가 구강으로만 몰린 것처럼 나는 연하의 남자애에게 통째로 잡아먹히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섬찟함이 공포인지 쾌감인지 헛갈릴 정도로 우리는 오래도록 입 맞추고 있었다. 저항이 줄어들자 눈을 부릅뜨고 있던 서태웅이 즐기듯이 눈을 감는 모습이 더 소름 끼쳐서 있는 힘을 다해 놈의 머리채를 쥐어흔들었다. 힘이 들어간 건 손뿐만이 아니어서 다음 순간 서태웅은 입을 틀어막고 내게서 한 발짝 멀어졌다. 손을 떼자 부어있는 혀끝에서 깨물린 흔적으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행위였다. 마치 민달팽이가 입안을 훑고 간 것처럼 꺼림칙한 기분에 입술을 마구 문질러 닦는 나를 보는 서태웅의 눈빛도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미쳤어? 무슨 짓이야? 혹여라도 1층에서 자고 있을 여자를 깨울까 봐 목소리를 높이지도 못하고 대신 오만상을 찌푸리는 걸로 불쾌감을 표시하는 내게 놈이 태연하게 미친 제안을 했다.


남자친구가 필요하면 내가 그 노릇 할 테니 그딴 놈이랑 사귀지 마.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우리는 그럴 수가 없는 사이인데. 내게 죽도록 미움받는 네가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아? 어이없어서 말문이 막히는 내 손끝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서태웅이 내 손을 제 상의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경악하는데 봐. 말하는 서태웅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이제 다 나았어.


서태웅이 내 손목을 붙잡고 내 손바닥으로 제가 입은 티셔츠 옷깃을 밀어 올리게 들춘다. 얻어맞았던 붓기와 멍이 깨끗하게 빠진 흰 피부가 마치 크림처럼 부드러웠다. 내 손을 옮기는 서태웅의 움직임대로 아랫배부터 탄력 있는 살결을 따라간 손바닥이 서태웅의 왼쪽 가슴 위에 포개졌다. 손바닥 아래로 맥동하는 심장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피부 아래로도 어찌나 노골적으로 느껴지는지 민망해서 눈을 마주치지 않는 내게 서태웅이 찌푸린 얼굴을 가까이하며 말했다.


놀고 싶으면 나 가지고 놀아.


서태웅은 언제나 내 말에 따르겠다고 했지만 가지고 논다는 표현은 한결 특별하게 들렸다. 그 대단한 서태웅을 장난감 취급해도 된다는 본인의 허락은 꽤 황홀하게 여겨졌다. 만약 서태웅이 한마디만 덧붙이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너 갖고 노는 멍청한 짓 하지 말고.


나는 분노해서 핸드백으로 놈의 머리를 몇 번이나 힘껏 후려쳤다. 하필 금속 장식 버클에 눈을 맞은 건지 윽, 소리와 함께 눈을 싸쥐고 비틀대는 이를 걷어차니 옆으로 쿵 쓰러졌다. 나는 억지로 놈을 방문 옆으로 밀어낸 후 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서태웅이 두어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자 곧 인기척이 사라졌다.

멍청한 짓...서태웅은 지금의 나를 멍청이 취급하고 있었다. 그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고 억울했다. 누구 때문에 내가 이러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데! 알고 있는 주제에 감히 그딴 말을 하다니! 가만두지 않을 테다! 분해서 힘껏 깨문 입술은 서태웅이 멋대로 물고 빨던 바람에 평소보다 뜨거운 온도였고 퉁퉁 부어있었다. 매만지면 델 듯이 뜨거워서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그게 정말 내 온기인지 서태웅의 입술이 남긴 온기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비틀어진 형태일지언정 또래 친구와의 동질감은 청소년기에는 중요합니다. 우리 애는 착해요 친구가 문제지~ 레파토리는 제가 어릴 때도 있었어요w 때웅이가 왜 저러는지는 다음에 나옴.


농놀중인 닌자이자 백수이자 로드레이서인 오타쿠 (닉넴은 파는 장르가 자꾸 늘어나는데서 유래. 지금은 슬램덩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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