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이 늘어선 골목으로 배달 대행사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오토바이 한 대가 멈춰 선다. 오토바이에서 내린 석민이 헬멧을 벗는다. 머리가 땀에 절여졌다. 이마에 맺힌 땀을 팔로 대충 닦아냈다. 아직 6월 말인데도 더위가 기승이다. 배달용 박스에서 치킨 봉투를 꺼냈다. 위에 붙여진 영수증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우주빌 402호 가게 요청사항: 맛있게 해주세용 배달 요청사항: 안전운전 하세용 좀 짜증이 났다. 더위 탓도 있었고 용용 거리는 이 말투 탓도 있었다. 석민은 용용체만 보면 꼭 누가 생각났다. 기억 저편에 묻어뒀던 누군가가.


 402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문 너머로 분주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린다. 샤워가운을 급하게 여민 티가 나는, 올라간 눈꼬리가 어쩐지 낯익은 남자가 나왔다.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내기에는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용용체의 덕도 있을 터이다.

 

권순영?

 

 이름을 읊조린 건 딱히 알은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치킨 배달하러 왔다가 상기된 얼굴로 가운을 걸치고 있는 전 애인을 만난 일에 대한.

 

“어, 오랜만이네.”

 

 순영은 큰 동요 없이 차분했다. 석민의 얼굴을 보고 살짝 멈칫한 것 빼고는. 마치 석민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심심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순영은 겉보기에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젖은 머리나 붉게 홍조가 올라온 얼굴. 그런 건 질리도록 봤다. 아마 말투 때문이다. 익숙한 모습으로 뱉는 낯선 말투. 묘하게 선을 긋는 듯한 그런. 순영은 석민을 딱딱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헤어질 때조차. 사실 끝이 그리 지저분하지 않았더라도 옛 애인을 웃으며 반기는 게 이상한 일이다. 석민은 그걸 알면서도 괜히 심사가 비틀렸다. 한 가지 더. 샤워가운. 석민이 아는 순영은 집에서 샤워가운을 챙겨입는 사람이 아니었다. 젖은 몸에 팬티 바람으로 돌아다녔으면 돌아다녔지. 순영이 석민의 손에 들린 치킨 봉투를 가져간다.

 

“여자친구랑 있나 봐요.”

 

 일부러 그렇게 물었다. 신발장에 치수 다른 남성 신발만 두 켤레 있는걸 봤으면서도. 블랙 컨버스 하이. 순영의 취향이 아니다. 순영의 얼굴이 아주 약간 일그러졌다.

 

“어, 여자는 아니고. 남자친구.”

 

 굳이 정정할 만큼 중요한가 그게. 아 권순영 진짜… 

 

 한심하다.

 

“형은 아직도,”

 

 형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그러고 다니냐고.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대로 문이 쾅 닫혔다. 문이 닫히는 소리로 알 수 있었다. 권순영이 화났다. 석민이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 반응도 없길래 몇 번 더 눌렀다. 세 번 정도. 신경질적으로 문이 확 열렸다.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너 지금 내가 반갑냐?”

 

 초면인 권순영의 화난 목소리.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순영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숨을 한 번 고르고 전해야 할 말을 뱉었다. 

 

“배달료 추가금 천 원 줘야 하는데요.”

 

 한 손에 천 원 한 장을 팔랑거리며 오토바이로 돌아가는 길에 석민은 순영과의 연애에 대해 생각했다. 철없을 적이라 가능했던 일이었다. 후회도 없고 미련은 더더욱 없는. 그래도 따지자면 흑역사였다. 굳이 끄집어 내봐야 좋을 것 하나 없는 기억. 한 번 되살아난 기억을 다시 묻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스무 살. 권순영. 게이. 군대. 그에 관한 단어들이 머릿속 구석구석을 떠다닌다. 그리고 결국 생각이 도달한 곳은, 권순영이 남자랑 섹스했을까.

 

 

 스물, 1학년, 새내기. 온갖 풋풋한 수식어가 다 붙은 석민은 인생 첫 대학 축제에 한껏 들떠있었다. 남들보다 축제를 알차게 즐기고 싶다는 욕심이 마구 일었다. 멤버 이름도 다 모르는 걸그룹 무대를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찰 것 같지 않았다. 교내 카페에서 테이크아웃 한 아메리카노를 들고 캠퍼스를 걷던 중, 게시판에 붙은 포스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축제에 있을 가요제 참가자 모집 포스터. 어떤 직감이 섰다. 저거라면 주인공이 될 수 있겠다, 하는.

 

 석민은 노래에 특출났다. 한 떄는 가수를 꿈꾼 적도 있었다. 사생활 따위 없는 걸 보고 금방 접어버렸지만. 어쨌건 석민의 직감이 근거 없는 허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로 그건 석민을 위한 무대였다. 환호성부터 다른 참가자와 달랐다. 학교 익명 커뮤니티에 석민에 대한 글에 간간이 올라오기도 했다. sns에서도 석민의 영상이 떠돌았다. 캠퍼스 내에서 가끔 석민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뒤에서 저를 보고 수군거리는 상황들이 나쁘지 않았다. 

 

“저기, 축제에서 노래 부르신 분 맞죠?”

 

 이건 예외다. 누군가 저를 알아보는 건 좋아도 알은척은 곤란했다. 그러면 석민은 어김없이 고장이 났다. 적절한 반응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연예인도 뭣도 아닌 주제에 싸인을 해준다거나 사진을 찍어주겠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민망해하며 웃어넘기는 게 최선이었다. 얼굴에 불편한 티가 덕지덕지 묻은 상태로. 

 

 수강 신청에 처참히 실패하고 어쩔 수 없이 혼자 듣게 된 지루하디지루한 교양 강의 5분 전. 석민도 제게 말을 건 남자가 낯익었다. 매번 근처에 앉았던 사람이라. 축제 후에는 석민을 힐끔거리기도 했다. 아…, 네.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아래로 처박았다. 더는 말 걸지 말라는 뜻이었다. 누가 봐도. 

 

 한창 강의를 듣던 중 옆에서 불쑥 흰 종이를 쥔 손 하나가 들어왔다. 반듯이 접힌 종이를 펼쳤다. [혹시 오늘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점심 먹을래용? 제가 살게요!! 완전 팬이에용ㅜㅜ] 황당했다. 아까 곤란해하는 표정 못 봤나. 아니면 눈치가 드럽게 없는 건가. 남자 쪽으로 눈을 흘겼다. 아까 출석할 때 이름을 들었는데, 권순영이었던가. 거의 엎드린 상태로 팔로 옆얼굴을 가리고 있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귓바퀴가 빨갛다. 종이 구석에 작게 [그래요]라 쓰고 돌려주었다. 호기심이 솟아났다. 남자가 이렇게 말을 거는 건 처음이기도 했고. 원체 거절을 못 하는 성격 탓도 있었다. 

 

 

 둘은 그 뒤로도 종종 함께했다. 점심을 함께 먹었고. 어쩐 때는 둘이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으며, 심심하면 서로를 찾을 정도로 빠르게 가까워졌다. 

 

 하루는 영화를 보기로 했다. 계획 없이 간 탓에 그냥 시간에 맞춰 아무 영화도 봤었다. 제목도 기억 안 나는, 하루에 한두 편 상영하던 그런 영화였다. 줄거리는 보는 내내 이해하지도 못했다. 다만 기억나는 건, 여자주인공 없이 남자주인공만 두 명이었는데 둘 사이가 단순 우정이 아닌 것 같았던 그 묘한 기류. 대체 이게 무슨 내용인가 싶어서 혼자 인터넷에 검색을 해봤다. 퀴어영화랬다.

 

 석민은 게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동성애는 꺼려진다거나 존중한다거나 뭐라 말할 수도 없이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제 인생과 평생 관련 없을 테니 당연했다. 게이 영화였구나. 영화 장면들을 곱씹었다. 어쩐지, 그저 우정이라기엔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형도 알려나. 형은 게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권순영, 게이. 둘에 대해 동시에 생각하다 보니 순영의 행동들이 문득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처음에는 남자가 팬이라며 다가오는 게 신기했는데, 얼굴을 붉히며까지 밥을 산다고 한 게. 석민은 그제야 알았다. 그날 받은 쪽지의 저의를.

 

“형 혹시 나 좋아해요?”

 

 막 강의가 끝나 가방을 챙기면서 석민이 물었다. ‘오늘 점심 뭐 먹지?’ 같이 아주 일상적인 질문과 같은 투로, 아무렇지 않게 질문을 던졌다. …어? 어, 좋지. 순영의 동공이 방황한다. 이렇게 쉬운 걸 왜 지금까지 몰랐지. 아무래도 눈치 없던 건 저였던 것 같다. 

 

“그럼 우리 사귈래요?”

 

 학생들이 빠져나간 강의실에서 석민은 순영에게 고백했다. 충동성으로 범벅된 고백이었다. 진심이 결여된 고백에 무드가 있을 리 만무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순영과 게이에 대해 생각했었다. 남자와의 연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지만, 한 번쯤 겪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듯했다. 무엇보다 보통의 남들과 다른 연애라는 점에서 오는 낭만이 있었다. 

 

“그래.”

 

 예상외로 순영은 덤덤히 받아들였다. 눈에 띄는 당황이나 기쁨 없이. 오히려 나 좋아해요? 라는 질문보다도 더 차분하게. 심심한 고백과 따분한 답으로 둘의 일방향적 연애가 시작되었다. 

 

 

 배달하다 우연히 순영을 마주친 이후로 계속 그의 생각이 났다. 권순영이 아직 게이라니. 저와 연애할 때는 철 없던 시기라 해도, 여전히 그러고 있는 건 한심한 일이다. 잤을까. 블랙 컨버스 하이의 주인과. 권순영에게 샤워 가운을 입힌 그 남자와 권순영이 잤을까. 그럴 거다. 아마 분명 그랬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어쩐지 억울했다.

 

 연애를 시작한 둘은 겉보기에 크게 변함이 없었다. 연락하는 빈도가 잦아진 것도 아니고. 다만 붙어있는 시간이 늘었다. 밖에서 말고 순영의 자취방에서. 석민은 순영과의 스킨십을 좋아했다.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이 관계가 주는 흥분이 있었다. 키스하고 몸을 더듬고 서로의 것을 만져주면서도 절대 삽입은 하지 않았다. 넘어선 안 되는 선과 같은 느낌이었다. 순영도 하자고 보채지 않았다. 

 

 도망친 건 석민 자신이면서 끝까지 하지 못했다는 점이 억울했다. 이왕 미친 짓 할 거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볼걸. 미련이 없는 사이라고 했었나. 그게 딱 하나 아쉬움이다.

 

 전화벨이 울렸다. 저장되어있지 않은 번호였다. 새벽에 전화를 건 모르는 번호. 피싱일까. 그렇다기엔 이상하게 번호가 낯익었다. 전화를 받아야 하나 고민하던 와중에 부재중 알람을 남기고 끊어졌다. 통화기록을 살펴보니 몇 달 전 헤어진 전 여친이었다. 석민은 그런 게 제일 싫었다. 끝난 사이에 구질구질한 거. 고민 없이 번호를 차단했다.

 

 순영과는 달랐다. 이렇다 정의할 ‘끝’이 없었다. 석민은 순영과 연애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말만 애인이었지. 애초에 석민은 게이도 아니었고. 금기가 주는 자극이 소멸할 때쯤 석민은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순영도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사귀자는 말에 그래라고 대답할 때처럼 건조하고 따분하게‘그렇구나’ 할 뿐. 둘은 그렇게 흐지부지 끝났다. 

 

 그게 끝이라기에도 애매했다. 석민이 입대하고 여자친구와 이별했을 때, 찾았던 게 순영이었다. 가볍고 뒤탈 없을 사람. 전처럼 그랬다. 키스하고, 서로의 것을 만져주고. 어쩌다 흥분할 때면 순영의 허벅지를 모아 그 사이로 성기를 비비기도 했다. 절대 섹스는 하지 않았다. 

 

 일주일 전, 순영에게 배달했던 것과 같은 치킨을 포장했다. 우주빌 402호. 순영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 집이 순영의 집이 아니라 상대 남자의 집일 수도 있을 테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순영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확인해야 했다. 권순영이 그 남자와 잤는지.

 

 초인종을 눌렀다. 다행히도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순영이었다. 샤워가운을 입지도 않았고 신발장에 블랙 컨버스 하이도 없었다. 석민을 얼굴을 확인하고 당황한 채 그대로 굳어버린 순영을 밀고 막무가내로 들어갔다. 

 

“야 너 지금 뭐하냐?”

 

 태연하게 거실에 치킨 봉투를 내려놓는 석민의 팔을 잡아 돌렸다.

 

“이거 범죈 거 몰라?”

“형. 남자랑 잤어요?”

 

 한동안 정적이었다. 열이 끝까지 찼던 순영의 숨소리도 차분해졌다. 석민의 팔을 잡던 악력도 풀렸다.

 

“어. 잤어. 됐니?”

 

 그거 물어보겠다고 온 거야? 순영이 치킨 상자를 꺼낸다. 이와 온 김에 먹고 가. 순영과 석민은 그런 점이 닮았다. 마음이 물렁한 점. 그래서 석민은 순영과 점심을 먹었고 순영은 군인 신분인 석민을 만났다. 

 

“나랑도 자요.”

 

 스스로도 미친 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엔 당연히 순영도 거절할 거라 생각했다. 순영은 아무 말도 없었다. 가만히 석민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분노가 찬 눈도 아니었다.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석민은 이제 철없을 나이가 아니다. 호기심에 남자와 키스할 나이는 지났다고 스스로 생각 해왔다. 석민이 순영의 입에 입술을 맞추고 혀를 섞고 순영의 윗옷을 벗기는 동안 순영은 온순히 석민의 손길을 받았다. 이건 그냥 진짜로 미친 짓이다. 

 

 애무 후 삽입까지는 순간이었다. 지난 기간 동안 왜 하지 못했는지 우스울 정도였다. 순영은 억눌린 신음만 뱉을 뿐, 그만 하자라거나 별다른 말이 없었다. 지친 것 같아도 석민이 만져주면 금세 다시 달아올랐다. 

 

 콘돔을 세 개나 깠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나란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순영은 석민을 등지고 있어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잠들었는지 아님 화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너 그때 여자친구 생겼다고 한 날 언젠지 기억해?”

 

 석민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여자친구 생겼다고 했던 때. 기억 안 난다. 겨우 몇 개월 사귀고 헤어진 사람이라. 

 

“난 기억하거든. 칠월 십칠일. 너 때문에 한동안 여름이 싫었어. 너는 나를 뭐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너한테 진심이었거든. 석민아, 너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제일 최악이었어.”

 

 이석민이 싫다는 권순영. 그러면서도 섹스를 한 건. 

 

“형 나 좋아해요?”

 

 

 이석민은 미쳤다. 게이도 아니면서 남자와 잤다. 석민과 순영은 종종 만났고 그때마다 섹스했다. 석민이 원할 때마다 그랬다. 

 

[야 씨발놈아]

[자국 남기지 말라고 했잖아]

 

 문자를 확인한 석민이 순영의 집으로 향한다. 순영이 거울 앞에서 목 부근의 빨간 자국들을 살피고 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흠칫 놀라더니 석민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손에 집히는 물건들을 던져 댄다.

 

“미친 새끼야. 오늘 남친 만난다고 했잖아.”

“못 만나는 거죠, 뭐.”

 

 능청스레 웃었다. 순영이 다급하게 핸드폰 자판을 두드리는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길을 잃었다. 이 괴상한 관계 속에서. 

𝙎𝙚𝙤𝙠&𝙎𝙤𝙤𝙣 𝘾𝙤𝙡𝙡𝙖𝙗𝙤𝙧𝙖𝙩𝙞𝙤𝙣, 𝙇𝙖𝙨𝙩 𝘼𝙪𝙜𝙪𝙨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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