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년에 한 손에 다 꼽을 수 있을정도로 평소에 꿈을 잘 꾸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낮잠을 자면서 꿈을 꿨는데 깨고 나서 일어나니 기분이 몹시 오묘해서 이렇게 글로 남긴다.


꿈에서는 오늘이 내 생일 전날이었다. 생일 기념으로 내 친구들이 날 위해서 공포 VR 게임을 제작해 선물해줘서 그걸 플레이하는데, 이게 오류로 로그아웃이 안되어서 중도포기가 안됐다. 탈출하기 위해서는 이 게임을 클리어 해야만 했다. 긴 복도에 문이 없이 뚫려있는 방이 여러개 있었고, 이 방 저 방 왔다갔다 하면서 단서를 찾고 해결하는 게임이었는데, 내가 단서도 잘 못찾아서 오래 걸리고 시간이 오래걸리니 방의 난이도가 높아져버리고 그래서 한참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방에서 바다 속을 헤엄치다가 토네이도에 휩쓸려서 죽을 뻔 했는데 그 순간 누군가 날 붙잡고 미션을 대신 깨준 후 복도로 나왔다.


그 사람은 자기를 유리라고 소개했다. 밝은 갈색머리에 파란눈이었고, 아마도 어깨길이정도 되는 길이에 파마끼가 있는 머리를 묶고 있어서 걸을때마다 묶인 머리가 촐랑촐랑 움직이는 친구였는데. 아무튼 그 애가 나에게 말하길, 나는 네가 공포게임을 깨도록 만들어진 조력자고 지금 이 곳은 첫번째 테마인데 여기서 세 번 죽으면 다음 테마로 넘어가게되고 그 이야기는 훨씬 어려우니까, 내가 있는 이 테마에서 끝내야한다고 그애가 내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


그 이후로는 그 애가 미션을 다 척척 깨줬다. 얻기는 했지만 쓰는법을 모르는 도구들을 손에 잔뜩 쥐고 있으니 순서에 맞게 척척 해결해주더라. 그리고 모든 방의 미스테리를 해결한 후, 유리는 나한테 잘가라고 인사를 해줬고, 나는 현실세계로 나올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때만 로그아웃이 안됐던거고, 내가 깨어난 이후로 다른 사람들이 테스트해봤지만 정상적으로 잘 작동됐었다. 그렇게 다음날 내 생일이 되었다. 나는 생일날 다시 게임으로 들어갔다. 또 첫번째 테마였는데, 이미 엔딩을 한번 봤던건데도 불구하고 막상 스스로 하려니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포기하고 방을 나와 유리를 찾아다녔다. 방을 조금 돌아다니다 유리를 발견해서 그 방으로 들어가 "나 이거 너무 어려워. 도와줘" 라고 말했다.


유리는 방에 앉아서 자수같은걸 하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오든 옆에서 말을 걸든 쳐다보지도 않고 하던걸 계속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쪼그려 앉아서 유리가 자수 두는 것을 구경했다. 다른 방을 돌아다니면서 귀신 얼굴을 마주치기도 싫고 또 어차피 모르겠어서. 대화도 없이 한참을 그러고 있었더니 유리가 한숨을 쉬었고 일어나서 내 손을 잡고 다시 끌고 갔다.


어제는 보지 못했던 방이었다. 미술하는 사람의 방인것처럼 물감같은게 책상위에 널부러져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색은 흰색, 분홍색, 노란색, 검은색이었다. 게임이 나에게 나레이션처럼 머릿속으로 이게 유리의 상징이라고 알려줬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햇빛이 들어오고 식물이 가득한 테라스가 있었고 유리는 나를 그 옆에 있는 긴 나무 테이블로 데려가서 앉았다.


유리가 그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는 종이들을 팔랑팔랑 넘기면서 "니 친구들이 생일 축하한대. 안나가?" 라고 말하더라. 종이를 바라보니 게임 밖에 존재하는 내 친구들이 생일 축하한다고 말하는게 그 위로 저절로 써졌다. 그 현상이 신기해서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 종이를 들고있는 유리의 얼굴이 지금까지 봤던 다른 귀신들과 비슷하게 잠깐 변했다가 돌아오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다가 다시 돌아온 유리의 파란 눈동자랑 마주했고, "너 생각나서 왔어. 보고싶어서." 라고 입을 열었다. 유리는 그 말을 듣더니 찌그러지듯이 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게임에서 팅겨져 나왔고, 꿈에서 깼다.


자고 일어나니 팔다리가 저릿저릿 했다. 게임을 하다가 스르르 잠들었고, 게임 화면이 켜져있는 상태로 핸드폰이 방치되어 배터리가 5% 남았다는 알림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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