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히스토리투데이HistoryToday 2013년 6월호에 기고한 마틴 퓨의 글을 옮긴 것이다.



1913년 6월 에밀리 와일딩 데이비슨이 엡솜 더비 경마대회에서 극적으로 사망한 후 100년이 지난 지금, 이 사건의 몇몇 측면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데이비슨은 자살을 의도했는가? 보다 폭넓은 참정권 캠페인 계획의 일환으로 행동했던 것인가? 데이비슨의 극적인 개입이 참정권 대의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1906년까지 데이비슨은 교사이자 가정교사로 일했지만, 여성참정권 부여를 놓고 정치인들이 계속해서 발뺌하는 작태에 자극을 받아 여성사회정치연맹(WSPU)의 전투적 전술을 채택했다. 빠른 속도로 확대된 참정권 캠페인은 용기와 기지를 가진 어느 여성에게나 드넓은 활동의 장을 마련해주었지만, 데이비슨은 단독으로 활동한 서프러제트였던 것으로 보인다. 데이비슨은 잘 알려진 여러 활동에 참여했지만 1909년 이후부터는 점차 자신의 재량에 따라 단독으로 행동했다. 이는 서프러제트들의 기습공격을 저지하려고 했던 경찰의 움직임을 감안할 때 이치에 맞는 행동이었다. 계획을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단점도 있었다.

당시 데이비슨에게는 정기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저널리즘 활동으로 간간이 수입을 얻고 친척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무엇보다 여성사회정치연맹이 더 많은 자금을 지원받으면서 1909년에는 75명, 1911년까지 110명을 고용했음에도 데이비슨은 연맹에 고용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와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는 매우 독재적인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했고, 심지어 연맹 지부에서도 본부가 승인한 전략을 따르지 않는 일원은 즉각 해고되었다. 팽크허스트 모녀는 운동 방법보다는 조직의 일원들을 관리하는 것이 더욱 수월하다고 판단했다. 예를 들어, 널리 알려진 서프러제트의 옥중 단식은 1909년 7월 마리온 월리스-던롭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것이었고, 이후 지도부가 승인한 전술이었다. 1911년 인구조사 보이코트도, 팽크허스트 모녀는 처음에 불승인했으나 점차 많은 서프러제트들이 참여하기를 희망했기에 결국 승낙한 것이었다. 여성사회정치연맹은 수차례 계속된 분열과 방출을 겪었다. 1907년 샬롯 데스파르, 1912년 페식-로렌스 부부, 1913년 실비아 팽크허스트가 잘 알려진 사례이다. 결국 팽크허스트 모녀의 관점에서 데이비슨 같은 일원은 골칫거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데이비슨이 공식적인 조직으로부터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데이비슨의 동기를 설명하는 것이 더욱 까다로워진다. 서프러제트였던 매리 리처드슨은 1953년 회고록 “Laugh a Defiance”에서 자신이 더비 경마대회에서 해당 사건을 목도한 목격자이자 데이비슨의 친한 동료였다고 주장하며, “데이비슨은 죽음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고 썼다. 하지만 이제는 데이비슨이 엡솜에 혼자 참석했으며 리처드슨은 그 곳에 있지 않았으며 단지 지루한 회고록에 양념을 가미하기 위해 그런 주장을 했을 거라는 것이 중론이다.

따라서 데이비슨이 자살을 의도했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는 없었다. 증거가 불충분했다. 1911년에 유서를 작성하기로 한 데이비슨의 결정을 두고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하기란 무리이다. 물론 할로웨이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당시 두 번이나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된) 철책 너머에 몸을 던진 적이 있기는 했고, 1912년 6월에 ‘비극이 필요하다’고 교도소 의사에게 말했던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당시 의사들은 서프러제트는 물론이고 여성이 히스테리와 자살 충동을 곧잘 경험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똑똑하고 영리했던 데이비슨은 1913년까지 전투적인 서프러제트들과 내무장관 레지널드 맥케나가 서로 여론을 잡기 위해 분전해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정부 당국은 옥중의 서프러제트가 사망에 이르지 않고도 투옥과 강제 음식 주입을 통해 참정권 운동을 진압하고자 했다. 그래서 제정된 것이 건강이 좋지 않은 재소자를 석방했다가 재수감하는 “고양이와 쥐”법이었다. 여성사회정치연맹은 당시 수감돼 있던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사망 직전에 이르렀다는 인식을 퍼트리는 선전 전략으로 정부에 맞섰다. 데이비슨은 심각한 부상이 따르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맥케나의 전략에 저항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해서 데이비슨이 자살을 의도했다는 말은 아니다. 데이비슨은 엡솜 경마대회에서 돌아오기 위해 왕복 티켓을 구입했던 것이다.

데이비슨이 사망한 후 여성사회정치연맹의 지도부는 예상치 못했던 전개에 직면했고, 크리스타벨이 파리로 망명 중이었으며 에멀린이 감옥을 드나들던 때였기 때문에 즉흥적인 전략을 짜야 했다. 그레이스 로는 6월 14일에 빅토리아에서 킹스크로스까지 이어지는 대대적인 장례 행렬을 조직했고, 블룸즈버리에 있는 성조지성공회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 서프러제트 행사마다 훼방을 놓던 청년들마저 행렬 선두에서 대형 십자가를 짊어진 서프러제트들에 기가 눌렸던 것으로 보인다. 하이드파크에서 장례 행렬이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자를 벗었다.

하지만 행렬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길어졌고 여론도 갈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에밀리 데이비슨은 ‘더비 데이’의 유일한 희생자가 아니었다. 또 다른 서프러제트였던 모드 안클리프-세네트는 당시 군중이 “왕의 말!”이라고 외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동물에 대한 영국인들의 감성을 과장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불행한 왕의 말 ‘앤머’는 부상을 입어 안락사를 당해야 했다. 데이비슨이 앤머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데이비슨이 경주에 끼어든 것이 왕을 향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앤머가 경주에서 이기지 못했을지라도, 왕의 말에 돈을 걸었던 이들은 서프러제트에게 실망감을 전가할 생각까지 했었다.

1912년부터 1914년 사이에 서프러제트들에 대한 대중의 적대감을 감안하면 이와 같이 엇갈린 반응은 무리는 아니었다. 심지어 노동당 지도부와 헬레나 스완윅과 매리 스톡스를 비롯해 전투적이지 않은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도 서프러제트의 순교자적 행위를 비난했고, 이렇게 작위적이고 부정직한 정책을 내세운 여성은 그 폭력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데일리 스케치” 지는 데이비슨의 용기를 인정하면서도 사회가 이 일종의 테러리즘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더비 데이’ 이후 여성사회정치연맹을 억누르기 위한 정책을 여전히 고수했다. 연맹의 본부에 들이닥치는가 하면 전화를 도청하고 우편물을 가로채거나 연맹이 발간한 신문을 압수했다. 1914년에는 여성사회정치연맹의 재정 후원자들을 기소하려고도 했었다. 실제로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데이비슨의 장례식에 가던 중에 다시 체포당하기도 했다. 전투적 전술이 여론을 갈리게 했다는 이유로 정치인들이 반자유주의적인 방법을 쓰고도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서프러제트가 대중 앞에 나서기만 하면 공격을 일삼는 군중의 태도에서도 볼 수 있다. 심지어 경찰이 서프러제트를 보호해야 했을 정도로 그 공격의 정도는 심했다.

이와 같은 공식 기록은 서프러제트들이 서로 교환한 사적 서신에 의해서도 입증되었다. 몇몇 서프러제트들은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에게 조직이 와해되고 있다며 불만을 전했고 팽크허스트가 파리로 망명하던 중에 능력있는 일원들은 활동을 그만두기도 했다. 크리스타벨과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데이비슨의 비극적인 죽음을 기회로 삼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데이비슨의 영웅적인 행동은 단독으로 수행되어 통제되지 않은 행동의 위험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 없었고, 일년 뒤 전쟁이 발발하자 전략 방향을 전환해야겠다는 모녀의 결심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전체 원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서프러제트 #영국여성참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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