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도와줬어요."


관용어구 같은 느낌이지만 거짓을 말하진 않았다. 류카는 자신이 신이라고 했고, 나는 그에게 도움을 받았으니까. 라프레티는 이해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음, 나도 이렇게만 들으면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을 것이다. 뭔 소리야 똑바로 말해! 라고 하면서.


"머리핀이 마법 물품이더라구요. 합쳐서 던지니까 폭발했어요."


펑 소리가 나면서 류카가 나왔으니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 얼굴에서 거짓을 읽지 못한 라프레티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기를 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역시 드래곤 레어에서 나온 물건은 뭔가 특별한 게 있나봐요."


더이상 이 주제에 말하기 싫어한다는 걸 눈치 챘는지 라프레티는 한숨을 쉬고 말 없이 팔을 벌렸다. 나는 라프레티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라프레티의 심장 고동 소리가 듣기 좋았다. 나는 라프레티의 등을 쓸어내리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라피가 걱정할 일 같은 건 없었어요."
"그런 말 하면 더 불안해요 언니."
"어라 진짠데. 저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가 아니예요."


나를 걱정해주는 라프레티가 사랑스러워서 볼에 입을 맞추자 라프레티가 곧바로 입을 맞춰왔다. 짧은 키스를 한 뒤 라프레티가 말했다.


"제가 방심했어요. 언니를 지켰어야 했는데."
"옛날부터 라피를 지킨 건 저였어요."
"그 때와 지금은 달라요 언니."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라프레티가 귀여워서 웃어버렸다. 그러고는 결심했다. 이번에는 해피엔딩으로 그녀를 이끌고 싶다. 라프레티의 해피엔딩에 내가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 연회의 홀에서 음악이 끝났다가 다시 새로운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라프레티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나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춤 출래요?"
"저 춤 배운 적 없어요."
"아무도 안 보는데 어때요. 뱅글뱅글 돌기만 해도 좋아요."


나는 라프레티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일 지도 모르는 황궁 연회장에 왔으니 단 둘이 있을 때 만큼은 즐겨도 되겠지.


*


어렴풋이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조명을 최소로 한 방에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호화로운 의자의 팔걸이를 일이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고운 손이 내리쳤다. 황태자, 루이의 곁에 서서 시중을 들던 메이드가 몸을 움츠렸다. 루이가 혀를 차고는 나가라는 손짓을 하자 허리를 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방에서 나갔다.


"기억이 나질 않아."


두 여자를 불렀다. 그 뒤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이 도려내진 것처럼 기억이 나질 않고 남은 것은 향이 피워지고 남은 재와 온 몸에 남은 크고 작은 멍 뿐이다. 기사들에게 책문을 해 보아도 기사들의 기억도 날아간 모양이었다.


"그 계집년들."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그 여자들이 자신에게 해코지를 한 것이 분명하다고 루이는 생각했다. 단지 단서는 없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책망을 하기엔 자신이 한 일도 떳떳하지 못하다는 걸 알 정도의 머리는 있었다. 어찌됐던 한 쪽은 용사였고 한 쪽은 전직 신녀였으니까. 하지만 한갓 평민 여자들이 자신의 비가 되라는 제안을 거절한 것이 마땅치 않았다.

샤를로트인가. 자신과 어머니를 닮지 않은 동생이 황태자 자리를 노리는 것은 알고 있었다. 샤를로트가 마법을 꽤나 잘 쓰는 것도 알고있다. 하지만 황제는 무력으로만 되는 케이스는 극히 드물다. 지금까지 샤를로트에게는 뒷배가 없었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용사를 자기 편으로 끌어 들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평민이건 뭐건 인간의 힘을 초월한 마왕을 헤치운 용사다. 정적이 됐다면 어떠한 야비한 수를 써서라도, 죽여야만 했다.


"샤를로트, 그 년까지 셋 다 모두 죽여주마."


셋이 붙어 다닌다면 셋 다 제거하면 될 일이다. 욕심에 미친 사내는 그렇게 생각했다. 방의 한 가운데에 놓여진 화병, 그 안의 매일 바뀌는 싱싱한 꽃들 사이에서 새끼 손톱만 한 분홍색 꽃이 하나 생겨났다 사라졌다는 것은 그 방 안의 모두가 몰랐다.


*


"흐음, 루이 쪽도 모르는 건가."


시골 축제의 어린 애들 마냥 꺄르르 웃으며 양 손을 잡고 한바탕 뱅글뱅글 돌은 마리아 언니가 잠시 마실 것을 가지러 간 사이에 샤를로트에게서 알아낸 루이의 방에 도청용으로 심어 놓은 마법을 수거했는데 저 쪽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루이도 학교에서 나름 좋은 성적을 받은 수재였고, 마물이면 모를까 인간이니 신력으로는 가벼운 상처도 입히지 못한다.


[신이 도와줬어요.]
"신, 말이지."


보통은 우연이나 기적이 일어난 걸 그런 식으로 표현한다고는 하지만, 조금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그게 뭔지를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마리아 언니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더 답답한 것이다.


'일단은 둘 다 무사하니 됐나.'


루이의 수면향에 당했을 때 독이던 약물이던 내성이 듣지 않아 당황했었다. 동방에서 수입한 향이라고 하니 그 동안에 쌓아왔던 내성은 소용이 없던 모양이었다. 아마 언니는 신력을 운용시켜 멀쩡했던 것이겠지. 나도 빠르게 방어막을 쳤다면 괜찮았을텐데 방심했다. 그래도 아는 얼굴이라고 루이를 너무 얕잡아봤다.


'요즘 좀 게을리 하긴 했지.'


이번에는 내가 언니를 지키겠다고 다짐했는데 또 보호 받았다. 5년 전과 다를 게 없으면 강해진 이유도 없다. 저 멀리서 고급 글래스에 든 음료 두 잔을 들고 신녀 특유의 단정한 걸음 걸이로 걸어오는 마리아 언니가 보였다. 흰색의 엠파이어 드레스를 입은 언니를 볼 때마다 청혼의 말이 목젖까지 나왔다. 프러포즈는 좀 더 근사한 장소에서 언니에게는 엘프의 드레스를 입히고 드워프의 반지로 하는 게 나을 것이다.


"라피, 피곤해요?"
"결… 아니요. 언니가 예뻐서 잠시."
"후후, 라피가 더 예뻐요."


음료의 겉면에서 신력의 빛이 살짝 빛났다가 사라졌다. 언니가 간단하게 약물 검사를 한 것 같았다. 언니가 나에게 잔을 하나 내밀고 내가 잔을 받아들자 옆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황궁 연회에도 와보고."
"언니도 스물 셋 밖에 안 되셨잖아요."
"후후, 그래요."


잔에 코를 박고 음료의 향을 맡았다. 알코올의 향이 전혀 않는 걸로 봐서 포도 주스인 모양이었다. 향만 그런가 싶어 한 모금 마셔보니 역시 주스였다. 어중이 떠중이들에게 언니가 취한 모습을 보이는 건 나도 싫으니 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주스를 받아 왔을 언니를 상상했다.


'귀여워.'


나는 마왕도 이겨봤고, 드래곤도 이겨봤지만 언니는 평생 못 이길 것 같다. 반한 사람이 지는 거니 어찌 보면 당연한가. 나는 음료를 마시기 전에 언니가 음료를 마시는 걸 지켜보았다.

투명한 글래스에 입술 연지를 발라 붉어진 입술이 닿았다. 테라스에 불어온 바람에 갈색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언니의 향이 풍겨왔다. 음료를 마시지 않고 자신을 보는 내가 걱정 되었는지 언니는 말했다. 


"라피, 역시 샬롯에게 휴게실이라도 빌릴까요?"
"말 해보고 올 게요."


여기서 더 있으면 테라스에서 언니를 덮칠 것 같아 샤를로트에게 휴게실을 빌리기로 했다. 황녀의 휴게실은 방음이 잘 되어 있겠지. 아니 사실 테라스에서도 차폐 마법을 쓰면 되긴 하지만 언니는 부끄러움이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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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 : 야외플레이를 해! 야외 수치플 개존맛!!
이성 : 그럼 차라리 야설을 쓰시던가요.


악역을 짜는 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매력적인 악역이 인기가 많은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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