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픽션입니다. 실제 역사적 배경을 묘사하고 역사적 사건들을 차용하지만 주 된 내용은 가상의 내용입니다. 











거센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자꾸만 시선이 창 밖으로 향한다. 어둡기만 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자꾸 시선이 밖을 향하게 된다. 경성에 온 뒤로 이렇게까지 비가 쏟아지는 건 처음 보는 일이라 조금 낯설기까지 했다. 


장마철도 아니고 태풍이 몰아치는 것도 아닐텐데 늦가을의 비가 참 거세게도 오는구나 싶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빗소리가 정적인 방 안을 조금씩 채워갈 때쯤 빗소리 사이사이로 아이들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참 이상하지. 그냥 비가 오는 것 뿐인데도 자꾸 마음이 가라앉는다. 


비가 내리는 걸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이미 가라앉아버린 마음은 도통 제 자리를 찾을 생각을 않는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김도영은 무사한걸까. 도영이도 지금 이렇게 비가 오고 있는 걸 알까

 




"누나"


"...비가, 너무 오는데..."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앉은 김정우가 내 말에 굳게 닫힌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낡은 커튼을 치며 창문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한밤중이라 어차피 보일 것도 없는데 커튼으로 가려진 덕분에 창문은 내 시야에서 완전히 가려졌고 빗소리마저 멀어진 듯 했다. 

 




"금방 그칠 것 같지는 않네"


"밤새 내리려나 본데"

 




김정우 말에 이동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새 내릴 것 같다며 한 마디 덧붙이는 이동혁의 목소리 너머로 정재현의 얕은 숨소리가 들려온다. 


제 집이라 그런지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며 정재현을 치료하던 나재민이 벽에 등을 기대고 나서야 정재현은 느리게 잠에 빠졌다. 


혼자 순사들을 피해 여기까지 오느라 밤새 고생했을 정재현은 이제야 마음 편한 얼굴로 잠에 빠졌고 잠든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등을 기대고 앉아있던 나재민의 지친 얼굴이 보이고, 감고 있던 눈을 뜬 그와 시선이 맞물렸다. 

 




"형님은 그리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피를 좀 흘려서 그렇지 크게 다친 것은 아니어서"


"......"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그냥..."

 




아무 말 없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아니면 좀 불편했는지 나재민이 조금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


정재현을 치료하느라 지쳐있는 그에게 괜히 부담이라도 주는 것 같아 나도 서둘러 시선을 돌리곤 김정우가 커튼을 쳐버린 창문을 다시 바라봤다. 


우리는 이렇게 모여있는데 김도영만 없다. 혼자 동떨어져서 이 밤을 어떻게든 견디고 있을 김도영을 생각하니 무겁던 마음이 더 가라앉다가도 한편으로는 또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정재현이 남기고 왔을 발자국들이, 그가 힘겹게 이 곳까지 오며 남겼을 흔적들이 빗물에 모두 씻겨내려가지 않을까 싶어서, 순사들이든 누구든 정재현의 흔적을 찾아 오지는 못하겠구나 싶어서

 




"비 오는 날이 싫어요 나는. 습하고, 찝찝하고, 빗물에 젖은 옷, 신발, 그런 게 다 싫었거든"


"......"


"비가 오는 걸 가만히 보고 있는 것도 좋아하진 않았어요. 누군가는 빗소리가 시원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비를 보는 게 좋다고 하던데 난 그냥 그렇더라고. 비가 오면 마음도 가라앉고, 가끔은 빗물이 눈물같기도 해서"


"......"


"근데, 지금은... 경성에 내리는 비는 참... 다행인 것 같아요."

 




그 누구도 내 말에 대답을 한다거나 반응을 보인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내 말을 듣고만 있을 뿐인 이들을 힐끔거리다 내 시선이 머문 곳은 다시 정재현이었다.


박지성이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은 덕분에 멀끔해진 모습으로 잠들어있는 정재현을 살펴보던 시선이 이내 김정우에게 닿았다가 이동혁에게 닿았다가 마지막으로 나재민에게 닿았다. 


인천에서의 거사를 끝내고 나재민과 김도영은 곧장 우리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이 서로에게만 의지하며 보냈을 그 날 밤,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을 그 순간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재현이가 남긴 흔적은 모두 지워졌겠죠. 빗물에 다 쓸려 내려갔을테니까"


"......"


"인천을 다녀온 그 날 밤도... 지금처럼 비가 왔다면 재민씨는 조금이나마 덜 다치지 않았을까"


"......"


"이 비가 하루만 더 일찍 내렸다면 재현이는 조금 더 일찍 도착하지 않았을까..."

 




텅 빈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매일같이 손에 쥐고 다니던 핸드폰으로 날씨를 찾아보는 건 매일 아침 루틴 중 하나였다.


하지만 경성에 온 뒤론 원래 일상의 루틴 중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핸드폰이 터지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고 이 곳에선 며칠 뒤의 날씨를 미리 파악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지금 내 손에 핸드폰이 있었다면, 핸드폰이 경성에서도 작동을 잘했다면 이들에게 뭐라도 더 도움이 됐을거란 막연한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거사를 치루고 돌아서야 할 아이들의 발자국을, 그들의 흔적을 빗물이 지워줄 수 있다면 그런 날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른손을 연신 쥐었다폈다 반복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위로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순간 놀라 고개를 들면 내 손 위로 제 손을 맞댄 김정우가 어깨를 으쓱여보인다. 

 




"잡시다 이제"


"어?"


"어제 한숨도 못 잤다면서. 또 밤이라도 샐 요량입니까"

 




고작 하룻밤 샌 것 뿐인데도 날 혼자 두어서 미안해하던 이동혁이 떠올라서 서둘러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비록 김도영은 아직 돌아오지 못했지만 정재현은 무사히 돌아왔으니 오늘 밤은 그나마 마음 편히 자도 되지 않을까. 


말없이 날 힐끔 쳐다보던 박지성이 긴 다리를 접고 일어서더니 옷장 옆에 쌓여있던 이불을 하나씩 가져와 펼치기 시작한다. 이동혁과 나재민이 박지성을 도와 움직이는 걸 멍하니 쳐다보다 김정우를 쳐다봤다.

 




"...설마 여기서 다 같이 자?"


"아- 형님이랑 단 둘이 있고 싶으시다?"


"아니 무슨,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그런 뜻 아니에요?"


"어 아니야!"

 




때아닌 김정우의 장난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살짝 커졌고, 내 목소리에 이부자리를 정리하던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향했다. 


사정없이 꽂히는 시선들에 괜히 뻘쭘해져서 큼큼 헛기침을 하자 여전히 내 손 위에 제 손을 겹치고 있던 김정우가 킥킥 웃어댄다. 

 




"형님 깨겠습니다"


"...갑자기 이상한 소릴 하니까 그런 거 잖아"


"새벽이 되면 꽤 추울 거예요. 땔감이 많이 없어서 저 쪽 집까지 다 쓰기가 애매해서"


"그럼 어떡해? 나무 구해와야 되는 거 아냐?"


"뭐... 내일 비가 완전히 그치고 나면?"

 




어깨를 으쓱이던 김정우는 제 말을 끝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 덕에 겹쳐져 있던 손이 떨어졌다. 손바닥 위로 느껴지던 무게감이 사라지고 텅 빈 손으로 다시 주먹을 쥐었다펴고 있는데 이동혁이 바닥을 툭툭 치고는 날 부른다. 


환자인 정재현을 제일 따뜻한 아랫목에 재운 이들은 남은 자리 위로 꼼꼼하게 이부자리를 펼쳐놓고는 나란히 눕기 시작했다. 


키가 제일 큰 탓에 가장 끝자리로 밀려난 김정우가 춥다며 몸을 움츠리는 게 마음에 걸려서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그에게 넘겨주려하자 내 옆에 누워있던 나재민이 턱하니 내 손을 잡아온다. 

 




"그냥 덮고 있어요"


"정우 자리가 너무 끝이니까..."

 




내 말에 상체를 일으키고 앉은 나재민이 제가 덮고 있던 이불을 김정우 쪽으로 넘겨준다. 박지성이 제 옆에 누운 김정우 위로 제 이불 끝자락도 슬쩍 덮어주자 김정우가 박지성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고 그 위로 이동혁의 웃음소리가 겹쳐졌다. 


세 사람을 말없이 바라보던 나재민이 다시 털썩 눕고 나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바라봤다. 불이 꺼지고 어둠에 적응한 시야는 눈을 깜빡일때마다 낡은 천장을 비췄고, 왼쪽 옆에선 깊이 잠든 정재현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이동혁을 그렇게 보내고 정재현은 혼자 어떤 상황들을 겪고 감내해야 했을까. 이들에게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 해도, 이미 겪어본 일이고 예상했던 일이라고 해도 혼자인 건 많이 두렵고 무서웠을텐데.


적막이 흐르는 방 안엔 창 밖에서 넘어오는 빗소리와 아이들의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김정우말대로 금방 그치지 않을 비는 여전히 거세게 쏟아지는 중이었고 그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하나 둘 깊이 잠에 빠졌지만, 나는 잠들지 못했다. 


밤을 샐 생각은 아니었는데, 정재현이라도 무사히 돌아왔으니 오늘 밤은 그래도 좀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멍하니 천장을 보며 눈만 깜빡이다 덮는 이불도 없이 누워있을 나재민이 신경쓰여 이불을 옆으로 쭉 밀었다. 똑바로 누워 자고 있는 나재민 위로 아주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줬다. 


원체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는 이들이라 잠을 깊게 자는 날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아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혹시라도 깰까봐 최대한 조심조심하며 이불을 덮어주고는 다시 누웠다. 

 




"...다들 마음 편히 푹 자요..."

 




모두에게 하는 말이자 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뱉은 말은 허공에서 흔적도 없이 흩어졌고, 나는 억지로 두 눈을 감고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

 




감고 있던 눈을 느리게 뜬 재민이 낡은 천장을 보며 두 어번 눈을 깜빡이고는 고개를 돌려 깊게 잠든 이들을 확인했다. 


이불을 돌돌 싸매고 잠든 정우와 서로 나란히 등을 맞대고 자는 동혁과 지성까지 쭉 살펴보던 재민의 시선이 제 왼쪽으로 틀어졌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더니 어느새 깊게 잠든 여주를 가만히 바라보던 재민이 제 가슴께까지 덮혀진 이불과 여주를 번갈아 쳐다보다 숨죽인 채 소리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것들 하나하나에 의미를 둬봤자 결국 남는 건 상처와 그리움 뿐이라는 걸 잘 아는데도 자꾸만 의미를 두게 된다. 저와 살아온 세상이 다르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또 이렇게 의미를 두게 된다. 


스르륵- 천천히 몸을 옆으로 돌려누운 재민이 아래로 내려간 이불을 어깨까지 올려 덮으면서 시선은 여전히 여주에게 고정시켰다. 똑바로 누운 채 고개만 제 쪽으로 살짝 틀어 자고 있는 여주를 재민은 가만히 바라봤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다 온 고운 사람이라 잠버릇도 이토록 조용하고 곱기만 한가. 몸부림 치는 것 하나없이 고요하게 자고 있는 모습을 꽤 한참동안 담아내던 재민도 밀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잠이 덜 깬 채 눈만 깜빡이다 뭔가 되게 허전한 기분에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내 왼쪽에서 자고 있어야 할 정재현은 온데간데 없고 오른쪽에서 자고 있어야 할 나재민도 없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다 몸을 일으켜 앉으니 이동혁과 박지성 그리고 김정우가 자고 있던 쪽은 이부자리까지 깔끔하게 정리된 게 보인다. 분명 내가 어제 나재민과 나눠서 덮고 있던 이불도 나 혼자 덮고 있었고, 이 방엔 오로지 나만 남아있다. 


뭐지. 다들 언제 일어난 거야?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핸드폰을 잡으려고 베게 옆으로 손을 뻗었다가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헛웃음이 터졌다. 방전된 핸드폰은 고철덩어리가 된 채 가방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걸 또 잊은 탓이었다. 

 




"몇 시... 아홉시밖에 안 됐는데..."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정리하며 박지성이 쓰는 책상 위의 시계를 쳐다봤다.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닌데 나 빼고 다 일어난 걸 보면 다들 일찍 눈을 뜬 모양이다. 다 일어났으면 깨워도 되는데... 


대충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자기 직전까지 들려오던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날이 새면서 비가 그친건가 싶어 김정우가 쳐 놨던 커튼을 서둘러 걷어내자마자 밝은 햇살이 날 덮쳤다. 


갑자기 쏟아진 햇살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느리게 떠보면 맑은 하늘이 보인다. 그렇게 쏟아지던 비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그쳐버렸다.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유난히 더 맑아보이는 듯한 하늘에 시선이 빼앗긴 것도 잠시, 건너편 집에서 나오는 이동혁을 보고는 어 하는 소리가 입술 새로 터져 나왔다. 


아직 잠이 덕지덕지 붙은 상태로 애들을 보기는 좀 그래서 재빠르게 세수를 끝내고는 헝클어진 머리도 다시 풀었다 묶고 나서야 집을 나서자 나란히 서 있던 이동혁과 나재민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던 탓에 그리 큰 소리가 난 것도 아니었는데 작은 인기척에도 금세 반응한 두 사람때문에 오히려 놀란 건 나였다. 

 




"어, 일어났어요 누나?"


"바람이 쌀쌀합니다."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네오는 이동혁과 달리 나재민은 제가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으며 내 앞으로 성큼 걸어왔다. 아침이라 바람이 쌀쌀한 건 사실이긴한데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앞으로 내밀어진 나재민의 카디건을 거절하기가 좀 그래서 얼떨결에 그의 옷을 받아들고는 팔을 끼워넣었다. 별로 춥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옷을 걸치고 나니 금세 따뜻해져서 나재민의 온기가 나한테까지 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고마워요 재민씨"


"...아닙니다"

 




조금 어색해하는 듯한 나재민때문에 괜히 나도 좀 어색해지는 것 같아 일부러 시선을 옆으로 돌리는데 그 때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무심코 돌아간 시선엔, 

 




"...아..."

 




김도영이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싱긋 웃는 얼굴이 아무 일 없었던 것 마냥 인사를 건네왔다. 잘 잤어? 여주야. 늘 하던 인사인 것처럼,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는 김도영을 멍하니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너, 너..."


"날이 찬데 어찌 맨발로 있어"

 




걱정스런 말투에 입술 새로 헛웃음이 터졌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거야 대체. 못 본 사이에 헬쓱해진 얼굴을 하고서, 한껏 지친 두 눈을 하고 있는 게 누군데. 


어젯밤 다친 모습으로 돌아온 정재현보다 상처하나 없이 돌아온 김도영이 더 지쳐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밤새 비가 그렇게 왔는데, 그 비를 뚫고 여기까지 왔을 김도영의 발자국엔 무엇을 남기고 왔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김도영이 어떻게 여길 올 수 있었을까. 제 아비의 감시를 뚫고 김도영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을까


어쩌면 다시는 김도영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친일파인 그의 아비가 어떻게든 김도영을 아이들에게서 떨어트려놓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는데

 




"밥은, 잘, 챙겨, 먹었어?"


"...응"


"거짓말... 너 완전, 핼쑥해, 완전"

 




두 손으로 김도영의 얼굴을 감쌌다. 나재민이 옮겨준 온기 덕분에 내 손은 꽤 따뜻했는데 김도영의 두 뺨은 너무 차가워서 결국 참았던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내가 진짜 정재현 앞에서도 안 울려고 꾹 참았는데, 더 이상 울고 싶지 않아서, 운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더 울고 싶지 않았는데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응, 미안해"

 




김도영의 손 끝이 눈가에 닿았다가 멀어지길 반복한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제 손으로 닦아내던 김도영의 사과에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 대체 뭐가 그렇게 미안할 게 있다고 정재현도 김도영도 미안하다 하는 지 모르겠다.


이들의 삶에 갑작스레 끼어든 건 나였고 이들의 일상을 헤집어 놓은 것도 나였다. 그런데 왜 당신들이 나한테 미안해하는건지, 우리는 왜 이렇게 서로에게 미안해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을 만든 것도 우리가 아닌데. 정작 우리에게, 당신들에게 잘못을 빌어야하는 존재들은 따로 있음에도

 




"아침부터 누나를 기어코 울리는구나 형이"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김정우가 내 손에 손수건 하나를 쥐어줬다. 김정우가 준 손수건을 펼치고 그대로 얼굴을 묻는데 어깨 위로 익숙한 손길이 닿았다. 

 




"조금 섭섭하다 나는"

 




그리고 나지막히 들려온 말에 손수건에 묻었던 고개를 다급히 들었다. 눈물범벅이라 엉망이 됐을 얼굴을 하고서 정재현을 쳐다보자 피식 웃음을 터트린 정재현이 내 손바닥 위에 축 늘어진 손수건을 제 손으로 쥐고는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준다. 

 




"어제 나 왔을 땐 이리 울어주지도 않더니 도영이 왔다고 울어주는 것이냐"


"...그거, 는, 내가, 참은 거, 거든"


"아- 나는 그다지 보고싶지 않았으니 참을 수 있었고 도영이는 너무 보고싶었으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뻔히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 욱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하도 울어대니 일부러 정재현이 장난친 거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 욱한 마음은 그대로 서러움을 극대화시켰고, 

 




"그런! 말이, 어딨어! 나는, 다, 다 보고 싶고! 다 아끼는데!"


"아야- 아- 여주야- 아파, 아-"

 




결국 허어엉 우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일부러 장난친 걸 알면서도 그런 장난을 친 정재현이 얄미워서 주먹 쥔 손으로 다치지 않은 팔을 쳐댔다. 일부러 다치지 않은 팔을 쳤는데도 감정때문에 힘이 실려서 그런지 퍽퍽 소리가 났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아프다 호소하는 정재현의 말을 못 들은 척 더 퍽퍽 쳐대자 웃음이 터진 이동혁이 내 주먹을 제 손으로 다정히 감싸왔다. 

 




"누나 손만 더 아픕니다. 그만 울어요 응? 도영이형도 저리 무사하고 재현이형도 무사하니 다 된 거 아니겠습니까"


"...알아요. 나도 안 울고 싶어..."

 




정재현이 쥐고 있던 김정우 손수건이 이제는 이동혁 손에 들렸고, 조금 전 정재현이 하던 것처럼 눈물이 번진 눈가를 조심스레 닦아주는 이동혁의 손길에서 한없이 다정함이 흘러넘쳤다. 


그래도 정재현의 장난 덕분에 오래 이어질 뻔 했던 울음은 금세 멈췄고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김도영이 손을 뻗었다. 날 향해 뻗어진 그의 손끝이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낸다. 


아무 말 없이 머리카락을 떼어내는 손길이 이상할 정도로 애틋하게 느껴져서 나는 가만히 김도영을 바라만 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김도영은, 꼭 무언가를 잃은 사람 같은 슬픈 눈을 하고 있다. 


대체 넌 이 곳으로 오는 길목에 무엇을 놓고 온 걸까. 지난 밤 빗물에 씻겨 내려갔을 네 흔적에는 대체 무엇이 담겨있었던 걸까

 




"나 이제 계속 여기 있을거야"


"......"


"그러니까 마음 편히 있어도 돼, 여주야"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계속 여기 있는다는 말은, 그러니까 김도영이 계속 여기 있을거라는 건 아이들 곁에 쭉 있겠다는 얘기아닌가. 왜? 김도영은 멀쩡히 제 본가가 남아있는 사람인데. 그래서 이동혁처럼 제 본가를 오며가며 하던 사람인데 왜?


멍하니 김도영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싱긋 웃는다. 근데 분명 웃고 있는데 그 너머에서 김도영이 꼭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아, 김도영이 선택을 하고야 말았구나. 눈 감고 귀 닫고 살면 그저 편하게 살 수 있는 그 길을 두고, 가시밭길로 제 스스로 뛰어들기로 했구나 하는 걸. 














열두시 전에 어떻게든 올리고 싶었으나 실패...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모두 편안한 밤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저는 출근때문에 글만 올리고 바로 취침을...! 여튼 날이 또 추워지는데 감기 조심하시고 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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