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은 뛰었다. 마치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듯이 온 힘을 다해서 약국에 가서 약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혹시라도 곤히 잠든 유하가 깰까 봐 까치발로 살금살금 유하의 방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 유하가 눈을 감고 천사처럼 잠들어 있었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기다란 갈색 속눈썹이 떨렸다. 땀에 젖은 금발 머리카락이 섹시했다.

아흑…. 자는 모습이 너무 예뻐. 인형 같다. 아파서 볼이 빨간건데. 마치 화장한 것 같네. 어휴….

한결은 군침을 꿀꺽 삼키며 유하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반듯한 이마, 우아한 콧대, 붉은 입술…. 붉은 입술. 아파서 그런지 평소에는 촉촉했던 입술이 메말라서 하얗게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 그래도 한결의 눈에는 매혹적이었다.

그 꺼칠함마저도 느끼고 싶었다.

아픈 사람한테 이런 마음을 먹으면 안 되는데…. 잘 때 뽀뽀 한 번 하면 안 될까? 힛.

한결은 고개를 저었다.

아…. 내가 이러면 안 돼. 일단 유하 선배가 나으면 그때도 기회가 많잖아. 최근에 좀 자제하기는 했지만 기회를 노리다 보면…. 또 있겠지.

유하의 상체를 살짝 흔들어서 깨웠다.

“선배. 잘 때 자더라도 이 죽 먹고 약 좀 먹고 자요.”

“으응.”

유하가 괴로운 듯 힘겹게 눈에 힘을 주고 상체를 일으켰다. 한결이 유하가 수월하게 몸을 일으킬 수 있도록 허리를 손으로 받쳐주었다. 뼈만 남은 상체를 만진 한결은 속이 상했다.

어휴…. 이렇게 말라서 체력이 없으니깐 아프지. 그렇게 좀 먹으라고 해도 잘 먹지도 않고.

한결은 후회가 막심했다. 곁에 있으면서도 유하 옆에서 잘 보살펴 주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했다. 유하가 아픈 것도 다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아서 속상했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무능해서 그래.

내가 선배가 무리할 때 조금만 더 냉정하게 말렸으면 이렇게 아프지도 않았을 텐데….

나는 유하 선배한테 너무 약해서 탈이야. 이러다가 사귀기라도 하면 십중팔구 꽉 잡혀서 살겠지. 그래도 난 좋아. 크큭.

“미…미안해.”

한결의 부축을 받아서 유하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콜록 콜록.”

기침을 했다. 한결은 기침하는 유하를 걱정하며 몸을 부축해서 식탁으로 데리고 갔다.

“선배. 입맛 없더라도 이 죽 조금이라도 먹어요.”

유하는 입맛이 없어서 죽을 먹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한결이 너무나도 간절히 원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어서 한 입 먹었다. 감기에 걸려서 미각이 상실됐는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혀가 까끌까끌했다.

한결의 까만 눈동자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유하를 보았다.

“어때요? 먹을 수 있겠어요? 그냥 약만 먹으면 위가 상하니 제발 조금만 더 먹어요.”

“어…. 그…그렇지. 그래 조금만 더 먹을게.”

유하는 어쩔 수 없이 두 숟가락 더 먹었다. 힘이 없어서 숟가락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반찬은 안 먹어요?”

유하는 고개를 저었다. 입맛도 없고 배가 불렀다. 유하는 숟가락을 놓았다.

한결이 유하의 숟가락을 쥐고 죽을 한 숟가락 더 떴다.

“너무 적게 먹었어요. 평소에 먹는 거 절반도 안 먹었잖아요. 이 한 숟가락만 더 먹어요. 제발요.”

한결이 유하의 입 앞으로 숟가락을 내밀었다.

“으으흠. 너는 정말 대충이 없어. 내가 그냥 먹을게.”

“그냥 받아먹어요. 숟가락 들 힘도 없어서 좀 전에 부들부들 떨었잖아요. 어서요.”

유하는 난감해서 한결의 눈치를 살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한껏 부끄러워하며 병아리처럼 입을 크게 벌였다.

한결이 신난다는 듯 유하의 입안으로 숟가락을 넣었다.

유하는 오물오물 죽을 먹었다.

한결은 유하가 잘 먹는 모습에 가슴을 부여잡고 희미하게 웃었다.

귀여워. 미치겠네. 하아. 오늘 이러다가 또 심쿵사하겠다. 크윽.

유하는 한결이 자신을 챙기는 모습에 괜히 가슴이 설렜다. 한결이 오늘따라 너무 다정해 보였다.

두근두근.

언제 이렇게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었지. 전혀 새로운 모습이네.

“이제 약 먹어야 되요.”한결이 약봉지와 함께 생수 한 컵을 내밀었다.

“응. 이거 감기 몸살 약이지. 요즘 약이 좋아서 하루면 낫더라. 아마도 너무 무리해서 몸이 맛이 간 것 같아.”

“그러니깐 젊음만 믿고 너무 무리하면 안 된다고 제가 그렇게 말렸는데 말 안 들었잖아요. 선배는 너무 고집쟁이에요.”

한결이 속상하다는 듯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유하의 얼굴에 땀이 흥건하자 수건으로 조심스레 땀을 닦았다.

유하는 한결의 평소의 모습과 다른 다정한 모습에 자꾸만 가슴이 설렜다. 얼굴이 홧홧했다.

두근 두근.

뭐야…. 나 몸이 아파서 어떻게 됐나 봐. 미쳤나 봐.

유하는 한결이 보는 앞에서 약을 먹고 재빨리 물 한 컵을 꿀꺽 삼켰다. 목구멍이 따갑고 쓰라렸다. 한결이 손을 뻗었다. 유하는 멍하니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한결은 유하의 입술 주변에 손을 뻗어 휴지로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큭. 얘기처럼 죽이 좀 묻어있었어요. 귀엽지만 닦아줘야 할 것 같아서요. 이제 깨끗해요.”

“어? 고…고마워. 오늘 신세를 너무 많이 져서 미안해.”

한결은 유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신세 갚는 길은 하나밖에 없어요.”

“뭔데?”

유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빨리 나아서 저랑 막 장난치고 말싸움해요. 선배가 조용하니깐 하루가 너무 지루하고 심심해요. 치고 박고 싸워야지 스트레스가 풀려요. 크큭.”

“뭐어?”

유하가 피식 웃었다.

한결은 유하를 다시 침대로 부축해주었다. 이불을 어깨까지 푹 덮어주었다.

“이제 저 잠깐 선배 작품 접수하러 갔다 올게요. 차 금방 몰아서 최대한 빨리 갔다 올게요. 감기약에 수면제 들어 있으니 잠잘 올거에요.”

“응. 알았어. 잘 부탁해.”

유하는 한결에게 맡겨서 든든했다. 분명히 자신의 작품을 소중하게 잘 접수해 줄 것 같았다.

“너만 믿을게.”

“혹시 많이 아프면 저한테 바로 전화해요. 그러면 금방 올게요.”

한결이 유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유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은 유하를 혼자 두기 미안한 듯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고 방을 나섰다. 유하는 그런 한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의외로 자상해. 언제까지나 심술궂은 어린애일 줄 알았는데 이제 어른 다 됬네. 크큭.

 

*

 

유하는 K 그룹 미술 대전에 작품을 출품하고 결과 발표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한결은 그런 유하를 보며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서 골똘히 생각했다.

한결은 자신의 방 창문으로 유하가 어깨가 축 쳐져서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한결도 결과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건 정말 편법이지만. 유하를 위해서라면 한결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주고 싶었다.

[누나, 미술 대전 심사 중이지? 유하 선배 작품 어떻게 됐어?]

[야, 너 결과 발표 나올 때까지 비밀인 거 몰라. 미쳤어?]

[응. 나 미쳤잖아. 사랑에. 크큭.]

한결은 피식 웃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미친놈. 유하 작품 아무래도 수상권에 못 들 것 같아. 그림 좋긴 한데 뭔가 아쉬워. 아마도 이건 경험의 문제가 아닐까 싶어. 어휴. 내가 미친다 너 땜에 규정도 어기고.]

[누나가 K그룹 본부장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줄 수 있잖아. 상 하나 줘. 작은 거 하나라도.]

한결은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떼를 썼다.

[야, 이게 뭐 어린애들 장난인 줄 알아? 한결아 심사는 공정해야 해. 그런 말 하려거든 인연을 끊자! 난 절대 못 해!]

[본부장이라면서 그런 것도 못 해. 한심하다 정말!]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며 한결이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전화를 끊고 전화기를 침대에 집어 던졌다.

“하기 싫으면 마. 그냥 조그마한 상 하나 만들면 되지 뭐가 그렇게 안 된다고 그래. 선배가 상 받고 좋아하는 모습 보고 싶단 말이야.”한결은 한나의 태도가 못마땅해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K 그룹의 회장은 할머니였고 본부장은 누나인 한나였다. 한결은 경영 쪽에는 관심이 없어서 아무런 직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마도 나이가 어느 정도 되면 누나와 함께 억지로라도 경영에 참여해야 할지도 몰랐다.

한결이 짜증을 식히려 컴퓨터 게임을 했다. 그 이후로 전화가 잠잠한 것으로 봐선 아무래도 한나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래…. 어쩌면 유치하지만 이 방법이라면 선배의 마음을 조금은 달래줄 수 있지 않을까?

한결의 눈빛이 짧게 반짝 빛났다.


*

얼마 후에 K그룹 미술대전의 심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유하는 예상한 대로 수상을 하지 못했다. 잔뜩 낙심해서 어깨가 축 쳐져서 집으로 들어왔다.

거실에서 한결은 유하를 기다리고 있다가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유하가 실망한 눈빛으로 한결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왔다.

“한결아…. 나 수상하지 못했어. 이번 그림은 내가 봐도 좀 그랬거든.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열심히 했는데….”밤을 새가며 열심히 그린 그림이었기에 유하는 가슴이 먹먹한 듯 눈시울을 붉혔다.

“아…알아요. 선배 열심히 그린 거. 정말 예술혼을 활활 불태웠잖아요.”

한결이 유하의 붉어진 눈가를 보며 새하얀 얼굴을 어루만졌다.

“내가…아직 많이 모자라서 그렇지 뭐. 난 재능이 없나 봐.”

유하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주먹을 꼭 쥐었다.

그 모습에 한결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너무 죄송해요.

“선배…. 이거 제가 준비한 건데 볼래요?”

한결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유하가 한결이 내민 종이를 보면서 방금까지 울상이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유하가 좋아하는 얼굴이 보자 한결의 얼굴이 빨개졌다.

종이에는 대상이라고 적혀있고 상장처럼 꾸며져 있었다.

“뭐야? 이거 순 엉터리 짜가잖아. 크큭.”

유하가 대상이라고 적힌 가짜 상장을 보면서 좋아서 헤벌쭉 웃었다.

“부상은 부상은 없어? 1000만원 내 놔. 인마!”

유하가 한결의 멱살을 살짝 잡는 시늉을 했다. 어느새 눈빛에 장난기가 서렸다.

한결이 당황하며 눈알을 또르륵 굴렸다.

선배가 원하면 천만 원 줄 수 있긴 하지만…. 농담이죠? 크큭.

유하가 한결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부상은…. 어…. 생각 안 해봤는데…. 지금 당장 계좌로 쏴줘요? 크큭. 계좌 알려줘요.”

“아니야. 넌 농담도 몰라. 바보”

유하가 가짜 대상을 뚫어져라 보며 눈시울을 살짝 붉혔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고마워. 이런 가짜라도 받으니깐 기분이 좋다.”

“제 마음속에 대상은 늘 선배예요. 잊지 마요!”

한결이 유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상 받았으니깐 우리 외식하자. 내가 쏠게. 짜장면 먹을래? 탕수육도 좋아? 우울할 땐 역시 맛있는 게 먹는 게 최고야.”

“그럼요. 선배가 사 주는 건 다 좋아요. 힛.”

한결이 다시 표정이 밝아진 유하를 보며 안심하며 말했다.

유하가 그런 한결 앞에 우두커니 섰다. 한 번 한결을 수줍게 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성큼 한 걸음 더 다가왔다. 한결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했다. 유하의 숨결까지 느껴지는 질 정도로 가까웠다.

“고마워. 너 때문에 위로가 많이 됐어.”

유하가 한결을 살포시 안아주었다. 작은 손으로 등을 토닥여주었다.

두근 두근.

유하에게 안긴 한결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얼굴이 빨개졌다.

사랑해요. 선배…. 언제나 내 마음속 1등이에요.

한결은 유하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달콤한 샴푸향을 맡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슈크라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