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사랑이 너였어 널 사랑했던거야 도경수. 그때도, 지금도.





Sweet Dreams! (스윗 드림즈)


<7> 진실 - 2

w. 앳



얼음장같이 차가운 경수의 몸을 녹이기 위해 근처 길가로 나와 택시를 잡아탄 종인은 남들이 보든말든 상관하지 않은 채 호텔로 이동했다. 드디어 만난 그의 첫사랑에게 뜨거운 포옹을 하지 못한 건 종인의 망설임 때문만이 아니었다. 경수의 동공이 흐릿했다. 종인과 재회하고서도 경수는 마치 꿈속을 걷는 듯 멍한 표정이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곤히 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도 그렇듯 경수를 안정시키기 위해 어디든 피신처를 찾아야 했다. 제 집은 위험했다. 안전하지 않은 곳에 경수를 데려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자. 아니, 쉬어 도경ㅅ,”

“여기, ..어디야.”


경수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려 하던 참이었다. 경수는 돌연 정신을 차린 것처럼 종인을 제 시야에 담는다.


“..기억은 나?”

“모르겠어. 김준면을 만난 것까진.. 아니지, 동생을 만났어.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어. 나보고 형이래. 쌍둥이 동생이 있었는지, 몰랐..는데.”

“……”


종인은 경수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다. 과거의 어느 날처럼 침대 헤드에 기대어 나란히 앉은 둘은 적요한 침묵 속에 잠시 숨을 골랐다.


“경수야,”

“응.”

“네가 사라졌을 때, 기억을 찾았어.”

“어떻게..?”

“반지..에 금이 갔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덕분인 것 같아. 불완전한 기억을 회상하려 애쓸 때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거든. 그런데 어떤 이유로 금이 갔고 조각난 그것들이 짝을 맞췄어.”

“정말.. 금이 갔네.”


경수는 종인의 왼손에 자리해서 이제는 사라지지 않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반지는 첫사랑을 잃고 씌워진 굴레였어. 제이가 나에게 준 속박을 뜻해. 동시에 불완전한 기억을 상징하기도 하고.”

“..제이..? 네 첫사랑.. 아니야? 첫사랑을 잃고서 얻었다는 게 말이 안 맞는데.”

“첫사랑이라고 한 적 없는데..”

“잘 때 중얼..거리길래.”


경수는 그가 종인에게 했던 고백처럼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줘야 할까. 아니면 어디까지 말을 해줘야 하는 걸까. 과거가 미래를 되풀이할 1퍼센트의 가능성조차 어떻게든 막아보고 싶은 종인이 사실의 범위를 좁히려 고민한다.


“네 쌍둥이 동생, 그 사람 이름이 제이야.”

“..뭐?”

“그리고 내 첫사랑의 이름은 디오..야. 제이가 아니라.”

“디오?”

“도경수 너의 과거 이름. 원래 너의 이름.”

“……!!!”


경수는 방금 종인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한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며칠 간의 필름이 끊긴데다가 몽롱한 기운에 떠밀려 그와 앉아있는 자신도 낯선데 잃어버렸던 동생이 제이고, 종인의 첫사랑은 디오인데 그게 내.. 이름이었다니. 게다가,


“..우리를 노렸던 자 또한 제이야. 그가 우릴 노리고 끊임없이 함정을 팠어.”

“ㅈ, 자, 잠깐만.. 농담.. 하는 거지? 거짓말이지?”

“…………”

“..왜, 왜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걸, 왜. 지금에서야..”

“..나때문에 네가 죽을 뻔 했어. 기억을 삭제하는 내 능력때문이야. 그래서..”

“……”


경수는 거대한 망치로 제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아 머리가 뚫린 양 비참한 기분에 휩싸였다. 얼얼한 타격이 가시기도 전에 그치지 않고 과거의 사실을 털어놓는 종인의 음성마저 귀에 설다. 현실은 망가져 가는데 제 주변의 것들이 무너진다. 잃었던 지난날을 타인의 입을 통해 듣고있으니 이성이 그걸 버틸 리 만무했다.


“..괜..찮아?”

“..어. 괜찮으니 더 말해봐.”


그러나 경수는 무너질 수 없었다. 이대로 붕괴되어 침전해버리면 자신도, 다른 이들도 허물어질게 뻔했다. 선천적으로 강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강해져야했다. 버텨야 했다. 제게 사실을 털어놓는 종인도 망설이는 만큼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단단해져야 한다.


“서브젝트..는 로드를 죽일 수 없어. 애초에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어있..거든. 난 제이를 죽이지 못해. 어떤 이유에선지 제이도 널 죽일 수 없고. 네가 제이의 로드도 아닌데 말이야. 난 그걸 알게되었고, 제이는 날 이용해서 널 죽이려 했어.”

“나도 오비디언스였으면.. 너의 로드일텐데 어째서 그게 가능해?”

“그게, 가능하더라.”

“…?”

“내가 널 사랑하는 걸 깨닫게 되면.”

“그 말은..”

“과거에 네가 디오였을 때, 제이가 널 어떻게든 죽이려 한다는 걸 알았을 때 깨달았어. 제이는 그걸 이용하려 했고 그 후에 넌..”

“죽을 뻔 했던 거구나. 기억을 잃고.”

“……”


종인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오늘날, 현재에서도 경수를 사랑하는 걸 깨달은 자신이었다. 이대로면 13년 전처럼 경수가 위험에 처할 것이다. 불안한 미래까진 실토할 수 없는 종인이 치미는 울음을 애써 삼켰다. 그와 달리 담담히 지나간 결말을 정리한 경수는 초연해 보였다.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긴 그에게서 디오의 모습이 스친다.


“김종인,”

“어..?”

“우선 도움을 좀 청하자. 너 다친 것도 치료할 겸.”

“..누구한테?”

“여긴 공공장소나 다름없어. 계획을 짜려면 좀더 은밀한 곳이 좋을 거야.”


금세 눈을 번뜩 빛낸 경수가 기운을 차린 마냥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와 연락이 닿는다. 무력하게 있을 경수가 아니었다.




* *




내가 특별히 마련했어, 손님온다고 한 번 더 청소까지 했다구.

네가 한 건 아닐 거 아냐.

아니잉.. 뭐.. 그래도 내가 시키긴 했지..! 그나저나 김종인 너 도대체,


경수가 연락을 취한 건 다름아닌 찬열이었다. 절대 박찬열의 도움은 받지 않을 거라 예상했던 종인과는 달리 경수는 일말의 갈등을 버리고 찬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너 박찬열한테 말도 안 하고 나 찾아다녔을거 아냐. 경수는 빠릿한 제 머리를 돌려 상황파악을 완료한 듯 싶었다. 충격적인 과거까지 알고서도 마음을 다스린 경수에게서 디오가 엿보였다. 그래, 겉은 변해보였을지라도 천성은 변할 리가 없었다. 종인은 오비디언스 시절의 디오를 떠올렸다. 그는 선했고 남을 깔보지도 않았다. 지켜야할 것에 대해선 이성을 다잡았고 견고했다. 과거엔 ‘날라리’라고만 여겨 보이지 않았던 경수의 본성이, 사랑하게 되어서야 제 눈에 드러났다. 종인의 생각보다도 더 뚜렷하게.


“아 됐다, 이따 물어본다 이따가. 너희 근데 호텔에 있던 거 치고 너무 피곤해보이는 거 알아? 내가 그래서 김종인 너 봐주는 거야. 이런 대표가 어딨냐. 나한테 잘해라?”

“가서 설명할게. 애 그만 볶아.”

“오~? 이제 대놓고 사귀는 사이라 이거지~?”

“몰라 자식아.”


아앗, 아파! 

조용히 하란 의미야.


경수가 찬열의 옆구리가 세게 꼬집었다. 찬열이 가져온 선글라스로 종인의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대표면 입 좀 다물어 진ㅉ, 어금니를 꽉 깨물고 복화술을 구사하는 경수의 안색이 급작스레 어두워졌다.


“어..? 뭐지? 정전인가?”

“..젠장.”

“왜, ㅁ, 뭐야? 으엑..!!! 야 사람들이!! 저거 봐봐!!”

“호들갑 떨지말고 가만히 있어 박찬열.”

“야, 다 굳었다니까?!! 인간들이 굳었다고!! 어떻게 침착해!”

“미치겠네.”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헝클어뜨린 경수가 호텔 로비를 뒤덮는 어둠에 리볼버를 들어 총구를 길게 만든다.


“..김준면이야. 인간들을 멈춘 건 녀석밖에 없어.”

“박찬열 얘는 어떻게 할까.”

“일단 내가 먼저 상대하고 있을게.”


종인 또한 공격 태세로 전환해 손 안의 불꽃을 태운다. 놀란 찬열은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 듣지 못하고 주변을 살피기에 바빴다.


“나만 있는 건 아닌데, 너희에겐 얘가 더 반갑겠지?”

“……”

“..오세훈.”

“스마일?”


스마일이 본래의 모습으로 둘 앞에 섰다. 그 모습은 처음이었으나 옆에 선 종인이 세훈의 이름을 부르자 경수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종인은 준면이 나타났을 때부터 세훈이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예견하고 있었다. 제이의 명령 안에서의 둘이니 보이는 것 말고도 계획이 있을 터였다. 그게 만약 종인 자신을 포함하는 일이라면..


“스마일, ..아니지? 세훈아, 아닌 거지.?”

“이름.. 불러준 거 처음이네.”

“아닌 거라고 말해. 너는 이런 일을 할 애가 아니잖아.”

“……”

“94, 로드가 명하셨어 도경수를 공격해.”

“……”


리볼버를 든 경수의 손과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악령도 아닌 스마일에게 통하지도 않을 총구를 겨냥하고 그마저도 망설여 위협이 될 리 없다. 민정을 제외하곤 유일하게 제 곁에 있던 스마일이었다. 의심할 수도 없었고 의심하고 싶지도 않던 그였다. 종인처럼 당장 기억을 불러올 수 없었지만 과거의 기억 한가운데 가장 가까웠던 사람의 배신이, 그 상처가 남아있어서 그럴 지도 몰랐다. 파고들어 들춰내고 싶지 않았다. 의문점들은 널려있었으나 관계를 망가뜨리며 스마일을 의심하는 건 소중한 친구를 잃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하필, 부정할 수 없을만큼 친구의 배신을 목격하다니 왜 네가, 우리의 우정이, 소중한 관계가..


“하, 너 몰랐던 거 아니잖아 도경수.”

“..모르고 싶었어. 몰랐어야 해.”

“..일단 리볼버는 소용이 없어. 나를 공격해 봐서 알잖아.”

“알아.”


그렇다한들 내가 지금 스마일을 공격한다면, 공격 할..


“..수 없어. 못하겠어.”

“..도경수..”


세훈은 경수의 낯빛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공격을 할 수 없는 건 비단 경수만이 아니었다.


“네가 해. 김준면.”

“로드는 너에게 명령하셨어.”

“넌 서브젝트의 규칙 안에 종속되어있지 않잖아. 네가 하라고.”

“94, 네가 못하면 뒷감당은 내가 아니야. 잘 결정해. 우린 오늘 경고만 하러 왔다는 걸.”

“..씨발,”

“로드는 네가 도경수를 공격할 수 있다는 걸 알고계셔. 그런데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


대치는 끝이 날 줄 몰랐다. 긴장에 머물러있던 사태를 종료시킨 건 경수가 아닌 세훈이었다. 세훈은 경수 안의 리볼버를 소환해제 시켰다. 일순간 없어진 무기에 놀라기도 전에 세훈의 손에 리볼버가 쥐어졌다. 철컥, 성수 탄환이 실탄으로 교체되는 소리가 울렸다.


타앙-! 탕 탕 탕!


“…!! 안 돼!!”


무자비한 총성이 네 차례 연발됐다. 경수는 두 팔을 교차시켜 실드를 쳤다. 종인은 외마디 외침과 함께 실드를 겹친 후 준면과 세훈을 향해 불꽃을 던졌다. 방어를 하면서도 어안이 벙벙한 경수가 멈춘 총성에 두 팔을 거둔다.


끄아아-!!


경수를 만나고 빠른 속도로 치유되던 상처였지만 급히 쓴 강한 능력에 찌릿하고 아려온다. 왼팔을 크게 휘두른 종인이 타오르는 불꽃을 불길로 키우자 화마가 두 사람을 집어삼키려 했다.


“..어어?! 총이 날아ㅇ, 아! 잡았다!!”


연신 종인과 경수의 뒤에 붙어 혼란을 거듭하던 찬열이 자신 쪽으로 총알이 아닌 총이 그대로 날아오자 빠른 속도로 리볼버를 낚아챈다. 세훈이 던진 경수의 물건이었다.


“이걸 왜 던진,”

“네 리볼버, 총구 그리고 총열에 새겨진 문양. 똑똑히 살펴봐.”

“..스마일.”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이야.”

“………”


화마를 피해 자리를 뜨는 순간 세훈이 둘에게 의미심장한 힌트를 준다.


“조만간 또 보게 될 거야. 둘 모두.”

“…”

“심판의 길목에서. 신의 가호가 있길.”


준면은 마지막으로 종인과 경수를 뚫어지게 본 후 세훈과 함께 자리를 뜬다.




* *





불길이 잦아드는 동안 사라진 둘의 존재는 온데간데 없었다. 해석 불가능한 메시지만 남긴 채 자취를 감춘 둘은 종인과 경수에게 최후의 숙제를 준 셈이었다. 찬열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서재로 향한 경수는 리볼버의 문양을 살펴본 후 컴퓨터를 켜 무언가를 검색했다.


구마의식의 글귀야, 라틴어. 총구에 그려진 건 스마일이 그러는데 ‘말’이래.

말?

어, 동물 ‘말’. 네 마리.


종인한테도 설명한 적 있다. 스마일에게 들었을 때도 흘려들은 내용이었는데 하나하나 되짚어보니 연결고리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네 마리의 말, 종말, 그리고 신.


“너네 나한테 방금 전 일이랑 그렇고 그런 것들은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니?”


다짜고짜 게스트룸도 아닌 서재라니, 집주인인 찬열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하루였다. 죽다 살아난 것도 모자라 둘이 무슨 세상의 멸망같은 얘기를 나누는데 심기가 편하다면 거짓말이지, 그저 친구나 초대해서 하룻밤 묵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요한 계시록.”

“계시록이라고?

“어, 묵시록. ‘이 책에는 네 명의 기사가 나온다. 흰 말을 탄 자는 정복자이고, 붉은 말은 전쟁, 검은 말은 기근, 청황색 말은 죽음이다. …… 요한계시록에는 난해한 상징들이 수두룩하지만, 네 기사는 세상의 종말에 들이닥칠 공포들을 나타내는 의미다.. 지상의 인간을 죽일 권위가 주어졌다고 여겨진다. 성인들은 세속의 권력이 가하는 무시무시한 박해를 견뎌낼 것이고, 결국 신이 승리해 박해받던 자들이 천상의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내용일 뿐이다.’ 라고 적혀있어.”

“무슨 그렇게 끔찍한 내용이야, 아까 걔네가 그런 말 한 거였어?”

“……”


찬열이 질문을 내뱉는 동안, 종인과 경수는 한참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너희 말 좀 해봐.. 나 답답해 죽는다구..”

“..제이, 라는 녀석이 있어. 그 녀석이 네 기사를 데리고 목적을 달성하려고 할 거야. 이미 그러는 중이고.”

“걔네가 그럼 기사인지 뭔지 그거라고?”

“붉은 말은 붉은 머리의 녀석, 김준면일테고. 검은 말은 세훈.. 일 거야. 신을 뜻하는 건 제이겠지. 요새 뉴스 기사 흉흉한 건 박찬열 너도 알테고.”

“아니, 그래서 며칠 이내에 우리 다 뒈진다는 말..은 아니지? 무슨 세상이 그렇게 판타스틱하ㄱ,”

“직접 목격했잖아 로비에서. 경수가 조카라고 하던 애가 세훈이란 놈이야.”

“뭐?! 그 쪼끄만 조카가??”

“오세훈이 경수를 공격할 수 있었던 건, 나와 비슷한 이유로 비롯됐겠지. 내가 사랑이라면 그 녀석은 우정일테고. 서브젝트가 로드에게 사랑이든 우정이든 어떤 감정을 품게 되면 공격이 가능한 걸 거야. 보통의 서브젝트들은 그런 감정조차 설계되어있지 않거든. 김준면은 애초부터 서브젝트가 아니었고.”

“뭔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한마디로 치명적인 적들이 널렸다는 얘기야. 악령을 퇴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임무라고. 믿기지 않아도 그냥 믿는 척 해.” 

“아니.. 안 믿는다는 건 아니고. 그래.. 뭐 얘가 나쁜 놈이고 쟤도 나쁜 놈이고.. 대충 알아들을게. 야 근데, ..김종인. 네가 말한 얘기에서 기사 둘이 없는데?”

“흰 말은 정복자, 즉 신을 뜻하는 걸 거야. 나머지 청황색 말은..”

“청황색은.. 뭐?”

“..나인 것 같아.”

“네가?! 너 우리 ㅍ, 아니지 경수 편이잖아. 뭔 뚱딴지같은,”

“씹..”

“김종인, 반지. 녹색빛의 검은 반지때문이야.”


종인과 찬열의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마지막 질문의 답은 잠자코 있던 경수가 대신했다. 


“도경ㅅ,”

“나, ㄴ,.. 난 먼저 들어가서 잘게. 피곤하다 너무.”


어두운 기색이 어린 경수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나치게 침착한 음성은 땅 속으로 파고들 것처럼 낮고 차가웠다.


“어? 어어.. 그래 뭐.. 복도 끝에서 두번째 방이야 경수 네 방.”

“..고맙다.”

“………”

“김종인 너도 잘자.”

“..응.”


별안간 경수는 피곤함이 몰려오는 마냥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구라도 차마 보지 못하고 돌아서는 경수의 뒷모습을 종인이 쳐다보지 못한다. 고개를 떨구고 만다. 


“..야, 매니저형 부를까.”

“갑자기?”

“다 말해줄테니 술이나 한 잔 줘.”

“…으응, 알았어.”


종인은 큰 결심을 한 듯 어느덧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피려 노력했다. 종착점에 도달하고 있는 지금, 비밀은 아무 소용이 없을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네가 나를 저버리게 될 수도 있는 갈림길에서 난 아마. 무엇도 할 수 없을테니.


내가 널 사랑하는 걸 깨닫게 되면.

그 말은..

과거에 네가 디오였을 때, 제이가 널 어떻게든 죽이려 한다는 걸 알았을 때 깨달았어. 제이는 그걸 이용하려 했고 그 후에 넌..


‘그리고 현재의 나 또한, 널 죽일 수도 있다는 거야.’


이을 수 없던 문장의 끝맺음은 목구멍까지 삼켜 들어갔다.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어렴풋이 경수도 알고 있을 것이다. 종인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이의 명령에 따르게 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제이는 또다시 자신을 이용해 경수의 목숨을 앗아가려 할테고 선택의 길이 어디든 끝은 파멸이었다. 과거가 반복되어선 안 돼. 그러면 나는 뭘 해야 하지. 굴레는 계속 될 테고, 흐르는 시간은 숨통을 조인다. 맞서 싸운다해도 난.. 너는..


“..답은,……”


시간도 알지 못하는 답을 내가 어떻게 찾을까.






-실종 신고라도 해야하나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미안하다 민정아.”

-목이 너무 잠겼는데요 관장님. 어디 아프신 거 아니죠?

“멀쩡해.”

-몸 말구요.

“..귀신 같네.”

-후우.. 관장님,

“왜.”

-찾아가기 힘든 곳이라 하니 전화로 대신하긴 하는데요..

“…”

-힘들면.. 그냥 우셔도 돼요. 울어도 약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

-자세한 건 잘은 몰라서 구체적인 위로는 못해줘요 저는.

“고, 맙.. 다.”

-강해서 버티는 게 아니라 버티면서 강해지는 거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관장님,

“흐윽.. 흐.. 너무, 흐- 읍.. 나, 너무.. 진, 짜.. 힘들어, 죽을 것, 흐으.. 같아, 민정아..”

-..관장님…

“그치마,ㄴ.. 종인, 종.. 인이도, 힘들 거, 아냐.. 내가 그 앞에서, 흐- 끅.. 어떻게 울, 겠어.”

-………


침대에 앉아 통화를 하던 경수는 한없이 무너지는 몸을 가눌 수 없다. 행여나 울음소리가 들릴까 이불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는다. 몇 분간 경수의 흐느끼는 소리만이 홀로 있는 방을 가득 채웠다. 가슴 속, 깊숙하게 머금고 있던 눈물이 더는 갇혀있지 못하고 튀어나왔다. 민정은 경수의 울음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차분히 무언의 위로를 건넸다. 보이지 않는 위로였지만 경수는 알았다. 충분히 울고 씻어내려하는 그를 알았기에 가능한 위로였다.


“하아,.. 좀 낫다..”

-우니까 좀 나아지셨어요?

“종인이한텐 ..비밀이야.”

-……알았어요.


경수는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쏟아진 눈물을 손바닥으로 벅벅 닦아낸 경수가 울음의 여파로 히끅거리는 딸꾹질을 멈추려 했다.


“민정아,”

-네.

“나 어쩌면 못 돌아갈 수도 있어.”

-..그만뒀다던 그곳때문에요?

“비슷해. 다 연관되어있어. 다치는 걸로 끝날 게 아니라, 죽을 지도 몰라 이번엔.”

-정말.. 이에요?

“응.”

-종인씨도 알아요?

“걔가 제일 먼저 알았어. 짐작하고 있고.”

-그랬군요..

“김종인도 힘들겠지.”

-같이, 위로해줘요. 같이 버텨내야 하는 일이라면요. 너무 순진한 말인가요 저?

“..아냐, 너라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기대도 될 거에요. 종인씨는.. 종인씨도 관장님 못지 않게 강해지고 있는 거라.. 생각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

-전 뭘 몰라서 무슨 말을 해드릴진 모르겠지만요,

“…”

-그냥, 관장님이라면 어떤 방법으로든 잘 이겨내실 것 같아서. 그냥요.. 제 생각은 그래요. 

“……응.. 고맙다. 항상.”

-괜찮아지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도장은 제가 잘 관리하고 있을테니까요.

“돌아갈게. 꼭.”


경수는 민정의 앞에서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려고 연락을 한 건 아니었지만 저도 모르게 참았던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강해지고 싶었다. 보육원 때도 그랬고 학창시절을 보내면서도, 성인이 되어서도 혼자였던 경수는 물리적인 힘말고도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종인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견딜 수 없는 과거를 전해들을 때도 그랬고 스마일이 저를 배신하는 걸 제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그러다 종래엔 종인까지 자신에게 등 돌릴 수 있다는 사실에 끝끝내 참았던 슬픔이 경수를 완전히 장악했다. 감내하기 힘든 울분이 치밀고 서러움이 복받치고 가장 유치한 방법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바보같이..”


어이없게 터진 눈물은 그럼에도 가슴 속 응어리를 조금은 풀게 만든 듯 했다. 흐린 날, 기대하지 않은 햇볕을 본 것처럼.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린.”


창문 밖을 본다. 시리게 달이 밝다. 달 주변에 둥그렇게 둘린 달무리는 밝은 달빛의 가장자리를 메운다. 아득하나 또렷한 빛이 밤하늘을 비춘다. 구름의 훼방에도 개의치 않고.




* *




“에휴……”


저택의 정원은 밤에도 아름다웠다. 알딸딸하게 마신 술이 화들짝 깰 만큼 대단한 스토리를 들었으니 취할래야 취하기가 힘들었다. 밤공기가 못다한 안주였다. 들숨에 한 번, 날숨에 한 번. 절로 나오는 탄식에 찬열이 발을 쿵쿵 굴렀다.


“에휴휴……”


순진무구 짝사랑 성공 배틀 게이의 연애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단순하게 정의하기엔 종인과 경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민석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종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믿기 힘들었다. 이거 무슨 드라마 대본이나 영화 시나리오 아니야? 농담으로 넘기기엔 종인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고 결국엔 눈물은 보이기 힘들었는지 엎드려 몸을 들썩이기만 했다. 야, 야 울지마 괜찮아 어? 코 끝이 찡해진 찬열까지 울컥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싶었다.


“나참…”


종인을 위로해준 민석이 가고 막판에 술을 진탕 마신 종인이 뻗기까지 정신을 붙잡고 있던 찬열은 차오른 한숨을 밖에서 쉴 수 밖에 없었다. 싸가지 없는 김종인으로 남을 줄 알았는데 너무나 의외인 모습에 첫인상이 발칵 뒤집혔다. 답답한 현실에 자신까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밤 자긴 글렀네.. 겨울 바람을 직방으로 맞으며 깊은 고뇌에 빠지고 있었는데,


“……뭐지..?”


저기 어딘가 조각상 근처에 무언가 보인다. 세콤 켜져있을 텐데 누구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몇 발자국 더 앞으로 성큼성큼 가보는데 어딘가 익숙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죠?”


남자다. 멀리선 분명 어린 아이였는데 성인 남성이다. 어떻게 올라간 건지 조각상 위에 앉아있다. 


“..아마도요.”


조금은 당황한 남자가 꿈뻑꿈뻑 무쌍의 눈을 감았다 뜬다. 새하얀 머리의 그는 두 볼에 홍조가 물들었다. 추운걸까. 추위에 떨고 있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파르르 떨리는 형상이다. 몸의 윤곽이 희미해 보이기까지 하다.


“………”


두 사람은 몇 초간 눈빛을 주고 받는다. 이유를 모른 채 꽤 오랫동안. 












이번 편에서 여러 갈등이 드러나는데요 두 사람 사이에도 미묘한 갈등이 보이죠? ㅋㅋ큐ㅠㅠ 그리고 백현이가 몇 편 동안 나오지 않다가 오랜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ㅎㅎㅎ 완결이 다가오고 있으니 여러 내용이 밝혀지는데 재밌게 보시길 바라요:)


다음주 목요일에도 어김없이 돌아올게요 ㅎㅎ! (열시미 완결을 향해 달리는 중


In Heartfelt Happ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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