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어. 오랜만이야, 어르신.”

 

그 시인은 갑작스레 나타났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 * *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

 

“여행자에게 들었어. 여기가 어르신의 단골 맛집이라며?”

 

종려의 오랜 벗은 자연스럽게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허락도 없이 젓가락을 들이대는 모습이 참으로 당당하다. 종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음식을 더 주문해야겠군.

 

“얼굴 찌푸리지 마. 주름이 생긴다고? 어르신은 나이도 있으니까 관리해야지.”

 

“밥을 얻어먹고 싶다면 조금 더 염치 있게 구는 쪽이 좋다고 생각한다만.”

 

“에이~ 그러지 마. 내가 특별히 아끼던 술까지 가져왔는걸. 바람이 시작되는 곳에 10년이나 묻어둔 귀한 거야.”

 

기껏해야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음유시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술병을 꺼내 들었다. 주조로 유명한 몬드에서도 특히나 맛있기로 유명한 민들레주. 쪼르르. 바닥까지 비치는 맑은 술이 잔에 담겼다. 종려는 싱글거리며 잔을 내미는 벗을 보며,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걸, 바르바토스.”

 

“그쪽이야말로, 모락스.”

 

종려는 술잔을 받아들었다. 소년은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직장을 갑자기 그만두면 우울증 같은 게 올 수도 있잖아. 난 어르신이 걱정되길래 위로주 챙겨서 와본 거지. 근데 기우였던 모양이야. 얼굴이 좋은걸?”

 

“솔직히 말해서 홀가분하다는 마음이 크긴 해.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들끼리라도 잘 해나갈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어. 이젠 그들을 믿는 수밖에.”

 

“그렇구나. 한낱 음유시인인 나는 잘 모르는 이야기긴 하지만, 어르신이 좋다니 다행이야♬”

 

딴 세계의 이야기 마냥 구는 바르바토스였다. 종려는 다시 한번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삼켰다. 천 년간 자신의 도시를 떠난 저 ‘자유의 신’에게 성실한 태도를 바라는 쪽이 무리이리라. 종려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근데 왜 갑자기 이런 결심을 한 거야? 설마 날 본받아서 욜로 라이프를 보내고 싶어졌어?”

 

“부정하진 않겠네. 리월도 신이 없는 나라가 되지 못할 것은 없어. 인간의 아이들은 스스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으니.”

 

“잘 생각했어.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어디에 매이는 건 너무 피곤한 일이야. 헤헤.”

 

바르바토스는 수정 새우딤섬을 집어먹더니 눈을 반짝였다. 마음에 든 모양이다. 이 가게의 수정 새우딤섬은 맛이 일품이라 종려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종려도 딤섬을 하나 입에 가져갔다. 오늘따라 맛이 더 좋은 기분이다. 민들레주를 곁들였기 때문일까.

 

“늘 그랬지만, 넌 태평하군. 그런 일을 겪었으니 약간은 낙담할 줄 알았어.”

 

“그런 일? 무슨 일 있던가?”

 

태연하게 오리발을 내밀던 바르바토스는 지긋이 향해진 종려의 시선에 체념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 뺏기고 나서 직후는 조금 동요했던 것도 같지만, 이젠 별 생각 없어. 2천 년 전 사귄 친구와의 추억이 담긴 골동품. 그 정도일 뿐이니까.”

 

억만금을 주어도 살 수 없는, 이 티바트에서 가장 귀한 물건. 신의 심장. 그것에 대해 바르바토스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건 어르신도 마찬가지잖아? 심장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걸. 설마 어르신이 우인단 따위에게 빼앗겼을 리도 없고……. 넘겨준 거지? 얼음의 여왕에게.”

 

“그래. ‘계약’에 따라 그녀에게 넘겼다.”

 

“무슨 생각이려나, 그녀는. 지금의 그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 어련히 잘 살겠지만.”

 

바르바토스는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앉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다섯 잔째이다. 가져온 민들레주가 바닥을 보이자 그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더니 점원을 불러 새로운 술을 주문했다. 역시 위로주라는 것은 구실이고, 술을 마시고 싶었던 것뿐인지도 모르겠다.

 

“상냥한 아이였지? 그 여행자는.”

 

별안간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종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올곧고 강하기도 했어.”

 

“그 아이라면 분명, 이 세계의 끝에도 닿겠지.”

 

바르바토스는 턱을 괴며 창문 너머의 하늘을 보았다. 종려도 그를 따라 창밖을 보았다. 푸른 달이 북적한 도시 위를 비추고 있었다. 여행자와도 함께 보았던 밤하늘. 그가 리월을 떠난 지 며칠 흐르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추억에 젖는 기분이었다.

 

“쓸데없이 오랜 시간을 살아온 내게 할 일이 남아있다면, 그 아이의 여정의 끝을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어.”

 

“나도 그 아이의 이야기를 노래하고 싶은걸. 나는 음유시인이니까.”

 

두 개의 술잔이 맞닿고, 잔 속 액체가 잔잔히 흔들렸다. 기울어지는 술잔은 달과 같았다. 몇천 년의 시간을 함께한 벗에게 꺼릴 것이 무엇 있으랴. 이야기는 막힘이 없었고, 술자리의 흥은 점점 돋우어졌다. 그렇게 리월항의 밤은 깊어져 갔다.

아무거나 끄적이는 잡덕 글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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