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이지







이 이야기는 언제까지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허구적 이야기입니다. 실제 역사적 배경, 언어와 많이 다를 수 있다는 점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항심

1. 늘 지니고 있는 떳떳한 마음

2. 맞서려는 마음



















용선과 약속대로 시간에 맞춰 승우의 집에 도착했다. 평소처럼 어린 하녀가 맞이해 안내하는 걸 보니 계속 수업을 진행해도 될 것 같았다. 나만큼 뛰어난 선생 찾기도 힘들지. 암, 그렇고 말고. 용선의 방으로 들어가니 자리에 앉아있다 나를 보고 일어난 용선이 보였다. 그냥 앉아있어도 되는데.




"안녕하세요, 아가씨."


"... 아, 안녕."


"...? 네?"


"인사... 하는 거야."


"푸흐, 이제 제가 편해지셨나봐요."


"뭐... 나를 구해준 것도 있고 어제 일도 있으니까..."


"좋네요. 아가씨의 마음을 이제 얻을 수 있는 건가요?"


"아니, 뭐 그거까지는... 크흠, 수업. 수업하자."


"네, 좋아요."




별이는 말을 돌리는 용선에 작게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귀여운 아가씨네. 이제 좀 가까워진 건가. 수업을 하며 용선은 아직 말을 놓은 게 어색했는지 조금 생각을 하며 말을 하는 게 느껴졌다. 난 상관없는데.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용선의 모습에 저도 뿌듯함이 느껴졌다. 다친 보람은 있네. 수업이 끝나니 어느 정도 말을 놓는 것에 익숙해지자 편하게 대했다.




"오늘 수업 수고하셨어요. 처음보다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 다행이야."


"목걸이 하고 다니시네요."


"아, 이거? 별이씨가 사준 건데 하고 다녀야지."


"잘 어울려요. 자주 하고 다니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자주 하고 다닐게."




똑똑-




문이 열리고 어린 하녀가 들어오더니 용선의 귀에 대고 말을 했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용선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어린 하녀를 밖으로 보냈다. 하아, 한숨을 쉬며 차를 마시는 모습에 별이도 찻잔을 들며 물었다.




"별로 안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나 보군요."


"음... 응."


"무슨 소식인지 저도 들어볼 수 있을까요?"


"... 카츠마토씨와 오늘 저녁을 같이 먹는대."


"카츠마토씨는 누군가요?"


"음... 높은 관직에 있는 분이야."


"많이 어렵겠네요. 아버님과 같이 식사를 하시나 봐요."


"그건 아니고... 둘이 먹기로 했어."


"단 둘이요?"


"사실, 카츠마토씨가 내 정혼자거든."


"아, 정말입니까? 높으신 분과 정혼을 맺으셨다니 몰랐습니다."


"몰라도 되는 이야기야."


"그런데...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으시군요."


"좀 어렵거든."




일부로 모르는 척 태연하게 시치미를 때며 용선의 이야기에 공감을 해주었다. 용선은 별로 정혼을 좋아하지 않은 것 같았다. 뜻밖의 소식에 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매우 불편하시겠어요."


"응...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나는 이제 준비를 하러 가야 할 것 같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아가씨."


"그래."




인사를 하고 방을 나온 별이는 천천히 집을 빠져나갔다. 왜 싫어하는지는 못 물어봤네. 다음 수업시간에 물어보기로 한 뒤 저잣거리로 나갔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 사이로 틈틈이 일본 순사들이 눈에 띄었다. 참 사나운 거리군.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한 거리는 이질감이 충분히 느껴졌다. 벽에 붙어있는 전단지들 사이에 혜진의 얼굴이 보여 발걸음을 멈췄다. 오늘 밤에 무대를 서는가 보았다. 혜진이 노래를 잘 부르긴 했지.




"저 처자가 노래를 그렇게 잘부른다며?"


"한 번 들어보고 싶구먼."


"아서게. 우리 같은 조선인이 들을 수는 있는가. 저 높은 일본 나리들만 실컷 듣지."


"저 처자는 어디서 왔길래 이방인같이 생겼대. 이역만리 먼 곳까지 와서 일본놈들 비위나 맞춰주고 참 고생도 하겠구만."


"쉿, 듣는 귀가 많아."


"애휴, 갈 길이나 가세."




상인들이 간 곳엔 씁쓸한 조선의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입이 있어도 마음대로 말하지 못하는 이런 지옥 같은 세상. 별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서 빨리 독립을 하는 날이 왔으면. 하아, 한숨을 쉬며 발길을 옮겼다. 혜진의 목에 좋은 약을 한 첩 먹여야 겠다.






-






식사를 끝마친 용선은 입가심으로 차를 한모금 마셨다. 오늘도 어김없이 속이 얹힌 기분이었다.




"이번 일본어 수업은 괜찮습니까?"


"... 네."


"부디 잘 배우길 바랍니다. 내 아내가 될 사람이 일본어를 못한다고 하면 그것대로 수치일 테니."


"......"


"물론, 유우키상의 얼굴은 조센징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고기를 썰어 먹은 토마는 용선을 보며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아, 하며 품에서 티켓 1장을 꺼내 용선에게 건넸다.




"요즘 '화사'라고 노래를 잘 부르는 여자가 있습니다. 나중에 나와 같이 공연을 보러 가죠.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곧 결혼한다는 것도 알릴 겸."


"저는..."


"싫습니까?"




토마의 시선에 용선은 자신의 찻잔으로 눈길을 피했다. 날카로우면서도 싸한 인상은 계속 쳐다보기 힘들었다. 결혼이라는 말을 하니 내가 정말 곧 결혼을 하나 싶었다. 싫다고 하기엔 눈치도 보이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 날 내가 집으로 유우키상을 데리러 가죠. 아, 그때는 일본어를 해야 할 겁니다. 조선말밖에 못하는 사람을 내 아내로 맞이하긴 싫으니."


"... 알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토마는 그날 보자며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식탁 위에 있는 티켓을 보던 용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 마당으로 향했다. 날이 저물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얹힌 속은 날씨와는 다르게 더 안좋아지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다들 바빠 밖에서 약을 사줄 사람이 없었다. 학수아저씨는 언제 오려나. 간도에서의 일이 바쁜 건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별빛들이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별... 별이씨가 생각이 났다.




"아가씨-"




별이씨가 생각나니 이젠 환청이 들리는 건가. 용선은 한숨을 쉬며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가씨, 여기에요."




하지만 다시 한번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봤다. 담장 바깥에 있는 커다란 나무 위에서 별이가 용선을 보며 웃고 있었다. 별이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잘 있었어요?"






-





주점에 도착해 2층으로 올라간 별이는 밤늦게 돌아올 혜진의 침상 머리맡에 약봉지를 올려두었다. '목에 좋은 약이니까 발견하면 꼭 먹어.' 쪽지를 쓰고 약봉지 앞에 붙였다.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소식을 바로 앞에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혜진이었다. 그만큼 위험한 일이지만 혜진은 이 일을 선뜻 하겠다고 나섰다. 참 기특한 동생이었다. 자신의 침대에 앉은 별이는 맞은 편 휘인의 자리를 바라봤다.




"휘인이 곧 올 때가 됐네."




잘 따르는 동생이 곁에 없으니 허전하기도 했다. 만주에는 잘 갔으려나. 너무 힘든 일을 준 건 아닐까 생각해봤지만 오히려 적극적인 동생이라 그만 고개를 저었다. 작은 꼬맹이가 벌써 이렇게 다 컸네. 휘인을 처음 봤을 때가 생각이 났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동지들에게 발견되었던 휘인은 일본군에게 어머니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아이였다. 처음엔 경계심이 많았지만 또래인 혜진과 별이가 많이 챙겨주니 이젠 독립운동을 할 정도로 어엿하게 자랐다. 휘인이 자라는 모습을 본 별이는 기특하면서도 미안했다. 우리가 일본에게 먹히지 않았더라면 저런 비극 또한 없었겠지. 그래서 휘인을 많이 챙겨주고 싶었다.


생각을 하다 이모님이 올라와 저녁을 먹으라 일렀다. 1층으로 내려와 이모님이 주는 음식을 천천히 먹고 있을 무렵 정혼자인 카츠마토 토마와 밥을 먹고 있을 용선이 생각났다. 친일파 가문의 자식은 고위관료, 특히 일본사람이랑 결혼하면 대체로 좋아하던데. 고정관념인가 싶었다.




"휘인이가 없으니 허전하네."


"그러게요. 음, 이모님."


"응?"


"불편한 사람과 식사를 하면 속이 그리 좋진 않겠지요?"


"그렇지. 별이, 너 혹시 나랑 먹는 게 불편하니?"


"아뇨, 아뇨. 그럴 리가요."


"푸하하, 농담이다."


"하하, 그냥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곧 휘인이 올 때가 됐네요. 잠깐 나가서 바람 좀 쐴 겸 휘인이 좋아하는 주전부리 하나 사 올게요."


"그래, 일본놈들 조심하고!"




그릇을 비우고 겉옷을 입은 뒤 주점을 나와 다시 저잣거리로 향했다. 달달한 걸 좋아하는 휘인을 위해 주전부리를 구매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다들 문을 닫고 집에 갈 준비를 했다. 등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한가롭게 거닐던 별이는 혜진이 줄 약을 샀던 약방에 들렸다.




"주인장 계십니까?"


"아까 낮에 목에 좋은 약을 지어갔던 처자 아니오? 약이 말을 듣지 않소?"


"아닙니다. 혹시 속을 달랠 수 있는 약은 없을까요?"


"가만보자... 이게 소화하는 데에 최고요."


"하나... 아니 넉넉하게 주세요."




별이는 값을 지불하고 약들이 든 봉지를 들고 약방에서 나왔다. 하늘에 별이 가득 빛나는 게 보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 별이는 걸음을 옮겨 승우의 집에 도착했다. 사람이 지나다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려 확인하고 용선의 방 근처 담벼락으로 움직여 근처 단단한 나무를 찾았다. 담장 너머가 보일 만큼 능숙하게 나무를 타고 올라가니 마당에 산책을 하고 있는 용선이 보였다. 하늘을 보고 있는 용선의 옆모습을 보니 전에 장날에서 목걸이를 고르고 있는 용선의 옆모습이 생각났다.


안하무인이었던 다른 친일파 자식들과는 다르게 용선은 바르고 올곧았다. 남들과 달라서 그런가, 첫만남때부터 조금씩 끌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거사. 거사가 가장 중요하다. 이 과정 또한 거사를 위한 또 다른 과정이라고 별이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이건 자연스러운 거야. 신경이 쓰이는 건 그만큼 내가 잘 하고 있다는 거야. 속으로 되새김질하던 것과는 달리 시선은 용선에게 땔 수 없었다. 약... 줘야 하는데. 그냥 방 앞에 두고 갈까. 별이는 속으로 고민하다 에라 모르겠다, 작게 외쳤다.




"아가씨-"




용선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내 잘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안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렸다. 어, 안 되는데.




"아가씨, 여기에요."




조금 더 크게 용선을 부르자 이번엔 들었는지 천천히 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로 시선을 마주하자 용선의 놀라면서도 반가워하는 표정이 보였다. 별이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잘 있었어요?"




별이는 나무 위에서, 용선은 마당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따뜻한 바람이 둘을 스쳐 지나갔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끌리는 순간이었다.

마마무 팬픽러 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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